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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조선은 내우외환의 위난에 직면하였다. 안으로는 관료사회의 부패와 밖으로는 일본·청 등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가중되었다.
이러한 때 전봉준(본명,全明淑, 1854~1895) 장군은 도탄에 빠진 나라와 백성을 건지겠다는 대의를 갖고 갑오(1894)년에 ‘갑오 동학혁명’이 발발한 것이다.
갑오동학혁명은 청·일 양국군의 조선출병을 불러왔다. 이 때 일본은 청국에게 조선의 내정개혁을 함께 할 것을 제의한다. 하지만 청국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결국 일본은 7월 23일, 경복궁을 불법 강점함으로써 조선에 친일내각을 수립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25일, 일본군은 풍도(인천 부근) 앞바다의 청국 함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불을 당겼다.
육전에서는 성환전투를 전후로 일본군이 연승하였다. 이후 9월 들어 평양전투, 황해해전 등에서 청군이 계속 패함으로써 전쟁의 향방은 완전히 일본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은 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에 합의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상실하고 만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랴오둥(요동) 반도를 얻는 듯했던 일본은, 전국이 애국주의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하지만 일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만주와 조선에 지배권을 강화하던 러시아의 압력에 직면한다.
당시 제정 러시아의 실세인 재무장관 비테(Vitte, Sergei Yulievich, 1849~1915)는 일본의 랴오둥 반도의 점령이 러시아의 철도를 목표로 하고 있으며 뤼순항 점령은 조선은 물론, 중국까지 일본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것을 크게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더불어 ‘동양의 평화를 위해’ 랴오둥 반도를 청국에 되돌려 줄 것을 일본에 권고하였다. 개항 초기, 서양 열강과 전쟁을 벌인 바 있는 일본으로서는 이들 세 나라와 전쟁을 하여 승산이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타이완을 얻었지만 랴오둥 반도를 상실하는 치욕을 맛본다. 한마디로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삼국간섭’은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고양시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타이완 식민통치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형 제국주의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특히 남중국과 동남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것은 청일전쟁의 큰 수확이었다.
한편 일본은 청국의 배상금을 모두 신무기 개발 등 군비증강에 투자함으로써, 러시아와의 숙명의 한판 승부를 착실히 준비해 나갔다.
일본은 1904년 2월 8일, 인천과 뤼순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 랴오둥의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전쟁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5년 3월, 펑텐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은 5월 28일, 쓰시마 해전에서도 승리함으로써 유럽의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세계열강들의 예상을 깨고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세계는 경악하였다. 러시아의 패배는 러시아 부르주아지의 허약성과 제국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드러내었다.
저임금과 기아의 고통에 신음하던 노동자·민중의 분노가 러일전쟁의 와중에서 폭발하였다. 전쟁 중에 발생한 ‘제1차 러시아혁명’은 러시아의 실상을 낱낱이 폭로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미국의 중재로 러시아와의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통해 조선의 지배권을 확고히 함은 물론, 뤼순·다롄을 포함한 랴오둥 반도와 사할린의 남쪽 절반을 차지하였다. 만주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좌절을 뜻함과 동시에 일본과 미국의 갈등을 예고하는 서막이었다.
러일전쟁에서의 러시아의 패배는, 유럽의 힘의 균형 상태에 균열을 일으켰다. 러시아의 후진성과 허약함이 드러나면서, 독일은 팽창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한층 더 가질 수 있었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파업이 수그러들자 노동자·민중에 대한 차르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차르는 군대를 이용하여 혁명의 지도자들을 탄압하였다.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를 비롯한 혁명 지도자들이 유형에 처해지거나 살해되었다. 1905년 혁명이 끝난 후, 스톨리핀(Pyotr Arkad’evich Stolypin, 1862~1911)은 혁명을 탄압하는 한편 자유주의적 개혁을 폭넓게 실시한다.
특히 1861년 농노해방 이후 농지자금대여법, 농민들의 토지소유를 허가하는 새로운 토지법을 제정함으로써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고자 했다. 사회주의 정당들이 의회에 진출하자 스톨리핀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조치는 혁명세력을 크게 긴장시켰다. 하지만 스톨리핀이 1911년 암살당함에 따라 차르 정부는 개혁을 지속시키지 못한 채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때, 누구도 대전쟁이 발발하리라고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칸 반도에서 벌어졌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1차 대전의 격발지인 발칸 반도는 ‘유럽의 화약고’라 불렸다. 발칸 반도는 인종·민족·종교 등의 복합적인 요인으로 말미암아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유럽의 두 강대국 독일과 러시아의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갈등의 두 축을 형성하였다.
1908년 오스만 제국에 혁명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강제 합병하였다. 결국 슬라브주의 국가인 불가리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가 ‘발칸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한다.
오스만 제국은 패배하였고, 이들 국가들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헌데 불가리아가 너무 많은 영토를 획득했다고 판단한 발칸 동맹국들은 곧 오스만 제국과 힘을 합쳐 불가리아를 공격한다. 이것이 바로 제2차 발칸 전쟁(1913년)이다. 불가리아는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접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말미암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세르비아의 전쟁은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으로 이어져 세계대전을 야기하였다.
