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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의원 집안과 풍수지리
유승민의원에 대한 풍수지리적 근거가 궁금하던 차에
영주지역에 볼 일이 있어서 간 김에
그의 부친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와 고조부이하 묘역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1, 유승민의원 고조부모님 묘
소제지 : 경북 안동시 녹전면 서천리 산103
주산에 해당하는 요성산(녹전면 신평리)에서 북동쪽으로 행룡하는 용맥의 끝자락 지점 높은 산등성이 위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 높은 곳에 있는 고조부모님의 묘 위치에서 좌우나 앞으로 뻗어나가면서 갈라지는 큰 산줄기만 그려봐도 아래의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습니다.
즉 묘지 밑으로 뻗어 내려간 용맥이 멈추지 않고 이리저리 갈라지면서 진행을 하고 있기 때문에 묘지가 있는 곳은 소위 과룡처(過龍處)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묘지의 정면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상석을 묘지 정면에서 좌측 편에 놓았습니다.
높은 곳, 북서방향을 지향하고 있어 바람을 맞아 그런지 봉분 앞이 심하게 훼손이 되었습니다.
▼ 묘지 후면입니다.
▼ 묘지가 있는 곳의 좌우가 꽤 넓습니다.
그 이유는 앞으로 진행하는 용맥과 좌우로 갈라지는 용맥이 겹쳐져서 그런 형상이 나타난 것임으로 이런 곳을 혈이 맺히면서 형성된 육지(肉地)로 봐서는 안 됩니다.
2, 유승민의원 증조부 묘
소제지 : 경북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산 45-2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의 고향은 점선으로 표시한 부분에 자리 잡은 아늑한 마을인데,
마을 어른들의 말씀을 빌리면,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때부터 이곳에 정착을 하였고,
부친 유수호의원이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이 마을은 유승민의원에게도 인연이 깊은 마을일 것입니다.
부친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 뒤편으로 행룡하는 용맥이 유승민의원 증조부 묘역으로 달려가는 산줄기로 보입니다.
▼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묘지가 있는 곳으로 달려온 산줄기는 증조부 묘지 밑에서 결인(結咽)을 하고, 다시 미미하게 솟아 오른 후 주먹을 꽉 쥔 듯이 굳게 뭉친 뒤에 급경사를 이룬 후에 물을 만나면서 끝이 납니다.
이럴 때 증조부 묘역이 있는 곳에서 혈이 맺히는 경우는 기룡혈(騎龍穴)일 때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묘역이 있는 곳의 등고선을 보면 좌우의 면(面)이 넓지 않고,
묘지 앞으로 진출하면서 결인 후에 미봉(微峰)을 형성한 산줄기의 면이 묘지가 있는 곳보다 훨씬 넓기 때문에 혈이 맺힌 증좌가 전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묘 역시 과룡처(過龍處)에 점혈조장(點穴造葬)한 것으로 보입니다.
▼ 증조부 묘 정면.
▼ 증조부 묘 후면에 전면을 지향하고.
3, 유승민의원 증조모 묘
소제지 : 경북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836
유승민의원의 증조모의 묘는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에서 바라보이는 산등성이 넘어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 아래의 위성사진을 살펴보면 산줄기는 대략적으로 북서쪽으로 뻗어 나가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유승민의원의 증조모 묘는 북서쪽으로 뻗어 나가던 산줄기에서 갈라진 지각(枝脚)이 급락하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위성사진에 묘지가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좌우에 비해서 푹 들어간 낮은 지형이기도 하지만,
묘지가 있는 곳으로 뻗은 산줄기가 나약하기 때문에 그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증조모님 묘 역시 혈이 맺힌 곳은 아닙니다.
▼ 묘지 뒤편에서 분지하는 지점에 서 있는 소봉(小峰)에서 묘지가 있는 쪽으로 갈라져 뻗어 내려옵니다.
▼ 급경사지에 점혈조장(點穴造葬)을 하였기 때문에 제절을 만들 여지도 없어 상석을 제절 밑에 설치하였습니다.
▼ 증조모님 묘 뒤편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 묘지정면 안대.
4, 유승민의원 조부님 묘
소제지 : 경북 영주시 안정면 봉암리 산 11
유승민의원의 조부모님 묘지가 있는 곳의 산 전체의 지형을 살펴보면, 마치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과 흡사합니다.
봉황포란을 예견하고 이곳에 점혈조장(點穴造葬)을 하였을까요?
유승민의원의 조부모님 묘지가 있는 곳은 아래의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이 현무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리는 산줄기의 끝자락 지점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 유승민의원의 조부님 묘지에가 있는 곳에서 밑으로 뻗어 내리는 산줄기는 아래의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아 보입니다.
즉 높은 곳에서 뻗어 내린 던 산줄기는 조부님 묘지의 우측으로 요도(橈棹)를 뻗어서 지탱하고 좌측으로 방향전환을 한 후에 조모님 묘지가 있는 곳으로 뻗어 내려가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 이렇게 산줄기가 갈라지는 지점에서 혈이 맺히는 경우는 아래의 그림과 같이 개장(開帳)을 해서 팔을 넓게 벌리고 그 가운데로 뚫고 나온 천심맥(穿心脈)위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데, 천심맥의 등성이 면이 혈장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어야 하고, 전순(氈脣)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승민의원의 조부님 묘지가 있는 곳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 묘지 뒤편에서 달려오는 내룡.
