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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반환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5월도 갔습니다. 본격적으로 여름으로의 진입입니다. 얼마나 더울까, 비는 얼마나 올까 지레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기후변화가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도 사계절로 단련된 우리 민족은 한결 수월하리라 생각합니다. 혹 열대지방에 눈이라도 내린다면 기절할 일이 아닐까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우리나라가 아열대지대로 들어가고 있다 하니 저 위에 있는 한대지방에 장마라도 생긴다면 역시 큰일 아니겠습니까. 뭐, 그런 일이야 발생할까 싶기도 하지만 남미의 브라질 홍수나 아프리카 케냐의 때 아닌 홍수를 보며 그야 열대지방의 일이니 있을 수 있다고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라 여겨집니다. 언제 어디서 뭔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우리가 지금 금사과를 먹게 되었으니 남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곳에 따라 역시 차이가 있구나 싶습니다. 그야 간단한 예를 들어도 가게 임대료가 다른데 아무리 같은 상품이라도 값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니 비싼 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싸게 사야 하고 값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점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거죠. 그렇다고 수십 년 정들었던 곳을 떠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속된 말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정 견디기 힘들면 옮기는 거죠. 죽기보다는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도 2,3년 전과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어쩌겠습니까? 그냥 사는 겁니다. 버티는 거죠. 살아있으니 희망을 가지고. ㅋㅋ
자, 6월입니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힘차게 출발합니다. 몸이 따라주기 조금 힘들어도 마음을 다해 일어서봅니다. 건강하세요. ^)^
2024년 6월 1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요한일서 2 : 15 - 16)
<그녀가 죽었다>
좀 낯선 단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관종’이라니, 무슨 말인가요? 찾아보니 ‘관심종자’(關心種子)의 준말입니다. SNS(Social Network Service)가 활발히 이용되기에 이런 일도 빈번하게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부러 특이한 행동을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을 이르는 말인데 옛날 같으면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받았지만 오늘날은 한번 인터넷이나 SNS에 올리면 순식간에 지역을 초월하여 퍼집니다. 비단 국내에서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관심 가진 사람들에게나 노출되는 일이겠지만 그만큼 접속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서로들 경쟁하듯 올립니다. 유튜브 같은 경우는 조회 수에 비례하여 돈까지 번다고 하니 직업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일상에 관심들을 많이 가집니다. 자기 하나의 삶을 살기도 바쁠 텐데 말입니다. 왜 그렇게 남의 삶에 열을 올리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관음증’이라는 질병도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성욕을 충족시키는 한 방법이면서 지나치게 되어 중독 곧 병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야 변태성 성욕만족을 이야기하지만 꼭 성적 욕구충족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그냥 남의 일에 유난히 신경 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대상이 이성인 경우에는 성적 충동이 포함되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여성보다는 남성 쪽에서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성은 시각적인 부분에 약하거든요. 성경에서조차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여자를 보고서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정죄합니다.
사람마다 다르기는 해도 남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자기 눈에 꽂히는 여성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이 돌아갑니다. 한번이라도 더 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사실 남녀가 만나서 인연을 맺고 인생을 나누는 경우, 이런 매력이 크게 작용을 합니다. 소위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춘향이와 이몽룡이나 로미오와 줄리엣도 비슷한 경우 아니겠습니까. 인연을 만들면 되는데 쉽지 않지요. 더구나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자기 욕구만 채우려는 의도로 자꾸 눈을 주면 그것은 세속적인 정욕이 되고 맙니다. 소위 도덕적인 자제가 요구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넘지 못하면 자칫 병으로 진전되거나 범죄로 발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부동산소개소를 운영하는 공인중개사 ‘구정태’는 좀 과한 관심을 가집니다. 관음증까지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조금 지나치게 됩니다. 마침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뒤를 좇아 그녀가 사는 집과 우편물에서 이름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인풀루언서임을 알게 됩니다. 한편 그녀의 올린 사진, 동영상과 실제 보인 모습을 보며 더욱 궁금함을 가집니다. 사실 우리는 인터넷을 통하여 그리고 특히 유튜브를 통해서 많은 영상을 보고 삽니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뿐만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여러 가지 정보들도 가지게 됩니다. 유튜브와 달리 SNS에서는 개인적 특성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소위 자신을 광고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관종이라고 하나봅니다.
