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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高麗), 송(宋) 때 아세아(亞細亞)의 주인(主人) [2편]
2023년 11월 11일
○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南宋 : 确庵、耐庵】”은, “宣和七年 : AD 1,125년”에 송(宋)나라 사신(使臣) “허항종(許亢宗)”이 “여진(女眞) 금(金)”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온 여정(旅程)을 정리(整理)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정강비사(靖康稗史) 야사(野史) 중에서 첫 번째의 것이다.
『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서 기록(記錄)하고 있는 그 지형지세(地形地勢)를 그대로 찾아 재현(再現), 따라가 보자』라는 것이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그대로 말이다. [제1편에 이어 2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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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第二十二程:自劉家莊一百里至顯州。/ ●出榆關以東行,南瀕海,而北限大山,書皆粗惡不毛。至此,山忽峭拔摩空,蒼翠萬仞,全類江左,乃醫巫閭山也。成周之時,幽州以醫巫閭作鎮,其遠如此。契丹兀欲葬於此山,離州七里別建乾州以奉陵寢,今書為金人毀掘。
➊《出榆關以東行,南瀕海,而北限大山,書皆粗惡不毛.至此,山忽峭拔摩空,蒼翠萬仞,全類江左,乃醫巫閭山也. : 유관(楡關)【산해관(山海關)】에서 나와 동쪽으로 가면. 남(南)쪽으로는 바닷가이고, 북(北)쪽은 큰 산(山)에 한계(限界)하는데, 모두 조악(粗惡)한 불모지다. 산(山)이 갑자기 가파르고 허공을 다듬은 듯 싱싱하고 푸르른 만인(萬仞) 높이의 산(山)에 다다르는데, 모두 강(江)의 좌(左)측에 있는데 이게 의무려산(醫巫閭山)이다.》라고 하였다.
※ 인(仞) : 중국어 사전 : 길이의 단위로, 옛날 8자 혹은 7자가 ‘1仞’이었음
고려대 중한사전 : 옛날에 1인(仞)은 7척(尺) 또는 8척에 해당함[1척(尺) : 1자]
고전번역원db : 주(注) / 1인(仞)은 8척(尺)
➠ 1척(자) / 30.3㎝ × 8인(仞) = 1인(仞) : “약 2.424m”를 말한다.
〈만인(萬仞)은, 곧 약(約) 24,000m〉 높이를 말한다. 따라서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만인(萬仞)’이라고 표현(表現)한다면, 24,000m의 높은 산(山)이었다는 이야기고, 삐쭉삐쭉 솟은 아주 높은 산(山)을 표현할 때 ‘만인(萬仞)’이란 표현(表現)을 한다』라고 하면 :
오늘날의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은 ‘866m’의 ‘흔하디흔한 산(山)’이란 것을 염두(念頭)에 둔다면 : 이건 100% 조작(造作)된 지세(地勢)다.
그러나 당시(當時)의 송(宋)나라 사신(使臣) “허항종(許亢宗)”이 무엇 때문에 거짓을 기록(記錄)한 것일까? 허항종(許亢宗)이 그렇게 기록(記錄)한 것은, 본인(本人)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대로 한 것일 뿐이다. 즉(卽) 후대(後代)들이 편집(編輯), 조작(造作)해버린 것이다.
➨ 당시(當時) 송(宋)나라 사신(使臣) “허항종(許亢宗)”이 갔던 곳은 전혀 다른 곳이었다는 증거(證據)요, 후세(後世)인들에 의해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내용(內容)이다.
강(江)의 좌(左) 또는 우(右) 어느 곳에 있었든 간에 중요(重要)한 것은, 『의무려산(醫巫閭山)은 해발고도(海拔高度) 866m 정도(程度)의 흔하디흔한 그저 그런 산(山)일 뿐이다』라는 사실(事實)이다. “24,000m 높이라고 말할 정도로 거대한 산(山)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그저 흔하디흔한 조그마한 산(山)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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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第二十四程:自兔兒渦六十里至梁魚務。/ 離兔兒渦東行,即地勢卑下,盡皆萑苻沮洳積水。[有河]名曰遼河。瀕河南北千餘里,東西二百里,北遼河居其中,其地如此。隋唐征高麗,路皆由此。秋夏多蚊虻,不分晝夜,無牛馬能至。行以衣包裹胸腹,人皆重裳而披衣,坐則蒿草薰煙稍能免。務基依水際,居民數十家環繞。彌望皆荷花,水多魚。徘徊久之,頗起懷鄉之思。
➨ 《是曰,凡三十八次渡水,多被溺。[有河]名曰遼河。瀕河南北千餘里,東西二百里,北遼河居其中,其地如此。隋唐征高麗,路皆由此。: 때에, 38차에 걸쳐 물을 건넜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물에 빠질뻔했다. 하(河)가 있는데, 이름이 요하(遼河)다. 하천(下川)이 남북(南北)으로 천여(千餘) 리(里) 이어져 있고, “동서(東西) 2 백리(百里)고”, 북(北)쪽에는 요(遼)들이 하천의 그 가운데에서 사는데, 그 땅이 이와 같다. 수당(隋唐)이 고려(高麗)를 칠 때, 길이 모두 이곳으로 통하였다.》라고 하였다.
