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1일 월요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2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3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5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콩깍지가 여러 겹으로 덮여서
마음이 어린 휘니
서경덕
마음이 어린 후(後)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늬 님 오리마난
지는 님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이 모두 다 어리석다.
깊은 산 속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 올까마는
그래도 떨어지는 잎새와 바람 소리만 들려도 혹시나 임일까 한다.
황진이의 유혹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는 서경덕의 연정가(戀情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눈이 삔다고 합니다. 또 콩깍지가 끼어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아무리 잘못하는 것도 잘하는 것처럼 보이고, 얼굴의 큰 흉터도 보조개로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눈이 삐도록 사랑에 빠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날 눈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내가 미쳤지, 귀신이 씌었나, 눈을 감고 살았군, 살았어!’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삽니다. 그런 때는 차라리 눈을 뜨지 않고 그냥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고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작으로 눈을 뜨고 있거나 감고 있거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으면. 어떤 아름다움이나 교태도 소용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마음 안에 아름다우면, 어떤 추함도 모두 아름다워 보일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큰 들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형제의 눈에 티끌을 볼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신 하나도 제대로 버틸 힘도 없으면서 정말 앞자락이 넓어서 다른 사람 참견까지 할 수 있다니 대단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큰 허물을 모두 덮어두고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오히려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정말 작은 허물 밖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별로 하고 싶은 말은 아니지만 내가 그런 사람입니다. 내 앞자락은 지금 엉망진창으로 얽히고설켜 있는 데 다른 사람의 실마리를 풀어주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꼴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해서 충고도 해주고, 길을 인도해 준다고 나서기까지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교회도 그렇고 우리 공동체도 그런 모습을 잘 보입니다. 입을 뗄 형편도 아닌데 ‘충판해탐’(忠判解探)에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충고(忠告)와 판단(判斷), 그리고 해석(解析)과 탐색(探索)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각오로 살고 있습니다. 누가 사람들을 잘 인도하는 사람인가? 누가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리더로서 살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질문은 아주 자주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신이 없는 질문입니다.
먼저 자신을 잘 살펴보고 자신의 결점을 고치고, 자신의 능력을 보완하고, 그리고 상대방을 잘 안다면 충고도 값질 것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부족하지만 주님의 성령으로 겸손해지고, 지혜의 은총을 받아서 이웃을 옳게 판단하고, 상담해서 좋은 길로 인도해 준다면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편견이나 아집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소상하게 연구하고 조리 있게 해석해 준다면 얼마나 지혜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래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연구하고 조사해서 좋은 방안을 찾아내서 제시해 준다면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충판해탐(忠判解探)도 절대로 가볍게 여길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정치가가 눈이 어두워 종교를 함부로 판단하고 말하고, 신앙을 함부로 얘기한다면 이는 큰일 날 일입니다. 그의 눈을 덮고 있는 그 교만을 말끔하게 씻어줄 것은 겸손한 자세뿐입니다.
교회도, 성직자도, 수도자도, 평신도도 그렇게 눈이 밝아지고, 자신의 결점을 잘 고치고 살았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매일 몹쓸 것이 잔뜩 끼어 백내장이나 녹내장처럼 소경을 만드는 그런 병들은 빨리 제거 수술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안약을 빨리 사서 골고루 발라야 합니다. 서로 무시하고, 서로 경시하면서 무슨 사랑이 이루어지겠습니까? 학문에 대한 교만이 가득한데 어떻게 학문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질시와 질투가 사랑의 눈을 멀게 하는데 어떻게 사랑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신앙을 가진 크리스천부터 개안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무언가 정말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것 같습니다. 지금은 아직 어둠의 속이라는 생각이 나를 우울하게 합니다. 그 사람들의 가장 앞에 내가 있음을 느낍니다. 더러운 속내를 교묘하게 포장하고, 겸손과 성덕을 위장하고 활개를 치고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내가 우두머리라는 생각이 더욱 슬픈 일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1-9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8 그는 그곳을 떠나 베텔 동쪽의 산악 지방으로 가서, 서쪽으로는 베텔이 보이고 동쪽으로는 아이가 보이는 곳에 천막을 쳤다.
그는 그곳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불렀다.
9 아브람은 다시 길을 떠나 차츰차츰 네겝 쪽으로 옮겨 갔다.
