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departed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헛된 철학이 난무하는 콜로새의 신자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굳건한 믿음을 세우라고 권고한다. 또한 인간의 몸 안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충만해졌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인성도 충만해졌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아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뽑으시기 전에 산으로 가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언젠가 이러한 내용의 공익 광고를 들었습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태극기를 다는 국경일 하루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국가 대표 축구 경기를 보는 90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순국선열을 위해 묵념하는 1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독도에 관한 뉴스를 접하는 그 짧은 순간만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나라 사랑은 어떻습니까?” 이 광고를 들으며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지 반성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곧 위의 내용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성체를 모시는 그 짧은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가를 부르며 감동을 받는 순간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이 오늘도 성당 가느냐며 구박할 때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힘든 일이 생겨 주님께 기도해야 할 때에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도’(使徒, apostolus)라는 말은 ‘파견된 자’, ‘사자’(使者)라는 뜻입니다. 이 열두 사도를 보고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이 사도들에게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 또한 사도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예수님의 참모습을 가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 또는 국가 대표가 된다고들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만큼 그 나라의 특징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성당 울타리에서 나가는 순간 하느님 나라의 대표 선수, 곧 주님의 얼굴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하느님 나라의 대표 선수로서 어느 순간만이 아니라 온 삶으로 주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옳바른 선택
-이호진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뽑는 장면을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하시기 전에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 가운데 열둘을 뽑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혼자 결정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뜻을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칠 제자들이니 당신이 뽑으셔도 될 일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하느님 뜻을 따르고자 하십니다. 사실 가르치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삼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에 의지한 다음에야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힘에 의지합니다. 그리고 할 데까지 해보고 안 되면 다른 사람을 찾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점집이나 철학관을 찾기도 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그제야 하느님을 찾습니다. 도저히 안 되니까 하느님께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청하지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하느님은 이처럼 언제나 삼등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인 사람”(콜로 2,6)들입니다. 이는 그분 뜻까지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모든 일에 앞서 주님께 기도하며 그 뜻을 찾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그 결정은 틀림이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제가 사제서품을 받고서 처음으로 본당에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에 지도신부로 쫓아간 적이 있었지요. 아마 강원도 어떤 계곡 옆의 캠프장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순수한 아이들과 함께 즐겁고 또한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요. 딱 한 순간을 빼고 말입니다. 그 한 순간은 바로 물놀이 시간이었습니다.
물놀이를 하러 계곡의 넓은 공간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수해 보이는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스무 명 되는 아이들이 저를 붙잡고, 저를 물가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조금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이 순진한 아이들이니까 그냥 물속에 저를 집어 던지고 말겠지 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물속에 집어 던진 것은 물론 나오지 못하게 그래서 물을 잔뜩 먹을 수 있도록 스무 명의 아이들이 저를 위에서 누르는 것이 아니겠어요? 인정사정 보지 않고 말이지요(제게 무슨 원수 진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리고 스무 명의 아이들을 제치고 물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힘세다는 것을 알았지요. 한 두 명도 아니고 자그마치 스무 명의 다 큰 아이들을 뚫고서 물 밖으로 나왔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 저의 힘은 그렇게 세지 않습니다. 바로 살겠다는 의지가 20명의 중고등부 아이들을 뚫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살겠다는 절박한 의지는 불가능한 것도 가능한 것으로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렵고 힘들다는 우리의 삶에서도 이러한 의지는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런 의지는 바로 기도를 통해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 바치는 간절한 기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기도야 말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기도의 힘을 의심하시는 분들은 오늘 복음의 장면을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따라서 모르는 것이 없을 것이고, 고민하실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도하십니다. 그것도 잠깐의 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라, 밤을 새워가면서 고민 속에서 깊은 기도를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통해서만 하느님의 뜻을 알 수 있고, 보다 더 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 손만 대어도 병이 나을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하셨던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는 과연 어떠한가요? 잠깐의 시간을 이용한 화살기도 몇 회로 나의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앞서 살겠다는 의지가 순간적으로 힘센 나를 만들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 내어 기도합시다. 기도는 여유가 있을 때만 바치는 것이 아닙니다.