➠ 요하(遼河) [출처 : 중국어 위키백과]
➊ 요하(遼河)는 전체(全體)가 “1,390km”에 걸쳐 있는 하천(河川)이라고 하는데, 요하(遼河)의 폭(幅)이 “동서(東西) 이백(二百) 리(里) 어마어마한 하천(河川)이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記錄)이다.
이런 하천(河川)은 요녕성(遼寧省)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수많은 연행사신단(燕行使臣團)의 기록(記錄)을 살펴봐도 이런 기록(記錄)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조그만 하천(河川)이었다”라고 하였고, 우리나라의 “임진강(臨津江)” 정도의 강(江)이었다는 것이다.
➋ 경자연행잡지(庚子燕行雜識) 잡지(雜識)[下] : 《白河,遼河最大。幾如我國臨津。其餘十水。只如猪灘。: 백하(白河)와 요하(遼河)가 가장 커서 거의 우리나라 임진강(臨津江)과 같고, 그 나머지 10개 물은 저탄(猪灘)만 하였다.》
반도(半島) 임진강(臨津江)의 폭이 아무리 넓고 넓어도 2 백리(百里)가 될 수 있을까? 위에서 말하는 “요하(遼河)”는 “전혀 다른 하천(河川)을 말하는 것이다”
➌ 계곡집(谿谷集) 제30권 / 칠언율(七言律) 1백 60수(首) : 심양(瀋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두 수[聞瀋陽不守 二首] : 《遼河消息不堪聞, 羯虜南來氣若雲 : 요하의 소식을 어찌 차마 들으리요, 오랑캐들 구름처럼 남침했다네》
기존(旣存)의 역사통설(歷史通說)인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을 추종(追從)하고 떠받들고 있는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들이 만든 조선사(朝鮮史)에서는 : 말하기를, 『심양(瀋陽)의 동(東)쪽인 백두산(白頭山) 동남(東南)쪽에서 “후금(後金)”이 시원(始原)하며, 그곳이 “만주(滿洲)”라고 하면서 서진(西進)했다』라고 말하는 것인데 :
어떻게 “후금(後金)”이 요하(遼河) 또는 심양(瀋陽)으로 남하(南下)를 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남하(南下)”를 했다는 말은, 후금(後金)은, 심양(瀋陽)과 요하(遼河)의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있었어야 남하(南下)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오랑캐를 말하기를 “갈노(羯奴)”라고 하였는데, “갈노(羯奴)”는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소그디아’ 땅에 살고 있었던 “갈족(羯族)=속특(粟特)”을 말하는 것이다. 【소그디아나[Sogdiana] :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양강(兩江) 상류(上流)의 중간을 동서(東西)로 흐르는 ‘제라프샨강’ 유역(流域)의 옛 이름이다.】
➍ 계곡집(谿谷集)제33권 / 육언(六言) 10수(首) 규정(閨情) : 《遼 河 百 戰 風 沙 : 요하의 수많은 전쟁터엔 모래바람 자욱하리》
〈요하(遼河)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흐르는 하천(河川)이었거나 또는 사막지대(沙漠地帶)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➎ 선화봉사고려도경 서(宣和奉使高麗圖經 序) : 《矧 惟 高 麗. 在 遼 東 : 고려는 요하(遼河)의 동쪽에 있다.》하고 하였으니, :
송(宋)나라 때도 “고려(高麗)는 요하(遼河)의 동(東)쪽에 있었다”라는 말은, 기원전(紀元前 : BC) 1,100년대의 주무왕(周武王) 때와 조선(朝鮮) 영토(領土)의 서계(西界)는 변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궁화(無窮花) 삼천리(三千里) 화려(華麗)한 강산(江山)”이라는 애국가(愛國歌)의 한 구절(句節)은 어디에 바탕을 둔 것인가?
