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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제5장>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허이불굴, 동이유출, 다언삭궁, 불여수중
어느새 5장까지 와 부렀네. 여기서부터는 도올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는 예고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함 보자.
제5장의 첫 줄이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
'티엔띠 뿌르언!' 캬~~ 발음 지기제? 내가 테레비에서 도올의 고전 강의 프로를
볼 때 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도올이 '티엔띠 뿌르언' 하는 걸 듣고 밥 숫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는거자나. 너무나 완벽한 본토 발음이어서 구르미가 뿅갔다.
사실 중국말은 사성(四聲)이 있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완벽한 본토 발음이
잘 안되거든. 그런데 너무 너무 멋진 발음인거 있제? '티엔띠 뿌르언!' 천지불인
(天地不仁), 이 한마디를 우리 할아방이 했던 본토 발음 그대로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서 나는 사실 도올을 용서해주고 싶었다. 그 수많은 날들을 테레비 앞에서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도오죠히데끼를 보아야 했던 고역은 상쇄할 만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제. 그런데 있자나, 나는 암만 생각해도 도올이 중국말을 하는 것은
용서하겠는데 영어를 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는거 있제. 소설을 쓰는 것은 용서해도
철학을 하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어분다. 우짜면 좋겠노? 본토 발음의 반만큼이라도
뜻을 알아먹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발음만 멋지고 해석은 취권인게라.
도올이 TV 강의에서 저 '천지불인(天地不仁)'을 멋드러지게 노래해서 나로 하여금
홀딱 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까지 본토 발음을 써놓은 이유는
결코 중국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이번만큼은 씨의 고질병인 위유식(爲有識),
자찬박학(自讚博學) 증세의 발작이 아니라 어린애처럼 순수한 감동의 발로로 보여진다.
그만큼 스스로 말하다시피 도올은 노자의 이 구절에서 주체할 길없는 감명을 받았능기라.
가심이 찡 하네요. 정말로.
눈물이 핑 도네요. 정말로.
이런거 보면 도올도 보기보다 여린 남자 아이가?
나는 왜 저 대목이 그렇게 감동적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짐작컨데 도올은
불인(不仁)이란 말을 일반적인 통념과상식을 깨뜨린 파격적인 통찰이라고
생각핸거 아이겠나? 물론 이것도 헛다리 짚은 거는 마찬가지다.
노자의 생각은 도올의 짐작이나 추측과는 전혀 반대편에 서 있다.
겐또를 쳐도 언제나 틀리는 쪽으로만 치는 것도 흉내내기 어려운 재주다.
고대에는 루소처럼 나이브한 (이런 영어를 끌어다 씅께로 구르미도 애북 유식하게
보이제?' 알고보면 구르미 디기 똑똑한 여자데이) 자연주의자들이 없었다. 자연과
그것이 인간에게 강요하는 생존의 조건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혹독한
시대였다 말다. 그래서 자연의 가혹함으로부터 인간을 지켜줄 만한 지혜로운 자를
성인으로 꼽았능기라. 요순이 달리 요순이 아이고 치수(治水)를 잘해서 요순 아이가?
홍수, 가뭄, 산불, 지진, 역병 등은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고난과
역경의 근본적 원인이었지.
'대자연은 어머니의 품처럼 아늑하고 따뜻하니...' 따위의 자연 예찬은 고대인들의
의식 세계와는 동떨어진 것인기라. 천지는 그야 말로 두려움과 외경의 대상이었다.
하늘은 인간들에게는 비정하고 박절하며 자주 잔인한 무엇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겠지?
그리 생각되제? 그런데 할아방은 당시 사람들의 그런 자연관에 대해서
'자연이야 말로 자비로운 성인의 도를 행하고 있다'고 오히려 자연을 예찬하고 있다.
이것을 거꾸로 동시대 사람들이 자연을 인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할아방이
혼자서 '아니다. 자연은 불인하다'고 우긴 것으로 도올은 착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게 대단한 사자후나 되능거맹쿠로 지 혼자 감격을 해갖꼬 '텐띠 뿌르언~~~~~'
하고 자빠징께로 얼매나 웃기노 말이다.
노자는 위(爲)를 '∼을 한다'는 의미의 행(行)으로 쓰지 않는다. 위(爲)라는 글자의 뜻은
할아방이 보기에 좀 고약한 것이다. 이것을 '행함'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仁)'이란 글자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노자가 말할 때의 '인(仁)'은 공자가 말할 때의
'인(仁)'과 전혀 다른 뜻의 글자라는 것을 도올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머리가 나쁘면
눈치라도 빨라야 귀염을 받제. 노자 할아방은 공자의 '인(仁)'에 대해 알레르기성
두드레기가 있다. 공자 자체가 노장 두 할아방한테는 속물로밖에 안 보였다. 그래서
공자가 할아방한테 예를 물어서 찾아왔을 때 손님대접도 안해줬다는거자나. 할아방들이
보기에 공자가 말하는 군자지도(君子之道)라는 것이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로 밖에
안보였고 그것을 역설하고 다니는 공자는 출세하는데 목을 맨 고급 구직자(求職者)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노자가 제일 고약한 의미로 쓰고 있는 두 글자가 하나는 위(爲)요
다른 하나가 인(仁)이다.
인(仁)은 즉 위(爲)다. 그런데 유가가 득세를 하면서 공자의 줏가가 올라가자 할아방의
심중에는 좀 가소로웠겠나? 해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란 말은 노자가 자연에 대해
던지는 최고의 찬사이다. '불인(不仁)함이여, 천지는 위대하구나!' 이 소리다.
도올이 헛짚어도 단단히 헛짚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저말의 배경을
눈치챌 수 있어야 그 다음 줄부터의 번역이 아귀가 맞게 된다. 도올처럼 헛짚고 나면
그 다음은 볼 것도 없이 고추먹고 맴맴이다.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 이 말은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것을 헛짚으면 '하찮게 여긴다, 무시한다, 능멸한다'라는 말로 오해할 수가 있다.