1차 대전은 ‘산업전’이자 ‘총력전’으로, ‘대량살상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 충격적 사건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열강의 힘을 약화시키는 한편, 일본·미국 등의 새로운 강자를 역사에 등장시켰다. 그리고 러시아 제국에게는 재앙을 안겨주었다. 독일군의 공격에 서부공업지대를 상실한 러시아는, 물자부족으로 인한 노동자·농민의 불만에 직면하였다. 더군다나 빈농의 아들들인 병사들의 불만은 혁명의 실질적 토대가 되었다.
독일과 전쟁이 진행 중인 가운데 1917년 2월 22일, 빵을 요구하던 부녀자들의 시위가 ‘제2차 혁명’의 불씨를 지폈다.
사회주의 세력과 병사들이 이 시위에 가담함으로써 ‘제2차 혁명’이 발발한다. 2월 혁명으로 말미암아 임시정부가 들어섰고, 10월 무장봉기로 레닌과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제2차 러시아혁명’(레닌 주도의 볼셰비키혁명)은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대안으로서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희망으로 떠올랐다. 즉 갑오동학혁명으로 촉발된 제국주의 전쟁은 러시아혁명(1917년)으로 이어져 ‘서양제국주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역사의 동력’으로 작용한 것이다.
‘러시아혁명’과 ‘혁명정권’의 수립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제국주의 국가를 모델로 삼지 않더라도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이상을 품게 되었다. 한마디로 러시아 혁명정권은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민족해방의 방법과 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러시아 혁명정부는 곧 독일과 강화를 성사시켰다. 이는 국내질서를 안정시키고 혁명을 추진하고자 하는 뜻을 품고 있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전세는 연합국 측으로 급격히 기운다. 1918년 8월 8일, 영국·프랑스·미국의 20개 사단은 아미앵 근방의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였고, 이내 독일군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연합군은 전진을 계속했고, 독일군의 패배가 가시화됐다. 9월 30일 불가리아가 휴전협정에 조인했고, 이탈리아의 공격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휴전에 조인함으로써 제국은 해체되었다. 이에 따라 독일은 패전에 따른 위기가 찾아왔다. 11월 초 킬 지역의 해군 반란은 혁명이 현실화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결국 11월 10일 빌헬름 2세가 네델란드로 망명함으로써 제국은 붕괴된다. 1918년 11월, 새롭게 수립된 공화국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1차 대전이 종식되었다.
1차 대전이 끝난 후 일어난 3.1(1919년)운동을 이야기 할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의 ‘민족자결주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러시아혁명과도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러시아혁명’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볼 때만이, 20세기 역사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혁명으로 탄생한 레닌의 사회주의 정권은 무병합·무배상에 입각한 민주적 강화회담, 비밀외교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정부는 소수민족에 대한 자결권을 인정하여, 자국의 지배하에 있던 폴란드· 핀란드· 발트 3국의 독립을 배려하는 혁명적 조치를 단행한다. 한마디로 ‘러시아혁명’은 약소민족에게 새로운 희망의 새싹이자 민족해방운동의 분수령이 된 세계사적 사건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바로 이러한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의 도전에 대한 응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혁명 러시아의 수반, 레닌(Vladimir Il’ich Lenin, 1870~1924)의 견해를 수용하였다. 또한 국제연맹이 약소민족의 권리를 점진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파리 강화회의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원칙’에 따라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이 새롭게 독립을 이루었다. 이는 ‘러시아혁명’이 유럽에 미친 순기능이라 할 수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미국의 이익과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득권 유지라는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성을 지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당시 ‘민족자결권’이 ‘인권’의 문제로서 국제사회에 크게 이슈화되었다는 점이다.
1차 대전을 통해 일본은 산동성의 독일 조차지를 확보하는 등, 한층 더 강력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선다. 결국 일본의 침략열은 2차 대전으로 이어지는데, 2차 대전은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힘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창조적 파괴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갑오동학혁명과 1차 대전은 인류에게 깨우쳐 주고자 한 역사정신은 과연 무엇일까?
한마디로 약자(사회적 약자, 약소민족 등)의 자율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 진정한 영구평화의 길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사건이다. 약자를 배려하며 공생하는 길만이 평화의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고도서>
임영태 저, 『인류이야기 현대편 1』, 아이필드, 2004년
크리스 월리스, 정성묵 옮김, 『대통령의 위기』, 이가서, 2005년
미셸린 이샤이 저, 조효제 옮김, 『세계인권사상사』, 도서출판 길, 2006년
배기찬, 『코리아 다시 생존의 기로에 서다』, 위즈덤하우스, 2005년
나카츠카 아키라 저, 박맹수 옮김, 『1894년, 경복궁을 점령하라!』, 푸른역사, 2002년
첫댓글 감사합니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