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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10-15 야곱이
본문은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서 하란을 향하여 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야곱이 그의 길을 가는 중간에 벧엘에서 밤을 맞아 노숙하게 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뵈옵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0-11절은
“(10)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11) 한 곳에 이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입니다.
1) 우리는 이 족장의 역사 가운데서 여호와가 어떻게 자기 교회를 보존하셨는지 특별히 관찰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일개 개인의 몸 안에 자기 교회를 보존하셨습니다. 이삭은 노령으로 인하여 마른 나무 등걸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경건의 산 뿌리가 그의 가슴 속에 감춰져 있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너무 늙어 생산을 못하는 나이에 더 이상 자손을 낳을 소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푸르고 무성한 가지 같았던 에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근사하고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력도 순간적인 것에 불과했습니다.
야곱은 절단된 가지와도 같이 먼 땅으로 이거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그곳에 접목되거나 식수되어 힘과 위대성을 획득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늘 이슬에 축축하게 젖어 공중으로 머리가지를 내뻗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놀랍게도 그에게 영양과 힘을 공급하시사 마침내 그를 다시 그 아비의 집으로 데려오실 것입니다.
2) 그런데 신자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가 유배당한다는 사실을 부지런히 관찰해야 합니다.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안목으로 보면 영화로운 일은 버림받은 에서에게 주어졌습니다. 에서는 남아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경쟁자 없이 안전하게 왕노릇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언제라도 우리가 억압당하는 동안 악인은 소원을 성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형식에 있어서는 개선의 나팔소리를 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말아야 합니다.
3) 모세가 여기서 브엘세바라는 지명을 언급하는 것은 브엘세바라는 곳이 가나안의 국경지대 중 하나를 이루고 남쪽 대사막을 향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야곱이 가고 있던 동부 지역에서 아주 굉장히 먼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29장에서 하란이라는 지명을 덧붙여 말하는데, 그곳은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 얼마간 거주했던 곳이었습니다. 경건한 노인 데라는 자기 아들을 따라가거나 여행길에 나선 자기 아들을 동반하여 가다가 하란에 이르러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다른 아들 나홀도 그의 가족과 함께 그곳으로 왔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1장에서 데라가 그의 아들 아브라함과 손자 롯 그리고 그 자부 사래를 데리고 그들 자신의 땅을 떠났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홀이 그 당시에 본토 갈대아에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모세는 라반이 하란에 거주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홀이 자기 부친을 몰인정하게 유기한 자로 정죄 당할까 염려하여 나중에 자기 제물을 모아 가지고 그에게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4) 모세는 그 성자 야곱이 매우 혹독하고 끈질긴 여행을 했다고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여행의 먼 노정 때문입니다. 여기에 다른 상황이 추가됩니다. 야곱은 동반자도 거처도 없이 땅에 노숙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역시 본문이 설명을 하는 대로 놔두고 장황한 설명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우리가 너무 거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언제든지 이 성자의 예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 우리 자신의 까다로움을 탓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2. 본문 12절은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입니다.
1) 12절에 “꿈에 본즉”에서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이 얼마나 적절한 시기를 택하시는가, 또 얼마나 위급한 순간에 자기 종을 구조하시는지 가르쳐 줍니다.
야곱이 누운 그곳은 거친 맹수의 습격을 받을 위험도 다분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으로부터 온갖 종류의 해를 입기 쉬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데서도 도움과 위안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야곱을 하나님께 소홀히 여김 받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겠습니까? 야곱이 이처럼 막다른 궁지에까지 다달았습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갑자기 손을 펴십니다. 놀라우신 방식으로 그를 구조하십니다. 참으로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말씀으로 그의 고통을 완화시키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은 야곱이 불요불굴의 인내심을 앞에서 나타냈습니다.
같은 방식의 은혜로 여호와께서는 이제 여기서 자기 신실한 자에게 대해 육신의 부모가 마치 자기 자녀를 돌봄같이 기념할 만한 보살핌의 본보기를 보이십니다. 여기서는 세 가지 사실을 순서대로 주목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세에 의해서 묘사된 이상의 본질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첫째로, 성경에서 꿈을 언급할 때 이것이 계시의 방법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전에 이 계시방법을 통해 자기 종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상례입니다(민12:6) 그러므로 야곱은 이 꿈이 보통 꿈과 달리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꿈에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한 모세의 말에 비견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엄이 어떤 표적으로 식별할 수 있게 되지 않았다면, 야곱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습니다. 사도는 그의 임재를 깨달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2) 12절 나머지는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입니다.
