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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결과를 둘로 나누면 성공 아니면 실패이다. 사람은 성공하기를 바라지 실패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사람은 실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가 없다. 바라지 않지만 인생에서 실패는 사람 주위를 늘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다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격으로 사람을 놀라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만을 꿈꾼다면 어떻게 될까? 하나하나의 성공이 기쁨을 주겠지만 성공의 노예가 되면 그 의미마저 제대로 즐기지 못하게 된다.
실패는 성공만큼이나 사람을 단단하게 키운다. 실패는 다음에 또 할 수 있는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된다. 결국 ‘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조금씩 더 다가가서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실패는 겪으면 쓰라리고 아프지만 전염병인양 화들짝 놀라며 멀리 달아날 필요는 없는 것이다.
- 389번째 원문
• 宿 : 숙(宿)은 묵다, 머무르다의 뜻이다. 숙은 숙소(宿所), 하숙생(下宿生)의 말로 널리 쓰인다.
• 晨 : 신(晨)은 동이 트기 전의 새벽, 이른 아침을 가리킨다.
• 奚 : 해(奚)는 어찌, 어디의 의문사이다.
• 自 : 자(自)는 스스로, 몸소의 뜻으로 많이 쓰이지만 여기서는 ~로부터의 뜻이다.
• 爲 : 위(爲)는 공자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가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을 나타낸다.
• 與 : 여(與)는 주다, 더불어의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 뜻은 없고 어감을 전달한다. 앞의 기(其)와 뒤의 여(與)는 공자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꼭 하려고 한다는 어감을 나타낸다.
오늘날 우리는 산업화의 시대를 거쳐 정보화와 세계화의 새로운 파고를 맞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지혜를 찾기 위해 인문학 열풍을 쐬고 있다. 인문학이 기존의 사고를 성찰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길러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종족 중심의 사회에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가 등장하는 시대를 살았다. 이로 인해 춘추시대의 개별 국가들은 형제·자매의 나라라는 공통 의식을 저버리고 살아남기 위해 약육강식의 경쟁을 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자의 고민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첫째, 중원 지역의 문화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때 개별 국가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침략과 약탈을 통제하는 ‘경찰 국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천자(天子)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 조국 노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현실의 힘을 바탕으로 군주의 권력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유력한 세 가문(三家, 계손씨 · 숙손씨 · 맹손씨)의 전횡을 해결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둘 중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천자의 나라가 국제 질서를 유지하는 경찰국가의 노릇을 하려면, 당시 사람들이 힘의 우열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공통으로 지켜야 할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 오늘날 미국과 국제 연합이 민주주의, 인권, 정의를 명분으로 개별 국가의 정쟁에 개입하고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이 보편 가치로 간주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 가치가 뻔히 훼손되면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모른 채 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춘추시대의 경우 천자의 나라가 경찰국가의 노릇을 하려면 일방적으로 천자의 지위만을 지키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서로 지켜야 할 평화, 정의(도리), 호혜 등의 가치를 집행해야 한다. 하지만 천자 는 이름만 ‘하늘(하느님)의 아들’일 뿐 하늘을 대신해서 지상의 세계를 규제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를 바랄 뿐 그럴 만한 기반이 없었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當爲性)은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현실성(現實性)이 없었다.
공자의 조국 노나라 사정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노나라가 명색이 제후의 나라이므로 왕이 국정의 중심을 잡아야 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제후의 지배를 받아야 할 유력 가문들, 예컨대 계손씨․숙손씨․맹손씨가 노나라의 군권과 토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제후는 토지의 1/4만을 관리하고 군권은 행사조차 할 수 없었다. 제후의 지배를 받아야 할 대부(大夫)가 오히려 제후를 지배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제도와 규범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당연히 지배할 자가 지배하고 지배받을 자가 지배를 받는 상황으로 돌아가야 한다. 비정상의 정상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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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나라 제후가 얼마나 무기력한 존재였던가를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이웃 제(齊)나라의 진항(陳恒)이 자기 나라의 간공(簡公)을 살해했다. 살인 자체가 범죄인 데다가 신하가 한 나라의 왕을 살해했으니 가만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공자는 이 소식을 듣고서 목욕재계를 하고 노나라 애공(哀公)을 찾아갔다.([논어], ‘헌문’편 22장)
공자 : “제나라 진항이 주군을 살해했습니다. 토벌에 나서야 합니다.”
