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한 편____
왕이 오신 자리
김덕우
1.
티브이 채널을 돌리는데, 눈에 익은 풍경이 지나갔다. 얼른 그 채널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그 풍경은 사라지고, 다른 장면이다. ‘다시 나오겠지.’ 하면서 채널을 고정시켰다. 드라마는 <하늘재 살인사건>이라는 단막극이었는데, 재방송인 것 같았다. 드라마의 배경은 6.25가 끝난 뒤였다. 화면 속 가을 단풍이 너무 고왔다. 그리고 옛날 장터, 돌담길, 소풍…. 장면들은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풍경이었고, 등장인물들의 여린 마음도 예전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그리운 모습이어서 눈길을 돌릴 수 없게 하였다.
지나가 버린 풍경은 봉도각이었다. 연못 가운데에 있는 정자도 눈에 익었지만, 연못 저편에 있는 반쯤 누운 고목은 어디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곳은 어릴 적 저녁을 먹고는 늘 바람을 쏘이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초등학교 때 교내 사생대회에서 바로 그 봉도각과 고목을 그려 상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그 풍경을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2.
십여 년 전에 여기에서 연극을 한 적이 있었다. 조선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금성대군의 이야기를 담은 “피끝”이라고 하는 실경연극이었다. 그 때 이 곳을 선택한 것은 연못 주변의 소나무와 어우러진 봉고각의 아름다운 풍경도 무대의 좋은 배경이었지만, 조명에 더 신경을 썼던 곳이 바쯤 누운 아름드리 버드나무였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아마 저 나무는 500여 년 전의 그 일을 쭉 지켜봤을 거야.’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목은 순흥도호부의 영화로움도 봤을 것 같았다. 그리고 단종 복위를 위해 힘쓰던 모습도, 온 고을이 불길에 싸여 허물어져가는 모습도,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되어 죽계천은 온통 피로 물들였던 모습도, 역모의 고을이 되어 폐허가 된 모습도 지켜봤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피끝”이란 실경연극의 배경을 여기로 정하였다.
그 후 200여 년이 흘러, 숙종 때에 와서 순흥부가 복부가 되고, 봉도각은 영조 때 만들어진다. 하지만 예전 사람은 다 흩어져버렸고, 기록들도 다 불태워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 이전의 순흥 역사는 인근 고을의 기록으로 미루어 알든지, 아니면 마치 선사시대의 유물을 찾듯이 채집해야 한다고 한다.
3.
인근 지역에서 <왕의 나라>란 뮤지컬을 매년 올린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으로 몽진한 이야기를 다룬 내용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내용에도, 다른 안내에도 공민왕이 어디로 어떻게 왔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래서 전해오는 이야기를 따라 답사해 보기로 했다.
마침 단양에 “하룻밤 궁궐터”가 있다고 했다. 단성면사무소에서 하선암과 상선암을 지나 도락산 앞에 가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도락산 앞 골짜기가 궁터골이었다. 그리고 도락산을 왼편으로 바라보며 골짜기를 한참 오르니 내궁기라고 하였다. 그곳에 예쁜 펜션이 있었는데, 이름이 “하룻밤궁궐터”였다. 공민왕을 하룻밤 모신 노부부 이야기가 전해 온단다. 사방을 둘러본다. 온통 산이다. ‘이 깊은 골짜기까지 왜 들어왔을까? 충주에서 문경 새재를 넘든지, 한강을 따라 제천 단양을 지나 죽령을 바로 넘으면 될 일을 이 깊은 골짜기까지 찾아들어왔을까?’ 신변의 위험이라는 그 때의 절박함이 절로 떠오른다.
“폐하! 서경이 함락되었다 하옵니다. 빨리 서두르소서.”
“내가 송도를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순흥부가 적절합니다. 그곳은 선대왕이신 충목왕의 태를 모신 곳이옵고, 충신 안향과 안축의 고향입니다. 또 부석사 승군들이 폐하를 호위할 것입니다.”
“아! 이곳을 버려야 한단 말인가?”
“아니옵니다. 최영이 이곳을 회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안축의 아들인 충청도 안렴사 안종원이 폐하를 모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찾은 곳은 안동시 녹전면이었다. 영주에서 예안으로 갈 때 지나는 곳이 녹전이다. 녹전으로 접어들면 큰 고개를 넘게 된다. 바우고개라 한다. 왕은 이 고개를 넘으며 추운 날씨에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행렬을 멈추게 하고, 즉석에서 녹읍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래서 녹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녹전 봉상색”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녹전봉상색은 고려 말기 녹전의 출납 사무를 관장하던 임시관청이라고 한다.
