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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도보여행과 밀레도의 고별 설교
사도행전 20:13~24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지금의 튀리키예 서북부의 드로아 항구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고 마지막 날 밤을 새며 예배와 가르침과 성찬과 권면 후에 출발한 후에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특별한 점은 사도 바울이 혼자만 따로 떨어져 하룻길을 걸어서 다음 행선지로 갔다는 것과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와서 그들에게 목회 지침을 준 일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새 예배와 설교를 한 후에 자정쯤에 유두고 청년이 삼층 다락에 창문에서 떨어진 후에 그를 고친 후 다시 새벽까지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아침에 배를 타고 떠났을 때에 사도 바울은 일행들과 한 배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앗소 항으로 함께 가지 아니하고 홀로 육지로 걸어서 앗소항으로 가는 길을 택하였습니다. 사실 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습니다. 이는 지난 저녁부터 밤을 새며 설교를 하였고 한밤중에는 또 3층 창문에서 떨어져 죽게 되었던 청년 유두고를 다시 살리는 기적을 베푸는 등 사도 바울 입장에서는 몸이 녹초가 되었을 터인데, 그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배를 타고 가지 않고 다음 행선지인 앗소항까지의 길을 홀로 아침 일찍부터 육로로 걸어가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동행이었던 의사 누가나 디모데나 디도나 다른 여러 형제들이 많이 만류했을 것입니다. 배를 타고 가면서 누워 잠이라도 주무시며 가라고 말렸을텐데 사도 바울이 고집스럽게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고서 홀로 80리 거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택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본래 사도 바울은 동료들과 늘 함께 일하고 함께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분이신데, 이렇게 혼자 떨어져서 하룻길을 내내 걷거나 도중에 하룻밤을 자고 가야 하는 것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그 만큼 사도의 속마음에 특별한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왜 드로아에서 앗소로 가는 80리 길의 도보 여행을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로마서 15장 30절에서 32절에 사도가 언급한 다음 세 가지의 일이 그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마서 15장 30절 이하를 읽어보면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지 쉬게 하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 이 개월 전에도 사도 바울이 헬라 지역 곧 고린도교회에 머물러 있을 때에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가는 배 안에서 살해하려 하는 구체적인 살해 계획이 있었던 것이 미리 알려져서 간신히 화를 면하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는 이제 유대인들 안에는 자기를 죽이려 하는 심각한 반감이 뚜렷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이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그의 목숨이 분명히 위태로울 것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는 이번 여행 길에서 사도는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에서 무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필요성이 컸던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이번에 여러 이방 교회들의 대표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목적 중에 하나가 바로 이방 교회들이 모은 구제 헌금을 유다의 교회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동안 이방인 성도들이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형제들을 위하여 구제 헌금을 모으는 과정이 매우 어려운 과정을 겪었습니다. 최근에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유대인 기독교회와 이방인 기독교회 간에 점점 벌어져가는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는 이번 예루살렘 방문시에 이방인 교회들이 정성껏 모은 이 구제 헌금을 유대인 교회와 사도들에게 전달할 때에 그 구제 헌금이 기쁘게 받아들여져서 이방인 기독교회와 유대인 기독교회 간에 사랑의 교제가 깊어지고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 주셔야만 했기에 사도는 이 일을 놓고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사도의 마음을 지배하는 또 한 가지의 생각은 바로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후의 선교 계획입니다. 사도는 이번 예루살렘 방문을 끝으로 아주 멀리 로마와 서바나를 향하여 떠나 복음을 전하려는 원대한 계획이 마음에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이 벅찬 소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일이 성취되려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러한 자기의 선교 계획을 놓고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마음의 부담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사도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다른 일행들과도 따로 떨어져 걸으면서 하나님께 깊이 기도하고 자기의 생각을 정리하면서 마음의 다짐도 새롭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 방문이 그의 삶과 그의 사역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번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자기 목숨도 잃을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도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과 만나 그 동안의 이방 선교 여행의 여러 결과들도 나누고 구제 헌금도 