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化 財 (7) 京畿地方(2)
(01) 驪州 英陵 -史蹟 제195호 –驪州市 世宗大王面(舊 陵西面) 英陵은 朝鮮 第4代 世宗(在位1418∼1450)과 妃 昭憲王后 沈氏의 무덤이다. 世宗은 政治·經濟·社會·歷史· 文化등 각 분야에서 朝鮮時代文化의 黃金期를 이룩한 왕이다. 世宗 28년(1446) 昭憲王后가 他界하자 당시 廣州(現 서울 瑞草區 內谷洞) 獻陵서쪽 산줄기에 雙室무덤인 영릉을 만들었다. 동쪽은 王后의 무덤, 서쪽은 生前에 미리 마련한 王의 무덤으로 文宗 卽位年(1450) 王이 昇遐하자 合葬했다. 朝鮮王陵中 최초로 한 봉우리에 서로 다른 방을 갖추고 있는 合葬무덤이었다. 무덤배치는 <國朝五禮儀>에 따른 것으로, 朝鮮前期 무덤배치의 基本이 되었다. 世祖以後 英陵의 위치가 좋지 않다고 移葬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옮기지 못하고 睿宗 1년(1469) 驪州로 옮겼다. 封墳둘레에는 12칸의 欄干石을 둘렀으며, 전에 있던 石物인 床石, 明燈石, 望柱石, 神道碑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며, 1973년에 발굴해 世宗大王記念館(서울 淸凉里洞)에 보존하고 있다. 魂遊石 2좌를 마련해 合葬陵임을 표시했으며, 欄干石에 十二支神像을 조각하는 대신 十二支를 文字로 표현해 方位를 표시했다. 訓民門·世宗大王銅像·世宗殿등은 1977년 英陵淨化事業때 세운 것이다. (*遐: 멀 하 *墳: 무덤 분 *欄: 난간 난)
(02) 驪州 寧陵 -史蹟 제195호 –驪州市 世宗大王面(舊 陵西面) 朝鮮 第17代 孝宗(재위 1649∼1659)과 妃 仁宣王后 張氏의 陵으로, 京畿道 楊州郡 健元陵(現 九里市 東九陵) 서쪽에 翼陵이었으나 1673년 현 위치로 移葬했으며, 世宗과 昭憲王后의 陵인 英陵과 함께 1970년 史蹟으로 지정되었다. 王陵과 王妃陵을 左右로 나란히 배치하지 않고 上下로 배치한 雙陵 형식이다. 風水地理에 의한 이런 雙陵형식은 朝鮮王陵中에서 最初인데 第20代 景宗과 宣懿王后의 서울 懿陵(사적 제204호, 城北區 石串洞)도 上下異封陵이다. (*懿: 아름다울 의)
(03) 驪州 孝宗 寧陵齋室 -보물 제1532호 -驪州市 世宗大王面(舊 陵西面) 孝宗의 寧陵은 齋室로, 祭官의 휴식, 祭需장만 및 祭器保管등 祭祀機能을 수행하기 위한 능의 附屬建物이며, 陵을 조성할 때 앞에 齋室을 건립했다. 현재 남아있는 朝鮮王陵의 齋室은 日帝强占期와 6·25戰爭을 거치면서 대부분 滅失되어 원형이 훼손되었는데, 寧陵齋室은 朝鮮王陵齋室의 기본형태가 가장 잘 남아있으며, 空間構成과 配置가 뛰어나 대표적인 朝鮮時代齋室로 學術的·歷史的價値가 높이 평가된다.
(04) 世宗大王像 -驪州市 世宗大王面 世宗大王과 昭憲王后의 合葬陵 英陵西쪽에 英∙寧陵으로 가는 길에 있으며, 1914년 行政區域改編때 首界面과 吉川面 13個里를 합하여 陵西面이라고 命名하고 驪州郡에 속했으며 2013년 驪州郡이 市로 승격하면서 驪州市에 속했다. 英∙寧陵이 있으며, 1977년 世宗大王像을 건립하고 參拜客이 많아졌다. 陵西面를 2021년 12월 ‘世宗大王面’으로 바꾸었다.
