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재집 제3권 = 문목(問目)-퇴계 선생께 올림 무진년(1568, 선조1)〔上退溪先生 戊辰〕
문: 경(敬)의 체(體)와 용(用)에 대해 묻습니다.
선생 답: 보내온 편지에서 옥자(屋子 집)와 규구(規矩 그림쇠)로써 비유한 것은 그 설이 지루하여 끝이 없을 듯하네. 내 견해를 말한다면, 옥자는 옥자의 체와 용이 있고, 규구는 규구의 체와 용이 있네. 동량(棟樑)과 당실(堂室)은 집의 체이고 사방에 각각 쓰임이 있는 것은 집의 용이며, 둥근 모양과 모난 모양은 규구의 체이고 둥글게 만들고 모나게 만드는 것은 규구의 용이네. 이는 또한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寂然不動]은 마음의 체이고 감응하여 통하는 것[感而遂通]이 마음의 용이며, 고요하여 엄숙한 것[靜而嚴肅]은 경(敬)의 체이고 움직이며 단정한 것[動而齊整]은 경(敬)의 용인 것과 같네. 규구의 체와 용을 집을 통해 보고 경의 체와 용을 마음을 통해 본다고 하는 것은 괜찮지만 규구의 체와 용이 곧 집의 체와 용이고 경의 체와 용이 곧 마음의 체와 용이라고 한다면 옳지 않네. 청컨대 이전의 설은 씻어버리고 심지를 비우고 밝게 하여 이 몇 마디 말을 가지고 오래 익숙하게 생각하면 절로 알게 될 걸세.
문: 《주역》의 용전(龍戰)은 무슨 뜻입니까?
선생 답: 《주역》 〈건괘(乾卦)〉의 여러 양효(陽爻)는 모두 용의 형상을 취하였고, 〈곤괘(坤卦)〉의 상육효(上六爻)는 음(陰)의 왕성함이 지극한 것이네. 음이 왕성하면 반드시 양과 다투게 되니, 용과 싸우는 것은 양과 싸우는 것이네. 음이 왕성하여 양과 싸우게 되면 반드시 둘 다 패하고 모두 다치게 되기 때문에 그 피가 검고 누렇게 되는데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기 때문이네.
문: 이(理)는 곧 예(禮)이니 맑은 것은 예가 발한 것이고, 화(和)는 곧 정(情)이니 화락한 것은 정이 행하는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하여 묻습니다.
선생 답: 악(樂)은 예(禮)를 말미암아 생겨나기 때문에 음악의 소리가 맑은 것은 예(禮)가 발한 것이라 말할 수 있네. 이(理)는 바로 예(禮) 자를 풀이한 것이니 이른바 ‘천리(天理)의 절문(節文)’이라 할 때의 이(理) 자네. 그러므로 주(註)에 “맑은 것은 이(理)가 발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옳지만 지금 “맑은 것은 예(禮)가 발한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옳지 않네. - 만약 이(理)는 예(禮)의 이(理)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면 옳지만, 곧바로 이(理)가 바로 예(禮)라고 하면 옳지 않다. - 음악 소리의 화락함은 인정이 화창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註)에 “화(和)는 화의 행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지만 지금 “화(和)는 정(情)의 행위이다.”라고 한다면 옳지 않네. - 만약 화(和)는 정(情)의 화창함을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하면 옳지만 곧바로 화(和)가 바로 정(情)이라고 하면 또한 옳지 않다. -
“‘지금의 음악이 그것을 형상했다.’는 말에서 ‘그것을 형상했다.’는 것은 형상해서 서로 비교한 것이다.”라는 이 말은 옳다. 다만 그 아래 말은 대부분 미진한 점이 있네. 그래서 그것을 고쳐서 “고인(古人)의 정은 화락하되 방탕한 데로 흐르지 않았다. 그 음악이 그것을 형상했으니 다만 화락하다고만 말하면 이미 극진하니 다시 맑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음악이 방탕하고 난잡한 것을 가지고 옛날 음악에 비교해 보면 옛날 음악은 장중하고 엄숙한 뜻에 근본을 두어 비로소 형체가 드러나 볼 수 있게 된 것이기 때문에 주자(周子)가 반드시 이 담(淡) 자를 말해서 밝힌 것이다.”라고 하였네.
‘성인이 중(中)ㆍ정(正)ㆍ인(仁)ㆍ의(義)로써 정하되 정을 주장하였다.’라는 것은 주자(周子)의 〈태극도설(太極圖說)〉 가운데 나오는 말이네. 지금 음악을 논하면서 운운한 것 역시 〈태극도설〉에서 정(靜)을 주로 했던 뜻과 같다고 한 것 역시 정(靜)을 주로 한 뜻이네. - 보내준 편지에서 “맑은 것은 장중하고 엄숙함에 근본을 둔 것이 또한 정(靜) 자의 뜻이다.”라고 한 이 설은 옳습니다. -
대체로 《통서(通書)》에서 논한 여러 설은 모두 〈태극도설〉에 근원한 것이기 때문에 조목마다 서로 발명하고 구절마다 서로 호응하네. 주자의 주(註) 가운데 지적한 것이 분명하고 빠진 것이 없네. 독자들이 〈태극도설〉을 말미암아 그 내력을 미루어 보지 않으면 《통서》를 지은 까닭이 아득하여 알 수 없을 걸세.