빠다킹신부
기도의 손
-김인한 신부-
신학생 때 주일학교 교사들과 술자리를 갖고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제 어머니께서 묵주를 두 손으로 꼭 쥐신 채 잠이 들어 계셨습니다. 저는 신학생이면서도 늦게까지 다른 일에 빠져 있었지만 어머니는 저를 위해서 계속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그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하는 손 끝에는 아들을 위한 마음이, 그리고 좋은 신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었습니다. 정안수 떠놓고 달밤에 손을 비비는 어머니들의 마음이 전해져왔습니다. 바로 기도하는 자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더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열두 제자를 뽑기 위해 기도하는 예수님의 손을 떠올려봅니다. 부족한 이들이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그들이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손 끝에는 하느님이 담겨 있고, 자신이 아끼는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 아침 제가 기도하는 손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지 바라봅니다. 혹 내가 정말 마음을 다해서 절절히 기도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처럼 정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바라는지, 아니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지 묻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간절한 마음이 배어 있는 우리네 삶이었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실 때
-송미영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괜찮아! 괜찮아!’는 한국 영화 ‘미녀는 괴로워’에서 청중이 제니에게 외치는 소리입니다. 진실과 사랑을 잃어버리고 괴로워하던 가수 제니가 자신이 ‘강한나’임을 청중에게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러고 나서 진정한 한나로 돌아온 그녀는 소중한 아버지와 친구와의 사랑을 회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 때 새 이름을 받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느님아버지의 아들딸이 되어 천상 유산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힘들 때가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부정적일수록 더욱 괴로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병든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지금도 날마다 우리의 ‘병든 자유’의 몸을 치유해 주시고 창조 때의 참모습을 회복시켜 구원의 예표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어린 시절, 퇴근한 아버지의 웃옷 주머니에서 복슬복슬 귀여운 강아지가 나왔을 때 우리 형제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그 귀여운 강아지가 우리 것이라니, 너무 행복해서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를 귀엽게 바라보시는 눈길을 느끼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는 귀여운 강아지의 이름을 정하는 데 날이 새는 줄도 몰랐습니다. 강아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고 나니 비로소 ‘우리 강아지’가 되었습니다. 몇천 번을 불러도 질리지 않을 그 예쁜 이름을 자꾸자꾸 부르며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실 때 그보다 더 달콤한 느낌은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며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십니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세요.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얼마나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부르시는지를, 그리고 우리가 그 소리에 잠겨 사랑스럽고 소중한 참모습을 발견하는 행복을 느끼기를 얼마나 바라시는지를.
고통의 자리가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로
-서영남 (인천 민들레 국숫집)-
예수께서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사도들을 뽑으십니다. 사도들은 하느님께서 뽑으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도라는 명칭은 파견된 자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해 파견된 사람인지는 예수님의 사명을 보면 확실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측은히 여기고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도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매달 민들레 국숫집이 쉬는 금요일에 두 번 청송을 다녀옵니다. 민들레 국숫집의 첫 손님이기도 한 대성씨는 일이 없는 날은 함께 청송을 가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함께 청송에 가서 청송 감호소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교무과 상담실에 둘러앉아 기도 나눔을 하고, 음식을 나눈 후에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 한 달 후면 출소하게 되는 용하 형제가 자기 소개를 했습니다. 나이가 마흔여섯이고, 고아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소년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고, 스무 살이 넘어서는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지금껏 30여년을 징역살이를 했고 출소해도 갈 곳도 없고, 또 교도소에서 손을 다쳐서 비록 오른 손가락이 전부 절단되기도 했지만 믿음 생활을 하는 요즘이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대성씨는 용하씨가 안쓰러운 모양입니다. 몇 번을 제게 용하씨 도와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두 주일 후에 청송 2교도소와 청송교도소 두 군데 자매 상담을 하는 날에 대성씨도 함께 청송으로 내려갔습니다. 오전에는 제가 청송 2교도소 자매 상담을 하는 데는 혼자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성씨는 청송 감호소의 용하 형제를 면회하기로 했습니다. 청송 감호소의 용하 형제를 면회하고 나온 대성씨는 면회시간 30분이 너무도 짧았다고 합니다. 용하 형제는 면회 왔다는 교도관의 말에 설마 자기를 면회 올 사람은 없고 아마 동명이인일 것이니 다시 확인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제 두 주일 후면 출소할 텐데 갈 곳도 없고 살아갈 길도 막막해서 그저 하느님께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며 대성씨를 어찌나 반갑게 맞이해 주는지 가슴이 찡했다고 합니다. 용하 형제에게 민들레 국숫집 2층에서 함께 살자고 말했답니다. 30여년을 징역살이하면서 아무도 찾아와 주지 않았던 용하 형제에게는 생전 처음 자기를 찾아온 대성씨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고통의 자리가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자리로 변했습니다.