전달하여 유대인 교회와 이방 교회와의 하나 됨도 추진하고 난 후에 자기의 인생에서 큰 한 단락을 긋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번 예루살렘 방문의 중대한 의미를 생각하고, 앗소 항구까지의 80리 길을 아침 점심 저녁의 시간을 길을 따라 걸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홀로 기도하면서 생각하면서 마음을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방문하기 전에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한적한 이방 지역에 가서 제자들과 조용히 시간을 보내셨던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정리하시고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자기가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인데, 이는 자기가 십자가에 죽으러 가는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또 다시 높은 산에 올라가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얼굴이 해와 같이 변화되고 옷이 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는 일을 겪으셨습니다. 이로써 예루살렘에 올라 십자가에 매달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그 큰 사명을 이룰 마음의 결심을 단단히 하시고 이를 차분히 준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 위에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하신 동일한 말씀을 제자들에게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시면서, 앞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대제사장과 유다 백성의 장로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것과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계속 알리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자기의 지상 사역의 기간 동안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할 때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하나님 앞에서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함으로 맡은 사명을 이루고자 자기 마음을 단단히 정하고자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인생의 여정에서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내어 마음을 정리하면서 맡은 바 사명을 다 이루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은혜를 구하는 독대의 시간을 갖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 항구에서 동료들을 떠나 홀로 하룻 동안 해변길을 따라 80리를 걸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면서 자기 마음을 누르고 있는 예루살렘의 유대인의 살해 위협에 대한 두려움을 하나님께 아뢰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교회의 화평을 위한 그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간절히 간구하면서 그 후에 맞이할 장래의 원대한 선교 계획을 고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서 기도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께 맡기신 사명을 얼마나 이루어가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또 장래를 생각하면서 굳건하게 마음을 다지는 각오와 결심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시간 관리 디렉터인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이 했던 말로 제가 기억합니다.
“계획되지 않은 시간은 낭비되는 쪽으로 흐르기 쉽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내려놓고 잠잠히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바라고 믿는 자의 선한 사명을 그 동안 얼마나 이루어왔는가를 점검하고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새롭게 계획을 세우고 또 다시 결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무더위가 조금씩 약해지고 가을 바람이 조금씩 조석으로 느껴지는 이 때에 우리도 드로아에서 앗소로 가는 길을 홀로 걸었던 사도 바울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흐트러진 영성을 조용히 가다듬도록 합시다.
주님 앞에서 시간을 내어서 우리의 지난 날을 돌아보고 앞으로 우리 앞의 세월을 어떻게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가꾸어갈 것인가를 조용히 반추해봅시다. 그리하여 앞으로의 삶을 주님 앞에서 아름답게 살아갈 계획을 생각하고 굵고 오래갈 삶의 계획을 짜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조용한 독대의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를 이 지상의 순례길을 걸어갈지 모르지만, 주님의 영과 더 긴밀한 교제를 나누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루 하루 살아감으로써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이루고 장차 주님 앞에 섰을 때 잘했다 칭찬받는 저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밀레도라는 항구 도시에 사도 바울이 도착한 후에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권면했던 말씀 중 초반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합시다. 앗소 항구에서 일행들과 합류한 후 사도 바울은 미둘레네 항구, 사모 섬의 항구, 그리고 밀레도 항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밀레도 항구는 에베소를 지나서 있는 항구였습니다. 밀레도로부터 에베소까지는 약 45km니까 가는 길만 해도 100리가 좀 넘는 먼 거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직접 에베소에 가면 에베소 성도들을 또 봐야 되고 그러면 일정이 길어지니까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가기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까지 오도록 하였습니다. 밀레도에서 삼일이 지난 후에 드디어 에베소 장로들을 달려왔습니다. 그리하여 밀레도 항구의 어느 조용한 집에서 사도 바울은 보고 싶었던 에베소 장로들을 반갑게 맞이하여 그의 긴 고별의 당부를 나눕니다.
