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
■성스러운 창의 기원
롱기누스라는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예수의 옆구리를 찌른 창이 소개된 기독교적 기원은 신약성서의 요한복음이다. 여기에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옆구리를 로마 병사가 창으로 찔렀고, 이때 예수의 배에서 물과 피가 흘라나왔다고 묘사되어 있다. 이 내용은 예수의 죽음을 거론한 기독교4복음서 중에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장면이다.

(사진: 바티칸의 롱기누스 像)
그 후 민간에 퍼진 속설로는 창으로 예수를 찌른 로마 병사의 이름이 롱기누스였으며, 창으로 찌른 직후 눈이 멀어 예수를 경멸하고 증오하였으나, 그 창을 타고 떨어지는 예수의 피로 눈을 씻어 다시 회복된 후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롱기누스는 원래 독실한 기독교도였는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힐 때 예수의 부활을 두려워했던 사탄이 롱기누스의 몸 안으로 들어가 예수의 심장을 찌르려 했지만 다행히 빗나가 갈비뼈를 찌르는 바람에 예수가 부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로 인해서 일부 지방에서는 롱기누스를 성인(聖人)으로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설화로만 전해져온 것으로서 이런 수많은 설화들을 정리하여 대체적인 가닥을 잡은 것은 12세기 프랑스의 시인 크레티엥 트루아(Chretien de Troye)의 <성배 이야기(Le Conte du Graal)>였다. 그후 독일의 볼프람 폰 에셴바흐(Wolfram von Eschenbach)가 지은 파르치발(파시발; Parzival)과 15세기 영국의 토머스 멜러리(Thomas Malory)가 지은 <아더왕의 죽음(Le Morte d'Arthur)>으로 이어지면서 롱기누스의 창은 성스러운 창이라는 이미지가 확립되기에 이른다.
(사진: 롱기누스의 창 복원 전 모습)
학자들에 의하면 성스러운 창의 이미지는 켈트 신화의 광명신 루(Lugh)가 적에게 던져 번개로 변하게 하는 마법의 창 브류나크(Brionac)의 이미지와 상당부분 겹친다고 한다. 짐작하건데 켈트신화와 기독교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배(聖杯)와 롱기누스의 창은 항상 짝을 이루어 회자되곤 했는데, 창이 파괴의 이미지이므로 자연스럽게 치유의 이미지인 성배와 짝을 이룬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지며 이와 관련하여 창은 남성의 생식기를 뜻하며 성배는 여성의 생식기를 뜻한다는 유감주술(類感呪術; 비슷한 모양을 연결시켜 숭배하는 현상)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제왕의 창- 롱기누스
역사적으로 보면 미인의 팔자는 항상 기구했다. 권력있고 잘난 남자들의 쟁탈전 속에 희생양이 된 예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롱기누스의 창도 그와 비슷한 숙명이 예정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예상대로 예수까지 한번에 죽음으로 몰아갈 정도로 대단한 무기인 이 창이 그냥 평탄하게 남아 있었을리 만무했다. 그 이미지는 어느덧 무엇이든 찌를 수 있다는 '힘의 상징'과 동일시 되었으며, 히틀러가 이 창을 소유했다는 것을 잠깐 언급했지만 그러한 상징성으로 인해 역사상 수 많은 권력자들이 소유했고, 또한 이 창을 소유하고자 전쟁까지 불사했던 마물(魔物)이 되어 버렸다.
첫 소유자는 로마에서 기독교를 공인했던 황제 콘스탄티누스였다. 그는 이 창이 하느님의 뜻으로 인도해 준다고 믿어서 부적처럼 몸에 지녔다고 한다. 아랍인으로부터 유럽을 방어한 칼 마르텔 장군은 전쟁 중에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샤를마뉴 대제는 이 롱기누스 창을 가짐으로 해서 47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고 믿었다. 그 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를 비롯 1.000년 동안 45명의 제왕이 이 숙명의 창을 소유했다하니 역마살(役馬煞)도 이런 역마살이 없다.

(사진: 박물관에 복원된 롱기누스의 창)
마지막 소유자였던 히틀러는 1910년대에 오스트리아의 학자 겸 박물관 학예관인 '발터 슈타인'에게서 '이 신성한 창을 소유하는 사람은 이 세계의 통치자가 된다'는 신비한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된 후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전시된 이 창에 대해 욕심을 내기 시작한다. 이 창에 대한 히틀러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훗날 그의 저서에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나는 이 창을 본 후 내가 경험하게 될 위대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날에는 그 창을 보고 혼수 상태에 빠지기까지 했다니, 그의 공과를 떠나 열정 하나만은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러한 열정의 결실은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1938년 4월에야 이루어졌다. 히틀러는 비엔나로 입성하여 꿈에도 그리던 '롱기누스의 창'을 손에 넣어 독일의 뉘른베르크로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45년 패망까지 파죽지세로 전 유럽을 격파하며 그는 제왕으로 군림했다.
이 창의 개인 소유 운명은 공식적으로는 독일 패망 직후 미군이 가져감으로해서 끝난다. 여담이지만 1999년 12월 구 소련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가 공개됐는데, 히틀러는 지하벙커에서 자살한 후 발견되어 곧장 화장(火葬)된 것이 아니라 소련으로 이송된 후 미이라 형태로 있다가 1971년에야 화장됐다고 하니, 그토록 아끼던 창은 미국으로, 자신은 소련으로 갈라져 냉전 시대 이산(離散)의 아픔을 몸소 겪은 아이러니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어찌됐든 롱기누스의 창은 그 후 원소유주였던 오스트리아의 호프브르크 박물관에 다시 반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자신을 소유할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듯 2천년 역사의 풍진 세월을 오늘도 관람객들에게 말없이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