(05) 明成皇后生家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6호 -驪州市 陵峴洞 高宗의 皇后로 乙未事變(1895)때 弑害된 明成皇后가 誕生해서 8歲까지 살던 집으로, 본래 肅宗의 妃 仁顯王后의 부친이며 明成皇后의 6代祖父인閔維重의 墓지기용 작은집으로 肅宗 13년(1687)에 처음 지었으며, 그때 건물은 안채만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 안채는 修理하고 行廊채와 사랑채, 別堂채등을 建築해 함께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明成皇后生家는 朝鮮中期살림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明成皇后는 哲宗 2년(1851) 父親 閔致祿과 母親 韓昌府夫人 李氏 사이에 태어났다. 8세때 부친이 他界하고 母親과 함께 肅宗妃 仁顯王后의 親庭집인 漢陽의 感古堂에 와서 살았다. 16세때 高宗의 王妃로 간택되어 高宗 卽位後 10년간 國政은 興宣大院君이 攝政했으며, 高宗이 成年後 明成皇后는 高宗과 함께 開化政策 推進過程에서 壬午軍亂, 甲申政變, 東學農民運動등의 政治的 危機를 겪었다. 특히 東學農民運動때는 日本이 무단으로 派兵하고 景福宮을 침략, 高宗과 明成皇后는 宮中에 軟禁狀況에 直面했다. 明成皇后는 러시아에 접근해 君主權回復을 추구하고, 러시아로 인해 朝鮮의 保護國化가 挫折된 日帝는 景福宮을 襲擊, 明成皇后를 弑害했다. 光武 1년(1897) ‘明成’이라는 諡號가 부여되고, 高宗의 皇帝卽位와 大韓帝國 宣布直後 皇后로 追尊되었다. 그해 11월, 淸凉里의 洪陵에 葬禮를 치렀다가 1919년 高宗葬禮때 京畿道 南楊州 金谷의 洪陵에 合葬되었다. (*顯: 나타날 현 *攝: 다스릴 섭)
(06) 明成皇后誕降舊里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1호 -驪州市 陵峴洞 明成皇后(1851~1895)가 태어난 옛 마을을 기념하기위해 세운 碑이다. 明成皇后生家바로 옆의 碑閣안에 安置 되었다. 碑身의 앞면 중앙에 큰 글씨로 ‘明成皇后誕降 舊里’라고 기록했는데, 明成皇后가 태어난 옛 마을이라는 뜻이다. 뒷면에도 ‘光武 8년(1904) 甲辰年 五月의 어느 날에 머리 숙여 절하고 눈물을 머금으며 恭敬히 글씨를 썼다’는 내용이 있다. 누가 글씨를 썼는지 새기지 않아 알 수 없다. 明成皇后誕降舊里碑는 四角形받침돌에 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韓屋팔작지붕형태의 지붕 돌을 올린 方趺蓋石樣式을 갖추었다. (*趺: 책상다리할 부 *蓋: 덮을 개)
(07) 江漢祠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0호 -驪州市 下洞 朝鮮中期 學者이며 政治家인 尤庵 宋時烈(1607~1689)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祠堂이다. 尤庵은 領議政까지 지냈으며, 驪州에 머물 때마다 孝宗의 寧陵을 바라보며 孝宗의 北伐政策에 대한 大儀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후에 正祖가 寧陵에 行次하다 이 이야기를 듣고 文臣·學者인 金亮行에게 宋時烈의 祠堂을 짓게 하고, 송시열을 높여 사당을 ‘大老祠’라고 했다. 1873년 高宗이 ‘江漢祠’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사당은 1871년 高宗의 書院撤廢에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강한사는 祠堂과 講堂領域으로 구성되고 齋室인 秋陽齋, 大老祠碑閣,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었다. 祠堂은 寧陵을 바라보기 위해 西向인데, 임금과 臣下사이의 義理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한다. (*尤: 더욱 우 *亮: 밝을 양 *祠: 사당 사)
