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점심때쯤 중학교 동창 친구를 만났다. 전날 대학친구들과 산에 가기로
약속을 해 놓고 있는데 오후 늦게 '내일 시간이 있느냐?'며 전화를 걸어왔던 것이다.
오랫만에 마산에 사는 옛 친구가 찾아온다는데 약속이 있다고 할 수가 없었다.
산행은 정기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취소하면 된다고 하면서 내려오라고 하여
1시에 2호선 지하철 수영역 만남의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그와는 마산동중 다닐 때 같은 반이었다. 그는 야구선수로 시합을 나갈 때면 수업을
빠지게 돼 필기를 내게 부탁하곤 했었다. 운동선수는 학교차원의 연습시나 시합때엔
수업에 불참하더라도 인정해 주었으므로 수업진도와는 상관이 없었으나 그는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고 운동은 취미라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그리하여 그는 중학 졸업후
야구부가 있는 마산상고를 진학하여 피처로 전국체전 고교야구시합에서 우승한 적도 있었다.
그는 집이 가난하여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누나 밑에서 점원을 하고
있었다. 서면 로터리부근의 금성센터 서면지점이었다. 당시 전자제품이 불티나듯 팔릴
때였고 월남 파병갔다가 귀국하는 군인들이 미군PX 테켙을 가져오면 국산 TV로 바꾸어
주던 때였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TV보급이 안된 상태여서 당시 인기프로인 '여로'를
방영할 시간대엔 점포앞에 구경꾼들이 수십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나는 집에서 12시반에 나와서 지하철을 타고갔더니 그는 미리 도착해 있었다. 3사출신인
예비군중대장도 보고 싶다고 하여 같이 만났다. 마산에서 올라온 윤사장과는 몇년만이다.
셋이서 만나 인근의 포항물회집으로 들어가 점심 식사를 하면서 옛날 추억을 떠올리며
함께 웃었다. 나는 대학시절 기숙사에 있다가 토요일 외출하면 윤사장을 찾았고 점포가
문을 닫을 시간까지 같이 있다가 퇴근하면 저녁식사부터 다음날 해장까지 그가 책임졌다.
지금 그의 근황은 회사에서 나온 이후 가야고분군 유물조사단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일년중 1,2월 7,8월 학생들 방학기간중에 쉬고 토,일요일에 쉰다고 한다. 그의 부인은
유방암이 전이가 돼 작년에 담도암 수술을 하고 방사선 항암치료를 14번 마쳤다고 한다.
방사선 항암치료는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남자들도 받기 힘든 치료인데 자기 부인은
의지로 버텨내고 있다고 했다. 후유증으로 머리가 다 빠져 씬중이 됐다며 웃었다.
그는 부인이 항암치료로 고생을 하고 있는데 제사를 모실 수가 없어 다 없애 버렸다고 한다.
딸만 넷인 그는 우리가 죽고 나면 대가 끊기므로 제사를 모실 사람도 없는데 돈을 주고
절에 위패를 모신다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요즘 일반 가정에서도 제사를 모시지 않고
절에 올리거나 아예 없애 버리는 가정도 많다고 한다. 꼰대처럼 기제사를 꼬박꼬박 지내는 나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