▼ 묘지 뒤편 입수부분.
이 지점이 넓어 보이는 것은 용맥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부분에서 산줄기가 갈라지는 각도가 좁을 때
산줄기의 면이 서로 겹쳐져 마치 하나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산줄기의 내부가 갈라진 곳은 산줄기를 통해서 흐르는 생기도 갈라진 것이기 때문에 비록 산줄기의 면이 넓어졌더라도 이런 곳에 묘지를 조성하면 안됩니다.
▼ 묘지 오른쪽으로 뻗은 요도.
▼ 묘지 앞에 축대를 3단으로 쌓아서 제절을 만들었습니다.
즉 전순이 없다는 증좌입니다.
5, 조모님 묘
소제지 : 조부님 묘하
유승민의원 조모님 묘지 밑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를 살펴보면 흰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산줄기의 형상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산줄기가 회전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산줄기가 이렇게 회전을 하는 구간은 산줄기를 통해서 흐르는 생기도 안정을 취하지 못하고 변화를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생기가 머물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혈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조모님 묘는 과룡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조모님 묘 정면입니다.
6, 부친 유수호의원 묘
소제지 : 경북 영주시 풍기읍 백리 산 50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의 묘지가 있는 곳은 백두대간의 근간(根幹)을 이루고 있는 연화봉에서 분지(分枝)한 주룡이 남-동-남으로 방향을 전환하면서 고산준령(高山峻嶺)을 이루면서 행룡하다가 유수호의원이 영면(永眠)하고 있는 묘지 뒤편에 현무봉을 세우고 급락한 후에 묘지로 입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묘지를 살펴보고 이해가 안 됐던 것은 묘지의 위치였습니다.
점혈은 정확하게 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최소한 용맥의 흐름을 살펴서 맥은 태워야하는데 말입니다.
아래의 사진은 묘지 앞에서 찍은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봤을 때 묘지 좌측은 윈래의 지형이 높고, 우측은 낮습니다.
즉 한쪽은 높고 한쪽은 낮은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형상입니다.
당판이 기울면 생기가 머물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일 텐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 좌측에 넓은 육지(肉地)를 놔두고 우측 개울가로 붙여서 묘지를 조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 묘지 뒤편에서 내려오는 용맥의 형상이나 여러 가지 정황을 봤을 때 아래 사진의 중심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지형이 높아서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등지려고 그렇게 조성을 하였을까요?
▼ 결국은 맥도 못 탄 꼴이 되었습니다.
▼ 현무봉에서 미끄러져 내린 산줄기의 중심은 아래의 위성사진에 녹색화살표로 표시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즉 기맥의 중심이라는 거지요.
점혈을 할 때는 반드시 기맥의 중심에 태워야 합니다.
이 기맥이 흐르는 선상에서 높낮이 변화와 산줄기 면의 변화 또는 좌우로 방향을 전환 하는 변화 등을 살펴서 점혈을 해야 하는데, 형기를 모르면 쉽지는 않겠지요.
이 기맥이 흐르는 선상에 혈이 맺힌 곳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혈(失穴)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기맥이 흐르는 대로 향을 정하면 아래의 위성사진에 표시한 바와 같습니다.
7,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 생가.
소제지 :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777(영봉로492번길 28)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이 마을 이름이 어실인데,
아래의 위성사진을 보시면 형국(形局)이 고기가 모여 사는 지형같이 보이시나요?
▼ 현무봉에서 생가로 입수가 되는 용맥의 출발지점을 보시면 산줄기의 면이 상당히 넓은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용맥이 갈라져서 출발하는 지점의 산줄기 면이 넓어야만 갈라진 산줄기로 혈을 맺을 수 있는 기운이 주입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산줄기가 갈라지는 부분을 살피는 것도 좋은 산줄기(주룡)을 분별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가의 우측에 녹색 점선으로 표시한 부분이 언덕인데, 위쪽은 산 쪽으로 붙고, 생가 쪽은 아래쪽으로 늘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형상은 옛날에 인력으로 조성한 밭이나 논두렁 같은데서 흔히 나타나는 형상입니다.
밭두렁이나 논두렁을 살피면 농경지를 조성하기 전에 산줄기의 원형을 알 수가 있듯이 아래의 위성사진에 언덕을 보면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 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내려왔던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 생가 뒤편의 현무입니다.
▼ 현무에서 생가 쪽으로 내려가는 산줄기입니다.
산줄기의 머리가 앞으로 내민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 그러나 생가의 뒤편은 집을 짓기 위하야 훼손을 한 관계로 그 원형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 유수호의원 생가.
지금은 비록 훼손이 되어 생가로 입수가 되는 모습은 사라졌지만,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 터에는 혈이 맺혀 있습니다.