사실 도올은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적당한 비유를 찾자면
'소가 닭 쳐다보듯이 한다'는 말에 가까울 것이다. 닭을 쳐다보는 소의 눈길에는 애정도
연민도 호감도 적의도 없다. 그냥 무심한 눈길이다. 소가 닭을 쳐다보는 눈길이야말로
천지가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요, 성인이 백성을 바라보는 눈이다. 소가 마당을 가로질러
가다가 닭이 낳아 놓은 알을 밟아서 깨트린다 해도 소가 닭한테 감정이 있어서 한 짓이
아니다. 소는 그저 마당을 지나 밭으로 걸어갔을 뿐이다. 배고픈 닭이 소똥 마른 것을
줏어 먹어도 소는 닭을 위해 똥을 싼 것이 아니다. 그냥 나오니까 쌌을 뿐이다. 닭도 소가
자기 알을 밟고 지나가도 소를 원망하지 않는다. '내 알이 깨졌구나. 저절로 깨졌겠지(謂我自然)'
소똥을 맛있게 먹어도 소한테 감사할 줄 모른다. '먹이가 저절로 땅 위에 생겨났다(謂我自然)'
고 생각할 뿐이다. 모든 것이 저절로 일어나고 절로 이루어졌을 뿐 '소가 했다느니,
닭 때문이라느니' 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천지성인(天地聖人)과 만물백성(萬物百姓)의
관계가 이런 소하고 닭과 같다는 것이 노자의 말씀이다.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연사의
강력한 주장이기도 하다.
반면에 공자의 인(仁)은 사람이 키우는 닭과 같다. 집도 지어 주고 먹이도 주고
물도 주고 춥지 않게 덥지 않게 보살펴 주지만 언젠가는 손에 칼을 들고 닭의 모가지를
딴다. 이게 인(仁)이다. 백성이 잘 살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못살게 굴지도 않는 게 최고의
통치라고 노자는 본다. 인이니 군자의 도리니 쓸데없는 것을 가르쳤다가 나중에 많이 안다는
이유로 잡아죽이는 짓을 하지 말고 아예 백성들을 무지무욕(無知無慾)하게 내버려두라는
심오고매한 할아방의 주장이시다. 그러면 백성들은 절로 행복할 것이요 자기가 행복해져도
그것을 통치자(성인)의 덕택으로 생각지 않고 내가 저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도의 정치라는 가르침이다.
'백성이 자기가 절로 행복해졌다고 생각하게 하는 정치야말로 최고 최선의 정치라는 것'이
이 대목의 골자요, 노자 정치 사상의 핵심이다. 지금 '준비된 대통령' 하는 꼬라지 함 봐바.
지가 온 국민의 행복을 책임질 것처럼 설치더니 우째 되가노? 지가 준비를 잘해서 국민이
행복해지겄나? 지없어도 저절로 국민이 잘살면 그게 장땡이제. '준비된 대통령'이 필요한 것
자체가 불행 아이가?
우쨌기나 도올이 해놓은 번역과 해설을 한번 보자. 도올은 꼭 자기 같은 노자를
만들어내고 있다. 자기 수준 이상의 사람이나 사상을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이 부족항께로
자기같은 노자를 그리고 있다. 다음에 계속하자.
도올이 '천지불인(天地不仁)'을 해석하여 가로되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해놓고,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를 가로되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라 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고? 또, '성인불인(聖人不仁), 이백성위추구(以百姓爲芻狗)'를 가로되,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라 했거든. 그래서 천지와 성인은
잔인하고 매정하고 몰인정하다 소리 아이가. 그런 것이 천지요 성인이라 카능기다.
하하하, 노자 할아방 심장마비 일으키겠다. 도올하고 아삼육인 깜보 왕삐의 이 대목에 대한
주라는 것은 소개할 가치도 없다. '짐승이 풀을 먹고, 사람이 개를 먹고, 어쩌고 저쩌고...'
진짜 강아지 풀 뜯어먹는 소리를 하고 있다. 왕삐가 이 시대에 있어서 저런걸 노자의 주해라고
나한테 가져오면 종아리가 서른 대다.
이 대목의 해설에서 도올은 자기가 89년에 펴낸 <길과 얻음>이라는 책이 우리말로 <도덕경>을
번역한 최초의 책이라고 자랑하면서 이런 나발을 불고 있다.
『전략(前略)...나의 <길과 얻음>은 한문을 될 수 있는 대로 한글로 풀었다. 그리고 先泰古經은
본래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된 의미단위이므로, 그것이 모여서 생기는 개념을 하나로
묶지 않고 본래대로 한 글자씩 다 풀어 번역하였다. "萬物"이면 "만물"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만 가지 것"이라든가 "온갖 것"으로, "天地"도 "천지"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늘과 땅"으로 번역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런데 이번 번역은,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이때 아이러니칼한 것은 한글로 풀면은 의미가 더 전달이 안된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을 상대로 한다"는 구체적인 뜻은 "대중의 언어의미구조에 가장 쉽게 전달가능한 방식의
언어기준을 세운다"는 뜻이다. "道"를 그냥 "도"로 하는 것이, 오히려 "길"로 하는 것보다 의미가
더 직접적으로 포괄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왜냐 우리민중에게 이미 道는 "도"로서 그들의
삶과 더불어 살아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는 분명 "Tao"보다는 "the Way"가 더
낳은 번역이다. "Way"라고 하면 "길,""방법,""사람이 살아가는 행로,""만물이 움직여 가는 법칙,"
등등의 뜻이 다 생겨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길"이라 해 놓으면 소달구지
마찻길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특별한 해설을 하지 않으면 의미가 오히려 한문 투보다 협애해
지고 폐쇄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요번 나의 번역은 지난번, 지금으로부터 꼭 십년 전
이맘때의 번역보다 그냥 평범한 한국말, 길거리에 지나다니는 보통 한국 사람들이 가장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기준으로 해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번역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말한다면
십년 전 <길과 얻음>(통나무,1989년 11월 16일 초판 발행)을 참조해 보는 것도 그 맛이 새로울 것이다.
그러나 <길과 얻음>은 왕필 주석에만 그 기본을 둔 것이며, 마왕퇴 백서와 곽점 죽간본의 연구성과는
반영되어 있지 않다. 요번 번역은 1999년 11월까지의 세계적인 연구성과들을 집약했다는 면에서는
기존의 어떤 역서와도 그 성격이 다르다.』
<노자와 21세기> 213쪽-214쪽
킁... 자기는 노자가 뭔지도 몰라요카고 광고 나발을 불고 자빠졌제?
이리 긴 글을 와 다 옮겨 소개했겠노? 바로 이 글 속에 도올이 공부했다는 노자가 다 들어 있다.
도올은 '도가 적합한가, 길이 더 나은가', 'Tao가 맞는가, Way가 맞는가' 고민할 필요 없다.
왜냐 하면 어느 것을 쓰건 틀린 것은 마찬가지니까.
