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교회는 인간의 혼과 육신의 수준이기 때문에 아직 음부에서
헤매고 있는 교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지만 그 선 자리가 죄와 사망인데도
이를 알지 못하고 개굴개굴 거리며 방언을 한다거나 표적을 쫓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갈보리 십자가는 모든 사람이 다 볼 수 있지만 십자가의 도는 받은 자
곧 말씀을 통해 계시를 받은 자만의 내적인 비밀이기에 아무나의 것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영광스럽게 되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살후3:2)
6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을 위해 바울과 아볼로는 시범을 보입니다. 본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기록한 말씀의 한계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혼과 육체로 말미암아 음부의 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고린도교회를
바울은 끊임없이 영과 생명의 세계를 향해 위로 끌어 올리고 있는 겁니다.
우리도 혼과 육으로 음부에서 신음하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과 생명인
천국으로 올라가는 비밀을 배워 다시 내려와서 다른 사람에게 천국복음을
증거하여 우리가 있는 곳으로 그들을 이끌어 올립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역자들입니다. 고후8:9절 말씀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신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고, 성령으로
우리 육체 안에 오시듯이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같은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은 말씀 안에서 다 해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다스리듯이 우주를 주장하십니다. 해 아래서 새 것이
없다 하신 말씀처럼 지금 나타나고 있는 현상은 성경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문제는 과연 성도들이 성경 속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문제 때문에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말씀사역을 제쳐두고 구제를 하다가 말썽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바울과 아볼로가 본을 보인 것입니다.
칼빈도 교회는 성경 한 권과 하얀 벽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지요?
그러나 요즘의 교회는 각종 이벤트가 너무 많아 놀이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어 성경에 번역에 빠진 부분을 보충하면 ‘말씀 안에서 즉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하나가 되기 위하여 서로 대적하고 교만하지 말라’입니다.
이건 교회사역자들의 책임입니다.
교회 성장학이나 표적신앙 같은 것이 다 여기에 걸립니다.
만약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따르지 않는 것은 구원을 이룰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생활인데 이것이 안 되는 것은 그 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생활에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대적하지
말라하는 것은 서로 대적하는 것 자체가 바로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7절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누가 너희들을 그런 사람들로 추대하였느냐? 누가 그렇게 만들어 주더냐?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거늘 받은 것을 가지고 제 것인 양 뭘 자랑을 하느냐?
이 말씀은 이 시대의 교회의 지도자들도 대답해야 할 바울의 질문입니다.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와 상관없이 너희들은 왕 노릇을 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자고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배부르며 부요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지도자들을 따라
파벌이 생겼다가 그만 그 지도자를 업신여기는 상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에서도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교회는 유명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경적인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내가
너희의 왕 노릇하기를 원하노라’말합니다. 새 번역이 좀 애매하네요.
이 말은 나도 너희 들 중에 한 자리 끼워 달라는 어투입니다. 만약 인간이
왕 노릇하고 있는 교회에 하나님이 오셔서 나도 한 자리 끼워 줘 하시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교단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의 교회인 라오디게아교회는 주님이 바깥에 서서 한 자리 끼워 달라고
노크를 하셔도 그 안에서 스스로 배부르고 부요한 왕 노릇 하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9절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고린도교회에 한 자리 끼워달라는 어투로 비틀듯 말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자세를 말하므로 그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은 사도들 중에 끄트머리가 되도록, 죽일 자로 작정한 것 같이,
세계 곧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스데반과 같은 모습)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가졌다 할지라도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비참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소자입니다. 비록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의 비밀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육신의
왕 노릇을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10절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그리스도의 연고로...’ 바울은 그리스도 때문에 미련하고, 약하고, 가치 없이
비천하게 되었으나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혜롭고
강하고 영광 안에 있는 자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어쩌면 지금의 교회 모습으로
보입니다. 신앙의 귀족들이 되는 것이 복을 받은 사람들인 양 호도되고 있습니다.
11절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는 것보다 자신의 처신을 위해 발 뻗을 곳을
먼저 찾아다니는 사역자들에게 바울의 처지는 어떻게 비쳐질까요?
그러나 이것이 주의 종들의 일생입니다. 만약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셔서
역사하시는 부활의 능력과 생명의 공급이 없다면 어떻게 이 짐을 질 수 있을까요?
거처가 없다는 말은 참새도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주의 종들은
육신이 거처할 집도 마땅찮습니다. 동가식서가숙합니다. 더군다나 그를
받아 주고 영접하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말 초상집 강아지 취급입니다.
12절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직접 수고하여 일하는 자비량 선교입니다. 후욕을 당한 즉 축복합니다.
이건 보통의 속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박해를 당한즉 참고
하는 말은 이를 수용하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죽이고 남을 살려내는 일에
주의 종들을 그때나 이제나 하나님은 이렇게 모질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 주께서 주시는 우리의 기쁨이 결코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13절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비방을 당한 즉 권면하니, 비방은 두 가지 말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아첨하고 뒤에서는 딴 말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은 흡사 버려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만물의 찌꺼기는 세상의
쓰레기 취급을 받는 겁니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걸어 갈 길입니다.
군대에서 공수훈련을 받는 중에 막타워에서 뛰어 내릴 때에 생명줄이 걸려 있음을
확인하고도 자신 있습니까 조교가 물으면 자신 있습니다 대답을 하고는 뛰어
하면 머뭇거리다가 뒤를 밀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활강을 한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다 하고 목청껏 노래하고는 현실 속에서 오금이 저렸던 제가 바로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