(08) 龍仁 할미山城 -京畿道 記念物 제215호로 -龍仁市 蒲谷邑 할미山의 북쪽봉우리와 남쪽경사면을 감싸는 長楕圓形의 둘레 661m의 小規模山城이다. 성벽은 長方形으로 가공한 城돌로 바른층쌓기하고 외벽에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게 補築城壁이며, 城門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懸門式城門으로 추정된다. 城內에서는 望樓와 집수시설, 병사들의 숙소이던 竪穴建物터와 多數의 구덩이저장 시설이 확인되었다. 할미산성은 신라가 쌓은 성으로 보이며, 신라는 553년, 高句麗를 몰아내고 百濟가 차지했던 京畿道地域 일대를 장악했다. 할미산성은 신라가 龍仁地域에 설치한 駒城縣의 治所城으로 추정되며, 6세기중엽~ 7세기중엽의 築城技術의 변화과정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楕: 길고 둥글 타)
(09) 鄭夢周先生墓 -京畿道 記念物 제1호 -龍仁市 慕賢邑 高麗末의 忠臣으로 우리나라 性理學의 基礎를 닦은 圃隱 鄭夢周(1337∼1392)의 墓이다. 恭愍王 9년(1360) 文科에 壯元及第하고 藝文館檢閱·大司成등의 여러 벼슬을 거쳤다. 高麗風俗은 모든喪祭가 佛敎儀式이었는데, 南宋의 性理學者 朱熹(朱子)의 <家禮>에 따라 祠堂을 세우고 神主를 만들어 祭祀를 받들게 해 禮俗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했다. 서울에는 五部學堂을 세우고 地方에는 鄕校를 두어 敎育振興을 꾀하고 紀綱을 정비했으며, 義倉을 再建해 궁핍한 사람을 救濟하는 등 國運을 바로잡고자 노력했다. 李成桂의 세력이 새 王朝를 세우려 하자 高麗王室을 지키려다 恭讓王 4년(1392) 刺客에게 善竹橋에서 被殺되었다. 전하는 말에 圃隱이 殉節後 開城 豊德郡에 묘를 썼다가 太宗 6년(1406) 故鄕인 慶尙道 永川으로 移葬할때, 龍仁 水眞面 豊德川엣 移葬行列앞의 銘旌(다홍 바탕에 흰 글씨로 死者의 品階, 官職, 姓氏를 기록한 깃발)이 바람에 날아가 지금의 墓所에 떨어져 喪輿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곳에 墓를 썼다고 한다. (*銘: 새길 명 *旌: 기 정 *輿: 수레 여)
(10) 터키軍 韓國戰參戰記念碑 -龍仁市 器興區 東栢洞 6·25戰爭때 1個 步兵旅團을 派兵한 터키軍을 기리기 위해 龍仁 에버랜드로 가는 마성IC 고갯마루에 건립한 記念碑이다. 터키는 美國과 英國 다음으로 가장 많은 兵力을 派兵한 국가이며 戰死 721명, 負傷 2,147명, 失踪 175명, 捕虜 346명 등 3,064명의 人命損失을 입었다.
(11) 德溫公主의 저울과 저울 집 -重要民俗資料 제212호 -龍仁 檀國大學校 石宙善記念博物館 놋쇠저울, 나무로 된 저울 집 각 1점씩으로, 저울의 접시부분과 저울집의 접시 들어가는 부분에 임금의 도장을 새겼다. 저울집은 저울의 접시와 추, 손잡이가 들어갈 수 있도록 같은 형태로 팠다. *德溫公主(1822~1844): 朝鮮 第23代王 純祖의 셋째 딸로, 16세에 南寧尉 尹宜善과 結婚했으며 23세에 他界했다. 墓所는 서울 城北區 長位洞에 있다. 德溫公主의 唐衣·의복·遺物이 각각 國家民俗文化財 제1호·제211호·제212호로 지정되었다.