조건 없는 부르심
-최혜영 수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들을 뽑으실 때도 산에 가셔서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느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열두 사도는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자 공동체, 나아가 그리스도 교회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사도’라는 말을 생전의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예수님의 직제자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갈릴래아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리였던 마태오와 열혈당원인 시몬,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한 제자단에 속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조건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종종 누구누구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교회에 가지 않는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예수님의 열두 제자단을 생각한다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선택이 아닙니다. 나를 불러주신 예수님 안에서 이웃의 약점이나 잘못을 받아줄 수 있는 관대함이 커지기를 기원해봅니다.
열세번째 사도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김경희 수녀(한국순교복자수녀회)-
언젠가 ‘열세번째 사도’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마음이 약하고 성격이 급했으며 용기가 없는 충실치 못한 제자였고, 야고보와 요한은 야심이 있었으며, 필립보는 맹목적이었다고 합니다. 필립보는 지성과 통찰력이 부족하여 자신이 직접 빠져보지 않고서는 영적 진리를 알아볼 수 없었고, 유다는 신뢰할 수 없었으며 하느님 나라보다 돈에 더 관심이 있었다고 합니다. 마태오는 사기꾼인데다 과거가 깨끗하지 않은 사람이었고, 토마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못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안드레아는 냉소적이고, 열혈당원 시몬은 싸움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었고, 사회 정의를 부르짖기는 했지만 감성이 섬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르톨로메오와 작은 야고보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오와 작은 야고보는 재능이 없었고, 세상에 기여할 바가 없었습니다. 수줍고 내성적이었습니다. 카리스마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순수한 동기, 지성과 통찰력, 성실함, 깨끗한 과거,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 성숙함, 섬세한 감성, 옳은 것을 선포하는 용기, 기쁨과 낙천성, 특별한 재능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을 부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꺼이 따르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저를 부르신 23년 전을 기억해 봅니다. 수녀원에 입회할 때 제 모습은 너무나 여리고 미숙했으며 아무런 재능도 없었고 세상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주님께서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한 발자국씩 걸음마부터 가르치셨으며 섬세한 사랑으로 주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저에게 참 기쁨은 ‘제가 주님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앎이 ‘영원한 생명’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께 대한 앎의 밀도가 점점 깊어지면서 이제는 시편 138편으로 주님께 고백합니다. ‘제 마음 다하여 당신을 찬송합니다. 신들 앞에서 당신께 찬미 노래 부릅니다.’ 아멘.
예수님이 초대 해 주신 삶
-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
촌사람 서울 구경 간다는 말을 기억하십니까? 시골에 살면서 텔레비전이나 다른 대중 매체를 통해서 서울을 수없이 보고 또 보고 사는 우리들에게는 낯설 기만한 말입니다. 그래도 자기 눈으로 확인 해 보고 또 몸으로 부딪쳐 보고 싶은 사람은 서울 구경 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시골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도시 서울처럼 구경꺼리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가 오시기를 고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꼭 만나보고 확인 해 봐야 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예수님 주위에 몰려든 모든 사람들이 다 구세주에 대한 믿음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호기심으로 온 사람도 있었겠지만, 자기에게 돌아오는 이익 때문에 온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한 어머니는 자기 아들 두 사람이 사도가 되자 예수님께 청하였습니다. 한 아들은 오른편에 또 한 아들은 왼편에 자리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요. 병을 고치는 일도 그 하나였습니다.