문: 본체(本體)와 전체(全體)가 차이가 있습니까? 본체는 성(性)을 가리켜 한 말이고 전체는 동정(動靜)과 언행(言行)을 가리켜 한 말입니까?
선생 답: 일반 사람은 얽매이고 가려진 상황에서 성(性)의 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본(本)’이라 하고, 성인(聖人)은 성(性)을 극진하게 한 상황에서 성(性)의 체를 가리키기 때문에 ‘전(全)’이라 한 것으로, 그 체(體)는 하나이지만 사람에 따라 두 가지가 있는 듯하네. 그러니 모두 동정(動靜)의 이(理)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여기에서는 동정으로 말할 수 없네. 5장(五章)에 말한 ‘전체와 대용[全體大用]’의 전체는 곧 정(靜)이고 대용(大用)은 곧 동(動)이니, 그 분기점을 어지럽힐 수 없네. 또 본(本)이라는 말은 지금 비록 흐리고 가려졌지만 그 본체는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고, 전(全)이라는 말은 혼연히 선(善)을 극진하게 했다는 뜻이고,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네. 언행은 바로 동정이고 사물은 곧 이른바 ‘용(用)’이라는 것이지 체(體)를 말한 것이 아니네.
문: ‘밖을 후하게 하고 안을 박하게 하라.[厚外薄內]’라는 것에 대하여 묻습니다.
선생 답: 밖을 후하게 하고 안을 박하게 하는 병통은 평소에 마땅히 이것으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하지만 몸의 질병을 치료할 때는 이 설을 쓰면 맞지 않네. 김이정(金而精)의 ‘경을 유지하며 강학해야 한다.[持敬講學]’는 설은 어찌 유독 공만 부끄러워할 것이겠는가. 늙고 졸렬한 이 사람이야 말로 붕우 사이에 이렇게 책망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더욱 부끄럽게 여긴다네.
문: ‘태산이 높기는 하지만[泰山爲高]’이라는 것에 대해 묻습니다.
선생 답: ‘태산이 높기는 하지만’이란 정자(程子)의 말이네. 태산이 높기는 하지만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하여 사업에 한계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지 태산을 도체에 비유한 것은 아니네.
문: 경계(警戒)에 대한 시를 청합니다.
선생 답: 경계에 대한 시는 많지만 마음을 더 쏟지 않는다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진실로 뜻을 닦는다면 경계하는 시가 없더라도 어찌 학문에 진전이 없겠는가. 이에 종이에 써서 보내는 한 가지 일에만 급급해서는 안 되네.
문: ‘부여받은 기가 맑고 흐린[受氣淸濁]’것에 대해 묻습니다.
선생 답: 부모에게 기를 받을 때 대략 그 기를 가지게 되나, 그 기가 맑거나 흐린 것은 여기에서 이미 결정되고, 나중에 다시 맑거나 흐림이 더하거나 빠지는 분수가 있는 것이 아니네.
문: 고수(瞽瞍)같은 아비에게 순(舜)같은 아들이 있고, 요(堯)와 순(舜)같은 아비에게 주(朱)와 균(均)같은 아들이 있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선생 답: 부모의 기(氣)는 바로 천지의 기이다. 교감하는 연월일시에 청순한 기운이 있으면 뚫고 와서 사람이 되네. 부모의 선하고 악한 기는 또한 어찌할 수 없네.
[주-D001] 주역의 용전(龍戰) :
《주역》 〈곤괘(坤卦) 상육(上六)〉에 “용이 들에서 싸우니, 그 피가 검고 누렇다.[龍戰于野, 其血玄黃.]”라고 하였다.
[주-D002] 맑은 …… 것이다 :
주돈이(周敦頤)가 지은 《통서(通書)》에 주희(朱熹)가 주를 낸 것을 말한다.
[주-D003] 본체(本體)와 …… 있습니까 :
《대학장구》 수장(首章)의 소주에 신안 진씨(新安陳氏)가 “명덕(明德)은 이 덕의 본체의 밝음을 가지고 말한 것이고, 준덕(峻德)은 이 덕의 전체의 큰 것을 가지고 말한 것이다.[明德, 以此德本體之明而言, 峻德, 以此德全體之大而言.]”라고 한 것을 두고 질문한 것이다.
[주-D004] 전체와 대용 :
《대학장구》 수장(首章)의 주자 주에 “힘쓰기를 오래 하게 되어 하루 아침에 환하게 관통하게 되면 모든 사물의 표리와 정추가 이르지 않음이 없고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이 밝지 않음이 없다.[至於用力之久而一旦豁然貫通焉,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라고 한 것을 말한다.
[주-D005] 태산이 높기는 하지만 :
《이정전서(二程全書)》에 “태산이 높기는 하지만 태산의 꼭대기 위는 이미 태산에 속한 것이 아니다. 비록 요순의 일이더라도 단지 허공의 한 점 뜬구름일 뿐이다.[泰山爲高矣, 然泰山頂上, 已不屬泰山, 雖堯舜之事, 亦只是太虛中一㸃浮雲.]”라고 한 것을 말한다.
ⓒ 한국국학진흥원 | 장재호 (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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