그의 고별 당부의 전반부 일부인 17절로부터 2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에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은 먼저 지난 날의 자기의 사역을 회고하면서 그가 행하였던 사역의 자세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먼저 사도는 자신이 겸손과 눈물로 사역했다고 말합니다. 수많은 이적과 표적이 그를 통하여 일어났지만 그는 결코 교만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가 더 뛰어나거나 더 훌륭한 인격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몇 년 후에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에베소서 3:8)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있다면 자기는 그보다 더 작은 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겸손,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격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자기를 작게 여기는 자가 됩시다. 직장에서나 이웃과의 관계에서나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항상 자기를 작은 자, 부족한 자로 생각하는 겸손한 자가 됩시다. 겸손함이 주님의 진실한 제자로서의 가장 분명한 표지입니다.
또한 사도는 자기가 눈물로 사역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울고, 성도들의 영혼을 사랑함으로 인하여 그들 중에 혹시라도 실족할까봐 기도하면서 울고, 사역하면서 자기의 부족함 때문에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주신 사명 감당하지 못할까봐 하나님 앞에 은혜 달라고 울었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서도 눈물이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 감격하여 울고, 마음이 찔려서 울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의 영혼이 무감각하여 잃어버려질까봐 안타까워 울고,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세상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함 때문에 울고, 자신의 나태함과 무능력함 때문에 울고, 세상의 악함 때문에 울고,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면서 우는 거룩한 눈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상의 성도의 눈물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귀한 보석이어서, 천사들이 받들어서 하늘의 눈물 병에 모아두곤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눈물의 보석들이 하늘 나라에 많이 올라가는 지극히 아름다운 눈물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도는 시험 중에 인내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에서도 사도의 동족 유대인들은 간사한 꾀를 많이 부려서 사도의 사역을 심각하게 방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런 저런 시험을 당하였지만 늘 참곤 하였습니다. 사도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으로는 유대인들 때문에 괴롭고 힘들 때에 에베소의 재판정에 유대인들을 고소 고발을 하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하고, 마음에 분노감이 생겨서 에베소교회의 사회적으로 유력한 성도들을 통하여 그 유대인들의 본거지인 유대인 회당을 무력화할 행정력을 동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럴수록 더욱 묵묵히 참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께서 친히 유대인들의 갖가지 시험을 해결해주시기를 간청하곤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오래 참아 인내하면서 기도하며 기다림으로써 결국은 유대인들도 더 폭력적으로 나오지 못하고 다시 잠잠해지고 또 잠잠해지곤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도 이 땅에 살면서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신앙 생활하면서 까닭없는 비방과 시험과 방해를 당할 때를 만날 때에 오래 참고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자가 됩시다.
잠언에서 이르기를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다”(잠언 16:32)
라고 하였으며, 전도서에서도 이르기를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라”(전도서 7:8)
라고 하였으니, 우리가 살면서 대적하는 자들을 만나고 성격이 부딪히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해타산이 달라 서로 부딪히는 일을 만날지라도 우리가 노하여 다투지 말고 오래 참고 온유함으로 상대방을 대합시다. 참고 또 꾹 참고 온유합시다. 그리할진대 성령께서 개입해주셔서 문제가 밥이 되게 해주시고 거칠어진 상대방 마음도 바꾸어질 것이요 우리 심령도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충만하므로 요로 시련들을 너끈하게 이겨내게 될 줄 믿습니다.