요하(遼河)로부터 “동서(東西)”는 : 요하(遼河), 심양(瀋陽), 함북(咸北)의 청진(淸津)까지 540km로, 1,350리요, 남북(南北)은 : 반도(半島) 남안(南岸)으로부터 흑룡강(黑龍江)까지 2,000km, 5 천리(千里)가 넘는 땅이다. 이곳은 거대(巨大)한, 광활(廣闊)한 땅이다.
단순계산(單純計算)을 해봐도 한반도(韓半島)의 5배 이상(以上)이 되는 광활(廣闊)한 땅이다. 이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요하(遼河)는 오늘날의 요하(遼河)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證明)하는 것이다.
➏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제6권 / 기미년(1799, 정조 23) 2월 29일 : 《이 물이 또한 요하(遼河)라 하니, 넓이가 우리나라 노량진만 하다.》 :
노량진이라면 아마도 한강(漢江)의 남안(南岸)을 말하는 것 같은데 이곳 역시(亦是) 제방(堤防)을 쌓기 전(前)이라고 하더라도 2 백리(百里)는 고사하고, 수십(數十) 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현상(現狀)일 게다.
➐ 연행일기(燕行日記) 제1권 / 산천 풍속 총록(山川風俗總錄) : 《白河‚ 遼河最大。幾如我國臨津。: 백하와 요하(遼河)가 가장 크며 거의 우리나라의 임진강과 비슷하다.》
위의 글 ➋와 똑같은 경우(境遇)로, 임진강(臨津江)의 강폭(江幅)은 아무리 넓게 잡아도 수십(數十) 리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곧 “송(宋)나라 사신(使臣) 허항종(許亢宗)”이 건넌“요하(遼河)”는 전혀 다른 하천(河川)을 설명(說明)하고 있다는 증거(證據)다.
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66권 / 입연기 상(入燕記上) 정조 2년 4월 24일 : 《自孤家子。至周流河堡。皆黃沙。是日大風。終日沙漲連天。人幾不得行。巨流河距孤家子八里。一名遼河。截沙而流。水甚渾濁。僅容一舟一刺棹而已。抵于彼岸。箕子所封。以此河爲界。 : 고가자(孤家子)로부터 주류하보(周流河堡)까지엔 모두 황사(黃沙)가 깔렸다. 이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종일 모래가 날려 하늘에 꽉 찼으므로 사람이 길을 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거류하(巨流河)는 고가자에서 8리 지점에 있는데 요하(遼河)라고도 한다. 모래를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물이 매우 흐렸고, 너비도 겨우 배 하나를 용납할 정도였다. 그래서 한 번 노를 저으면 벌써 건너편 언덕에 닿게 된다. 기자(箕子)가 봉함을 받은 땅은 이 거류하를 경계로 하고 있다.》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입연기(入燕記)에서 말하는 “요하(遼河)”는 :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흐르는 하천(河川)으로, 비가 오지 않으면 조그만 하천(河川)이나 우기(雨期) 때 “비”가 오면 넓은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흐르는 물이 지대가 낮은 건천(乾川)으로 모여들어 큰 하천(河川)으로 변해버리는데, 이건 사막지대(沙漠地帶)라는 특이(特異)한 지세(地勢)에서의 자연스러운 현상(現狀)으로 사막지대(沙漠地帶)에서 우기(雨期)를 맞아 비가 내리는 것을 본 사람은 금방(今方)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모래를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물이 매우 흐렸고』: 여기서 중요(重要)한 대목은 “가로질러”라는 뜻이다. ‘가로질러’는 곧 ‘횡단(橫斷)하다’라는 뜻으로 원문(原文)에서의 “절(截)”자(字)는 “끊을 절(截)” 자(字)로 쓰인다.
사막지대(沙漠地帶)의 모래밭(沙場)을 가로질러 흐르기 때문에 토분(土粉) 때문에 물빛이 흐리고, 유속(流速)이 빠르지 못하고 느린 것을 표현(表現)한 것이다. 곧 “요하(遼河)”는 사막지대(沙漠地帶) 한가운데를 흐흐는 하천(河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요하(遼河)” 유역(流域)은, 결코 사막지대(沙漠地帶)가 될 수 없는 지형(地形)을 가진 곳이다.
전혀 다른 하천(河川)을 말하고 있다. 연행일기(燕行日記)는 직접(直接) 보고, 들은 내용(內容)을 기술(記述)한 것이고, 특히 사막지대(沙漠地帶)와 같은 특이(特異) 지형(地形)은 직접(直接) 경험(經驗)한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信賴性)은, 100%라고 할 수 있다.