그 동기가 어떠했든 지간에 수고를 마다 않고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 주위를 맴돈 사람만이, 병을 고치기도 하고, 기적의 빵도 먹을 수 있었고, 또 좋은 술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들 중에서 사도들을 선발하셨습니다. 또 신중하게 먼저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나서 그들을 뽑으셨습니다. 여기에는 시몬 베드로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의 핵심 인물이 되었고, 그 후계자, 로마의 주교이신 교황님은, 오늘날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계십니다. 사도 중에는 예수님을 배반할 유다스도 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할 사명,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과 말씀을 세상 끝까지 전하는 일입니다. 서울에 가보니 정말 볼 것도 많아 꼭 한번 가볼만 하다고 이웃에게 말하는 시골 사람의 경우와 같습니다. 서울이 구경거리가 못 된다면 헛수고 했다고 후회하면서 다른 사람도 못 가게 말릴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 구경을 권한다면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한 번 만나보고 또 알게된 사람,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이들에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 구경할 수 있도록 전교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따를 만한 점이 무엇입니까? 왜 대부분의 사도들을 끝까지 또 이 세상 하나뿐이고 그렇게 귀중한 자신의 생명을 내 놓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다 하였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믿었고 또 예수님을 찾아가서 보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기쁜 소식이고, 예수님의 가르치심 뿐 아니라, 하신 모든 말씀이나 행동이 다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카 복음 6장 12-19절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이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시고 선발하신 사도들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평지에 있던 많은 제자들입니다. 그 외 각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이들은 병을 고치려고 온 사람, 악령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입니다. 평화방송을 아껴주시는 청취자 여러분, 우리는 이 세 그룹의 사람들 중에 어느 그룹에 속합니까? 물론 12사도는 아닙니다. 우리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 또는 더러운 악령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 나선 사람들입니까? 병이 우리의 죄악이고, 더러운 악령이, 엉뚱한 믿음을 가진 잘못된 신앙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도움으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가진 병은 우리의 생명이 이 세상으로 끝이 나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삶은 없다는 생각과, 그에 따른 삶일 것입니다. 이런 삶에는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와 누구든지 다 낫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은혜와 갖가지 성사를 통한 은총이 주어졌고, 특히 매일 미사 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기적의 힘을 체험하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 구경 못하면 후회되겠지요.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놓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나 혼자만 차지 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좋은 습관 들이기
-서울대교구 조성풍 신부-
인생살이의 스승이신 예수께서는 큰일에 앞서 기도하셨습니다. 오늘도 당신의 협조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밤을 지새워 기도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어떤 결정을 앞두거나 또는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단순히 그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그 일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의 뜻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런 체험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맛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기도 체험을 통해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도 진한 기도의 체험이 있습니다. 부제품을 앞두고 ‘30일 피정’ 때의 기도 여정입니다. 기도는 나의 삶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하시는 사랑이신 하느님 체험입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꾸준히 기도하려고 합니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습관을, 기도 안에서 결정하고 힘을 얻는 좋은 습관을 들였으면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지’ 기도 중에 여쭈어보았으면 합니다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양승국신부-
<이토록 저를 소중히 여기시는 주님>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몇 번 시도를 해보았지만, 늘 실패로 끝났습니다. 밤을 꼬박 샌다는 것, 그것도 기도하며 지샌다는 것,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철야기도하시는 분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기간 동안 가끔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상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저녁 무렵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가며 기도하십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께서는 아주 자주, 시도 때도 없이 철야기도를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은 당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절대 절명의 순간, 삶의 분수령이 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오늘 복음에서처럼 당신의 제자들을 뽑기 위해서,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제자 선발에 큰 중요성을 두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뽑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우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충만한 감사의 정이 느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마도 저를 위해서도 열렬히 기도해주실 것이라는 생각, 그래서 내 성소, 비록 너무나 부족하고 부당해서 정말 부끄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토록 철저하게도 부족하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소중히 여겨주시니 다시금 힘을 냅니다. 내가 이토록 나약하지만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고 걱정해주시니 모든 것 그분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막 본격적인 수도생활을 시작하는 후배들과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다 따라가는 그 휘황찬란한 길, ‘때깔 나는’ 길을 뒤로 하고 너무나 가파른 언덕길, 어찌 보면 너무나 팍팍해서 짜증나고 숨 막히는 길을 선택하는 우리 어린 수도자들, 너무나 사랑스럽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하느님의 현존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마음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어린 수도자들입니다. 저보다 세상의 때가 훨씬 덜 묻은 형제들입니다. 마치 산속 깊숙이 몰래 피어있는 들꽃 한 송이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형제들입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마다 우리 가운데 활발히 활동하시는 성령의 움직임을 확인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 우리 모든 수행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의 신앙여정에 동행해주시기를, 그들을 축복해주시기를, 그들의 인생길을 환히 밝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창열 신부(영성의 집 관장)-