또한 사도는 자기의 설교 사역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20절과 21절에 이르기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어느 곳에서나 누구에게나 가르침을 베풀 때에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말이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영혼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기는 거북하고 힘들지 모르지만 그들의 심령에 유익이 되는 말씀을 가감없이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교자의 진정한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듣기 좋은 말만 하면 결국 그 영혼이 각성되지 못하고 죄를 깨닫지 못하여 그 영혼 망한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설교자는 그 망한 영혼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최선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그의 전도 사역의 핵심은 우상과 잡신을 섬기는 데서 돌이켜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참된 회개를 하라고 간절히 요청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위하여 구원의 주가 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고 사람들에게 증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며 그 참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유일한 구원의 중보자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이 외에 사도는 복음을 증거하고 가르칠 때에 그런 말씀 외에 헛된 인간 자랑이나 학벌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자기에게 이끈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오직 하나님, 오직 예수님께만 향하여 그들의 마음의 시선이 향하도록 진실하고 참된 마음으로 가르치는 일에만 최선을 다한 것이 사도의 말씀 사역의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다 복음의 증인이요 주님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가르침을 말과 우리의 삶으로 가르치는 영적 교사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삼년 동안 있으면서 행한 가르침과 복음 증거의 말씀 사역에서 본을 보인 대로, 우리도 우리의 이웃과 동료와 믿음의 형제 자매의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거리낌없이 잘 가르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우상과 잡신을 버리고 참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간절히 권면합시다. 또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끝까지 증거합시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귀한 영혼의 열매를 맺게 해주실 것이요 성령의 은혜도 더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한 가지 더 현재 상황에서 그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굳은 결심을 장로들 앞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22절로부터 24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제가 군대를 제대할 때에 안양 수리산 공군부대의 신우회를 인도하실 사회의 목회자를 모시고 제가 내려갈 때에 그 목사님이 제가 마지막으로 그 신우회를 이끄는 자리에서 주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신우회가 없던 안양 수리산 공군부대에 신우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이끌다가 제가 제대하면 이끌 분이 없을 것 같아서 알아보던 중에 그 자리를 맡아주시겠다고 하신 목사님이 마침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대일 당일에 그분과 인사를 나누고 기독 신자 장병들과 마지막 신우회 예배를 드리던 중에 그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가지고 설교해주셨는데, 마치 제게 주시는 말씀 같아서 제 마음에 두었던 말씀입니다. 이는 주의 종이 되겠다는 제 결심에 또 한번 도장이 찍히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에 그 앞에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자기를 기다리는 줄 뻔히 알면서 모든 죄인들의 영혼 구원의 사명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실 것을 각오하시고 마음을 굳게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발걸음을 재촉하신 것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발걸음은 지금 주님의 앞서간 발자취를 뒤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은 주님의 핏자국이 난 길이요 사도들이 쓰러지고 엎어지면서 피 흘리며 끝까지 올라가신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 일제 때에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걸어가신 길이기도 합니다. 그 길은 모든 것이 안락하고 모든 것이 즐겁고 모든 것이 평탄하고 아무런 장애도 없고 고난도 없는 길이 아닙니다. 온실 속 화초과 방안에서 뛰노는 잘 가꾼 애완동물과 같은 삶이 아닙니다. 캄캄한 밤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거친 비바람과 뒤집히는 파도 가운데 나아가는 길이요 홀로 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함께 해주시는 길이기에 심령은 즐거운 길입니다. 그러므로 결박과 환난이 기다린다는 성령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목숨을 내놓고 올라가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도 다시 한번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위하여 우리 목숨까지 내놓으려는 굳은 결심을 다지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우리가 단지 이 땅의 생존을 위하여, 단지 지상적 삶의 안락을 더 얻겠다고 자기 목숨을 아끼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지 맙시다.
그 대신 얼마 있으면 다 만나게 되는 영원하신 왕 우리 예수님 앞에 서게 될 그 날에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다 완수했노라고 인정받는 귀한 목표를 이루려고 열심을 품고 살아가도록 합시다. 곧 맡겨주신 내 가정을 잘 지키고 자녀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기르고 부름받은 교회의 섬김의 직분 잘 지키고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서 빛과 소금의 사명 감당하고 직장과 세상에서 주님처럼 섬기는 자로 살아가는 이 귀한 사명을 잘 감당하여서 장차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귀한 상급을 다 받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