➨➨➨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은 :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논함에 있어 고전(古典) 원전(原典)에서의 ‘사막지대(沙漠地帶)’를 눈여겨봐야 하는데, 「오늘날의 하란산맥(賀蘭山脈) 서(西)쪽 지대(地帶)인 하서(河西) 땅으로부터 지중해(地中海) 동안(東岸)까지에 존재(存在)했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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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第二十九程:自鹹州四十里至肅州,又五十里至同州。 : 제 29 정(程) : 함주(鹹州)에서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다다르고, 또 50리에 이르면 동주(同州)에 닿는다. 離鹹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함주(鹹州)를 떠나 곧 북(北)쪽으로 가면, 주(州) 땅이 평양(平壤)인데, 그곳에 사람들이 취락을 이루고 살고 있다. 땅이 마땅하니 기장을 새로 심고 거의 미쳤다. 東望天山,金人雲彩,此新羅山,山內深遠,無路可行。其間出人參、白附子,深處與高麗接界。山下至所行路可三十里。: 동(東)쪽으로 천산(天山)이 보이는데, 금인(金人)들은 운채[雲彩 : 구름 색깔]라고 하는데, 이것이 신라산(新羅山)이다. 산(山) 안(內)은 깊고 아득하며, 길은 없으나 갈 수는 있다. 그곳에서는 인삼(人蔘), 백부자(白附子)가 나는데, 고려(高麗) 접계(接界)의 깊은 곳에서 난다. 산(山) 아래로부터 갈 수 있는 길이 30리이다.》라고 하였는데,
➊ 『천산(天山)은 곧 신라산(新羅山)이다.』 이게 아마도 인삼(人蔘)과 백부자(白附子)가 나고 고려(高麗) 접계(接界)에서 난다고 하니 혹(或) “백산(白山)인 백두산(白頭山) 즉 장백산(長白山)”을 말하고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나 기록(記錄)에는 “천산(天山)은 곧 신라산(新羅山)”이라고 하였다.
➨ ‘천산(天山)이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이 될 수 있을까?’ 백두산(白頭山)이나 장백산(長白山)을 신라산(新羅山)이라고 부른 적이 있는가? 그런 유형(類型)의 기록(記錄)은 아직 발견(發見)되지 않았다.
‘기장(黍)을 심었다’라는 말은, 그곳 땅이 매우 추운 땅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➋ 《離鹹州即北行,州地平壤,居民所在成聚落。新稼殆遍,地宜種黍。함주(鹹州)에서 곧 북(北)쪽으로 가면, 주(州) 땅이 평양(平壤)인데, 그곳에 사람들이 취락(聚落)을 이루고 살고 있다. 땅이 마땅하니 기장을 새로 심고 거의 미쳤다.》라고 하였는데,
평양(平壤)은 당시(當時)의 사정(事情)으로 볼 때 단 한 곳밖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평양(平壤)”이라는 지명(地名)은, 늘 고구려(高駒驪)와 함께 존재(存在)했기 때문이다. 즉(卽) “고려(高麗) 서경(西京)이다” 그 외(外)엔 “평양(平壤)”이라는 지명(地名)이 존재(存在)할 수 없다.
(8) 【第二十九程, 繼續】:《南有渤海,北有鐵離、吐渾,東南有高麗、靺(從韋從末)鞨,東有女真、室韋,東北有烏舍,西北有契丹、回紇、党項,西南有奚,故此地雜諸國風俗。: 남(南)에는 발해(渤海)가 있고, 북(北)에는 철리(鐵離)와 토혼(吐渾)이 있고, 동남(東南)에는 고려(高麗)와 말갈(靺鞨)이 있고, 동(東)쪽에는 여진(女眞), 실위(室韋)가 있으며, 동북(東北)엔 오사(烏舍)가 있고, 서북(西北)에는 글란(契丹)·회흘(回紇)·당항(党項)이 있으며, 서남(西南)에는 해(奚)가 있는데, 원래 이곳 땅은 제국(諸國)의 풍속이 뒤섞인 곳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북(東北)이나 요녕성(遼寧省) 북방지대(北方地帶)에 ‘토혼(吐渾)=토곡혼(吐谷渾)’이나 ‘당항(党項) 또는 회흘(回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천부당만부당(千不當萬不當)한 이야기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융(西戎)의 종족(種族)들로 서토(西土) 땅에 사는 종족(種族), 부족(部族)들이기 때문이다”
「토곡혼(吐谷渾)은, 청해(靑海)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및 신강성(新彊省)에, 당항(党項)은 하서회랑(河西回廊)과 알타이산맥(Altai山脈)에, 회흘(回紇)은 장안(長安)으로부터 7,000리 또는 9,000리 또는 16,900리 떨어져 있었다.」라고 하였다.
