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산과하늘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산행 사진---^^ 스크랩 `남산 13곡`이라는 명소를 끼고 있는 청도의 진산, 남산(`14.5.3)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89 14.05.22 06:10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남산(南山, 870m)

 

산행일 : ‘14. 5. 3()

소재지 : 경상남도 청도군 청도읍과 화양읍, 그리고 각남면의 경계

산행코스 : 청도읍성석빙고향교남산 13신불사 삼거리신불사 왕복헬기장남산삼면봉(840m)봉수대D사거리낙대폭포청도군청(산행시간 : 4시간20)

같이한 산악회 : 기분좋은 산행

 

특색 : 한 마을 또는 한 지역을 지켜주는 산을 진산(鎭山)이라고 한다. 그런데 의외로 남산이 이곳 청도고을을 지켜주는 진산이란다. 가지산 등 청도지역에는 이곳 남산보다 더 높고 웅장한 산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청도사람들이 그만큼 이곳 남산에 애착을 갖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남산은 신둔사라는 고찰(古刹)과 낙대폭포, 그리고 남산 13곡 등 이름난 명소(名所)들이 즐비하다. 거기다 위험하다는 생각을 조금도 할 필요가 없는 암릉 곳곳에서의 눈터지는 조망(眺望) 등 전국의 다른 괜찮은 산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이다.  

  

산행들머리는 청도읍성 터 앞 주차장(청도군 화양읍 동천리 251-2)

대구-부산고속도로 청도 I.C에서 내려와 25번 국도 밀양·청도 방면으로 우회전하자마자 나타나는 모강교차로(청도읍 원정리)에서 20번 국도로 옮겨 창녕방면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화양삼거리(화양읍 합천리)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만 더 들어가면 청도읍성 터가 나오고, 그 곁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남산계곡 주차장은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조금 더 올라가야 되지만 이곳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모처럼 찾아온 청도에서 선현(先賢)들의 발자취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차에서 내리면 바로 앞이 청도읍성(淸道邑城 :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이다. 읍성(邑城)이라고 해서 한 바퀴 둘러볼 것까지는 없다. 성 안에 들어가 볼 것이 아니라면 눈앞에 보이는 100m도 채 안 되는 복원(復原)된 성벽(城壁)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청도읍성은의 성벽은 길이 1,570(1.9), 높이 55(1.65m)인데, 축조(築造) 년대는 1590(선조 23)에 공사를 시작하여 2년 뒤에 완공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으면서 동··북문이 소실(燒失)되는 등 크게 파손되었다. 그 뒤 소실된 문루(門樓)를 다시 새우고 성벽을 보수하여 조선조 말까지 유지되어 왔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헐어버려 지금과 같이 그 흔적마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성곽(城郭) 안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근민당(勤民堂),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기고청(旗鼓廳), 군사(郡司), 인리청(人吏廳), 군기고(軍器庫), 대동고(大同庫), 고마청(雇馬廳), 사창(司倉)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객사(客舍)로 사용되던 도주관(道州館)과 정면 7,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인 동헌(東軒)이 남아있을 따름이다.

 

 

 

 

성곽을 둘러본 후 남산계곡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잠시 후 왼편에 석빙고(石氷庫 : 보물 제323)가 나타난다. 숙종 39(1713)에 지어졌다는 석빙고는 앞에 세워진 비문(碑文)의 기록(석공 13명과 목수, 야공 등 연인원 674명이 공사에 투입됐고 1438근의 철을 사용)으로 미루어볼 때 규모가 엄청났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막상 눈앞에 보이는 것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천장을 덮고 있는 네 개의 홍예(虹霓)와 장대석 한 개만 남아 앙상한 몰골인 것이다. 참고로 석빙고는 빙실(氷室)의 길이가 14.75m에 너비는 5m, 그리고 홍예(虹霓)의 높이가 4.4m인 돌로 만든 창고로서, 겨울에 강에서 채취한 얼음을 이 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에 사용했다. 그리고 현존하는 한국의 석빙고 가운데 축조 연대가 가장 오래되었으며, 규모는 경주 석빙고(보물 제66) 다음으로 크다.

 

 

 

 

석빙고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우뚝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반긴다. 향교를 지키고 있는 수문장(守門將)이다. 당연히 청도향교(淸道鄕校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는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 옆에 있다. 향교란 문묘(文廟)와 그 부속기관인 학교(學校)로 구성되며, 고려 때부터 나타난 지방교육기관이다. 청도향교는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조선 선조 1(1568)에 고평동(古坪洞)에 창건하였다. 인조 4(1626) 합천리로 옮겼다가 영조 10(173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4칸의 동무(東?)와 서무(西?), 7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5칸의 사락루(思樂樓), 삼문(三門),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2(宋朝二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고, 지금은 석전(釋奠 : 봄과 가을 2)과 분향(초하루와 보름)만 하고 있다.