어느 날 몰래 지켜보고 있는 바로 그녀가 사무실로 들어옵니다. 깜짝 놀라지요. 자기 살고 있는 집을 내놓으려 합니다. 그리고 자기 없는 동안에도 원하는 사람에게 집 구경을 시켜주라고 열쇠까지 맡기고 갑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 집 원할 때 아무 때고 들여다보라는 것이지요. 얼마나 신났을까요? 그 신나는 마음에 의심이나 의아한 마음을 가지지 못한듯합니다. 어떻게, 언제 보았다고 더구나 혼자 사는 이성인데 집의 열쇠를 맡깁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닌가요? 하지만 구정태는 그런 생각을 지닐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냥 신났으니까요. 그 자유를 누립니다. 얼마 후 그녀 곧 ‘한소라’의 집에 들어갑니다. 사실 침입이지요.
거실로 들어서다 크게 놀랍니다. 소파에 그녀가 피범벅이 되어 누워있습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도로 나옵니다. 그리고 112 신고를 하려 합니다. 그러나 멈칫합니다. 불법주거 침입하고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칫 그대로 살인누명까지 쓸 수 있는 일입니다. 뭐라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집 밖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신고를 합니다. 고객에게 연락을 하려는데 통 전화를 받지 않아 직원과 함께 들어갔다가 현장을 본 것처럼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사들과 다시 들어간 그 집에는 얼마 전에 보았던 시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집안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황당한 일이지요. 도대체 무슨 일이지? 헛것을 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형사는 일단 신고자부터 의심하는 것이 순서지요. 살인사건이 있는데 시신이 없다. 그런데 그녀는 친구에 의해서 실종신고가 되어 있습니다. 정태는 나름 소라의 행적과 주변 인물들을 추적합니다. 확인 차 다시 찾아갔을 때 괴한의 기습을 당합니다. 한 사람을 확인합니다. 신고를 하고 다시 갔을 때는 역시 죽어있습니다. 영락없이 범인이 됩니다. 도망칩니다. 그렇게 뒤죽박죽 사건이 진행됩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 아주 잘 요약해놓아서 인용합니다. ‘여인의 죽음은 미스터리, 진범이 남자를 범인으로 모는 것은 스릴러, 여인의 SNS를 뒤지며 진범을 찾아나가는 것은 추적의 장르’라고 말입니다. 등장하는 형사와 경찰은 ‘범죄도시’의 형사들과는 너무 차이가 납니다. 피식 웃음이 나오지요. 영화 ‘그녀가 죽었다’(Following)를 보았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바꿀 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장소에 관한 문제는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동할 수도 있고 있는 장소를 개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시간에 관한 한 인간은 무기력합니다. 흐르는 시간을 멈추게 할 수도 없고 지나간 시간을 바꿀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정해 놓으신 인생의 법칙 중에 하나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오늘은 어제 내가 뿌려놓은 씨입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뿌리는 것을 내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이 바뀌기를 원한다면 오늘 우리는 어제와 다른 씨를 뿌리면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우리가 논에 벼를 심었는데 쌀을 수확할 것이 당연하지만 수확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매년 여름이면 태풍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록을 경신하며 이 땅에 맹타를 가합니다. 어촌 농촌 도시까지 피해가 엄청나게 발생합니다. 특히 농작물 피해가 크지요. 병충해 때문에 고생하다가 남은 것을 태풍이 싹 쓸어 가버립니다. 그래서 수확을 제대로 못 하게 됩니다. 논이 물바다가 되니 수확해야 할 것이 미미해집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 법칙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거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치며 애를 쓴다 해도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아니하시면 거두는 것이 적거나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인공 강우를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하지만 아무튼 사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우리의 미래를 바꾸는 것입니다. 여태 보리 농사해서 보리를 수확했는데 보리가 아니라 팥을 얻고 싶다면 이제 팥을 심으면 됩니다. 오늘 우리가 다른 것을 심으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심는 대로 내일 거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비는 것입니다. 심는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복이 합하면 우리는 소망대로 많은 결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법칙은 인간 역사 속에 계속 이어져 오는 철칙입니다. 여태 그래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법칙을 준수한다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그리고 풍성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도 그냥 무조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무조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예컨대 아비가 자식에게 용돈을 주면서 잘 했느니 못 했느니 따지며 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러나 무조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마디로 내 자식이니까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자식이 예뻐서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는 짓이 사랑스럽잖아요. 그 사랑을 이기지 못 하여 주고 싶어집니다. 사랑하면 자꾸 주고 싶잖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 드리고 싶게 됩니다. 인색해지는 마음이 든다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은 다른 말로 아직 사랑이 깊어지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때로는 법으로, 의무로, 또 체면 때문에 눈치 보느라 드리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우리의 사랑의 비례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바라고 우리의 미래를 바꾸기를 원하며 풍성한 삶을 소망한다면 오늘 우리가 변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변한다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변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져서, 그 사랑에 못 이겨서 우리에게 복 주지 않으실래야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의 미래가 새로워지고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바꾸도록 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바꾸시기를 바랍니다.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고 행복하고 영화로운 우리의 미래가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미래가 바뀔 것인가 몇 가지 보겠습니다.