위에서 말하는 ‘천산(天山) 곧 신라산(新羅山)’이 정확(正確)하게 어떤 산(山)을 지칭(指稱)하고 있는지는 더 연구(硏究)해야 할 사안(事案)이지만 위의 원문(原文) 기록(記錄)으로 보면 최소(最小)한 “하서회랑지대(河西回廊地帶)로부터 그 서(西)쪽 신강성(新彊省)까지에 이른다.”라고 보아 지는데,
또 “남(南)쪽에 발해(渤海)가 있다”라는 기록(記錄)에 따르면 : 오늘날의 타클라마칸사막(Takla Makan Des=塔克拉瑪干沙漠)의 동(東)쪽 백룡퇴(白龍堆)로부터 하서회랑(河西回廊) 사이에 있었다고 추정(推定)되는 일천(一千) 여리(餘里)의 “내륙해(內陸海)”를 지칭(指稱)한다고 유추(類推)할 수 있다.
이곳은 과거(過去)에 하(河)가 흐르던 곳으로, 이곳에 일천(一千) 여리(餘里)에 이르는 거대(巨大)한 내륙해(內陸海)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推定)되는 곳이다. 추정(推定)의 근거(根據)는, 이곳에 일천(一千) 여리에 달하는 내륙해(內陸海)가 있었다는 통전(通典) 서융(西戎)의 기록(記錄)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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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第三十三程:
第三十三程 : 自黃龍府六十里至托撤孛堇寨。/ 府為契丹東寨。當契丹強盛時,虜獲異國人則遷徙雜處於此。: 제 33 정(程) : 황룡부(黃龍府) 60리에 다다르면 탁철패근채(托撤孛菫寨)에 닿는다. 부(府)는 글란(契丹)의 동(東)쪽 성채다. 글란(契丹)이 강성(强盛)할 때에, 포로(捕虜)로 잡은 이국인(異國人)들을 옮겨 잡거(雜居)시킨 곳이다. 南有渤海,北有鐵離、吐渾➊,東南有高麗、靺(從韋從末)鞨,東有女真、室韋,東北有烏舍,西北有契丹、回紇、党項,西南有奚,故此地雜諸國風俗. ➋ : 남(南)쪽에는 발해(渤海)가 있고, 북(北)쪽에는 철리(鐵離), 토혼(吐渾)이 있으며, 동남(東南)쪽에는 고려(高麗)와 말갈(靺鞨)이 있고, 동(東)쪽에는 여진(女眞), 실위(室韋)가 있고, 동북(東北)에는 오사(烏舍)가 있고, 서북(西北)에는 글란(契丹), 회흘(回紇), 당항(党項)이 있으며, 서남(西南)에는 해(奚)가 있는데, 원래 이곳 땅은 제국(諸國)의 풍속이 뒤섞인 곳이다. 凡聚會處,諸國人語言不能相通曉,則各以漢語為證,方能辨之,是知中國被服先王之禮儀,而夷狄亦以華言為證也。》
위의 본문(本文)은, “송(宋)”나라의 사신단(使臣團)이 전진(前進)하고 있는 곳에서의 지형지리(地形地理)【지세(地勢)】를 설명(說明)하고 있다. 위의 본문(本文)에서 가장 중요(重要)한 대목은 ‘➊’의 기록(記錄)인데 : 『남(南)쪽은 “발해(渤海)”이고, 북(北)쪽에는 “철리(鐵離)와 토혼(吐渾)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토혼(吐渾)”은 “토곡혼(吐谷渾)”을 말하는 것으로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이들이 청해(靑海)를 중심(中心)으로 있었던 옛 요동선비(遼東鮮卑) “모용씨(慕容氏)”의 나라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說明)대로라면 : ① 송(宋)나라 때의 “발해(渤海)”는 곧 “청해(靑海)”가 되는 것이다. ② 그렇지 않다면 “토곡혼(吐谷渾)”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에 존재(存在)해야 한다.