십년이면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세월이다. 그 세월 동안 노자 하나만 연구를 하고 전 세계적인
연구성과를 집약했다는 사람이 겨우 '도'와 '길'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런 속 터지는 중생들이
있을까봐 노자는 서두에서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 명가명(名可名), 비상명(非常名)'이라고
미리 못을 박아둔 것이다. 그래도 보람이 없는걸 우짜겄어?
반야(般若)는 그냥 반야(般若)지 그 이름에는 아무 뜻이 없다.
열반(涅槃)은 그 이름이 열반(涅槃)이지 이름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냥 인도어 니르바나를
소리나는 대로 옮겼을 뿐이다. 노자도 '도(道)'라는 글자로 이름을 삼았을 뿐 그 이름에는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다. 글자가 한문으로 가지고 있는 '길'이라는 의미와는 저언혀 무관하다. 지 나라 말로도
번역을 제대로 못하면서 영역을 한다꼬 설칭께 딱 겁이 나분다. 도를 영어로 'Way'로 옮기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라? 음냐리, 하품 나온다. 도는 '도'고 'Tao'지 '길'이나 'Way'가 아니다. 이름인 글자 자체에
의미가 들어가면 그건 이미 노자가 말하는 '도'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도'라는 이름에는 아무런 뜻이 없다. 이름은 도올이 좋아하는 '좆'이라캐도 관계없다.
구름이 이렇게 말한다 해서 또 어떤 맹꽁이가 '자지不仁, 以보지爲芻狗'할라.
자지는 절대로 보지를 '위추구(爲芻狗)'하면 안 되는 것이제. 모름지기 '자지仁者, 以보지爲寶物'해야
하는 것이다. 알겄제? 구르미도 도올이 지만큼은 자지 보지 할줄 안다. 다만 숙녀의 품위와 체통을
생각해서 함부로 안할 따름이다. 잠시 옆으로 샜다. 다시 진도 나가자.
텐띠 쁘루언~~ '천지불인(天地不仁),하니 이만물위추구(以萬物爲芻狗)요' ☞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에 무심하고', '성인불인(聖人不仁)하니, 이백성위추구 (以百姓爲芻狗)니라' ☞
'성인도 이와 같이 불인하니 백성들을 간섭치 않는도다'라고 번역하면 그런 대로 준수하다.
그리해야 다음 문장들과도 뜻이 잘 통하여 막힘이 없게된다.
도올식의 악역인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라 해부면 다음 문장하고 연결이 안 되분다. 이 문장을 해석할 때
'다룬다'는 단어가 들어가면 무조건 빵점이다. 풀강아지처럼 다루건 보물처럼 다루건 아무튼 다룬다는
의미는 이 문장과는 상극이다. '다루지 않는다. 또는 무심하다'는 것이 바로 '위추구(爲芻狗)'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지는 결코 만물을 다루지 않는다'는 문장을 '천지는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로
하면 이게 어찌 번역일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다. 이런 수준으로 노자를 강의해서 이름을 얻고 강의료를 받고
책이 불티나게 팔리는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차말로 나라의 장래가 걱정시럽다.
다음 문장을 가면 도올이 진짜 술먹고 주정하는 꼴을 보게 된다.
이거 큰일났네. 곽제 얼매나 어려븐 한자가 나오는지 새롬 데이타맨 편집기에 등록도 안된 한자가
막 나온다. 이걸 우짜면 좋노? 한자 한두개 화면에 안보이능거야. 별 문제가 아이라캐도 이런 한자를
도올이 우찌 읽겠노 말다.밑에 문장에서 '탁' 자하고 '약' 자는 천자문에도 없는 글자고 시골 서당 훈장도
못 알아보는 글자다. 우리 도올이 큰일났제? 우짜능가 함 가보자.
天地之間, 其猶槖籥乎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虛而不屈, 動而愈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이 어려븐 문장을 도올이 번역도 잘했제. 왈,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해놨네. 역시 도올이제. 누야가 기가 멕히분다.
여게서 풀무가 와 나오노? 생각을 함 해봐바. 할아방이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오데 비유할 데가
없어서 바람 내는 풀무에다가 비교를 했겠노? 그라고 풀무라 카마 이기 말이 되나? 이것부터 다음 다음
문장까지 당췌 이해가 안되부리. 좋다. 풀무라능기 옛날 그릇굽는 가마나 숯굽는 가마에다가 바람
불어넣는 기계아이가? 구르미 어릴 때 우리 마을에 있던 대장간에도 풀무가 있었다. 그 대장쟁이가
쓰던 풀무는 왜정 때 왜넘들이 맹긴건데 발로 페달을 밟으면 선풍기 날개같은기 씩씩 돌아감서 화덕에
바람이 들어가는 그런거였다. 조선 시대 엽전들 풀무는 농약치는 뽐뿌맹키로 실린더를 밀었다 뺐다
푹작푹작 하는 식이었다. 아뭏든간에 풀무라능기 속이 텅 비었다치자. 그래서 우찌됐다 말이고?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허이불굴(虛而不屈) 즉, 속이 비었으되 짜부러지지 않는다 이런 말이가?
듣고보이 완투가 있는 소리네. 그쟈? 그럴듯 하다 아이가?
그라마 그 다음 구절 함 보까? '
동이유출(動而愈出)'이라 해놨네. 이기 무신 소리고? '움직일 수록 더욱 많이 나온다'라는 소리 아이가?
쪼께 헷갈리부네. 구르미 머리로는 이해가 안되부네. 완투는 커녕 제로도 안오는데. 풀무야 당근
피스톤이건 날개건 움직일 수록 바람이 많이 나오제. 근데 하늘과 땅 사이가 우찌 움직이야 움직일
수록 뭐가 쏟아져 나오노? 지구도 돌고 해도 돌고 별도 막 돌아제낀께로 뭐든지 막 나온다 이 소리가?
천지지간의 광대하고 적막한 공간하고 피스톤 빠이뿌가 쌔리 움직임시로 바람이 쌕쌕 나오는 풀무하고
정서적으로 연결이 안 되는데? 내가 이상하나? 할아방이 이상하나? 다 이상하고 도올이만 정상이가?
하늘과 땅 사이가 풀무 맹쿠로 정신없이 움직이면서 뭘 뱉아내는 그런 물건이가? 할아방의 우주론은
24시간 상시 창조체제인갑네.이건 쉽게 풀 문제가 아이다. 오늘은 안되겄다. 우리집 깜지가 새끼를
낳아갖꼬 내가 좀 바쁭께로 이리 고차원적인 우주론은 내일 하자. 일단 척 봉께 도올이가 달라들어갖꼬
답이 나올 문제는 아인겉다.
