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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방서예자료[532]중국 4대 명루(名樓)와 불후의 명시(名詩)
중국 4대 명루(名樓)
중궁의 3大명루를 꼽는다면, 우한(武漢) 부근에 있는 황학루(黃鶴樓),
동정호(東庭湖) 호반에 위치한 악양루(岳陽樓),
그리고 내륙 장시성(江西省) 남창(南昌) 부근의 등왕각(滕王閣, 또는 滕王樓)을 듭니다.
그런데 이들 누각은 모두 장강(長江) 아래에 위치해 있어 江南 3대명루라 부릅니다.
여기에 황하 강가에 위치(山西省 永濟)한 관작루(鸛雀樓)를 넣어 4大명루라 합니다.
관작루 대신 안후이성(安徽省) 宣城에 있는 사조루(謝眺樓)나
山東省 봉래시 부근 봉래각(蓬萊閣)을 넣기도 한답니다.
이들 명루를 읊은 옛 시인들의 명시 몇수를 붙이면서
이들 누각에 얽힌 전설을 함께 올려봅니다.
황학루(黃鶴樓)
황학루에서(黃鶴樓) / 최호(崔顥)
昔人已乘黃鶴去(석인이승황학거)
옛 사람은 이미 황학을 타고 떠나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이곳엔 공연스레 황학루만 남았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부반)
황학은 한번 떠나 돌아오지 않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유유)
흰구름만 천년을 부질없이 떠도는구나.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력한양수)
맑은 물 사이로 한양의 나무 무성하고,
芳草萋萋鸚鵡州(芳草처처앵무주)
앵무주에는 향기로운 봄풀이 우거졌구나.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디런가?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연무낀 강 위에서 시름에 잠기네.
이백(李白, 701~762)이 황학루에 올라 그 벅찬 감동을 시로 읊고자 하나
시상이 바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무심코 옆을 보니 최호(崔顥, 704~754)의 시(黃鶴樓)가 걸려 있는데,
이백이 봐도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는 절창인지라
황학루를 주제로 결코 시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언약을 지키지 못하고,
벗이며 시인인 맹호연(孟浩然, 689~740)이 광릉으로 가는 걸
전송하는 시(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를 남기게 됩니다.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李白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친구는 황학루 서쪽에서 작별을 고하고,
烟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춘삼월 꽃피는 봄날 양주로 내려간다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창공으로 사라지는데,
惟見長江天際流(유견장강천제류) 보이는 건 오직 하늘 멀리 흐르는 장강뿐.
*연화(烟花) : 봄날 꽃들이 만발한 아름다운 경치
☞황학루(黃鶴樓)는 우한(武漢)에서 가까운 장강 가에 세워진 누각으로,
각 층마다 보이는 풍광이 다르며 꼭대기에서는 장강을 가장 잘 조명할 수 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황학루는 삼국시대 오(吳)의 손권이 유비와의 싸움에 대비해서
223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3층 건물이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퇴락하여
증개축을 거듭한 것으로, 지금의 황학루는 1985년에 재건한 철근 콘크리트의
5층 건물로 높이가 51m나 되며 엘리베이터까지 설치된 최신식 누각이다.
황학루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 온다. 吳나라 때 신 씨라는 사람이 경치 좋은
이곳에 주막을 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노인(王子安)이 찾아와 술을 청하기에
내다주었더니 여러 잔을 마시고도 돈을 내지 않고 그대로 가버렸다.
그 후에도 노인은 가끔씩 와서는 돈도 내지 않고 술만 마셨고 후덕한 주모는
노인을 잘 대접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인은 귤껍질로 벽에다 학을 그려놓고는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 학이 춤을 출 것’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그동안의 술값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 후로 사람들이 모이는 술자리마다 노래를 부르면
벽에 그려진 학이 나와 춤을 추었고, 소문이 나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술을 마시는 바람에 주인은 큰 부자가 된다. 그런데,
10년 후에 다시 나타난 노인은 술을 대접하려 하자 필요 없다면서
자기가 그렸던 황학을 타고 피리를 불면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는데,
그후 그 자리에다 정자를 짓고 황학루라 불렀다고 한다.
황학루는 중국 역대 내로라하는 시인들이 그 천하절경을 노래했는데,
역대 명사로는 최호(崔顥),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가도(賈島), 육유(陸遊), 등이
문예를 뽐냈으며, 최호의 시 황학루(黃鶴樓)가 걸려 있다.
악양루(岳陽樓)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 / 두보(杜甫)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지난 날 동정호에 대해 듣다가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오늘에야 악양루에 올른다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吳나라와 蜀이 동남으로 갈리고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하늘과 땅이 밤낮 동정호에 떠있구나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가족 친구에게서 소식 한 자 없고,
老病有孤舟(노병유고주) 늘고 병든 몸 외로운 배 안에 있네.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관산 북쪽 적도와 전쟁중이기에,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난간에 기대어 눈물 짓노라.