예수님은 바쁘신 일정 중에서도 기도생활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기도하는 시간을 통해서 성부 하느님과 일치하였고, 기도함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이행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었다. 특히 예수님은 밤을 새워 가며 기도하기도 하셨다. 공생활 시작 전 광야에서 40주야를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고, 수난 전에 게세마니 동산에서도 밤새 기도하셨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제자들 가운데서 사도들을 선발하실 목적으로 철야기도 하기도 하셨다. 이처럼 중대한 일을 앞두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중대한 결정을 하거나 큰일에 앞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밤새 기도하신 후,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마르코 복음 3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고, ……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려고” 선발하셨다. 또 사도들을 뽑은 목적은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13-15)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 주셨다. 그렇듯이, 사도들을 선발한 목적 또한 그들을 당신 곁에 있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나는 이제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당신의 친구처럼 대하시고, 그들과 우의를 나누시고자 하신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도움과 협조, 우애를 나누시며 생활하셨다. 라자로의 죽음을 슬퍼하셨고, 많은 부인네들이 그분을 도왔다. 그것이 예수님께는 행복이기도 하셨다. 하느님께는 부족함이 없고 하느님은 완전한 분이시지만, 우리와의 친밀한 사귐과 우애를 나누고자 하신다.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가? 이런 사실로 보아, 하느님은 나로 인해서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발한 중요한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선포하게 하고, 마귀를 쫓는 구마의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의 일차적인 사명이었고, 사도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세례 받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지상 명령에 따라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할 중대한 의무를 갖는다. 또한 사도들에게 마귀를 쫓는 능력을 주신 것은 우리를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하고 하느님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서부터 우리의 신앙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함이다. 예수님도 공생활을 통해서 이 은사적인 구마 사목을 통해서 악의 세력에 적극 대처하시고, 그 영향으로 질병에 구속되어 있던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그리하여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셨다.
사도들이 받은 이 두 가지 사명은, 오늘 우리 교회가 세상 가운데 건설해야 할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계속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다. 복음 선포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는 서로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세상에 보내어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려고 파견하신 것처럼, 매 미사 때마다 파견되는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바로 그러한 사명을 이행하기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뜻이고, 곧 파견하시는 목적인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다
-이회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당신 곁에 부르신 다음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서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들과 함께 평지에 서신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당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군중을 이루었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과 띠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이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질병을 고쳐줄 의사로서 만나게 될 희망으로서의 예수님,
더러운 영을 쫒아내 줄 희망으로서의 예수님,
가까이 다가가 손이라 한 번 대어 보면 은총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루가 복음 사가에게 있어서 이 희망의 첫 번째 자리는
병의 치유나 악령을 쫒아내는 일 혹은 은총을 얻는 일이 아닌 “말씀을 듣는 것”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앙을 사는 이유를
어떤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성당에 다니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돈을 더 많이 버는 것, 일이 잘 풀려 만사(萬事)가 잘되는 것,
가족이 아무런 탈도 나지 않고 건강하게 잘 사는 것,
혹은 은총을 많이 받아 원하는 데로 복을 많이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바로 신앙을 사는 이유라고 받아들이곤 합니다.
그런데 루가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군중들에게 있어 그들의 “희망사항”을 열거하면서
그 첫 자리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놓고 있습니다.
물론 군중의 희망사항이 말씀을 듣는 것 하나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기다리며 다른 것을 또한 바라고 있었고,
예수님과 루가 복음 사가 역시 그것을 외면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인식하기를 요구합니다.
바로 우리가 신앙을 사는 이유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에 있어서
앞뒤가 바뀌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분이 그들에게 “희망”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희망은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삶의 이유와 힘을 주는 희망의 힘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신 이유는
그들의 병을 낳게 해 주고, 마귀를 쫒아내 주고, 복을 주어서 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살아갈 이유와 힘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병을 낳게 해 건강하게 만드는 것, 고민을 풀어주고 기도를 들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인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삶의 이유”와 “살아나갈 힘”을 말씀을 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루가는 우리에게 우리가 사는 “희망의 이유”와 “희망의 힘”의 첫 자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한편,
그것은 2000년 전 평지에서 예수님을 기다리던 군중에게나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나 마찬가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늘 누군가 제게 왜 사냐고 묻는다면 당신 때문이라 말하겠습니다. 아멘.”