구르미가 병이 좀 들어서 며칠 연재를 못해부렀네. 죄송.무슨 병이냐고? 심각한 병이제.
가을타는 병이라꼬 있거든. 잔디가 노랗게 황금색으로 변해가고 감나무 잎이 소솔하게 떨어지는
이때쯤에 꼭 한번씩 앓는 고질병이다. 이런 때는 정말 도올이같은 아 잡고 공부 가르치는기 영
맘에 안내킨다. 어디론가 훌쩍 여행이나 가서 이름모를 바닷가의 바위가 파도에 씻기는 모습이나
하루종일 보다가 오면 낫는 병이긴 하다. 아니면 추수가 끝나 휑하니 빈 시골의 논둑길을 한없이
걸어도 좋다. 그건 그렇고 이런 이야기는 구르미하고 안 어울리. 도올이 한자 공부 가르치는 무서븐
선생의 이미지가 더 어울리제. 다시 진도 나가자. 오데까지 했더라.
'기유탁약호'하다가 말았다. 이 문장은 다섯글자 중에서 두 글자나 표시가 안 된다. 제일 중요한
'탁'하고 '약'이 입력이 안됭께로 그게 짜증이 나서 가을병이 도지붔제. 하이간에 '탁'자는 옥편을 찾아보면
'절구 탁'이다. 그 있자나? 공이로 콩콩 찍어서 떡 해묵는거. 그기 '탁'이다. '약'은 뭐냐? '피리 약'이다.
에프킬라는 파리약이고 '약'은 '피리 약'이다. 그랑께로 '탁약'은 '절구와 피리다. 그런데 도올은 한자를
누구한테 배왔는지 이 '탁약'을 지멋대로 '풀무'라 항께네 이것도 까무러칠 노릇이다. 만약에 '탁약'이
바람내는 풀무라 카마 그 앞에 '유(猶)' 자하고 뒤에 '호(乎)' 자를 번역할 방법이 없는데다가 전체 문장이
뒤죽박죽이 되부리. 말이 안된다 이말이제.
'유(猶)' 자는 '움직일 유', 또는 '원숭이 유' 잔데 '움직일 동(動)'과는 쓰임새가 다르다. 원숭이 까불듯이
촐삭거리면서 움직이는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다. 노자는 이 '유(猶)'를 절구질하는 동작을 묘사하는
글자로 고른 것이다. 그래서 '유탁(猶槖)'은 '절구질"로 번역하면 정확한 옮김이다. 다음에 오는
'약호(籥乎)'는 말할 필요도 없이 '피리 부는 것'이제. 즉 '유탁약호'는 '절구질과 피리 부는 일'이다.
이 문장을 '유' 자도 갇다버리고 '호' 자는 빼고 '풀무'라 하면 이건 번역이 아니라 창작이다. 그것도
황당무계한 창작이다. '탁약'을 지맘대로 '풀무'라 하고 나니까 그 담에 번역이 안되능기야. 당근
횡설수설을 씨리즈로 할 수 밖에 엄찌. 그건 좀 있다가 보기로 하고 이 문장의 올바른 뜻을 살펴 보자.
할아방의 글버릇을 살펴보면 한가지 특이한 필법이 눈에 뜨이는데 그건 바로
'Aa Bb' 구조의 글을 'AB ab'로 쓰는 버릇이다. 그것을 알아야 뜻이 통하는 부분이 더러 나온다.
앞서도 그런 구조의 글이 나온 적이 있었다.
허기심(虛其心), 실기복(實其腹) 약기지(弱其志), 강기골(强其骨)'이란 말과
'좌기예(挫其銳), 해기분(解其紛), 화기광(和其光), 동기진(同其塵)'이 그런 예이다.
이 문장을 읽기 쉽게 배열을 고치면 '허기심(虛其心) 약기지(弱其志)', '실기복(實其腹)
강기골(强其骨)'이 된다. 뒷 구절도 '좌기예(挫其銳) 화기광(和其光)', '해기분(解其紛) 동기진(同其塵)'이
되는 것이다. 마음을 비우게 하고 뜻을 약하게 하며, 배를 부르게 하고 뼈를 튼실하게 만든다'라는 문장을
할아방은 '마음을 비우게 하고 배를 부르게 하며, 뜻을 약하게 하고 뼈를 강하게 한다'는 어순으로 써놓은
것이다. 이런데 헷갈려갖꼬 도올은 제정신을 못차리고 헛소리만 하는거다.
'그 뽀족한 부분을 쳐내고 모습을 보면 빛이 어우러지는 영롱함이요, 그 얽힌 것을 풀어혀쳐서
속을 보면 그것은 먼지와 같은 것이다'라는 문장을 '어순을 바꿔서 '뾰족한 부분을 쳐내고 얽힌 것을
풀어보면 빛이 어루어지고 먼지와 같다' 해놓으니까 도올같은 머리로는 이기 해석이 안되부는거다.
천지지간(天地之間) 기유탁약호(其猶槖籥乎), 허이불굴(虛而不屈) 동이유출(動而愈出)도 마찬가지로
천지지간(天地之間) 허이불굴(虛而不屈), 기유탁약호(其猶槖籥乎) 동이유출(動而愈出)'로 어순을
바로 잡으면 아주 쉽게 그 뜻을 알 수가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텅비어있지만 찌그러지지 않고,
절구와 피리는 찧거나 불 수록 튀어 나온다 (곡물 찌꺼기와 소리).라는 뜻이다. 그러면 할아방이
왜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만 알면 된다. 천지지간이라는 대자연의 공간과 절구나 피리처럼
인위적으로 파놓은 공간의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강대한 공간은 텅비어있지만
그것으로서 찌그러들지 않는 것이고 절구와 피리의 속은 비어 있는 것은 같지만 그것은
움직일 수록 무엇인가가 경망스럽게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고로 같은 '빔'이라도 자연의 '빔'과 인공적인 '빔'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어떠해야 한다? 절구나 피리처럼 움직일 수록 경망되게 뭔가가 튀어나오는
절구나 피리의 '빈 자리'가 되지 말고 천지지간의 '빔'처럼 그저 찌부러지지 않으면서 고요한 그런 '빔'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이에 대한 결론은 다음 구절에 따라 나온다.
그런데 도올은 아예 '유탁'과 '약호'를 못 읽어서 '탁약'을 '풀무'라 해놓고 이 장의 끝까지
강아지 풀 뜯어묵는 소리만 하고 자빠진다. 당췌 앞 글을 똑바로 못 읽으니까 뒷 줄을 읽을 수가 없는기다.