축일 :6월 21일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Aloysius Gonzaga)
신분 :수사, 신학생
활동 연도 :1568-1591년
같은 이름 :공사가, 루도비꼬, 루도비코, 루도비쿠스, 루이, 루이스, 루이지, 알로이시우스
성 알로이시우스 곤자가(또는 알로이시오)는 1568년 3월 9일 이탈리아 북부 브레시아(Brescia)와 만토바(Mantova) 사이에 있는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 성(城)의 후작 페란테(Ferrante de Gonzaga)와 마르타 타나(Marta Tana di Santena)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다소 야만적이고 부도덕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어머니는 사랑으로 성 알로이시우스를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성 알로이시우스의 아버지는 그가 군인이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이를 원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의 가정 교사였던 피에르프란체스코(Pierfrancesco del Turco)는 성 알로이시우스의 영혼과 정신을 길러 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577년 스페인의 왕 펠리페 2세(Felipe II, 1556-1598)의 부름을 받은 아버지는 성 알로이시우스를 피렌체(Firenze)의 대공 프란치스코 데 메디치(Francesco de Medici) 궁의 시동(侍童)으로 보냈다. 그리고 2년 후인 1579년에 성 알로이시우스와 그의 동생 로돌포(Rodolfo)를 만토바(Mantova)의 공작에게 보냈다. 여기서 사제직의 꿈을 키우던 성 알로이시우스는 1580년 7월 여행 도중 들른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Carolus Borromeo, 11월 4일) 추기경을 만나 그에게 직접 첫영성체를 받았다. 1581년 오스트리아 황후 마리아가 마드리드(Madrid)로 돌아갈 때 곤자가 가문도 함께 갔고, 성 알로이시우스는 펠리페 2세 궁정에서 왕자 돈 디에고(Don Diego)의 시동으로 지내면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 후 왕자가 사망하자 1583년 8월 15일 성 알로이시우스는 예수회에 입회할 것을 결심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완강히 반대하며 일단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원하는 대로 하라고 아들을 설득했다. 이탈리아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온갖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돌려 보려고 애를 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1585년 11월 25일 로마에 있는 예수회에 입회한 성 알로이시우스는 밀라노(Milano)의 예수회 분원에서 몇 달을 지낸 후 만토바에서 수련을 받았다. 이듬해 2월 15일 아버지가 사망하여 잠시 집에 들러 모든 일을 정리하고 돌아온 후 학업에 정진하였다. 그는 나폴리(Napoli)에 머물면서 형이상학을 공부하였고, 예수회 로마 학원에서 철학을 배웠다. 1587년 11월 25일 첫 서원을 한 뒤 곧바로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를 가르치던 교수 중에는 당시의 유명한 학자 바스케스(G. Vazquez, 1549-1604)가 있었으며, 훗날 성인이 된 로베르투스 벨라르미노(Robertus Bellarmino, 9월 17일)가 성 알로이시우스의 영성지도 신부였다.
성 알로이시우스가 신학을 공부한 지 4년째 되던 1590년 로마 전역에 페스트가 퍼졌다. 그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병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그렇게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간호하던 성 알로이시우스는 이듬해 3월 초 자신도 페스트에 전염되어 같은 해 6월 21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다. 그의 시신은 로마의 성 이냐시오(Ignatius) 예수회 성당에 안치되었다.
성 알로이시우스는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모든 일을 잘 처리하는 뛰어난 학생이었다. 긍정적이고 관찰력이 탁월했던 그는 철학과 신학의 전 과목에서 그를 가르쳤던 교수들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깊은 사랑과 신앙 안에서 어려서부터 정결을 지키며 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있었고, 어떠한 반대에도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특별히 정결에 대한 은사를 받은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그는 수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악습들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으며, 자신의 자존심과 이기심을 이기기 위한 수련을 끊임없이 실천했다.
성 알로이시우스의 시성 절차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는 1605년 10월 19일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726년 12월 31일 교황 베네딕투스 13세(Benedictus XI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후 성 알로이시우스는 젊은이와 신학생들, 특별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교회 미술에서 그는 주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상을 잡고 기도하는 모습으로 주위에 백합화나 해골 등과 함께 그려지곤 한다. 백합은 정결을 상징하는 꽃으로 특별히 성 알로이시우스가 받은 정결의 은사를 상징하고, 해골은 회개와 보속의 삶을 의미한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루이지 곤자가(Luigi Gonzaga)로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는 알로이시오 곤자가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과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