밤 새워 기도하신 예수님의 선택
-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골로 2,6-15 (주님께서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려 주시고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해 주셨습니다.)
복 음 : 루가 6,12-19 (예수께서는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다. 그리고 제자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1년 계획을 세우려면 먼저 씨앗을 뿌리고, 100년 계획을 세우려면 지도자를 양성하라는 중국 속담이 있지요. 무엇보다도 사람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나라나 기업이 잘 되려면 좋은 사람들이 자리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회사가 크고 돈이 많아도 경영자가 한번 잘못하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나 회사의 리더들은 좋은 인재를 찾으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이것은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인 축구를 대표하는 레알 마드리드 팀에는 지네딘 지단이라는 프랑스인 축구 선수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 선수의 1년 연봉은 무려 800억 원이 넘는다고 합니다. 11명이 한 팀이 되는 축구단에서 단 한 사람의 연봉이 다른 10명의 선수 몫을 합친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 선수 한 사람을 쓰느니 10명의 다른 선수들을 데려오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한 사람이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많은 돈을 주고 그 선수를 기용하고 있는 겁니다.
능력 있는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스포츠뿐만 아니라 신앙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몇 십만 명 이상의 신도를 자랑하는 개신교 교회가 있는가 하면 단 몇 십 명의 신도만으로 힘에 부쳐서 망해 나가는 개척 교회도 수없이 많습니다. 역시 어떤 목사님이냐에 따라 그렇게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사람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천주교회입니다. 어느 한 개인의 능력이 드러나기보다는 조직으로 운영이 되는 천주교회는 거룩하고, 공번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하나 된 교회라는 천주교회의 특성을 2000년의 역사 안에 증거 해 왔습니다. 신부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2년이나 5년이 지나면 바뀌게 됩니다. 한 사람이 지나치게 오래 능력을 떨치면 이단으로 치우치기가 쉽다는 것을 과거의 역사 안에서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나름대로 끊임없이 조직을 움직이지만 우리 교회 안에서도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당 신부가 어떤 마음으로 일 하느냐에 따라 복음적으로 잘 성숙되어 가는 본당이 있는가 하면 바람 잘 날 없이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는 본당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목자의 흐름에 영향을 받는 본당의 상황과 같은 모습을 반 구역과 단체들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반장이나 구역장 또는 단체장이나 사목위원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그 공동체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이지요. 사목자의 위치에 있으면 이런 모습이 한 눈에 다 들어옵니다.
얼른 보기에도 활성화가 잘 되고 깊은 친교가 맺어지는 반이 있는가 하면 무엇을 하자고 제안을 해도 시큰둥하고 잘 모여지지 않는 반이 있습니다. 리더가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사람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열 두 사람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도들을 뽑으시는 예수님의 스타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뽑아 쓰는 방법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시지요. 세상 사람들은 인재를 뽑을 때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실력이 있으며 사람을 통솔하는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를 우선으로 살펴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무렵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 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3)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밤새도록 기도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재를 뽑는 평가 기준과 예수님께서 사도를 뽑으신 기준이 전혀 달랐다는 것은 뽑힌 사도들의 명단을 보면 여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열두 사도 중에는 학벌이 좋은 사람도 없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도 없으며, 성격이 유순한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다혈질인 베드로에,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하는 혁명 당원 시몬이 있는가하면 사람들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세리 마태오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 중에는 후에 스승을 배반하게 될 이스가리옷 사람 유다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예수님의 기준은 이렇게 달랐습니다.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돈 많은 사람도, 박식한 사람도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 대한 열정이 있는 사람만을 택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즉 복음적으로 열심하고 최선을 다하며 하느님께 그 결과를 맡기는 겸손한 이들을 사도로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가을이 되면 본당의 사목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됩니다. 새로운 사목위원들과 단체장, 또 구역장들을 뽑아야 하는 시점이 된 것이지요. 사목자로서 고민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뽑힌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많은 생각과 고민이 저를 더욱 더 기도하게 만듭니다.