‘통전(通典) 토곡혼(吐谷渾)’ 편을 보면 : 토곡혼(吐谷渾)은 본시 요동선비(遼東鮮卑)로써, 서진(西晉) 때, 선비(鮮卑) 추장(酋長)의 서자(庶子)인 “토곡혼(吐谷渾)”이 적자(嫡子)인 모용 외(慕容廆)와 결별(訣別)하고, 그를 따르는 약 7백(七百) 여호(餘戶)와 함께 서(西)쪽으로 가 “음산(陰山)에 의탁(依託) 기대었다”【於 是 擁 馬 西 行, 乃 西 附 陰 山.】하였다.
여기에 등장(登場)하는 “음산(陰山)”은 어디에 있는 산이냐? 하는 것이다. “음산(陰山)”이라는 산(山)이 무슨 살아 숨 쉬며 스스로 이동하는, 움직이는 생물체(生物體)도 아닌 다음에야 이곳저곳에 “음산(陰山)”이라는 산(山)이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사가(史家)들이 맘대로 여기저기에 “음산”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바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을 위해서다.
“음산(陰山)”이라는 “산(山)의 이름”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다만 후대(後代)인들에 의해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이곳저곳으로 전파(傳播)되었을 뿐이나, 본시(本是)의 “음산(陰山)”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곧 “천산산맥(天山山脈) 박격달봉(搏格達峰 : 5,445m)”이다.
그러나 “토곡혼(吐谷渾)”은, 이곳으로부터 다시 처음으로 서(西)쪽으로 가 “롱서(隴西)”를 넘어갔다고 하였으니,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으로 서진(西進)했다”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 송(宋)나라 이후(以後), 수백(數百) 년(年)이 흐른 뒤에도 “토곡혼(吐谷渾)”이 “명사(明史) 삼위(三衛) 열전(列傳)”에서 다시 살아난다“라는 것을 알면 이게 기막힌 우연(偶然)일까? 역사(歷史)에서 우연(偶然)이란 결코 존재(存在)할 수 없다.
《明史列傳 第216 外國9 : 瓦剌.朵顏(福余.泰寧) :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地也.元為大寧路北境 : 타안(朶顏), 복여(福餘), 태녕(泰寧)은, 고황제(高皇帝)가 설치한 삼위(三衛)이다. 그 땅(地)은【삼위(三衛)를 설치(設置)를 땅을 말하는 것이다.】, 올량합(兀良哈)이 있는 흑룡강(黑龍江)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 한(漢)때의 선비(鮮卑), 당(唐) 때의 토곡혼(吐谷渾), 송(宋) 때의 글란(契丹). 모두 그 땅이다. 원(元)나라의 대녕로(大寧路) 북경(北境)이다》라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 여기에서 “흑룡강(黑龍江)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이라는 두 구절(句節)을 따로 떼어 놓고, 이곳 땅이 바로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동(東)쪽과 흑룡강(黑龍江) 이남(以南)의 땅이라고 해설(解說)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선비(鮮卑)의 땅이었는가? 글란(契丹)의 땅이었는가? 토곡혼(吐谷渾)의 땅이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와 같다”
토곡혼(吐谷渾)의 땅은 : ① 청해(靑海)를 포함한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②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천산산맥(天山山脈)과 그 서(西)쪽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이다.
➨ 송(宋)나라 사신단(使臣團)은 『 ③ 첫째로는 : 하서회랑(河西回廊)을 지나 청해(靑海)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지나가고 있다 ④ 두 번째로는 : 음산(陰山)인 천산산맥(天山山脈) 남북(南北) 안(岸)을 지나가고 있다』라는 “두 가지 여정(旅程)”으로 압축(壓縮)될 수 있다.
➋ 《東南有高麗、靺鞨,東有女真、室韋,東北有烏舍 : 동남(東南)에는 고려(高麗), 말갈(靺鞨)이 있고, 동(東)쪽으로는 여진(女眞), 실위(室韋가 있고, 동북(東北)쪽에는 오사(烏舍)가 있다. 西北有契丹、回紇、党項,西南有奚,故此地雜諸國風俗 : 서북(西北)에는 글란(契丹), 회흘(回紇), 당항(党項)이 있고, 서남(西南)에는 해(奚)가 있어, 고로 이곳 땅은 여러 나라의 풍속(風俗)이 섞여 있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회흘(回紇) : 고전(古典)을 들먹일 필요(必要)도 없는 “서방(西方), 북(北) 구라파(歐羅巴) 땅의 종족(種族)”이다. 통전(通典)에 의하면 장안(長安)에서 10,000리 16,500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당항(党項) : 역시(亦是) 서융(西戎)이다.