왕이 순흥에 온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단양과 녹전 사이에 순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왕은 왜 순흥을 떠나게 되었을까? 왕이 왔던 때는 겨울이었다. 소백산에서 불어치는 눈바람에 추워하는 어머니와 왕비가 안타까웠을 것 같다. 그래서 좀 더 따뜻한 곳을 찾았을 것이고, 그 때 왕에게 건의한 곳이 예안이었다. 예안은 그 당시 순흥부 땅이기도 했지만, 회헌 안향 선생의 여섯 제자 중 수제자였던 역동 우탁 선생의 연고지였기 때문에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피난 생활의 고단함이 절로 그려진다.
녹전을 지나 예안에 갔다. 하지만 옛 땅은 모두 안동호 속에 잠겼다. 우탁선생의 집도 물 속으로 사라졌고, 선생을 모셨던 역동서원은 안동댐이 조성되면서 안동대학교 자리로 이건하였다고 한다. 예안을 둘러보다가 청량산으로 가 본다. 청량산은 공민왕 신앙의 중심지이다. 곳곳에 공민왕에 얽힌 이야기가 많다. 축융봉 동남쪽에 그때 쌓았다는 성곽이 남아있고, 산성마을에는 공민왕을 모신 ‘공민왕당’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부인당, 어머니당, 딸당 등 가족단위의 사당이 그 주변 여기저기에 있다. 왕이 이곳에서 성을 지키고 머물렀다는 이야기는 의문이 들지만, 왕이 오신 이 자리가 이젠 주민들의 신앙으로 승화되어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마을 사람들은 600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까지도 해마다 동제를 올리며 공민왕과의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4.
오랜 풍상에 힘겨워 반쯤 누워있는 고목을 다시 찾았다. 나무 옆구리로 자란 가지가 이젠 성인이 되었다. 누구든 머문 자리엔 자취가 남는다. 그 자취는 머문 이의 향기만큼 짙다. 또 그 인물이 보통 사람이 아닌 왕이라면 그 흔적은 더하다. 영주엔 어래산, 어위실, 남대궐, 왕유리, 왕비네…, 왕의 자취를 떠올릴 수 있는 지명이 있다. 또 무량수전, 흥주도호부아문, 제운루와 기주절제아문, 봉서루 등 현판에 남긴 왕의 글씨도 많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그 왕의 이야기와 그 왕을 받는 백성들의 애틋한 이야기가 어떤 풍습으로 남을 법도 한데, 순흥엔 없다. 무엇 때문일까? 육백여 년 전의 공민왕 이야기는 백 년 뒤에 소용돌이 친 금성대군 이야기로 덮여버린 것은 아닐까? 소백산 아래엔 공민왕을 모신 곳은 없어도 금성대군을 모신 사당은 많기 때문이다.
왕이 머물렀다는 또 다른 장소를 찾아본다. 왕이 잠시 머물렀다고 해서 왕머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이제 영주댐을 지나야 한다. 산허리로 난 새 길을 따라 가는데, 승용차 한 대가 멈추더니 젊은 내외가 길을 묻는다.
“말씀 좀 여쭙겠는데예. 혹시 옛날 철교가 있던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송리원철교 말인가요?”
부산에서 할머니 산소를 찾으려 한다고 했다. 철교가 있던 곳과 철길이 지나던 곳을 설명해주는데, 울상이다. 고맙다고 몇 번 인사를 하고 가는 젊은 부부를 보내고 주변을 다시 돌아본다.
영주댐 공사는 이제 거의 끝이 났다. 이제 물만 채우면 된다. 옛집들은 거의 헐어내고 빈터만 남았다. 새로 만들어진 교각 위에서 열 길 아래로 지도처럼 보이는 옛길을 본다. 이제 저곳도 물이 채워지면 갖은 사연들도 물밑으로 사라질 것이다. 옛길 사이로 흘러가는 시냇물이 석양에 하얗게 반사된다. 예쁘다. 하지만 저 물길도 이제 더 큰 물속으로 잠길 것이다. 왕이 오신 자리가 더 큰 역사의 물길 속에 잠겨 버렸듯이….
김덕우 / 2005년 『시와 산문』으로 등단했으며 저서 『영주기행』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