이런 아가 공자를 강의하고 자빠징께로 구르미는 참 억장이 멕힌다. 대한민국에서 못 말리는 두 꼴갑이
있다. 하나는 영새미고 하나가 도올이다. 이 두사람을 말릴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다. 바로 구르미다.
나서서 말려? 말아? 고민 중이다. '제행무상' 부처님 한 말씀이 자꾸 구르미를 잡는다.
절구와 피리라는 물건은 사람이 그 속을 파서 비게 만든 물건이다. 이 빈 것이 절구와 피리를
쓸모 있는 물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인공적인 빔은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사람의 부가적인 노동이 필요하다. 절구는 공이로 부지런히 찧어야 곡식이 빻아지고
피리는 입과 손을 열심히 움직여야 소리가 난다. 열심히 할수록 더욱 많은 곡식을 빻고 더 요란한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그러나 절구질은 세게 할 수록 가루가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리도 너무 세게 불면 음이
깨져서 나온다. 이게 바로 '동이유출(動而愈出)'이다. 그러나 천지 사이의 공간은 열심히 움직이지 않아도
부지런히 애쓰지 않아도 그 빔은 비어있다는 자체로서 가치를 지닌다. 바로 짜부러지지 않고 우주를
받치는 '허이불굴 (虛而不屈)'인 것이다. 그래서 할아방이 우리에게 하는 말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다언삭궁(多言數窮),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다.
즉 절구나 피리를 불 때 너무 세게 하면 곡식가루나 음이 튀어나오는 것과 같이 '말이 많으면 금새 막히니
가슴 속에 아껴둠만 못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천지가 만물을 보고 아무 소리 안하고 성인이
백성들을 간섭하지 않으며 천지간의 공간이 비어있음으로써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본받고, 절구와 피리처럼
경망되이 움직여 쏟아내지 마라. 모름지기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는 법이니 모쪼록 말을 아껴 가슴 속에
담아 두라. 이런 가르침이다.
'다언삭궁(多言數窮)이니 불여수중(不如守中)이니라' 얼마나 좋은 말이고?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니 마음속에 담아 둠만 못하느니라.'는 할아방의 이 말씀은 도올이
명심해야 될 소리제.
사람이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세 가지가 따라서 많아지능기야. 틀린 말이 많아지고, 거짓말이 많아지고,
책임 못질 말이 많아진다 말다. 이 세 가지 때문에 사람이 궁지에 빠지게 되능기야. 요시 사람이 비명에
횡사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것이 뭐고? 교통 사고제. 그러나 옛날 사람들이 비명에 돌아가시는 이유 중에
으뜸이 뭐였겠노? 바로 말이다. 횡액의 대부분이 말에서 비롯됐다. 연산군이 대신들한테 걸어준 묵언패의
내용이 '입은 화를 부르는 구멍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였자나. 그래서 현대인들은 싸돌아다니지
않으면 죽을 일이 없고 옛날 사람들은 말을 안하면 죽을 일이 없었다. 말로써 궁지에 몰리기는 백성들이나
위정자나 범인이나 군자나 다를 바가 없었제. 옛날 같았으면 도올같은 촐삭이는 그 입 때메 벌써 인생
종치고 날샜을낀데 세상이 좋다봉께 아매 죽을 때까지 헛소리 나발을 불 수 있으끼야. 그기 다 세상을
잘 타고난 덕분이제. 하지만 할아방 당시에는 나발 잘못 불면 바로 가는 수가 있었다.
가도 지혼자 가는기 아이고 불쌍한 지 처자식에 삼대까지 델꼬 갔다 말이다.
그래서 할아방이 말하기를 대저 성인은 백성들을 추구를 보듯이 하여 간섭치 않고 장담도 하지 않고
약속도 아니하며 거짓말도 아니하니, 이와 같이 말을 아끼라고 재삼 당부하는 것이다. 위정자가
말을 아끼면 백성들은 위정자의 말에 따라 흔들리지 아니하고 약속을 하지 않으면 기대를 하지 않고,
장담을 하지 않으면 믿지도 않으며, 거짓말을 아니하면 분노할 일도 없으므로 그저 묵묵히 지 할 일이나
하며 산다는 야그다. 그래서 불행해도 당연, 행복해도 당연, 그저 그런 것이려니, 이게 인생이거니 하고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할아방은 보는 것이제.
자연(自然)! '천지지간(天地之間)은 텅 비었으므로 굽히지 않는데,
사람은 탁약과 같이 경망되이 움직이고 말이 많아서 자주 궁지에 몰리는도다.
모름지기 다언삭궁이니 불여수궁이니라!'
이쯤에서 도올의 번역과 해설을 또 아니 보고 넘어갈 수는 엄찌. 함 보자.
도올 가라사대,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라 해놨다.
'수중(守中)'을 '그 속에 지킨다'로 풀고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단순히 '그 속'이 아니라
'흉중(胸中)에' 또는 '가슴 속에'라고 약간 말을 꾸며주는 것이 자연스럽다. 꾸밀 때 꾸미고,
꾸미지 말아야 할 때 꾸미지 않는 것이 좋은 번역의 첩경이다. 직역이 더 어울리는 대목에서
억지 멋을 부리거나 가미해야 할 때 무미하게 두는 것은 훌륭한 번역문이 못된다.
도올의 번역은 엽기적인 오역과 악역의 점철일 뿐만 아니라 어쩌다 하나씩 비슷하게
겐또친 것조차도 그 꼬라지가 한심하다.
그런데 더 사람을 식겁시키능기 도올이 해논 해설이다. 번역보다 해설은 더 죽인다.
21세기의 명작 <노자와 21세기> 상권 230쪽에 보면,
『그러나 노자철학을 총괄해서 보면 그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분명 어떤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은 무엇인가?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항상 도는 스스로 그러할 때, 빔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은 그 빔을 채워버리는 방향, 그 빔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방향으로의 사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함이 없음(無爲)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빔을
유지하는 함이요, 그 빔을 유지하는 함이야말로 바로 스스로 그러함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當爲가 아니라
自然이다. 이것은 곧 모든 존재를 스스로 그러하게 내버려 둘 때는 반드시 스스로 그러하게 허를 유지한다고
하는 자연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의 有爲的 행동만이 빔을 유지시키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함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러함은 存在의 自然이다. 여기서 우리는 虛와 無爲와 自然이 하나로
노자철학에서 관통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道의 쓰임(用)이다.』 하고서는,
박스까지 두르고 아래와 같이 도식을 그려놨다.
