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제95주년 기념
동국사 침탈사료관 제3회 기획전.
씁쓸한 기억. 신사와 무단통치
조선명당엔 신사가 있었다.
2014. 3.10 ~ 6.30.
동국사를 알리는 현판이 다가온다.
동국사 내력.
카메라 설정을 잘못해서 조그마한 크기로.....
ㅋㅋ 지금 크기를 수정을 해 본다.
풍경!
나는 풍경소리가 알리는 의미가 좋다.
자연이 주는 고즈막한 내음을....
단기 기억이 부족해서....
글을 쓰다보니 범종각이라 알리는 안내..ㅋㅋ
실은 사고 휴유증으로 인한 여파가 있어서!
참사문!
일제의 침탈을 참회와 사죄의 글.
글의 내용을 읽다보면서
수 많은 사람의 희생이 독립이라는
힘겨운 새로운 대한민국이 탄생되였고
다시는 이런한 아픔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본식 사찰이지만
아름다움은 세상 누구의 눈이라도 같이 보고있지 않을까요?
대웅전.
본존 불상(本尊佛像)을 모신 법당(法堂)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본 글을 통해 알게되었다.
무식의 소치이다.
대웅전.
승려들이 거처하는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 홑처마 형태로 높이 솟아 있다.
건물 외벽에는 창문이 많고, 처마는 일반적인 한국의 사찰 처마에서 볼 수 있는
단청도 풍경도 없이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 양식을 따른 사찰로 법당의 내부 공간이 바뀌었지만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동국사는 1913년에 지은 국내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인 선운사의 말사(일정한 교구(敎區)의 본사(本寺)에 소속된 작은 절)이다.
전라북도 군산시 금광동 135-1번지에 있다.
저 멀리 보이는 OO아파트.
현존하는 아파트에는
1910년대 광주 형무소 군산감옥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다.
이것이 본 모습입니다(저의 단기 기억 부족등....)
위의 사진에 있는 범종각을 미처 생각이
떠 오리지 안아서 이 안내판을 보면서
극복해야 할 숙제이라 생각 해 본다.
본 건물과 대칭을 이룬다고 말 해야 맞는지요?
대웅전이 좌측이고 우측의 건물은 직접 방문 하셔서....
마음 한 가득 정취를 담아가세요!
감사합니다.
내부에 사진을.....
이성당이라는 군산에서 유명한 빵집입니다.
빵 먹고싶다. 단팥빵!(주로 이 빵을 주문 한다).
전국의 5대 빵집이라서 오후 시간이 되면 줄을 서야 한다.
우리의 장례 문화와
차이가 무엇인지 지금부터 알아 보자!
일본의 장례는 종교에 따라 여러가지 형식을 갖고 있지만 대부분
불교식으로 진행된다.
불교식 장례가 널리 퍼지게 된 것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는데,
바로 사청제도이다.
사청제도는 에도 막부 시대에 막부가 크리스도교 니치렌(일련종) 등의
종교를 억압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각자 하나의 절을 선택하여
적을 올릴 것을 강요한 제도이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집 근처의 절에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등록한다.
사청제도가 있기 전의 장례는 마을 자체에서 상부상조하는 장례 방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청제도가 도입된 이후에는 등록한 절의 스님이
파견되어 장례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청제도에는 의해 불교식 장례는 일본 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장례 방법이
되었고 절은 장례로 인한 수입원을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장례로 인한 안정적인 수입원 때문에 절과 승려는 타락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장례식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본 불교의 모습을 비판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 한국이나 일본도, 장례문화는 물질이 오고가는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아쉽고 않타까운 현실이다
음주 가무!
나도 일가견이 있는데~~
저랑 동무할 분 모십니다. ㅋㅋ
동국사 입구 안내판!
군산은 근대문화도시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에 개항된 항구도시다.