두 번째로는 여기에는 야곱이 꿈에 보았던 이상의 ‘형식’이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주제, 곧 계시의 본질에 매우 적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 계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그 사닥다리의 끝 부분은 땅과 하늘에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천사들의 수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땅 위로 내려왔습니다. 일부 히브리 해석가들은 사닥다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상징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견해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보다 더 적합한 표징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 기초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이 아버지의 영원하신 형상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형상 가운데서 거룩한 족장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원리를 고수하는 우리로서는 이 이상이 조금도 복잡하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권능으로 만물을 채우시고 지지하십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이끌려고 하시는 통보를 알지 못합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하나님과 너무나 틈이 크게 벌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우리에게 반대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분의 면전에서 도망치려고 합니다. 더욱이 인간 수호의 직책을 맡은 천사들도 끊임없이 자기 직분에 열중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라도 그런 방식으로는 우리와 교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분은 그리스도 뿐 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땅까지 이르시는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매개체요 방편이십니다. 하늘 위에 있는 충만한 복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머리로서 그 천사들로 하여금 땅에 있는 자기 식구들에게 봉사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51절에 나오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이 명예로운 일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가 세상에 나타나시게 된 후에는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사닥다리를 그리스도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사닥다리의 비유가 중보자와 아주 잘 부합하는 것은, 천사들과 의와 생명이 성령의 모든 은혜와 더불어 그 중보자를 통해 우리에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땅에 고착됐을 뿐만 아니라, 깊은 저주와 음부에까지 떨어진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또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사닥다리 위에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거기서 그것은 하늘에까지 다다릅니다. 비록 모든 권능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그의 인간적 성품에 위임되었을지라도 그가 만일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이 아니라면 참으로 우리의 믿음을 뒷받침하지 않으려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은 모든 곳에 편재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유한하다는 사실이 그분께서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지 못하도록 훼방하지 못합니다. 이 일에는 바울이 증인입니다. 또 한편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올라가셔서 만물을 채우실 수 있으셨습니다. 여기서 모세는 신의 충만하심이 중보자의 품성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사 (알)을 ‘가까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자들은 이 구절의 의미를 파괴시켜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기와 하나가 되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접근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히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아들에게서 나타날 그분의 영원하신 구원의 언약을 자기 종 야곱에게 인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적합한 방식은 없었습니다. 사닥다리가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는 것은 이와 같은 생각에 의해서도 확증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하신다고 듣습니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에서 똑똑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보는 자에게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마땅합니다. 따라서 모든 자는 그리스도께 무릎을 꿇고 복종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를 쳐다보고 찬양하며 모든 육체는 그분 앞에서 잠잠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의 우애롭고 사랑스런 형상이 여기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에게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우리와 친숙한 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 쓰여진 방식입니다. 천사와 우리들의 공동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 땅 위에 자기 자리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천사들과 우호적인 교제를 나누게 됩니다.
3. 본문 13절은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입니다.
1) 이것은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 세 번째 요점입니다.
말씀이 없는 이상만으로는 냉랭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은 그들을 활발하게 만드는 영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닥다리의 이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에 비하면 열등한 종속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을 외면적 상징으로 설명하고 장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부 상징으로 자기 말씀에 보다 큰 명확성과 권위를 첨가시키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카톨릭의 성례전이 경박한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성례전에서는 영혼을 교화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 도무지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조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말없는 이상이 그들을 불안정한 상태에 얽어 매두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의 유일한 창조주라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는 야곱으로 하여금 다른 신들을 찾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엄위로우신 존재 자체는 불가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즉시 자기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자기 종의 기능에 자신을 수용시키십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신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감각이 그분의 크심을 이해하려고 원할 때도 그 시도는 단번에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침착성을 부지런히 개발하여야 합니다. 그 침착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 이상은 그분에 대해서 알고싶어 하지 말도록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하신 인자를 따라 자신을 우리 연약에 적응시키셔서 우리 구원을 촉진시키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빠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 두 사람으로 더불어 자신을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면서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는데 여기서는 자기 종 야곱에게 신앙의 진정한 근원을 상기시키며 그를 그분의 영구 불변하는 언약 속에 붙잡아 두십니다.