 

 

 

 

석빙고에서 조금 더 위쪽으로 올라가면 우뚝 솟아오른 느티나무가 반긴다. 향교를 지키고 있는 수문장(守門將)이다. 당연히 청도향교(淸道鄕校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7)는 보호수(保護樹)로 지정된 이 느티나무 옆에 있다. 향교란 문묘(文廟)와 그 부속기관인 학교(學校)로 구성되며, 고려 때부터 나타난 지방교육기관이다. 청도향교는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조선 선조 1(1568)에 고평동(古坪洞)에 창건하였다. 인조 4(1626) 합천리로 옮겼다가 영조 10(1734)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4칸의 동무(東?)와 서무(西?), 7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5칸의 사락루(思樂樓), 삼문(三門),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2(宋朝二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참고로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고, 지금은 석전(釋奠 : 봄과 가을 2)과 분향(초하루와 보름)만 하고 있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10분 가까이 되면 왼편 계곡으로 내려가는 나무데크 계단이 보인다. 남산계곡의 개울가로 난 길과 연결시키는 계단이다.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서 개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갈 수도 있으나 계속해서 임도를 따른다. 개울에 물이 많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개울트레킹(trekking)을 고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나무계단 두 곳을 지나면 임도는 끝을 맺고 그 뒤를 오솔길이 잇는다. 오솔길로 들어서는 가 했더니 금방 나무데크 조망대가 나타난다. 안내판에 음용지(飮龍池)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니 드디어 남산골에 들어섰는가 보다. 음용지는 남산 13중의 제3곡이기 때문이다.

 

 

 

 

 

남산 13은 남산계곡의 또 다른 이름인데, 옛 선현(先賢)들이 2.5정도 되는 남산계곡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서 명소마다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바위에다 새겨놓은 데서 유래됐다. 지금으로부터 약500년 전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4) 당시 이 고장 선비들은 남산계곡에 모여 시회(詩會)를 열고 자연 속에서 풍류를 읊었다고 한다. 그 즈음에 지형(地形) 또는 암(), ()마다 그에 걸 맞는 이름을 붙였고, 그 중 13곳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13곡을 둘러보고 나면 실망을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안내판이 붙어있는 명소들이 이름에 비해 너무 왜소(矮小)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저렇게 작은 절벽이나 바위, 그리고 저렇게 얕은 소()나 담()을 보고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구(詩句)들을 떠올릴 수 있었을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자연 속에서 우정과 사랑을 노래했던 옛 선조들의 멋을 느끼며 산행을 이어간다.

 

 

 

 

 

 

 

산수정에 이어 두 번째로 나타나는 쉼터에 이르면 검은 오석(烏石)을 반듯하게 다듬어 놓고 그 위에다 남산 13을 설명해 놓은 것이 보인다. 그 내용을 모두 머리에 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탓에 산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기록을 뒤져 여기에 옮겨본다.

1곡 여기추(女妓湫) 원래는 청수대(靑水台)였는데 반가(班家)의 여자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기생들이 목욕하는 곳이라는 뜻의 여기추(女妓湫)라는 이름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들의 말장난이 성공하여 반가 부녀자들의 목욕이 끊겼다니 흥미로운 일이다.

2곡 록수문(鹿脩門)은 녹피(鹿皮)를 상납할 때 포수들이 이곳에서 수렵제(獸靈祭)를 지내고 사냥하던 곳이다.

3곡 용음지(龍飮池)는 한발 때 군수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일명 기우단(祈雨壇)이라고도 한다. 아까 올라올 때 보았듯이 이름표만 붙어있지 않으면 그저 자그만 바위에 불과할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4곡 백석뢰(白石瀨)는 물 밑에 흰색 돌이 많아 보석처럼 반짝이는 여울이라는 뜻이다.

5곡 질양석(叱羊石)은 바위가 우뚝 서 있어 소나 양을 치면서 감시하기에 알맞은 바위라는 뜻이다.

6곡 운금천(雲錦川)은 바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비단을 깔아 놓은 것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7곡 취암(醉 岩)은 무오사화(戊午史禍) 후 많은 선비들이 한을 달래던 곳이다.