위 시는 두보(杜甫, 712~770)가 죽기 이태전인 57세 때에 풍광이 수려한
洞庭湖의 악양루에 올라 지은 시입니다.
아직 전란이 평정되지 않아 유랑생활을 하는데 몸에 병까지 겹쳐
고생이 자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즈음에 지은 다른 시(登高)에서는 좋아하던 술마저 끊어야겠다고
읊고 있는 걸로 보아 건강상태가 아주 나빠졌던 모양입니다.
居廟堂之高卽憂其民(거묘당지고즉우기민)
높은 조정에 있으면 그 백성을 걱정하고,
處江湖之遠卽憂其君(처강호지원즉우기군)
강호 멀리 있으면 그 임금을 걱정할지라.
是進亦憂退亦憂(시진이우퇴역우)
조정에 나가서나 물러난 후에나 역시 걱정하라,
然卽何時而樂耶(연즉하시이락야)
그 연후에 언제라도 즐길 수 있지 않은가?
先天下之憂而憂(선천하지우이우)
나라를 먼저 걱정하고 다음에 (나를) 걱정하고,
先天下之樂而樂(선천하지락이락)
나라가 먼저 안락한 다음에 (내가) 즐겨야 할지니.
북송의 문신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인데,
'先憂後樂(먼저 근심하고 뒤에 즐긴다.)'라는 4자성어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악양루(岳陽樓)는 후베이(湖北) 드넓은 동정호(洞庭湖)를 잘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진 목조의 누대로 중국 3대 명루 중의 하나인데,
당나라 때 이곳으로 좌천되어 온 재상 장설(張說)이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퇴락한 것을
파릉군(巴陵郡 : 지금의 악양) 태수였던 등자경(騰子京)이 중수하였다.
악양루에는 두보(杜甫, 712~770)의 시 '登岳陽樓'를
모택동(毛澤東)이 초서체로 쓴 글씨가 걸려있다.
그 옆에는 '水天一色' 과 '風月無邊' 라 쓰여진 목각 주련이 보이는데,
이 글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악양루 벽에는 오래전 부터 '一䖝二(벌레 하나가 둘?) ' 라고
쓰여진 글씨가 있었는데, 다들 장난으로 쓴 낙서 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갔다고 한다. 이백(李白)이 악양루에 올라 이 글씨는 보고,
'이는 仙人의 글로 '一'은 온통 한가지 색 '水天一色'이란 말이고,
'䖝二'는 글자에 모두 바깥 둘레가 없으니 이는 '風月無邊'이란 뜻이라.' 라
풀이했다고 합니다. 즉 '눈앞에 펼쳐진 하늘과 물이 온통 한가지 색으로,
음풍농월(吟風弄月)은 끝이 없네' 쯤으로 새겨질 듯 하네요
(비슷한 전설이 항주 서호(杭州 西湖)에서도 전해 오는데 어느 게 원조인지?).
악양루에는 북송의 애국 정치가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도 걸려있습니다.
등왕각(滕王閣)
落霞與孤騖齊飛(낙하여고무제비) 내리는 노을 외로운 따오기와 더불어 날고,
秋水共長天一色(추수공장천일색) 가을 물빛은 푸른 하늘과 같은 색이로다.
왕발(王勃, 650-676)이 등왕각의 중수(重修) 낙성식에 지은 서문 중 일부입니다.
이미 왕발의 文名이 알려져 있다 해도, 25살의 젊은 청년의 일필휘지가
이 대목에 이르자 지방관이며 이 잔치를 주관한 염백서(閻伯嶼)가
'이 건 귀신의 글이지 사람의 글이 아니다.' 라 크게 감탄했다 전합니다(古文眞寶).
긴 문장의 등왕각 서문(騰王閣序)는 다음과 같이 끝을 내지요
(이 재기 발랄한 청년은 삼십 살도 되기 전에 남쪽 지방관으로 있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도중 강을 건너다 익사하고 맙니다. 佳人은 薄命이라더니..).
滕王高閣臨江渚(등왕고각임강저)
등왕각 높은 누각 강가에 가까이 있는데,
佩玉鳴鑾罷歌舞(패옥명란파가무)
패옥 방울 소리 노래와 춤도 파했구나.
畵棟朝飛南浦雲(화동조비남포운)
화려한 기둥 아침에 날리는 남포의 구름,
朱簾暮捲西山雨(주렴모권서산우)
붉은 발 저녁에 걷히면 서산에 내리는 비.
閑雲潭影日悠悠(한운담영일유유)
한가로운 구름 연못에 비치고 해는 유유히,
物換星移度幾秋(물환성이도기추)
세상 바뀌고 세월 흘러 몇 해나 지났던가?