※ 종합
위와 같이 유승민의원의 고조부모님 이하 묘지를 살펴보면서 만나 뵌 마을 어른들과 일가들한테 전해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대부터 시골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부유했던 집안이었고, 고조부인 유병호님의 묘지를 조성한 후에 판서가 서너 명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집안에서는 유승민의원의 고조부묘를 명당으로 인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제 짧은 소견으로는 유승민의원의 집안은 선대부터 풍수지리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곳저곳에 토지를 마련하여 선대의 묘를 소점(所點)해온 것으로 보이지만, 고조부모님 이하 부친의 묘지에 이르기까지 단 한 기도 정혈처(명당)에 점혈조장(點穴造葬)한 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대에서부터 부자였다고는 하나 집안에서 실질적으로 걸출(傑出)한 인물이 된 것은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분의 고조부 묘를 살펴보지 못함으로써 유수호의원이 큰 인물이 되는데 있어서 선대의 음택이 어떻게 작용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다소 아쉽습니다.
그러나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대에서부터 살아온 집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유승민의원의 부친인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를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이 태어난 생가는 위에서 말씀을 드렸다시피 혈이 맺혀 있는 명당임으로 혈이 맺힌 명당에서 발산되는 생기의 영향에 의해서 유승민의원의 증조부 대부터 부자소리를 듣고 살아온 이유와 유수호의원이 걸출(傑出)한 인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구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유승민의원은 이렇다 할 음택의 영향도 없이 어떻게 4선의 국회의원이 되었는가 물으면 지금으로서는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집안의 발복이 유승민의원의 부친 유수호의원 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음으로 유수호의원의 고조부(유승민의원의 5대조부)의 묘와 유승민의원이 태어난 생가 터를 살펴봐야만 유승민의원에 대한 의문점이 풀릴 것으로 보입니다.
※ 부언
양택혈의 발응에 의해서 큰 인물이 태어났을 때
그의 자녀들이 또한 그에 못지않은 지위에 오르는 예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정우택의원의 부친인 정운갑의원이 진천의 양택혈에서 태어났는데,
6,25동란 당시 부산에서 출생한 것으로 전해지는 정우택의원이 부친의 대를 이어서
4선의 국회의원과 도지사, 장관을 역임하였지만,
그의 선대 묘지가 명당으로 알려진 곳은 없습니다.
조병옥박사도 천안 병천면의 양택혈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들 조윤형이 6선의 국회의원,
순형은 7선의 국회원을 역임하였지만,
역시 명당으로 알려진 선대의 묘는 없습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양택혈에서 태어난 정석모는
6선의 국회의원과 충남도지사, 강원도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아들 정진석이 3선의 국회의원 되었지만
그의 선대 묘 역시 명당이라고 할 만한 묘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례가 있겠지만
음덕을 기대할 만한 이렇다 할 선대의 묘도 없이
부모의 대를 이어서 출세가도를 달리는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식물은 품종을 개량하면
그 품종은 토질이 바뀌어도 그 성정을 잃지 않습니다.
사람도 양택혈에서 발생되는 생기의 역량에 의해서
그 성정이 바뀌면(종자개량?)
부모님의 피와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에게
부모가 양택혈에서 받았던 생기도 대물림이 되는 것일까?
첫댓글 지종학카페지기님,
저는 한국참풍수지리학회 카페지기 수암 이정희 입니다.
반갑습니다.
천인지인 박인호란 작자가 제가 쓴 글 일부만 퍼다
귀 카페에 올려 놓고 제가 없는 곳에서 비판을 하였기에
본의 아니게 귀 카페에 제가 쓴 글 전문을 올렸습니다.
이런 글을 올리게 되어 죄송하고,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과룡처(過龍處)에 묘를 쓰면 "3대내 절향화.三代內 絶香火"라는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그렇다고 하여 龍이 진행하다가 잠시 멈춰서서 結穴된 기룡혈騎龍穴이나 또는 높이 龍頭의 이마(頂)에 결혈한 정혈頂穴까지도 過龍으로 분류하는 실수를 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자칫하면 참관혈도 과룡으로 오인할 수가 있습니다)
말씀 고맙습니다.
제가 이 카페에와서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통맥풍수님께서 제 글에 대해서 지적을 하셨으니
기왕이면 더 구체적으로 제가 쓴 글 중에 어떤 곳이 기룡혈이고,
용맥의 정수리에 맺힌 정혈(頂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지
지적을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수암 이정희 과룡을 피한다고 하다 자칫 기룡혈이나 정혈을 버릴 수 있다는 일반론을 말한 것이지..
윗 글에 수암선생님께서 그런 실수를 하셨다는 의미가 아닌데 오해를 하신듯 합니다..
@통맥풍수 아네 통맥풍수님 그런 뜻이었군요.
제가 민감하게 대체해 죄송합니다.
유의원 부모님 묘가 가장 좋아보입니다. 부친 묘 좌측의 넒은 부분은 자리가 아녀보입니다. 그곳은 흉지(수맥지)로 부친묘를 소점한 지사야말로 풍수의 이치를 제대로 아시는 분 같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증조부와 조부의 묘도 부모묘 보다는 한단계 낮지만 나름 명당으로서 혈심처에 제대로 용사하여졌다는 판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