애공 : “세 대부의 집안을 찾아서 이야기하시오.”
애공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공자는 비정상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정명(正名)’의 기치를 높이 내걸었다. 사람은 ‘어버이’, ‘자식’ 등의 혈연적 호칭, ‘과장’, ‘사장’, ‘장관’, ‘국회의원’, ‘대통령’ 등의 직무상 호칭 등의 사회적 호칭으로 불린다. 각각의 호칭은 그 호칭에 해당되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또 그 호칭에 어울리는 언행과 역할을 제대로 하리라고 기대하는 규범을 가리키기도 한다.
예컨대 ‘자식’은 현실의 부모가 낳은 자식을 가리키기도 하고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람의 자식이라면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제 몇 대 대통령을 가리키기도 하고 헌법에서 대통령이 수행하도록 규정된 직무를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한 사람의 대통령이라면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한다.” 공자는 정명을 통해 현실의 사람과 그 사람이 해야 할 규정 사이의 불일치를 메워야 한다는 점을 요구했던 것이다.
훗날 맹자는 정명에 따라 행동하기를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요구를 하더라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를 고민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정몽주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활용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공자는 자신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치열한 사고를 했던 것이다.
공자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하려고 하면 [논어]를 읽어보는 것이 가장 좋다. 사람들은 각자 공자에 대해 나름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성인(聖人) 공자’이다. 공자가 동아시아 문명의 기틀을 다졌을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과 다른 인격의 높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대에 들어 공자를 초시대적인 영웅이 아니라 ‘봉건시대의 사상가’로 규정하려는 이미지이다. 특히 1949년 신중국이 수립된 뒤에 공자를 지나간 역사의 인물로 한정하려는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서 이런 이미지가 많이 퍼지게 되었다. 최근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공자를 ‘중화주의(中華主義)’의 상징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중국이 자국의 문화적 위상을 강조하기 위해 공자를 중국적 가치의 대표자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공자에 대한 다양한 이미지는 나름대로 역사적 연원과 시대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론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맞다 틀렸다는 관점으로 단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특정한 시공간에서 태어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꿈꾸었지만 숱한 실패를 맛본 ‘인간 공자’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렵다. ‘성인 공자’의 이미지에 갇히면 공자가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고민 끝에 내놓은 사상이 현실에서 거부당하는 맥락을 설득할 수 없다.
‘봉건 사상가 공자’의 이미지에 갇히면 [논어]는 고고학의 오래된 지층과 같다. 과거의 모습을 알 수는 있지만 오늘의 삶과 연결시킬 수 있는 통로가 없어진다. 이러한 관점은 [논어]에서 오늘의 문제를 푸는 비법이 아니라 생각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인문학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한다.
공자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후대의 관점에서 공자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자의 생애를 따라가면서 그가 했던 선택과 주위 사람들의 평가를 들어보는 쪽이 낫다. 어떤 이미지로 포장된 공자가 아니라 아직 요리가 되지 않는 날것 상태의 공자가 사실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논어]와 후대의 기록을 보면 공자를 성인의 이미지로 덧씌우려는 노력도 보이지만 현실의 문제로 고민하는 인간 공자의 담백한 모습을 그대로 전하기도 한다.
[논어]를 읽다보면 ‘미자(微子)’라는 제목이 붙은 제18편을 만난다. 이 편은 나머지 편들보다 성인으로 포장되기 이전 날것 상태의 공자를 만날 수 있다. 당시 사상가들은 공자처럼 세상의 위기를 구할 방략을 가슴에 품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견을 펼치는 유세객(遊說客)과 현실 참여를 위험한 일로 보고 산림에 은거하며 자족한 생활을 살아가는 은둔자 그룹으로 나뉘었다. 제18편을 읽다보면 공자와 은둔자가 우연히 만나 서로 엇갈리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몇몇 나온다.