1. 회개하면 바뀝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니느웨 성으로 갑니다. 욘 3 : 3 - 4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이므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며 곧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이 때 어떤 반응이 일어납니까? 5 - 6절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그 뿐이 아닙니다. 왕이 조서를 내려서 온 백성과 하다못해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악에서 돌이키라 명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10절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아멘! 멸망으로 향하던 그들의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구원으로,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가능했습니까? 회개의 역사입니다.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 심판의 말씀을 듣고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회개하고 돌아섰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화를 복으로 바꾸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회개하면 내일 우리의 미래는 바뀝니다. 회개란 후회와 다릅니다. 후회는 지나간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일 뿐입니다. 회개는 마음과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여태 도적질을 했다면 이제는 도적질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 반대로 선행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내가 여태 잘못 살아왔구나 하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엡 4 : 28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아멘! 그렇습니다. 후회만 하고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수고의 열매로 선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그 때 비로소 회개의 열매가 하나님의 복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회개는 돌아서는 행동입니다. 후회만 하고 앉아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돌아서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행동이 없으면 회개가 아닙니다. 그냥 후회만 하다가 끝장이 납니다. 아비로부터 재산을 챙겨서 멀리 도시로 나가 허랑방탕하게 지내던 둘째 아들이 돈 떨어지고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아 이것이 아닌데 후회했습니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길에서 굶어 죽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아비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께 잘못을 빌기로 했습니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결단과 행동이 없었다면 그는 거지로 살든지 객사를 하든지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살 길을 찾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회개는 돌아서는 행동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서면 우리의 내일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풍성해지리라 믿습니다.
2. 사랑하고 용서하면 바뀝니다.
사랑과 용서는 동전의 앞과 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용서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용서를 한다면 사랑이 따라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가 아니라 억지인 것입니다.
먼저 용서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은 몇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말합니다. 마 18 : 21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우리가 다 잘 압니다. 그리고 다 경험이 있을 줄로 압니다. 잘못을 반복하면 용서가 쉽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잔소리라도 해주어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그냥 용서가 됩니까? 억지로 세 번까지는 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을 언급한 것입니다. 이 정도면 주님께 칭찬을 받겠지 하는 기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시죠? 2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는 할 말을 잃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어서 하나의 비유를 이야기해주십니다. 어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있었습니다. 갚을 길이 막막했습니다. 가족을 다 노예로 팔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 종이 용서를 구합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다 탕감해줍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이 있습니다. 그가 주인에게 탕감 받고 나오면서 그 동료를 붙들고는 빚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 동료가 용서를 구하지만 그는 용서하지 않고 감옥으로 보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이 분통이 터져 그 종을 붙잡아 감옥으로 보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들 사이의 사소한 죄는 서로 용서하며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종이 자기 동료를 용서하는 것은 바로 빚진 백 데나리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무엇입니까?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어려운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을 사서 노예로 팔렸습니다. 하루아침에 신분이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제 자유는 없습니다. 배고프다고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졸립다고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놀고 싶다고 나가서 놀 수가 있습니까? 이제 자기 몸은 자기 것이 아닙니다. 아직 청소년의 몸으로 이 엄청난 변화를 어떻게 견디었을까요? 문화와 풍습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곳으로 팔려 와서 해보지도 않던 육체노동을 하며 하루하루 지내야 했습니다. 누구 때문에요? 형들 때문에. 철천지원수가 되었습니다. 집 생각이 얼마나 간절하였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밤을 눈물로 보냈을까요? 그 때마다 얼마나 원망스러웠겠습니까? 누가요? 형들이. 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고 이제 전혀 다른 신분으로 형들을 만납니다.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제는 얼마든지 형들에게 복수해줄 수 있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나게 복수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동생을 마주한 형들은 불안했습니다. 그래도 한 가닥 의지했던 아비마저 죽고 나자 더 불안해졌습니다. 그 동안은 아비의 체면 때문에 복수를 미루어왔을지도 모르지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의 장례가 끝나고 나자 형들은 바로 요셉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용서를 빕니다.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울었습니다. 여태 불안 속에 살아온 형들이 불쌍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능히 할 수 있는 복수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습니다. 요셉의 마음에는 복수란 처음부터 없었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해준 말 속에 있습니다. 창 45 : 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손안에 있다고 믿으면 용서가 보다 쉽게 이루어집니다.