8곡 철주단(撤珠湍)은 여울에 솟구치는 모래알이 구슬을 뿌리는 것과 흡사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9곡 산수정(山水亭)은 자연과 더불어 작시(作詩)하였던 곳으로 정자가 있다.

10곡 만옥대(萬玉臺)는 나지막한 폭포로 물방울이 튀어 날리는 것이 놀라울 정도이다.

11곡 유하담(流霞潭)은 노을빛이 계곡에 가득하기가 큰못에 물이 가득한 것과 같다는 뜻이다.

12곡 낙석대(落石臺)는 선녀들이 옥련대에서 목욕할 때 옷을 벗어 놓았던 곳으로 일명 낙안봉(落岸峯)이라고도 한다.

13곡 금사계(金沙界)는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고 신둔사(薪屯寺, 鳳林寺)로 올라갔다는 곳이다.

참고로 오늘 산행 중에는 여기추와 록수문가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석문(石門), 일감당(一鑑塘), 용항(龍亢), 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 등의 안내판을 볼 수 있었다. 이름은 남산 13이지만 16개의 명소로 관리되고 있는 모양이다.

 

 

 

 

마지막 13곡인 금사계(金沙界)를 끝으로 남산 13은 끝을 맺는다. 그렇다고 해서 남산계곡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옛 선현들이 풍류를 즐기며 노닐던 명소들만 끝을 맺을 뿐 계곡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그러나 계곡이 보여주는 풍광(風光)은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 분명한 모양이다. 산길이 금사계를 지나면서 신둔사로 올라가는 자동차길과 하나가 되어버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지 30, 그러니까 남산골에서 25분 남짓 머문 셈이다. 신둔사로 올라가는 자동차길을 따라 올라가면 조금 후에 남산기도원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이어서 신둔사 방면으로 약 100m쯤 더 올라가면 ‘119구조위치 안내판과 스테인리스(stainless)로 만들어진 등산로 안내판이 있는 작은 공터에 닿는다. 공터 바로 위에서 길이 두 갈래(이정표 : 남산 1.85Km/ 신둔사 400m/ 화양읍)로 나뉜다.

 

 

 

 

 

갈림길에서 신둔사까지는 400m, 잠깐 다녀오기에는 결코 짧지 않은 거리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옛 사찰(寺刹)을 둘러보지 않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다. 가지마라는 집사람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신둔사로 향한다. 당연히 뛰다시피 다녀올 수밖에 없다. 7~8분쯤 올라갔을까 울창한 숲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신둔사가 눈에 들어온다. 1천년 가까이 되는 오랜 역사에 비해 의외로 자그마한 규모이다. 신둔사(薪芚寺)는 고려(高麗) 명종 3(1173)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창건한 사찰(寺刹)로서 당시에는 봉림사(鳳林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후 조선 현종 8(1667) 상견(尙堅)에 의한 중창(重創), 중건(重建 : 고종 15)을 거치면서 절 이름이 지금의 신둔사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칠성각, 독성전, 산령각, 요사채 등이 있으나 특별한 문화재는 보유하고 있지 않다.

 

 

 

신둔사를 둘러본 뒤 다시 공터 위의 삼거리로 되돌아와 이번에는 오른쪽 계곡으로 난 길로 들어선다. 신둔사를 다녀오는데 15분이 채 안되었으니 거의 달려서 다녀온 셈이다. 계곡으로 들어가는 길은 아까 등산로 안내판에서 보았던 ‘A코스이다. 100m쯤 들어가니 물기 한 점 없이 메말라버린 건천(乾川)이 나오고 그 건너편에 집사람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장난이 아니다. 가지마라는 곳을 다녀온데 대한 불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몸을 낮추어야 한다. 가능하면 말을 줄이고 그녀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다. 계곡을 건넌 산길은 초반에는 사면(斜面)을 따라 완만(緩慢)하게 이어진다. 그러다가 점점 가파르게 변하더니 장군샘을 지나면서부터는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가팔라져 버린다. ‘산이 불끈 일어섰다거나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는 표현이 있다. 바로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런 가파름이 힘에 겨웠던지 산길은 곧장 위로 향하지를 못하고 지그재그로 갈지()자를 그리면서 서서히 고도(高度)를 높여간다.