장저(長沮)와 걸닉(桀溺)은 산림에서 함께 농사를 지으며 은거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공자를 만난 뒤 자신들을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피세지사, 辟世之士)’으로 부르고, 공자를 ‘사람을 가리며 만나는 사람’(피인지사, 辟人之士)으로 불렀다. 공자가 세상을 구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러 다니지만 실상 뜻에 맞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말이다.
하조장인(荷蓧丈人)은 “사지를 부지런히 놀리지도 않고 오곡이 무엇인지 구분할 줄도 모른다(사체불근, 오곡불분, 四體不勤, 五穀不分)”라며 공자를 노골적으로 비꼰다. 공자가 세상을 구하려고 하면서 먹고 사는 일에 종사하지도 않고 곡식조차 분간할 줄 모른다고 험담하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지 않지만 공자는 심지어 ‘상갓집의 개(상가지구喪家之狗)’를 닮았다는 말까지 듣는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일행과 헤어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누군가가 공자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한 말이다.
공자와 은둔자는 서로 정치적 지향만이 아니라 삶의 의미가 달랐다. 은둔자의 눈을 통해 공자를 바라보며 공자는 위인과 성인보다는 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하나의 길을 찾아가는 사상가의 모습이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울러 은둔자의 말은 공자를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 하면 충분하지 않느냐!”라고 위로하는 측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처럼 반대자들도 공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태도를 드러낸다면 점에서 보면, 공자의 고생은 헛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일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공자 무덤. 원나라 성종이 1307년에 내린 시호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사진을 비교해보면 마지막 왕(王) 자가 간(干) 자처럼 보이게 쓰여 있다. 훗날 천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왕이 된 공자’를 못마땅하게 여길까봐 후손들이 우려해서 그렇게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논어]와 후대에서 공자를 평가하는 숱한 찬사와 비판의 말이 많다. 그 중에서 ‘인간 공자’ ‘역사적 인물로서 공자’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을 꼽으라면 “불가능한 줄 알고서 무엇이라도 하려고 한 사람”(知其不可而爲者)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이 말했듯이 날 때부터 천재가 아니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으면 끊임없이 묻고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호학(好學)’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태어날 수 있었다. 그는 실패를 맛보면 그것으로 인해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하면 실패한 원인을 찾고 찾아낸 원인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하고 싶은 이상’이 불리한 여건과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코 떨어질 수가 없었다. 둘이 떨어진다면 공자의 인생이 한 줌의 의미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공자를 쓰러뜨리지 못했지만 단 하나 공자를 무너뜨렸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시간’이었다. 아무리 의지가 단단하고 열망이 뜨겁고 호학 정신이 지칠 줄 모른다고 하더라도 죽음만은 피할 수 없었다. 그는 노년에 죽음을 예감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태산이 무너지는구나,
대들보가 쓰러지는구나,
철인이 시드는구나!
(泰山其頹乎, 梁木其壞乎, 哲人其萎乎!)-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공자는 위의 노래를 읊조린 뒤에 병을 얻었다. 다시 자신이 죽은 뒤에 관을 어디에 놓는지에 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7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누구보다 세상에 책임을 느끼고 시대를 아파했지만 성공보다 실패로 점철된 인생을 살았다. 그는 그 인생을 불행하다고 느끼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지금 전해지는 [논어]는 모두 20편으로 되어 있다. 공자가 죽은 뒤에 그의 후배들은 그의 이상과 가치를 재해석하며 제21편의 [논어]를 쓰려고 했다. 공자는 죽었지만 [논어]는 계속 확장되었던 것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이상과 가치가 오늘날에도 공감과 사랑을 받는다면, [논어]의 제21편이 계속 쓰여질 것이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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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可而爲(불가이위), 안 되는 줄 알면서 시도한다.
공자가 “불가능한 줄을 알고서도 끊임없이 뭔가를 하려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고,
끊임없이 실패했지만 그것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