(12) 六槐亭 -利川 鄕土遺蹟 제13호 -利川市 栢沙面 道立里 中宗 14년(1519) 己卯士禍로 落鄕한 嚴用順이 건립한 亭子로 처음에는 草堂이었으나 여러차례 重建해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얹은 本建物에 담장과 대문이 있는 祠堂形態로 변모했다. 本堂은 정면 9m, 측면 3.78m로, 내부에는 ‘南塘嚴先生六槐亭序’, ‘六槐亭重修記’등의 懸額을 걸었다. ‘六槐亭’이란 이름은 嚴用順등 當代의 明賢 6명의 선비가 詩會와 學問을 논하며 友誼를 기리자는 뜻으로, 亭子앞에 연못을 파고 6그루의 느티나무를 심은 데서 비롯되었다. (*栢: 측백 백 *槐: 회화나무 괴 *塘: 못 당)
(13) 三幕寺男女根石 -京畿道民俗文化財 제3호 -安養市 石水洞 七星閣서북쪽에 있는 2개의 自然石으로 모습이 男子와 女子의 性器모양을 닮았다. 男根石의 높이는 150㎝, 女根石의 높이는 110㎝이며 서로 2m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性器崇拜信仰(phallicism)은 주로 性器를 닮은 바위나 奇巖怪石등 自然物을 대상으로 하지만, 人爲的으로 나무나 돌로 性器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多産과 豊饒를 빌거나 福을 祈願하는 전통적인 民間信仰이다. 이 바위를 보존하면서 그 옆에 七星閣을 건축하고 18세기에 七星佛을 안치한 것은 男根石에 대한 믿음이 확대되면서 佛敎와 民間信仰이 함께 어우러진 대표적인 事例로 볼 수 있다. 性器崇拜信仰은 先史時代부터 지속적으로 이어져온 彌勒信仰, 巫俗信仰, 風水信仰, 洞祭등과 같이 그 傳統信仰의 脈을 잇고 있다. 특히 이 三幕寺男女根石은 文化變動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饒: 넉넉할 요 *彌: 미륵 미 *勒: 굴레 륵)
(14) 6∙25戰死者 遺骸發掘터 -軍浦市 修理山 修理山지역은 1951년 2월 美軍(KATUSA 配屬)과 터키軍이 中共軍 및 北韓軍과 熾烈한 戰鬪를 벌인 곳으로, 2013년 5월 戰死者 遺骸 3具를 발굴했다. 오직 命令에 따라 싸우다 숨진 戰死者들의 넋을 慰勞하고, 護國報勳意識을 고취하기 위해 國防部 遺骸發掘鑑識團과 步兵 第51師團에서 2015년 4월 알림판을 설치했다. (*掘: 팔 굴 *鑑: 거울 감 *識: 알 식)
(15) 安山邑城 및 官衙址 -京畿道記念物 제127호 -安山市 秀岩洞 高麗時代後期부터 朝鮮時代에 사용한 邑城과 官衙址로, 전형적인 平地城과 山城을 이어 쌓은 平山城이 邑城을 감싸며 남쪽에 官衙址가 있다. 安山官衙는 처음에는 木內洞에 있었으나, 世宗때 秀岩洞으로 옮기고, 海岸으로 침입하던 倭寇에 대비하기 위해 顯宗 10년(1669) 東南쪽 50m인 현재위치로 移轉헸으며, 평시에는 行政機能을 담당했다. 官衙址에는 正門인 平近樓와 客舍·東軒등의 行政施設, 옥사와 창고가 있었으나 파괴되어 주춧돌과 長臺石, 기와조각 등만 흩어져 있다. (*衙: 마을 아 *址: 터 지)
(16) [護國 國家有功者 功績碑] -安山 花郞公園 安山은 高麗時代 徐熙將軍의 愛國魂이 잠든 곳으로, 옛날부터 나라를 지키던 草芝陣兵士들이 軍事訓鍊하면서 농사지어 軍糧米를 지급하던 ‘둔배미벌판’이다. 6∙25戰爭때는 傷痍軍警과 參戰勇士들이 농사를 지으며 愛國心을 불태우던 花郞農場이었다. 이같이 愛國魂이 깃든 곳에 [護國 國家有功者 功績碑]를 세워 後世에 전한다. (*芝: 지초 지)