 

 

 

 

신둔사 갈림길에서 35분 조금 못되게 올라서면 오른편에 너럭바위가 나타나면서 오늘 처음으로 시야(視野)가 열린다. 청도산악회에서 아랫·윗 전망대(展望臺)’라는 이름을 붙인 바위이다. 바위 위에 올라서면 조금 전에 지나온 남산골과 화양읍 시가지가 한눈에 잘 들어온다. 전망대를 뒤로하고 조금 더 오르면 갈림길(이정표 : 정상 570m, 헬기장 390m/ 전망대 90m)을 만나게 된다. 이정표의 방향표시 하나가 떨어져 나간 것이 보인다. 이 방향표시가 지시하고 있었을 방향이 바로 죽림사에서 올라오는 길이다.

 

 

 

 

 

죽림사 갈림길을 지나면서부터는 심심치 않는 산행이 계속된다. 암릉이 나타나면서 곳곳에서 멋진 조망(眺望)처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전망대 위로 올라가면 남산골과 신둔사가 조망되고 남산골 건너로는 은왕봉이 마주 보인다. 이런 코스에서는 구태여 서두를 이유가 없다. 마침 조금만 위험하다 싶으면 밧줄까지 매어 놓았으니, 그저 눈요기를 즐기며 여유롭게 걷기만 하면 된다.

 

 

 

눈요기를 즐기면서 오르다보면 어느덧 헬기장에 올라서게 된다. 전망대를 출발한지 28분쯤 되는 지점이다. 헬기장에서 죽림사 갈림길(이정표 : 남산 0.18Km/ 각남, 죽림사/ 기도원 1.67Km)과 헤어지고 나면 금방 남산 정상에 올라서게 된다. ’화양읍성을 출발한지 2시간10분이 지났다.

 

 

 

10평 남짓한 공터로 이루어진 정상에 올라서면 자연석으로 만든 커다란 정상석과 남산 종주거리 및 등산로가 그려진 스테인리스(stainless) 안내판이 길손을 맞는다. 정상에서의 조망(眺望)은 의외로 시원치 않다. 꽤 많은 부분을 잡목(雜木)들이 시야(視野)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까지는 없다. 조금 후 하산 길에 만나게 되는 전망대에서 조망에 대한 목마름은 일거에 날아가 버릴 테니까 말이다. 참고로 남산이란 지명(地名)은 전국에 많은 편이다. 그러나 그중에 공식적인 것은 서울의 남산과 경주의 남산, 그리고 이곳 청도의 남산뿐이라는 것이 아까 올라오는 길에 만났던 청도에 사신다는 아주머니의 주장이었다. ‘남산이란 남쪽에 면한 산 이라는 뜻으로 보통 한나라의 도읍지(都邑地)가 있는 지역의 앞산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경주의 남산이나 서울의 남산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남산의 북쪽 어디엔가 이서국(伊西國)의 도읍지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 청도에는 한때 신라를 공격해 위기에 빠뜨릴 정도로 강성했던 이서국(伊西國)이라는 부족국가가 있었다니까 말이다.

 

 

 

하산은 올라왔던 길과 반대방향으로 내려선다. 정상석을 마주 바라볼 때 왼편 방향이다. 잠시 울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을 통과하면 남산 최고의 전망대가 나타난다. 아까 정상에서 목말라 했던 조망(眺望)에 대한 갈증은 이곳에서 풀면 된다. 꼭 조망뿐만이 아니다. 암릉을 이루고 있는 바위들 사이에 뿌리를 박고 있는 멋진 낙락장송(落落長松)들도 한 폭의 그림이니 구태여 발걸음을 서두르지 말고 즐기다가 내려갈 일이다. 저 멀리에 첩첩이 쌓여있는 영남알프스의 산군(山群)들은 물론 이서국(伊西國)의 왕이 은신(隱身)했었다는 은왕봉과 그 아래 신둔사가, 그리고 정면에는 삼면봉이 손에 잡힌다.

 

 

 

 

쇠사슬을 잡고 내려서면 삼면봉이다. 정상에 1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삼면봉 정상은 봉우리의 한가운데에 쌓여있는 큰 돌무더기 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또한 위로 올라왔다는 느낌도 없기 때문에 봉우리에 세워진 이정표(낙대폭포 4.3Km/ 밤티재 1.5Km/ 남산정상 0.6Km)를 겸한 등산안내도만 아니라면 정상인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일 정도이다. 참고로 삼면봉(三面峰)은 청도군내(淸道郡內) 삼개 면(각남면, 화양읍, 청도읍)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삼면봉에서는 낙대폭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내려서면 또 다시 쇠사슬이 길게 늘어진 암벽(巖壁)이 길손의 발목을 잡는다. 그러나 걱정할 것까지는 없다. 옆으로 돌아 내려갈 경우에는 허리를 세우고도 아래로 내려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암벽을 내려서서 조금 더 걸으면 한재(이정표 : 봉수대 1.6Km/ 신둔사 1.75Km/ 남산 정상 0.8Km)에 닿는다. 한재에서는 봉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또 다른 이정표(원리방면/ 신둔사 1.7Km/ 삼면봉 0.1Km)에는 원리방면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참고할 일이다.