빔(虛)≡함이 없음(無爲)≡스스로 그러함(自然)≡쓰임(用)
도올이 얼마나 노자 사상을 모르는지 이 표만 봐도 알 수가 있다.
도올의 강의를 듣거나 책을 읽고 행여 사람들이 노자를 자연주의자로 오해하게 될까봐 걱정스럽다.
노자는 자연주의자가 아니다. 위의 도식을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다.
도(道)≡빔(虛)≡본래 그대로(無爲)≡스스로 그러함(自然)≡쓰임이 없음(無用)
노자는 앞에서 '이용지혹불영(而用之或不盈)'이라 하여 '도무용(道無用)'임을 명백히 한바 있다.
적어도 하나의 사상 체계가 되고자 하면 앞 뒤 말에 어폐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앞에서 '아'라 했던 것을 뒤에 가서는 '어'라 하는 수상쩍은 구석이 보이면 그것은 이미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석가세존 80년 설법의 어디에 앞뒤가 안 맞는 소리가 있던가? 도올이 번역한 노자의
어디에 앞과 뒤가 맞아떨어지는 것이 있던가? 도(道)는 허(虛)로써 무용(無用)이지, 결코 실(實)로서
용(用)이 아니다.
도(道)는 모든 실(實)이 나오는 허(虛)요, 모든 용(用)을 낳는 무용(無用)이다. '도(道)=용(用)'이란 등식을
그리는 인간이 우찌 노자를 아는 인간일 수가 있겠노? 소가 웃을 일이제. 그람 이 인간이 노자를 강의하는
꼬라지는 뭐겠노? 소가 웃지도 못할 일 아이겠나? 우쭝이가 그랬나? '세상은 넓고 챙길 돈은 많다'고.
인생은 길고 시간은 많다. 서두를거 뭐 있겠노? 쉬어 가면서 하자.
이 장에서 우리 도올이 중언부언 해설이랍시고 잔뜩 늘어놓은 것들을 살펴보면
꼭 술처먹고 오바이트 해놓은 거 같애. 이기 만약에 철학이고 도올이 철학자라면
주일이는 성인이고 석천이는 보살이다. 말도 안되는 헛소리만 퍼질러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자기의 기철학적 용어로 그런 것을 '천지코스몰로지(Tien-ti Cosmology)'라 카는데 티엔띠가
조선 땅에 와갖꼬 고생이 많제. 영어까지 곱싸리 끼이갖꼬 같이 고생이다. 그 '천지코스몰로지'가
어떤 건지 볼작시면 '하늘(天)은 형체없음이니 무형(無形)이라서 형이상(形而上)이고,
땅은 형체가 있어서 유형(有形)이라 형이하(形而下)인데, 양자는 일형(一形)으로서 일기(一氣)다'카능기다.
에렵제? 차말로 가방끈 짧은 구르미는 철학 못해 묵겠다. 도올 같은 대학자의 글은 도무지 어려워서
이해를 못하겠거니와 통박으로 굴려서 겐또를 쳐도 역시 황당할 따름이다. 책을 보면 어쩌고 저쩌고
골치 아픈 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다가 역시 결론은 버킹검이야. '이것은 내 기철학의 방대한 의론(醫論)
부분을 들어봐야만 그 실마리를 터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는 거론키를 삼갈 수 밖에
없다. 정신은 마인드(Mind)가 아니라 몸(Mom)이다. ... 운운'
도올의 글은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다. 안 봐도 결론이 뻔하기 때문이다. 끝은 꼭 지 자랑으로 끝난다.
도올의 '기철학'인가 무시깽인가 하는 책은 내가 읽고서 포복절도 했다는거자나. 그노무 '기철학'에
대해서도 언제 틈이 나면 이야기해 줄 때가 있겠지만 황당하기가 노자 강의 뺨친다. 그러나
구르미가 이 말 정도는 하고 서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다. '
도올은 노자나 마찬가지로 기에 대해서도 조오또 아능기 엄써'
주차장에서 차에 앉은 먼지를 보고 '도(道)의 본질'을 깨닫고, 다방 레지한테서 '빔(虛)의 도리'를 깨닫는
도올의 일도정진(一道精進)하는 학구열이야 감히 구르미가 흉내낼 경지겠느냐마는 그 대글빡 나쁜 것은
더욱 흉내내기가 불가능이다. 야 말하능거 함 봐바.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함"은 바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빔"을 극대화시키는 방식으로 유지될 때 스스로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다'카고 봉창 두들기는
소리하고 자빠지자나. 완죤 대철인(鐵人)의 확철대오(確鐵大誤)답제? '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만물의 존재방식'이라? 이기 뭔 해괴한 소리고?
만물은 '빔(虛)'을 지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채움(盈)'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비려고 하지도 않고 차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 이것이 '스스로 그러함(自然)'이다.
빈 놈은 빈대로, 찬 놈은 찬대로의 '있는 그대로'가 바로 무위(無爲)다.
하늘과 땅이 그 사이를 비어있게 하려고 애쓰는 걸 본 적 있나? 하늘과 땅은 둘 사이를
텅 비게 유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극대화는커녕 현상유지조차도 관심이 없다. 다만 스스로
그렇게 비어있을 뿐이다. 여기서 절구나 피리와의 차이점이 있다. 절구나 피리는 스스로 그러해서
속이 빈 것이 아니다. 사람이 속을 파내고 긁어서 비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천지간의 빔은 쓰임이 없다.
그저 찌그러들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쓰고자 하는 것도 없다. 그러나 절구와 피리의 빔은 쓰임이 있다.
곡식을 빻고 소리를 낸다. 그 쓰임(用)을 위해서 움직임(猶,動)이 필요하다. 이것이 스스로 그러한
천지간의 빔과 용을 위해 만들어낸 빔(극대화시킨 빔)의 차이점이다. '빔을 극대화하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이 아니라 절구나 피리를 파서 속이 비게 만드는 짓이다.
도올은 무위(無爲)를 '행함이 없음'이라꼬 얼척없는 소리를 해대디 이제 와서는 자연(自然)을
'빔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라꼬 헛소리 나발을 불고 있다. 도올이 개떡으로 맹길어분기 노자 할아방 뿐이면
내가 말도 안해. 죄없는 음양오행설까지 들고나와가 이것까지도 음양횡설, 오행수설을 맹길고 앉았다.
