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을 달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역들이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리고
얼굴 없는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 같았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 만 책들의 대부분은 다 백지이었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ㅡ 시집 『봄날은 십 분 늦은 무늬를 갖고 있다』 도서출판 도훈 2023
2020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카페 게시글
시 감상
순환선 / 이도훈
정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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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0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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