돈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기업을 하거나 세상의 흐름에 맞춰 가는 곳이 아니지요. 그렇다고 세상의 지식을 많이 가진 박식한 사람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하느님께 충실하고 겸손하며 내가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느님께 맡길 줄 아는 사람들이 교회의 일꾼으로 뽑힐 때 공동체는 더욱 복음화가 되고 참으로 성숙해 질 것입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나와 가족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가며 노력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하늘의 한 조각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이기적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혀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작은 도구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할수록 하느님께서 부족한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을 사목자인 저는 경험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삼으셨듯이 오늘날 하느님의 일꾼으로 뽑힌다는 것은 역시 보이는 본당 신부를 통해서입니다. 본당 신부의 사목에 협조자로서 불림을 받는다는 것을 본당 신부를 통해서 하느님의 손길이 움직인 것으로 믿고 감사하며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좋은 공동체를 만들고 하느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바탕인 것입니다.
한편 신자들은 뽑힌 사람들이 복음적인 열정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숙되지 않은 공동체일수록 뽑힌 일꾼들의 흠을 잡고 입방아를 찧는 일에 열을 올리는 것을 봅니다.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지요. 자신들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면서 어려운 결단을 내려서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일해 보려고 하는 사람의 발목을 잡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밤 새워 기도하시고 마침내 열두 사도를 뽑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뽑힌다는 것은 말할 수 없이 큰 은총입니다. 뽑힌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일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쁜 마음으로 “예!”하고 응답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참된 봉사자가 많이 나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제자(弟子)와 사도(使徒)의 의미
-박상대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장엄한 과정을 거쳐 12제자를 선발하신 사실과 그분의 계속된 치유행적을 보도하는 내용이다.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12제자를 엄선하신 사실은 공관복음서 모두에 실려 있다. 우선 마르코복음(3,13-19)은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당신이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불러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고 하면서, 이는 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태오복음은 파견설교(10장)의 범주 안에서 12제자의 선발(10,1-4)을 다루고 있는데, 예수께서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다음, 그들에게 엄격한 여장규칙과 함께 악령제어와 질병치유의 능력을 주어 파견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루가는 12제자의 선발목적이나, 사도로 선발된 제자들의 능력이나 임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선발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12제자의 선발을 위해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는 것이다.
공관복음서가 보도하는 내용을 모두 종합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하루 일과를 마치실 즈음,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가) 이는 당신을 따르고 있는 많은 제자들 가운데 특별히 열 두 제자를 선발하여 사도로 삼아 당신 곁에 두시기 위함이었다.(마르코) 날이 밝자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좇아 열둘을 선발하시어(루가),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악령을 제어하고 병자를 치유하는 능력과 임무를 주어 세상에 파견하셨다(마태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선발하는 장소로 산을 택하셨다. 산은 예로부터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하는 장소로서 여기서 소명과 결단이 이루어진다.(출애 3,1; 4,27; 18,5; 24,13; 1열왕 19,8; 에제 28,14) 산은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기도하는 장소이며, 하느님의 권위와 계시가 드러나는 장소이다.(마르 9,2; 마태 17,1; 루가 9,28) 예수께서는 여기서 밤을 새워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이 대목 외에 어느 곳에서도 예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적은 없으시다. 12제자를 선발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하고 특별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12제자들은 이렇게 산에서 사도로 뽑혔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보듯이 예수님과 사도들이 산에서 내려와 평지에 이르러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진리의 말씀에 굶주리고, 병고에 허덕이며, 악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을 예수께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고쳐 주셨다.
루가는 이렇게 산(山)과 평지(平地)를 구분하고 있다. 산은 기도와 소명의 장소요, 평지는 선포와 활동의 장소라는 것이다. 이것이 루가복음사가가 오늘 복음에서 산과 평지, 즉 소명과 활동을 함께 묶어둔 이유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셨고, 평지에서 치유의 활동을 계속하셨다.
예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 중에 12제자가 뽑혀 사도가 되었다면 12사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스승이신 예수의 모범을 따를 일이다. 바로 예수님처럼 산에서 기도하고 평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산과 평지를 분명히 구분되나 서로 뗄 수는 없듯이, 제자와 사도 또한 분명히 구분되나 뗄 수 없는 것이다.
통상 ‘제자(弟子)’란 역사적 예수의 공생활 중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요, ‘사도(使徒)’란 부활하신 예수로부터 복음선포의 지상사명을 받은 이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산에서는 제자이나 평지에서는 사도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신자란 예수님 앞에서는 제자로 불림을 받았고, 세상 앞에서는 사도로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충실한 제자로, 세상을 향해서는 용감한 사도로 말이다. 예수 없는 제자 없고, 세상없는 사도 없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