○ 즉(卽) 당시(當時)의 송(宋)나라 사신(使臣) 허항종(許亢宗)이 전진(前進)하고 있을 때의 상황(狀況)을 묘사(描寫)한 것이 바로 “東南有高麗、靺鞨,東有女真、室韋,東北有烏舍 : 동남(東南)에는 고려(高麗), 말갈(靺鞨)이 있고, 동(東)쪽으로는 여진(女眞), 실위(室韋가 있고, 동북(東北)쪽에는 오사(烏舍)가 있다. 西北有契丹、回紇、党項,西南有奚,故此地雜諸國風俗 : 서북(西北)에는 글란(契丹), 회흘(回紇), 당항(党項)이 있고, 서남(西南)에는 해(奚)가 있어, 고로 이곳 땅은 여러 나라의 풍속(風俗)이 섞여 있는 곳이다”라는 곳이다.
이러한 땅은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심양(瀋陽)이나 영고탑(寧古塔) 등지(等地)로 전진(前進)한다는 가정(假定)하에 그 방향에 있는 나라, 종족, 부족들을 보면 가당치 않은 “곳”이다.
어느 곳에서 든 :
➊ 동남(東南)은 고려(高麗)다. 허나 ‘말갈(靺鞨)과 실위(室韋)’는 존재(存在)할 땅이 없다.
➋ 서북(西北)쪽은 내몽고(內蒙古)와 울란바토르(庫倫)이다. 회흘(回紇)이나 당항(党項)은 서(西)쪽으로 7-9 천리(千里)쯤에 있다.
서남(西南)쪽에 해(奚)가 있다는 말은 : 요동반도(遼東半島)·압록강(鴨綠江) 땅에 해(奚)가 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된다. 곧 황당(荒唐)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➌ 가능성(可能性) 단 하나, 즉 『‘송(宋)나라 사신(使臣) 허항종(許亢宗)이 “서북방(西北方)∼북방(北方)을 향(向)하여 전진(前進)하고 있을 때면 가능(可能)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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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금(後金)”은 결단(決斷)코 “동북방(東北方)”에 존재(存在)할 수 없는 종족(種族)이며, 부족(部族)이다.
동북방(東北方) 땅 어디에 “숙신(肅愼), 말갈(靺鞨), 여진족(女眞族)이 있나? 이곳에 있는 인종(人種)은 대부분(大部分) 우리와 똑같은 황인종(黃人種) 계열(系列)의 인종(人種)들 뿐이다.”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은 말하기를 : “청인(淸人)은 우리와 다르게 생겼는데, 신체(身體)가 풍후(豐厚)하다”라고 하였다.
『마자르[Magyar]가 바로 말갈(靺鞨)이다.』 인터넷[Inter-net]에서 “항가리(Hungarian)”을 검색(檢索)해 보면 그들의 “형상(形相)=형상(形象)”을 바로 볼 수 있다. 그들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니다.
바로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청인(淸人)들을 보고 : 그들의 ’형상(形相)=형상(形象)‘에 대해 말한 그대로 “신체가 크고 풍후(豐厚)하다”라고 하였다. 마자르[Magyar]가 바로 말갈족(靺鞨族)이다. 말한 그대로다.
수천년(數千年) 전(前)부터 학자(學者)들이나 정객(政客)이나 군주(君主)들은 말했다. “숙신(肅愼)은, 북방(北方)∼서북방(西北方)∼서방(西方) 간(間)에 있었다”라고 말이다.
● 찬란(燦爛)한 문명(文明)과 함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를 자랑하던 “조선왕조(朝鮮王朝)”를 아주 없앨 수는 없었던 당시(當時)의 서세(西勢)는,
하수인(下手人)으로 일제(日帝)와 손을 잡고, 또 일제(日帝)는 손문(孫文)을 포섭(包攝)하고, 국세(國勢)가 약화(弱化)되어 통치력(統治力)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던 무주공산(無主空山)과 같았던 “반도(半島) 땅”으로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배치(配置)해 버리고, 이에 맞춰 ’일제(日帝)와 손문(孫文)‘은 대표적(代表的)인 많은 고전(古典) 사서(史書)를 새롭게 편집(編輯) 만들기 시작하였고, 이는 지금도 진행(進行) 중이다.
이때 일제(日帝)에 포섭(包攝)되고 세뇌(洗腦)된 반도(半島) 출신(出身)의 젊은이들은 “부역매국노(附逆賣國奴)”라는 충견(忠犬 : 사냥개)이 되어 일제(日帝)의 주문(注文)대로 역사조작(歷史造作)을 한 것이다.