야를 우짜면 좋겠노? 머리 나쁜기 부지런하면 뭐고? 바로 멍부제? 멍부가 일을 조진다.
할아방하고 구르미는 어떤 타입이겠노? 바로 전형적인 똑게다. 머리가 나쁘면 게으러기라도
해줘야 그기 사람들 도와주는거 아이가? 안글나?
도올의 음양횡설, 오행수설 한마당 들어보까? 골 까래빈다.
텐띠쁘루언을 기똥차게 설명함시로 느닷없이 호주의 시드니가 튀나오능기야. 이기 뭔가 하고 봉께로
또 지자랑인게라. 세계실내건축가 워크숖인가 무시깽인가에 가서 일장 연설을 하고 왔노라 카는데
그런 단체는 내 과문해서 첨 듣지만도 참 벼라별 자리에 다 낯짝을 내밀고 다니는구나 싶어서 그 부지런한
활약에 감탄을 안 할 수 엄따. 그런데 문제는 외국에까지 나가서 횡설수설을 하고 온다는 거다.
생각 좀 해봐바. 코쟁이들이 뭔 음양오행을 알겄어? 저거가 황제내경을 들어보기나 했겠어?
노자 이름이나 들어봤겠어? 그래도 그렇지 양코배기들이 모른다치고 막 떠들어도 분수가 있어야제.
이럴 순 없능기다. 명색이 한의대를 나오고 한의사 자격증을 받았다면서? 요시 한의대가 6년 과정이제?
지는 몇년 하고 한의사 시험 패스했능가 모리겠는데 우리 역사 유구한 동의학도 염려시럽다.
도올의 골 까래비는 한의학 지식을 함 들어보자. 기대 되제?
도올은 개그를 하면서 새로운 소재를 발굴하는데도 부지런하다. 노자만 갖고는 안됭께로 인자
음양오행설에 한의학까지 개그의 소재로 써먹자고 설친다.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개그쑈의 단골메뉴라
카더라마는 암만 그래도 우찌 수천년 역사를 가진 우리 의학을 갖꼬 코메디를 한다 말이고.
허준 영감이 통곡을 할 노릇이다. 도올이 명저 <노자와 21세기>에서 지 한의학 지식을 자랑한다꼬
보따리 풀어논 거 같이 함 보자. 그 나이에 한의대 가갖꼬 뭘 배왔능가가 의심스럽다.
도올이 나발불어 왈, 비장과 위장의 소화 효소작용을 화(火)라 카능기다.
이런건 한의학의 기본의 기본이고 기초의 기초다. 1학년때 다 배우고 2학년만 돼도 달달달 외우는 거다.
이런 데서 지랄육갑을 하고 자빠지마 한의사 사람잡는다. 비장과 위장은 오행상 토(土)에 속하는 장부제.
당근 토기(土氣)를 그 기운으로 삼는다 말다. 화(火)는 심장과 소장을 관장하는 기운이야.
오행의 상생상극으로 볼 때 화생토(火生土)요, 목극토(木剋土)의 관계가 있어. 그래서 토에 속하는 비장과
위장은 심장과 소장의 화기로부터 도움을 받고 간과 담의 목기(木器)로부터는 상함을 받게 되능기야.
위치상으로도 비장과 위장은 위로는 심장 아래로는 소장의 사이에 딱 끼여 있자나. 그래서
심장과 소장의 화기(火氣)가 비장과 위장이란 그릇(土)을 굽는 가마가 되는거다. 화력이 셀수록
도자기는 단단해지고 광택이 좋아지는 것처럼 심장과 소장의 기운이 좋을수록 비장과 위장도
튼튼해지는 것이다. 반면에 간과 담(쓸개)은 토를 극하는 목기(木氣)의 장부여서 간의 기능이 승하면
비장의 기운을 억제하고, 담의 기운이 강하면 위장을 손상시키는 것이야. 이런 것은 한의학의 기본 상식이다.
내 살다가 비장과 위장의 소화 효소작용을 화(火)라 하는 돌팔이는 첨 본다.
그라고 또 도올이 뭐라카능가 함 봐. 비장과 위장의 일차적 기능이 부숙(腐熟)에 있다 하능기야.
야가 노자를 지멋대로 맹길더마는 인체 과학도 새로 맹기는갑지. 부숙(腐熟)은 썩히는 것을 말하는데
택도 없는 소리 아이가? 비장의 기능은 생리 기능의 조절에 있고 위의 기능은 해체(解體)와 혼합(混合)에
있능기다.위장이 하는 일이 잘게 부수고 섞는 것이지 썩히는 게 아니다. 썩힘과 섞음은 발음은 비슷해도
전혀 다른 소리자나. 위장에 화기가 모이면 바로 위열(胃熱)이 되고 그건 바로 위궤양으로 직행하제.
큰일날 소리를 하고 있다. 흙(土)의 성질은 바로 해체와 혼합이며, 부숙 즉 썩히는 것은 습기(濕氣)인
물(水)의 작용이다. 오행을 각각 대응하는 색으로 나타낼 때 토는 '누를 황(黃)'이고 화(火)는
'붉을 적(赤)'이고 목(木)은 '푸를 청(靑)'이다. 그럴 듯 하자나. 그런데 수(水)의 색이 '검을 흑(黑)'인 것은
선뜻 납득이 안 가제? 왜 그런가 물어보면 한의대 교수도 대답을 못해요. 오행에 대입시킬 때 물의 색이
왜 검은 흑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이것 하나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교수가 엄써. 그기 울나라 한의학이다.
물의 색이 오행상 왜 흑이냐 하면 그건 바로 수기(水氣)가 도올이 말한 부숙(腐熟)의 기운이기 때문이야.
물은 모든 생명을 길러내지만 동시에 그것을 불러들여 썩히는 것이 바로 물이야. 그리고 썩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 색이 검게 변하게 돼 있어. 바로 습기의 작용으로 수의 색깔을 띠게 디는거지.
소금이 썩은 간장도 검은색이고 낙옆이 썩어도 검은 색이고, 고추장을 오래 둬보면 알 듯이 빨간 고추도
썩으면 검어진다. 그래서 인체에서 볼 때 수(水)의 장부인 신장(腎臟)이 바로 부숙(腐熟)의 역할을 한다.
