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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31일
말씀 : 마28:1-10
제목 : 부활 이후의 삶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천사들이 내려와 예수님께서 묻히셨던 무덤의 돌을 굴려내고 빈 무덤을 여인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당시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소문들이 무성했습니다. 예를 들면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하신 예수님께서 서늘한 무덤 속에서 깨어나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훔쳐갔다, 부활하지 않으셨는데 부활하셨다고 제자들이 헛소문을 퍼트린다와 같은 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살아나셨고 무덤은 비어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언어, 공간, 시간 등의 한계를 초월하는 신성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가신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 같으면 무지몽매하여 자신을 고소한 산헤드린 공회의 종교지도자들이나, 빌라도 또는 로마 병사들 앞에 서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이것은 잡히시기 전에 하신 말씀을 지키신 것입니다. 갈릴리가 아니라 로마로 가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은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받는 시험과 유혹입니다. 우리는 내가 믿은 것이 정당하고 옳은 선택이었으며 이로 인해 나는 이런 혜택과 기적을 체험했다고 증명해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마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마16: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이것이 교회의 근거입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만 세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목적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라(롬7:24)’를 들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연합하신 비밀에 대해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두세 사람이 함께 기도할 때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은 부활의 목적인 동시에 우리를 부르시고 묶으심으로 나타난 축복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구약의 이스라엘과 같은 명칭이라고 말씀드린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내용이라 다시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이면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엡1:17-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신약성서가 십자가와 교회를 특별히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십자가 못지 않게 교회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와 교회는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교회를 통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어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시고 신성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채우시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며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는 구원의 완성으로 가야 합니다. ‘무엇을 드릴까, 무엇을 바칠까’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먼저 성화(聖化)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신비함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시고 그분의 몸으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알수록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신비함뿐만 아니라 우리를 대접하시는 우리의 위치와 축복을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은 엄청난 신비함이고, 그분의 거대함과 충만함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분의 권위와 권세와 능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골2:9-10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우리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분의 몸입니다. 이것을 느끼고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회개를 통해 정결함과 신령함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려면 그분의 충만을 공유하는 은혜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나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신자가 된 여러분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인하고 싶겠지만 우리는 늘 세상적인 승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나타내야 합니까? 힘의 원리, 축복, 형통함으로 나타내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존귀하심을 드러내며 그분을 경외함과 그분과의 친밀함으로 드러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시작부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마27:40)’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인간은 거룩한 것, 의로운 것, 생명에 관한 것을 산출해내지 못합니다. 죄인인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죄와 사망, 더러운 것들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는 의, 진리, 생명, 거룩, 영광, 가치, 보람 등이 나옵니다. 오직 그분께만 복과 영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음으로 인해 나무로부터 모든 영양을 공급받는 것처럼 예수님과의 연함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는 충만함을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함이며 신비함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온 교회, 그분의 몸으로 우리를 부르심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속한 모든 것 즉, 의와 진리와 생명에 속한 것들을 우리에게 채워주시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골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머리를 붙잡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산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필요한 것들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의 부르심을 거룩함으로 확인하지 못하는 성도들은 감사하지 못하며 세상의 것으로 자기를 점검하려고 합니다. 교회의 가장 큰 시험거리 즉, 교회에 대한 평가를 사회에서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칭찬을 받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악을 도모할 수 없고 세상의 원리와 방법을 따라 그들의 문화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사회를 위해 봉사, 구제, 기부 등의 활동을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칭찬을 듣기 위함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것들로 인정받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점검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죄와 생명의 구별을 통해 교회의 위치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멋진 교회, 훌륭한 교회를 꿈꿉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교회에 소속된 개개의 영혼들이 성경적 신앙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부수적인 것을 교회의 자랑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와 목사를 향해 훌륭해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나는 훌륭해지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목사님은 고급차 타고 다니면 안 된다. 검소해야 한다, 사모님은 사치를 부리면 안 된다, 목사님의 자녀들은 절대로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된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그렇게 해야 하고, 누구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저만 거룩하고 검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는 핑계할 수 없다는 일입니다.
