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장 17절 – 22절
우리는 무엇을 주인삼는다면 우리는 그것의 말을 복종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좋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라도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주인삼고 살고 있다면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그 주인삼은 것들의 말을 듣게 됩니다. 예를 들어 사울왕은 굉장히 경건하고 신앙심이 대단한 자였습니다. 더구나 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아닌 다른 것들을 주인삼고 있었습니다. 바로 사람들로부터 얻어지는 평가였습니다. 사무엘이 블레셋과 전투를 행할 때 먼저 하나님께 예배하고 전쟁을 하라고 하며 그 예배는 사울왕이 아닌 제사장인 사무엘이 주관해야 한다고 하며 이를 위해서 사무엘이 예배처소에 올 때까지 잠잠히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왕은 블레셋이 가까이 오는 다급함과 이스라엘백성들의 성화에 못이겨 스스로 제사장만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길을 버리고 자신이 제사장되는 자신 스스로의 길을 택하였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만이 주인되는 그런 자가 아니라 사람들의 평가가 주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다른 것을 주인삼은 사울왕이 모습을 말씀하시지만 사울왕은 깨닫지 못하고 결단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사울왕은 하나님이 버리시는 그런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다윗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왕들이 전쟁할 때 홀로 왕궁에 남았다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권력을 이용해 못된 짓을 했습니다. 그 때 다윗에게는 하나님만이 왕이신 것이 아니라 육체의 욕망이 왕으로 서려고 하였습니다. 그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은 나단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실재를 보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잠시 성적욕망이 왕노릇하였던 것을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언제라도 회개하는 다윗을 사랑하시고 그에게 다윗왕조의 축복을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주인삼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면 언제라도 그리고 기꺼이 내려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내려놓음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려놓으라고 하면 불쾌해 하고 화를 냅니다. 이런 자들은 더 많은 것들로 하여금 주인되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욕심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욕심이 죄를 낳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유대지경에서 한사람을 만나십니다. 그 사람은 영생을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영적인 사람이라고 보여집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결정적인 문제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바로 공로를 통해서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하라고 하시면 그 사람은 당장에 그것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한다고 해서 그가 영생얻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생이란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되어집니다. 그런데 그 젊은이는 무엇을 하는 즉 공로를 가지고서 영생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의 사고는 자신은 돈이 많아서 사서 얻으라고 하면 자신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부자라고 하는 자부심이 강한 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아서 부자로 산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그가 영생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당연히 영생을 얻었다고 여겼는데 그 젊은 이는 그런 유대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를 거부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가 주인삼고 있는 재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전에 공로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신앙관의 잘못을 말씀하십니다. 그 젊은이는 대단히 경건하고 의로운 자였습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를 말하면서 자부심을 갖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선하다고 말하는 즉 그 젊은이가 가장 자신있어 하는 선행의 문제를 말씀하시면서 오직 하나님아버지만이 선하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은 선하지 않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하다고 하는 그 젊은이의 자부심이 영생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음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에게 가장 자부심을 가지는 것을 물으십니다.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젊은이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그런 젊은이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율법을 주신 목적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의 자원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여 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자기나름대로 당시 정해진 규칙을 따라 지킨 것입니다. 그러닌까 자신의 자원으로 잘 지킬 수 있다고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젊은 이를 사랑스럽게 여기십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가 자기의 자원으로는 지킬 수 없는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젊은이는 자신의 자원의 한계를 깨닫고 인정하고 예수님께 은혜를 구하여서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은혜를 구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는 자신에게 명예를 가져다 주고 사람들로 인정받게 만든 그 재물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그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해도 여전히 재물을 주인삼는다면 그는 언제든지 재물을 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가 재물을 주인삼는 그 삶을 내려 놓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구하여 서는 것을 바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나바같은 부자도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젊은이는 그것만은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슬퍼하며 실망하고 낙심하여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 젊은이는 여전히 재물의 종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그것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돌이키지 못해서 예수님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잘못을 범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재물의 주인이 예수님이신 것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인도를 따라가는 자가 되었다면 그는 부자로서 영생을 얻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주인삼고 재물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자는 재물을 사랑하는 그 마음을 내려 놓지 못합니다.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쓴다면 부자라도 얼마든지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고 부자는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지 않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