다른 개항 항구와는 달리 오직 쌀 수출을 근간으로 하는
일본 상공인들의 경제적 중심지였고,
군산은 일본인들의 도시였다.
호남, 충청의 쌀은 일본으로 강제 수출됐다.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했던 역사적 아픔이 군산에 서려 있다.
수탈의 흔적들은 조정래의 ‘아리랑’과 채만식의 ‘탁류’를 통해 그려진다.
과거문화의 자료들을 근거로 근대문화를
사실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현장 체험학습의 장이 많이 있다.
일제시대에는 군산의 인구 중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이 5:5 정도나 되였다고 한다.
내항을 중심으로 한 시가지는 대부분 일본인이 주거하는 지역이었다.
현재 원도심(구도심 지역)의 건물 가운데 약 20%는 일제시대 지어진 가옥이다.
고은 시인.
본명은 은태(銀泰) 법명은 일초(一超).
1933년 8월 1일 전북 군산 출생.
군산중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한국전쟁을 맞아 휴학했다.
1952년 입산하여 효봉선사의 상좌가 된 이래 10여 년
동안
수선(修禪)과 방랑생활을 하다가 1962년 환속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장,
민주회복국민회의 중앙위원,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의장 등을 역임했다.
1958년 시 「폐결핵」이 『현대시』에 추천을 받으며 문단에 등단한 이래
『피안감성』(1960), 『해변의 운문집』(1964), 『신 언어의 마을』(1967)을
위시하여 많은 시집을 발간하였다.
그의 초기 시들은 허무의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생에 대한 절망을 노래하면서 허무의 정서에 젖어 있는 시적 자아의 형상에는
삶에 대한 의지나 집착보다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죽음은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심미적
탐닉의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시적 언어는 지나치게 탐미적이고
감상성을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정한 정서의 편린을 표출하고 있다.
그의 시 세계는 1970년대 중반에 발간된
『문의마을에 가서』(1974), 『입산』(1977), 『새벽길』(1978) 등을 통해서 변모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시적 자아는 자기 혐오나 허무감을 떨쳐버리고 역사와 현실 앞에 자기를 세우기 시작한다.
동시대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과 민중 중심의 역사관에 바탕을 둔 이러한
자기 인식을 통해 시인은 정의롭지 못한 현재에 대한 격렬한 투쟁의지를 노래한다.
대표작인 「화살」에서 잘 나타나듯이 투철한 현실 인식에 바탕을 둔
자기희생의 비극성과 전투성이 이 시기 시의 주조를 이룬다.
고은의 이러한 시적 변모는 이전의 시에서 볼 수 있었던 삶에 대한
회의적 태도가 생의 무상함에 대한 인식으로 변모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1980년을 경험한 후 그의 시 세계는 다시 한 번 변모한다.
이 시기에는 연작시 만인보와 장시 「백두산」이
창작되었는데,
이들은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다면성을 그려내려는 시도라고 보여진다.
특히 연작시 만인보는 그 규모의 방대함과 시적 상상력의 포괄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민족의 삶의 모습을 시간과 공간의 제약없이 다채롭게 엮어가고 있는
이 시의 독특성은 반복과 중첩의 묘미에서 찾을 수 있다.
「백두산」이 역사에 대한 신념을 서사적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면,
만인보는 민족의 삶과 그 진실을 서정의 언어로 통합시켜 놓은
훨씬 폭 넓고 깊은 역사의식을 포괄한 작품이라고 할 것이다.
덕분에 저도 많은 것을 알게 되였고,
모두! 행복하고 좋은 시간 가지세요! 고맙습니다.
첫댓글 군산상고 22회 67세 군산에 남중을 거쳐 왔지만 월명산은 알아도 동국사 몰라서 들려보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들려보지요
소식주어서 고맙습니다.
재활용님! 반갑습니다. 저는 51세입니다. 군산비행장 근방에서 살았고요, 지금은 나운동이 전부 집입니다.ㅋㅋ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