(17) 華城 隆陵 -史蹟 제206호 -華城市 安寧洞 隆陵은 正祖의 父親인 思悼世子와 夫人 惠慶宮 洪氏의 무덤이다. 正祖가 王位에 오르면서 莊獻世子라고 했으며, 1899년 莊祖懿皇帝로 追尊되고, 惠慶宮 洪氏도 獻敬懿皇后로 追尊되었다. 隆陵은 원래 楊州(현재 서울 典農洞) 拜峰山에 있던 永祐園을 華城의 花山으로 옮기고 顯隆園이라고 했다. 合葬陵인 隆陵은 병풍석을 두르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石燈은 朝鮮前期의 八角形과 肅宗, 英祖때 등장한 四角形石燈樣式을 합한 새로운 양식이다. 文石人은 머리에 金冠을 쓴 경우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이후의 무덤樣式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光武 3년(1899) 思悼世子를 莊祖로 推尊하면서 隆陵으로 改稱했다. 隆陵은 正祖와 妃의 合葬陵인 健陵과 함께 1970년 [華城 隆陵과 健陵] 史蹟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隆: 높을 융 *悼: 슬퍼할 도 *獻: 드릴 헌 *懿: 아름다울 의 *祐: 복 우)
(18) 華城 健陵 -사적 제206호 -華城市 安寧洞 健陵은 朝鮮 第22代 正祖와 妃 孝懿王后 金氏의 合葬陵으로, 封墳안에 2室을 갖추었다. 封墳을 둘러싼 12칸의 欄干石기둥에는 十二支方位 文字로 새기고 屛風石은 설치하지 않았다. 封墳앞에 石床이 있고, 양쪽에 望柱石 1쌍이 있다. 封墳周圍로 石羊·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고, 封墳外部로 3面의 曲墻을 둘렀다. 封墳下段에 文人石·石馬 각 1쌍과 長明燈 1좌가 있으며, 그 아랫단에는 武人石·石馬각 1쌍씩있다. 陵의 언덕아래에는 丁字閣과 碑閣, 丁字閣 남쪽 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서 丁字閣에 이르는 參道左右에는 薄石을 깔아 놓은 것이 특징이다. 丁字閣西쪽에 수라간이 복원하였으며, 陵域남쪽 齋室이 있다. (*封: 봉할 봉 *墳: 무덤 분 *墻: 담 장 *薄: 엷을 박)
(19) 華城 唐城 -사적 제217호 -華城市 西新面 山頂上을 둘러싼 테뫼식山城인 一次城과 계곡을 두른 包谷式山城인 二次城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는 東門터, 西門터, 北門터와 우물 터, 八角建物터를 비롯한 方形과 長方形의 건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唐城이 있는 南陽地域은 新羅 景德王때는 唐恩郡으로, 中國과의 중요한 交通路였으며, 興德王때인 829년 唐城鎭을 설치하면서 淸海鎭과 함께 新羅海軍의 중요하 근거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九峰山黨項城과 관련되는 가장 중요한 유적의 하나로 꼽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唐’을 새긴 기와조각으로, 唐城郡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며, 將臺推定址에서 출토된 土製馬는 華城 唐城에서 祭儀가 있었음을 증명하며, 中國 白磁碗의 출토는 華城 唐城이 對外交易 窓口역할 한 것을 알 수 있다. (*碗: 사발 완)
(20) 金浦 文殊山城 南門 -사적 제139호 *金浦 文殊山城 -사적 제139호 -金浦市 月串面 甲串鎭과 함께 江華入口를 지키던 山城으로, 朝鮮 肅宗 20년(1694) 築城한 石築山城으로 純祖 12년(1812) 改築했으며, 견고하게 쌓은 위에 女牆을 둘렀다. 당시에 城門은 取豫樓·控海樓등 3개의 門樓와 暗門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甲串鎭과 마주보는 海岸에 있었으며 陸地로 나오는 關門역할을 했다. 현재 海岸쪽 城壁과 門樓는 없어져 마을이 되고, 산등성이를 연결한 城壁만 남아있다. 高宗 3년(1866) 丙寅洋擾때 프랑스軍과 치열한 戰鬪를 벌인 곳이다. (*殊: 다를 수 *串: 곶 곶 *牆: 담 장 *控: 당길 공 *擾: 시끄러울 요)
- 文化財 (8) 京畿地方(3) 및 仁川地方에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