이것은 경건한 신앙의 신성한 속박이자 계약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녀는 이 기반에 의해 연합됩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마지막가지 동일한 구원 약속을 듣습니다. 또 그들은 한가지 공통된 소망에 동의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야곱이 근자에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은 축복의 결과입니다. 이는 인간의 단순한 증언이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입으로 야곱을 그 언약의 상속자로 공언하시기 때문입니다.
2) 특별히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그 땅이 그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신은 끝까지 그 땅의 나그네였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 죽는 것조차 허용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런점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이나 야곱과 함께 그 땅의 영적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그 땅을 단지 보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의 주된 관심은 하늘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땅을 표징으로 또는 보증으로 해서 보다 낫고 보다 훌륭한 것이 주어졌으리라고 추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야곱의 자손이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과 반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 다른 자손들은 육을 따라서는 아브라함에게 기원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거룩한 백성으로부터는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자손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때로부터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 기업을 변함 없이 향유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시자 그분의 출현에 의해 세상은 새로워졌습니다.
4. 본문 14절은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입니다.
1) 본문의 개요는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이삭에게, 그리고 이삭은 야곱에게 또 야곱이 그의 자손에게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이 같은 하나님의 증언에 의지하여 소망과 그 너머에 있는 소망을 거는 것이 이 거룩한 사람의 의무였습니다. 비록 약속은 방대하고 극히 훌륭했을지라도 야곱 자신이 향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소망의 빛줄기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면을 둘러봐야 자신은 고립무의(孤立無依) 한 자였습니다. 이것은 유형(流刑 : 멀리 유배되어서 형을 받는)의 조건보다 나을 바가 없었습니다. 그의 귀환은 불확실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위험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하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이렇게 모든 구조 수단이 단절된 채, 홀로 남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장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자유로이 약속하시면서 빈손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처럼 보이실 때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부요하게 되고 충만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분의 말씀에 존귀와 경의를 바쳐야 마땅합니다. 야곱이 죽은 뒤 결국 이 약속의 유효성은 사실에 의해 웅변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한가지 큰 교훈을 얻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비록 자신이 약속하셨던 선하신 일들의 허락을(허여{許與}를) 그들의 사후에까지 지연하실지언정 결코 자기 백성을 실망시키지는 않으신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2)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이 주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온 인류가 그 첫 부모로 말미암아 단절 당했던 그 복을 야곱과 그의 자손에게서 회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복의 표본이나 신조일 뿐만 아니라 복의 근원이요 이유가 되고, 또 기초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이런 종류의 표현이 더 할 나위 없는 정도의 행복을 의미한다고 해도 다수의 성경구절에서는 누구로부터든지 복을 바라고 그것을 자기 은사로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든 선의 창조자로 인정하고 고백할 때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송축한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근원에서 나오는 것 이외에는 어떤 행복도 결코 발견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족속이 야곱과 그의 자손으로 인하여 스스로 복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때에 야곱의 허리에 계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특유한 것은 야곱에게로 옮겨집니다.
따라서 야곱은 예표적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은 복을 얻는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커다란 은총이 다른 자에게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네 자손’이란 표현이 해설 형식으로 즉시 첨가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손” 이란 단어는 집합 명사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 해석과 조금도 상치되지 않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은 자손 된 명예와 은혜를 스스로 배제해 버림으로써 이방인으로 간주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손의 통일성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손의 머리를 가리키는 일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이 점을 경건하게 숙고하려는 자는 누구나 이 해석을 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울 사도의 해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와같은 해석에 올바르지 못한 점이나 부자연스런 점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5. 본문 15절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경건한 야곱의 마음에 스며들지도 모를 유혹을 즉각 예방해 주십니다. 비록 야곱이 일시적으로 이국 땅에 추방당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데려오실 때까지 그의 보호자가 되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이 성취될 때까지 결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자기 약속을 더 확대시켜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이 약속의 용도는 이중적이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 약속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안에 그의 마음을 붙들어 두었습니다. 둘째로 그 약속은 만일 그가 약속된 기업에 동참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가 형통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