 

 

 

한재를 지나면서 암릉산행이 시작된다. 오늘 산행에서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구간이다. 반반한 바위구간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 쌓아 놓은 듯이 바위들이 첩첩이 쌓여 있는 등 수시로 그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거기다 바위틈에 비집고 들어선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주변 바위들과 상큼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絶壁)을 잇는 암릉은 주변 조망(眺望)도 뛰어나다. 곳곳의 전망바위에 올라서면 청도 시가지는 물론 주변의 산군(山群)들이 거의 다 조망된다. 오른쪽 아래에 보이는 곳은 미나리로 유명한 한재 미나리재배단지이다. 참고로 한재 미나리 재배단지(비닐하우스)는 행정구역 상 청도군 청도읍 초현리, 음지리, 평양리, 상리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남산과 화악산 사이의 계곡을 따라 형성된 이 마을들을 한꺼번에 한재라고 부르다. 이 한재마을에서는 8~9월 무렵에 미나리 줄기를 무논에 뿌려 11월쯤 베어낸 뒤 12월에 비닐을 씌워 다시 키워서 50쯤 자란 1월부터 수확에 들어가는데 3~4월에 제철을 맞이한다고 한다.

 

 

 

암릉이라고 해서 온통 바위들만 널려있는 것은 아니다. 바위구간과 흙구간이 번갈아 나타나면서 걷는 이들을 심심찮게 만들어 준다. 능선의 주변은 온통 소나무들 천지,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愛國歌)가 절로 튀어나올 만하다. 애국가가 가리키는 남산은 서울의 앞산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곳 청도의 남산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소나무가 가득한 것이다. 사실 소나무들이 울창한 산은 전국에도 많다. 그러나 바위와 함께 어우러지는 소나무 숲은 그리 많지 않다. 거기다 남산이라는 지명까지 합쳐지니 자신도 모르게 애국가의 구절이 떠오르고 만 것이다.

 

 

 

암릉길에서 눈에 호사(豪奢)를 누리며 걷다보면 봉수대(烽燧臺)에 이르게 된다. 한재에서 35분쯤 되는 지점이다. 봉수대란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산봉우리에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피우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외적(外敵)이 침입하거나 난리(亂離)가 일어났을 때에 위급한 소식을 중앙(中央)에 전하던 시설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봉수대의 시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3~4평쯤 되는 공터에 돌맹이 몇 개가 바닥에 동그랗게 깔려있을 뿐이다. 곁에 세워진 등산로안내판이 아니었다면 이곳이 봉수대인줄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봉수대에서 길은 두 갈래(이정표 : 낙대폭포 3.5Km/ 대포산 1Km/ 남산정상 2.4Km)로 나뉜다. 이곳에서 하산지점인 청도군청까지는 이정표가 가리키고 있는 대포산 방향의 능선을 타는 방법도 있지만, 낙대폭포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 남산의 명물인 낙대폭포를 빼먹지 않기 위해서이다. 낙대폭포 방향으로 내려가면 얼마 뒤에 어른 키로 두 길 정도 되는 거북바위가 앞을 가로막는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돌아 아래로 내려가면 갈림길(이정표 : 은왕봉 1Km/ 신둔사 1.4Km/ 봉수대 0.6Km/ 남산정상 2.8Km)를 만나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신둔사에서 올라오는 ‘C코스이다. 갈림길에서는 은왕봉 방향으로 진행한다. 울창한 참나무 숲 아래로 난 산길을 따라 얼마간 내려오면 'D사거리(이정표 : 낙대폭포 1.8Km/ 신둔사 0.5Km/ 남산 3.8Km)‘가 나온다. 봉수대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비록 이정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맞은편 능선을 따라 오르면 옛날 이서국(伊西國)의 왕이 은신했었다는 은왕봉이 나오는 것이다.