우리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에 우리도 모르게 걸려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앞세워 로마로 진군하자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국기도회로 모이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정치화해서 압력단체처럼 행동하거나 기독교가 얼마나 힘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한 영혼, 개인을 책임질 뿐입니다. 세력이 되면 안 됩니다.
여러분은 주님과 함께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갈릴리로 가십시오. 그곳은 주님께서 그분의 생애 대부분을 보내시면서 활동하셨던 곳입니다. 갈릴리는 가난하고, 소외되고,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은 곧 빛과 소금의 삶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세력이나 힘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로마가 아닌 갈릴리로 가신 두 번째 이유는 열한 제자를 만나 명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명령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의 명령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그분의 통치권 안에서의 순종을 그들에게 요구하시기 위해 가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러 가실 때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통치자로서 이제 그분의 통치 영역 안의 모든 존재에게 순종과 복종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유대인에게만 허락되었던, 할례와 율법으로만 가능했던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이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우신 교회를 통해서 나타날 것이며,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그분의 통치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마26:63-64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권세자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보복이 아닙니다. 그분의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의 새로운 공동체, 즉 새로운 영혼과 제자들을 통해 그분의 권능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 행사를 통해 우리의 신앙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종교 행사가 성도들의 신앙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윤리나 도덕적 가치가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세우신 그분의 나라의 거룩함음 힘입어 서 있어야 합니다.
행2:43-47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여기서 나타난 성령의 능력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난 거룩한 삶의 성공을 위해 힘주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의 개입입니다. 자기의 자랑이나 이익을 위해 이웃을 해치는 더럽고 자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극렬해지거나 치열해져야만 나타나는 신앙이어서는 안 됩니다.
불쌍한 북한 동포를 위해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고 삶에서 조용히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은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엡5:18-21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내용입니다. 그분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분명 다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모든 족속 앞에서의 증인 된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신앙은 조금씩 쌓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연합을 통해 서로 복종해야 합니다, 양보하고 지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세상과 다른 교회, 신앙인의 모습은 나의 이기심과 자랑을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삽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기에 우리는 기꺼이 양보합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워진 유기체적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부활을 통해 나타난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교회 행사에만, 종교적 생활에만 익숙할 뿐입니다. 참다운 신자가 되는 일에는 아직 수준 미달입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너희 몸을 드려라.’ 그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그리스도의 몸 된 자로서 분별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 어머니가 김치를 주기 위해 아들 집에 갔는데 현관에서는 강아지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고 방에서는 아들 부부의 대화 소리가 들렸습니다. 며느리가 아들에게 세상에서 누구를 가장 사랑하느냐고 묻자 아들은 첫째는 아내, 둘째는 아이들, 셋째는 강아지, 넷째는 장모님, 마지막으로 다섯째는 우리 부모님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이런 쪽지를 남기고 돌아갔습니다. ‘5번이 3번에게 맡기고 간다’
교회의 ‘첫째’는 무엇이어야 할까요? 선교, 사회봉사, 구제 등 다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무엇보다 연합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그분을 경외하는 예배를 통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가 아닌 갈릴리로 가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갈리리로 가신 첫 번째 이유는 교회를 세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권위와 권능을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충만하게 채우시고 그것들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충만하심과 통치권 안에서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갈릴리로 가신 두 번째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에 갈릴리로 가는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그분의 모든 충만하심을 채우고 공급받기 위해 연단과 훈련을 받아 성장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 여러 가지 훈련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만 일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일을 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는 역설을 아셔야 합니다. 아무리 팔과 다리의 힘이 좋아도 폐가 좋지 않으면 달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의 주님과 함께 성장하여 복음을 들고 세상에 나가 그들을 구원하는 갈릴리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