이러한 실정(實情)이다 보니 :
① “반도(半島) 땅”의 지형지세(地形地勢)와 사서(史書) 속의 지형지세(地形地勢), 역사해설(歷史解說)이 서로 배치(背馳)되고, 뒤죽박죽되고,
② 동서남북(東西南北) 방위(方位)가 엉뚱하여, 남(南)쪽의 도성(都城)이 동경(東京)이 되고, 북(北)쪽의 도성(都城)은 서경(西京)이 되는 황당무계(荒唐無稽)한 일이 벌어지고,
③ 반도(半島)라는 한정(限定)된 땅(地)이 고무풍선처럼 커졌다가 다시 줄어들고, 사막지대(沙漠地帶)가 펼쳐지고, 기후(氣候)가 전혀 달라 산(山)에 집을 짓고 사는 코미디(Comedy)를 연출(演出)하고, 호(湖), 택(澤), 늪지가 많은 나라로, 장독(瘴毒:瘴氣)이 기승(氣勝)을 부리는 땅으로 변(變)해버리고,
④ 리수(里數)가 맞지 않아 한양도성(漢陽都城)으로부터 동(東)쪽으로 수천(數千) 리도 갈 수 있고, 남(南)쪽으로는 5, 6 천리(千里)를 갈 수 있어, 진화(進化)에 진화(進化)를 거듭한 변종(變種) 인간(人間)들이 탄생(誕生)되는 등의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 모두는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여 생기는 혼란(混亂)스러움이다. 뭐가 뭔지 판단(判斷)할 수 없을 정도(程度)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식민통치(植民統治), 식민지(植民地)로 천손(天孫)들의 지배(支配)를 받은 탓일까? 아니면 반도(半島) 땅에 천손(天孫) 출신(出身)의 왜족(倭族)이 많아진 탓일까?
『가해자(加害者)와 피해자(被害者)조차 구분(區分)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게 작금(昨今), 이 나라의 크나큰 비극(悲劇)이다.』
학폭(學暴 : 學校暴力)을 경험(經驗)한 사람은 평생(平生)을 그것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헌데 36년(年) 동안이나 일제(日帝)의 강제통치(强制統治)를 받았던 사실(事實)을, 누가 지배자(支配者)고 누가 피지배자(被支配者)였는지 조차를 구분(區分)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건 어리석음과 무지(無知)에서, 맹목적(盲目的) 사대(事大)에서 나오는 사고(思考)하지 못하는 뇌세포(腦細胞)의 영향(影響)이다. 이러한 자(者)가 무리의 지도자(指導者)가 되는 것은, 무리의 큰 불행(不幸)이요, 비극(悲劇)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오늘은 어떤가? 망조(亡兆)【亡徵敗兆 : 망징패조 : 망(亡)할 징조(徵兆)】가 드리우고 있다고들 걱정이 태산(泰山)과도 같다.
『이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국민(國民)에게서 나오는 “힘”이다.』 이게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이요, 이걸 결코 잊으면 안 된다. [1∼2권 끝].
2023년 11월 11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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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음 게재물은 "맥(貉)=맥(貊)"에 대한 총제적인 글이 될 것으로 보이는데,
1편에서는 : 우리나라의 사서인 해동역사에 기록된 ""맥(貉)=맥(貊)=호맥(胡貉)=호맥(胡貊)"에 대해서
2편에서는 : 오늘날의 중국에서의 "맥(貉)=맥(貊)=호맥(胡貉)=호맥(胡貊)" 기록과 해설, 주장에 대해서
3편, 4편에서는 : 우리들이 자주 접하는 기록이 아닌 기록에 기록된 "맥(貉)=맥(貊)=호맥(胡貉)=호맥(胡貊)" 에 대한 진실 곧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조선사=한국사'를 왜곡, 조작하는 무리들은,
대한민국을 이루고 있는 "정부=정권"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니만큼 이것을 근절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5200만 국민들 모두가 들고 일어선다고 해도 그 장벽을 깨부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학자"들에게 그 답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1945년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정권차원에서 무작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식민사대교육의 폐해가 지금 윤석열 정권에서 극치를 보이고 있어 실로 안타까움이 많습니다"
*** '한국'과 '한민족'이라는 나라와 종족의 운명을 '윤석열'이라는 '식민사대파'에게 더 이상 맡겨놓을 수 없다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의 각성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