閣中帝子今何在(각중제자금하재)
누각 속 황제의 아들은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檻外長江空自流(함외장강공자류)
난간 밖 長江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帝子 : 당나라를 세운 이연(李淵)의 아들 원영(당태종의 동생)이
등왕각을 짓고 그곳에서 소일했다고 함
☞등왕각(滕王閣)은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의 아들 이원영이
장시성(江西省) 南昌현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이 전각을 지었는데,
그가 등왕(騰王)의 작위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 전각을 등왕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뒤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 연대(628~683) 염백서(閻伯嶼)가
이곳의 지방관으로 발령을 받아 등왕각을 개보수하여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성대한 잔치를 벌인다. 염백서는 자신의 사위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고 싶어서
미리 글을 지어놓게 준비하였으나, 왕발의 명문 앞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등왕각은 그 동안 숱한 전란으로
여러차례 파괴되고 다시 지어졌다. 청나라 때 28번째로 재건되지만
1929년에 군벌들 간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방치되어 있다가,
1989년이 되서야 다시 짓게 된다.
관작루(鸛雀樓)
관작루에 올라(登鸛雀樓)
왕지환(王之渙)
白日依山盡(백일의산진) 해는 서산에 기대어 지려는데,
黃河入海流(황하입해류) 황하는 바다로 흘러가고 있구나.
欲窮千里目(욕궁천리목) 천리 밖 멀리까지 보고자,
更上一層樓(갱상일층루) 다시 한 층을 더 올라가노라.
중국 근현대 정치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인용한 한시로,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때에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이 시가 들어간 서예작품을 선물로 줍니다.
왕지환(王之渙, 688~742)이란 시인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나
중국 근대 정치가들에 의해 화려하게 부활한 특이한 케이스라고나 할까요.
☞관작루(鸛雀樓)는 長江 가까이 위치한 황학루, 악양루, 등왕각(江南 3名樓)과는
달리 黃河 강가인 산시성(山西城) 永濟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남북조(南北朝) 시대인 북주(北周) 때 3층으로 건립했으나,
원(元)나라 초 몽고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근년에 중건하여
2001년에 완공되었다. 관작루는 멀리 큰 산 아래 황하가 내려다보이는
절경에 위치하여 당나라의 많은 시인들이 찾아와 시를 남겼는데,
오직 이익(李益), 왕지환, 창제(暢諸)의 시 3수만이 아름다운 경치를
제대로 표현한 절창이라고 한다. 이 중 왕지환의 시(登鸛雀樓)가
가장 유명하여 지금까지도 人口에 회자되고 있다.
사조루(謝眺樓)
가을날 사조 북루에 올라秋登宣城謝眺北樓
-이백(李白)
江城如畵裡 (강성여화리)
강물과 성곽이 그림 속 같은데,
山晩望晴空 (산만망청공)
산은 어스름하고 하늘은 맑구나.
兩水夾明鏡 (양수협명경)
두 갈래 물길은 맑은 거울 같고
雙橋落彩虹 (쌍교낙채홍)
한 쌍의 다리는 무지개가 떨어진듯 하다.
人烟寒橘柚 (인연한귤유)
인가의 연기에 귤과 유자는 차갑고
秋色老梧桐 (추색노오동)
가을 빛에 오동나무는 늙어가는구나.
誰念北樓上 (수념북루상)
누가 생각했으리 북루에 올라,
臨風懷謝公 (임풍회사공)
바람맞으며 사공(謝眺)을 그리워할 줄을..
*사공(謝公) ; 중국 六朝시대 제(齊)나라의 시인 사조(謝眺)를 지칭하며,
이곳에 지방관으로 있을 때 이 누각을 건립했음.
이백(李白, 701~762)은 사조루(謝脁樓)와 인연이 많은 모양입니다.
그의 또 다른 절창 '사조루에서 아저씨를 전별하며(宣州謝脁樓餞別校書叔雲)에서는
이곳의 멋진 풍광을 읊기보다는, 詩文이 뛰어난 아저씨(李雲)와 자신을
세상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라 여기에 붙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抽刀斷水水更流, 擧杯消愁愁更愁(칼을 뽑아 물을 끊어도 물은 다시 흐르고,
술을 들어 시름을 씻어도 시름 더욱 시름겹네)'라는 명구절이 이 시에 나오는군요.
이백은 평소 사조(謝脁)를 부러워하여 '宅近靑山同謝脁, 門垂碧柳似陶潛
(집 가까이 청산에 있음에 사조와 같고, 문 앞에 버들이 늘어졌으니 도연명이로다)'
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하지요.
☞사조루(謝眺樓)는 안후이성(安徽省) 宣城에 위치한 누각으로,
육조(六朝) 시대 남제(南齊)의 시인 사조(謝眺)가 선성태수(宣城太守)로 있을 때
北樓를 지어 붙여진 이름으로 사공루(謝公樓) 또는 사루(謝樓)라 부르기도 한다.
첫댓글 황학루(黃鶴樓), 악양루(岳陽樓), 등왕루( 滕王樓). 관작루(鸛雀樓) 관련된 詩 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