3. 우리가 하나님을 알면 바뀝니다.
우리 아버지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무슨 소원이 있으시겠느냐고요? 그래도 아버지시니 자식들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간절한 소원, 그것이 무엇인지 보겠습니다. 호 6 :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려 왔습니다. 옛날에는 제사 드리려 성전으로 갔지요. 그 제사가 여러 가지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제사가 바로 번제입니다. 365일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저녁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제사보다도 무엇을 원하신다고요?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한다면 예배드리기보다 먼저 하나님 알기를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은 기본적인 신앙행동입니다. 그런데 예배보다 무엇을 원하신다고요?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신답니다. 누가요? 하나님 자녀들이, 하나님 백성이. 그러니 하나님 생각하시기에는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안다, 모른다?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알면 어찌 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믿기는 합니까? 알고 믿습니까, 모르고 믿습니까? 알고 믿는다고 생각은 하겠지요. 그런데 알고 믿는다면 신앙의 세계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안다고 생각하며 믿는 것입니다. 만약 모르고 믿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저 믿는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복 준다기에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이 아니라 어려움이 생기면 ‘이게 아닌가벼,’하면서 떠나는 거죠. 그게 신앙입니까? 자기가 필요하면 믿고 필요 없으면 안 믿는 겁니다. 복 받을까 싶어서 믿는다고 했는데 복이 아니라 고통이 온다, 그러면 언제라도 떠나는 겁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장식입니다. 필요할 때 달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환경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계시니까요.
그러면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멀리 해외에 근무합니다. 집으로 전화하지요. 아들이 전화를 받습니다. ‘여보세요!’ 저쪽에서 알아듣고 대답합니다. 아무개야 내다. 아, 아빠! 알아듣습니까, 모릅니까? 알지요. 자기 아빠 음성을 대뜸 알아듣습니다. 아빠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소리만 듣고 아빠인 줄 압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들으니 이게 누구 말씀입니까? 아버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일진대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알아듣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요 1 :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알아들으면 우리는 하나님 자녀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알아야 하겠다, 몰라도 된다? 당연히 알아야 하겠지요.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호 4 :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1절에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그렇지요? 이스라엘 자손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 하나님 백성의 그 세상이 엉망이 됩니다. 요즘 기독교 세계가 그렇게 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기고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왜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알면 바뀝니다. 세상이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죄로 말미암아 떠나신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돌아오십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일꾼, 제사장으로 세우십니다. 그리고 세상을 바꿉니다. 사 61 : 6 - 7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이야말로 우리 하나님 백성이 꿈꾸는 복이 아닙니까? 그리고 마땅히 그리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현실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습니까? 욕이나 안 먹으면 천만다행 아닙니까?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지나온 시간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희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지나온 시간은 바꾸지 못해도 앞으로의 시간은 바꿀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다고요? 오늘 세 가지 배웠습니다. 첫째 회개하면 바뀝니다. 둘째 사랑하고 용서하면 바뀝니다. 셋째 하나님을 알면 바뀝니다.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제사보다 즉 예배보다 하나님을 알기 원하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이라 하셨습니다.(요 1 : 1)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다가오십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고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하는 일입니다. 돈 벌기도 바쁜데 무슨 성경을 배우냐고 말한다면 신앙을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냥 불신자로 사는 것이 더 편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그런 사람에게 당신을 알려주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경계의 말씀 한 마디 하고 정리하겠습니다. 눅 12 :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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