인체에서 썩은 물을 걸러내는 것이 신장이고, 그게 바로 오줌이자나. 불의 기운이 가까이 가면
썩어가던 물건도 소독이 되어 버린다. 곰팡이가 피고 균이 번창하는 것은 오로지 습기 때문인 것이니
썩어 가는 것을 햇볕에 말려 보라. 당장 썩는 것이 멈춰져부리. '비장과 위장이 썩히는 역할을 하고,
그 기운이 화기(火氣)라 하고, 불이 사물을 부패시켜 썩힌다'는 소리를 태평양을 건너가서 불쌍한
양넘들을 앉혀놓고 떠들고 왔다꼬 자랑을 하고 자빠지니 이걸 우찌해야 돼? 동의학의 국제적 망신이제.
어물전에 꼴뚜기가 따로 엄써.
물을 불이라 우기는 짓이 바로 지랄병인기라.
비장은 곧 지라인데 인체의 생리기능 조절에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 지라가 나쁜 사람의 증세를 일컬어 지랄병이라 한다.
지라 바로 위에 있는 심장의 화기가너무 승할 때 지랄병이 생긴다. 은행까지 갔다가
통장을 안 가져와서 되돌아오거나 차 속에 키를 꽂아두고 문을 잠궈 버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지라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은행까지 가서 집에 전화해서 구좌번호를 물어보거나,
철사를 구해서 차 문짝에 쑤셔 넣고 낑낑거리는 것이 바로 지랄하는 짓이다 말다.
내 보기에 도올은 지라에 약간 문제가 있어. 글에 지랄병 증세가 자주 보이기 때문이고
해외에까지 나가서 나라 망신을 시키는 것도 그렇제. 꼴에 저 나발을 시드니에서 영어로 했다는 것이고
그것을 증명해보일라꼬 강의한 영어 원고를 책에다 고대로 실어놨능기라. 이것도 다 지랄삥이다.
심장의 화기가 머리에까지 치밀어 올라서 언제나 뚜껑 속에 증기가 풀풀 솟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인게야. 심장을 식히고 머리 속의 김을 좀 빼내서 증기압을 낮추지 않으면
도올은 장수하기 어렵제. 지가 뭐 테레비에 나와갖꼬 쿠샵 몇개 한다꼬 오래 사능기 아이야.
태권도 단증 흔들어보인다꼬 튼튼한 것도 아이고. 내가 지 몸의 건강이나 상태까지 다 보고 하는
얘기야. 걸프가 이 글 보고 있으마 도올이한테 여 한번 오라캐라. 누야가 노자도 갤치주고
음양오행에 한의학에 기철학까지 갤치준다카더라 캐라. 그게다가 건강 진단까지 공짜다캐라.
도올이는 걸프 니 고대 선배 아이가? 선배한테 평생에 좋은 일 한번 하능기다.
도올의 한의학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얘기할 기회가 몇번 있다.
이쯤하고 제5장의 전체적인 풀이를 같이 보고 다음 장으로 가자.
한의학 이야기가 나왔응께로 이 참에 도올의 증상에 대해서 쪼께 설명을 해주는 것도 괜찮겠다.
도올이 지금 하고 자빠진 꼬라지를 일컬어 '지랄염병'이라 카는데 이 '지랄염병'이 어떤 병이냐?
염병은 '염통'이 나빠서 생기는 병이다.
즉 심장병인데 한의학적 소견으로 이 염병은 심장이 허(약)해서 오는 병이다.
심장의 기운인 화기가 약해지면 우찌 되느냐 바로 지라가 같이 허에 빠진다.
왜냐 하면 지라(비장)는 심장의 화기를 받아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장부이기 때문이다.
비장은 토(土)에 속하기 때메 화생토(火生土)의 관계상 화기를 못 받으면 힘을 못쓴다.
그래서 심장이 나쁜 사람은 반드시 지라가 안 좋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염병은 지랄병을 부르고 지랄병은 반드시 염병과 같이 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둘을 항상 붙여서 '지랄염병'이라 카능기다.
그 담에 '미치고 환장하겠다'카는 말을 자주 쓰자나. 이기 무신 병이냐?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의 원인은 신장(콩팥)에 있다.
심장의 화기를 억제해주는 것이 바로 신장의 수기(水氣)인데
신장이 약해서 몸에 수기가 부족하면 화기가 위로 올라가서 골에 미치게 된다.
사람은 화기가 머리에 미치면 미쳐분다. 수기가 부족해서 몸이 말라버리면
미치기만 하느냐? 그기 아이다. 환장을 같이 하게 된다.
환장은 '간이 말라서 비틀어지는 병'이다. 물이 없으면 나무는 마른다.
간은 목(木)이다. 그래서 신장의 수기가 부족하면 간이 마르게 되고
심하게 마르면 이기 비틀려서 뒤집어지는 거다. 이기 바로 '환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배를 째서 간을 보고는 '간이 제자리에 있는데 무신 소리냐?'카고
무식이 철철 넘치는 질문은 하지마라. '간이 뒤집어진다'는 말은 부침개 뒤집듯이
엎어진다는기 아이고 그 기운이 뒤집어진다는 소리다.
때문에 미치는 증상은 환장하고 같이 온다. 그래서 '미치고 환장하겠다' 소리를 하능기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지랄염병'과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는 같이 오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인체라는 것은 하나가 나빠지면 도미노 카드가 쓰러지듯이 줄줄이 상하게 마련이라서
'미치고 환장'하는 증세가 계속 심해지면 '지랄염병'도 오게 된다.
도올은 심장이 유독 실해서 화기가 승한 체질이라 '지랄염병'을 할 타입은 아이다.
그런데 왜 자꾸 지랄삥을 치게 되느냐? 몸에 수기가 부족해서 환장을 하기 때메
이 나빠진 간(木)이 지라(土)를 침범해서 그렇다. 목극토(木克土)다.
심장의 화기가 지라를 감싸주기 때문에 저 정도로 버티는거지
천성적으로 심장까지 약하면 버얼써 염병까지 떨고 있을거다.
마음은 오장육부 상태의 총체적인 조화에서 나오는 것이고 글이라는 것은
마음의 표상이어서 어떤 사람의 글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상태를 알 수가 있다.
나는 통신 벗들의 얼굴을 한번도 못봤지만 글 두세개만 보면 '아! 이 사람은
몸의 어디가 안 좋은 사람이고 어떤 부분의 기능이 활발한 사람이구나' 정확하게 안다.
도올의 건강진단은 공짜다. 기마이다.
또 한 장 마무리 하자.
◆ 도올 역 ◆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 구름 역 ♡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고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천지 사이의 공간이 어떠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지간은 텅 비어서
결코 찌그러지는 법이 없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그와 같이 말이 많을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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