 

 

 

 

‘D사거리에서 오른편 낙대폭포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은 약간 가파르게 시작된다. 그러나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이다. 부드러운 흙길인데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D사거리에서 800m쯤 내려가면 폭포삼거리(이정표 : 낙대폭포 1Km/ 남산정상 4.6Km)가 나온다. 비록 이정표에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D사거리를 거치지 않고 곧장 ’C사거리로 올라가게 된다. ‘D사거리를 출발한지 18분쯤 되면 소류지(沼溜地)에 닿게 되고, 이어서 무덤이 있는 갈림길에서 오른편으로 급하게 방향을 튼 후 가파르게 내려서면 낙대폭포(落臺瀑布)이다. 참고로 위에서 말한 소류지는 낙대폭포로 흘려보내기 위한 물을 가두어 두는 저수지이다. 그리고 무덤이 있는 갈림길에서 왼편으로 진행할 경우에는 낙대폭포를 거치지 않고 곧장 낙대폭포 안내소앞으로 떨어지게 되니, 낙대폭포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길 찾기에 주의할 일이다.

 

 

 

 

낙대폭포(落臺瀑布) 앞에 내려서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우람하다는 것이다. 높이 30m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찾아온 때가 마침 갈수기(渴水期)임에도 불구하고 장관이다. 흘러내리는 물은 비록 많지 않지만 그 물줄기가 만들어내는 물보라가 일품인 것이다. ‘청도 8의 하나로 꼽힌 이유일 것이다. 이 폭포는 예부터 신경통에 효험이 있다고 하여 약수폭포로 불리기도 한단다. 그래서 여름철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웃통을 벗은 채로 폭포수를 맞는데, 그 풍경이 또한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폭포 앞에 탈의실(脫衣室)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면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다. 여름철이 되려면 아직은 이르지만 벌써부터 물을 맞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안돼욧!’ 날카로운 집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폭포 아래로 들어가려던 내 꿈은 가녀린 소망으로 끝나버리고 만다.

 

 

 

폭포에서 내려가는 길은 산길이라기보다는 도로에 가깝다. 바닥을 돌로 심어 놓은 멋진 길을 따라 6분쯤 걸어 내려오면 주차장을 겸한 폭포 안내소에 이르게 되고, 이어서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따라 7분쯤 더 내려오면 왼편에 일주문(一柱門) 하나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정자(亭子)가 둘, 그 곁에는 전각(殿閣)을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지도에 나와 있는 대응사(大應寺)이려니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대응사는 이곳에서 조금 더 내려가야 나오고, 이 곳은 전통 한옥의 맥을 잇기 위해 설립했다는 목수(木手) 양성 사관학교청도한옥학교이다. 그렇다면 지금 공사 중인 건물은 전각이 아니라 한옥(韓屋)인 모양이다.

 

 

 

 

산행날머리는 청도군청 뒤 주차장

한옥학교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조계종 사찰인 대응사그리고 이어서 천태종 사찰인 청화사를 지나면 낚시하기 딱 좋은 대동지가 나온다. 대동지를 벗어나면 청도 시가지로 접어들게 되고, 이어서 조금 후에는 저만치에 청도군청 건물이 나타난다. 한옥학교에서 20분쯤 걸리는 지점이다. 한옥학교 앞에서 도로를 따르지 않고 과수원을 무단(無斷)으로 통과하여 내려가면 5분 정도 단축되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과수원이고, 거기다가 복숭아 열매라도 매달려 있는 시기라면 결코 그리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오늘 산행에 소요된 시간은 총 4시간30, 막걸리를 마시느라 멈춘 시간을 제외하면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20분쯤 걸렸다.

 

 

 
다음검색
댓글
  • 14.05.22 11:19

    첫댓글 잘지내시지요? 주말에 공작산 산행 어떠세요?

  • 작성자 14.05.22 19:32

    이번 주말은 어머님 생일잔치가 있어서 시간이 없어...
    김포에서 1박2일로 치를 거 거든

  • 14.05.22 21:58

    @가을하늘 시간되실때요. 토욜 내려가서 일잔하고 일욜 산행 하는 것으로요 ㅎㅎ

  • 작성자 14.05.23 03:58

    @블루엔젤 그러자구, 대신 산은 서석에 있는 고양산과 아미산으로...
    미리 코스를 검색해 주시게나

  • 14.05.23 11:18

    @가을하늘 전 6월 첫째 둘째주 가능합니다. 언제가 좋은지 말씀해주세요... 고양산과 아미삼ㄴ은 제가 검색해 두겠습니다.

  • 작성자 14.05.23 17:19

    @블루엔젤 다음 주 주말, 그러니까 5월31일은 어떠신지?
    그 다름 두 주는 약속이 잡혀있어서 곤란하거든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