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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성육신 목적(요일3:4-10)-2024.12.1
지금은 대림절 기간입니다. 대림절은 성탄절 4주 전의 기간을 말합니다.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기간임과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성탄절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초림하신 예수님을 축하하는 이벤트로만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재림 예수를 대망하는 기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절기 이름이나 전통이나 절차에 매이지 말고 우리 가운데 반드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소망의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마라나타의 대림절이 되게 하십시다.
초림하신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오, 다시 오실 재림의 주인공도 예수님이십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은 예수님께 맞추어져 있고, 하나님의 스케줄도 예수님께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역사나 구속사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역사도 예수님의 역사요, 구속사도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주인공이시오,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구속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세상 역사를 타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이지요.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최고의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육신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장 신비로운 사건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요1:1). 하나님의 품속에 계셨던 것이지요. 말씀으로 하나님과 선재하셨던 예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분은 분명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품속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로 보내신 것입니다(요1:18).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골로새서1장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보이지 아니하십니다. 보이지 아니하시기에 형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을 대체할 만한 어떤 형상도 만드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십계명의 제2계명으로 못을 박았습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형상으로 당신의 존재를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인간이 만든 신적 형상은 우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형상으로 존재하신다면 하나님의 권능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손상을 입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서 절대 제한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다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존재를 보여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을 그만큼 사랑하셨던 것이지요. 또한 인간의 한계를 아시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당신 품속에 있는 독생자를 우리 가운데 보내사 당신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요한복음14장8절입니다.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옵소서 그리하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그들의 소원은 아버지를 보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에 대한 말씀은 아들로부터 많이 들었지만 한번도 아버지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을까?’ 제자들은 궁금했던 것이지요. 솔직히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입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말입니다.
그런 빌립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러면서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줄을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아직 그들에게 오순절 성령이 강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몰랐던 것이지요.
사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깨닫게 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로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들 안에 오심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과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했던 것이지요. 이유는 성령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증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요,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시면 내 영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시는 것이거든요(롬8:16). 성령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입으시고 오신 것이지요. 그분의 나심도 우리 인간과 동일하게 여인의 몸을 통해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는 우리는 생물학적인 방법으로 이 땅에 왔으나 우리 주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셨다는 말은 남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이지요.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의 배를 빌어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을 이루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요1:14). 이것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말합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갖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감히 하나님이 사람의 옷을 입고 사람으로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시다니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세상에 사람이 신의 자리를 차지한 흔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수많은 이단 종교는 사람을 신의 자리로 높여 왔습니다.
그래서 자칭 인간이 신이 된 사례는 너무 많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구요. 그런데 신이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경우는 한번도 없습니다. 어떤 종교에서도 흉내를 낼 수 없습니다. 증거도 없거니와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감히 신이 사람이 되다니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이른바 신이 사람이 되신 경우이지요. 이런 종교도 없거니와 이런 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이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내버리고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성육신은 다양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성경도 다양한 목적으로 성육신을 조명하고 있지요. 성육신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은 세 가지의 목적으로 성육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다는 것입니다(5절). 둘째는, 마귀의 일을 멸하려 오셨다는 것입니다(8절). 셋째는, 하나님의 씨를 전파하러 오셨다는 것입니다(9절).
(1)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습니다(5절)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표면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죽음을 맛보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죽음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이거니와 죽음을 맛볼 수밖에 없게 된 것이지요. 인간이 자기 죄로 인하여 죽는다면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습니다. 죗값으로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죄인들의 죗값을 대신 지불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성정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이지요.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죄를 다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죄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양은 죗값을 지불하기 위한 대속물이요, 희생제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죗값을 대신 지불하기 위해 오신 어린양이십니다. 그래서 육신으로 오셔야만 했던 것이지요. 만일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시지 않았다면 죽음을 체휼하실 수 없습니다. 죽음은 육신을 입고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육신을 입으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육신을 입어야 죽음을 체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었다는 말은 죽음을 체휼하시기 위함이라는 말과 동일합니다. 그러면 그 죽음은 누구의 것입니까? 당연히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기 백성의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마태복음1장21절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미안하지만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하여 오신 분으로 말입니다. 아닙니다. 자기 백성의 죄가 아니면 주님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아니하십니다.
오직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신 분이십니다. 자기 백성이라함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로 작정된 자라는 말이지요. 만일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입은 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그들은 그들의 죄를 그들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들의 죄를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긍휼 없는 죽음이라는 말이지요. 긍휼 없는 죽음은 영원한 형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없이하려고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셨습니다. 죄를 없이하는 방법은 죗값을 지불하시는 것입니다. 죗값은 사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치러야 할 죗값을 대신 지불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것이라는 말은 죽으러 오셨다는 말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오신 표면적인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주님이 죽으셔야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고 짓지도 못하시며 죄와 상관없으신 분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죗값이 지불된 것이지요. 죄가 소멸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이전에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죗값을 지불하신 이후에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는 것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 단번에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영벌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착각하면 안됩니다.
(2)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오셨습니다(8절)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또 하나의 목적이 있습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시기 위함입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일이 있고, 하나님의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하나님의 일과 마귀의 일 사이에서 충돌하고 갈등합니다. 그러면 마귀의 일은 무엇일까요? 사단의 주는 생각과 마음으로 사는 것이 마귀의 일입니다. 마귀의 일은 육신의 일입니다. 육신은 마귀의 일을 도모하고, 영은 하나님의 일을 도모합니다. 로마서8장5절과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신을 쫓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쫓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주는 마음과 생각으로 하는 모든 것이 마귀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우리가 육신을 입고 살지라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면 성령이 하시는 일을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성령이 마귀의 일을 멸하고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한다는 것은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만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성전삼고 내안에 오셔서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살 때 마귀의 일이 소멸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로, 왕으로, 전부로 오셔서 내 삶의 주인 되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나를 성전삼고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지요.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갈2:20). 그분의 이름과 그분의 은혜와 그분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내안에 거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일을 멸하게 됩니다. 자연인으로서 나는 절대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영물입니다. 육체를 입은 인간은 육체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영물이기 때문에 인간보다는 더 영역이 크고 활동 범위도 넓습니다. 인간보다는 한계가 자유롭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자연인으로서 인간은 마귀의 일을 멸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귀의 일을 멸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한 가지 방법뿐입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밖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수시로 경험하고 삽니다. 우리가 아무리 자기 죄를 이기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길 수 없습니다. 나로 하여금 죄를 이기는 권능을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디 계십니까? 내 곁에 계시지 않고 내 안에 계십니다. 믿는 자들 안에 주님이 내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원수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도록 역사하십니다. 마귀의 일을 멸하려고 도와주신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힘이 되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 내 안에서 나로 하여금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내가 마귀를 이기려고 노력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마귀를 이길 수도 없습니다. 마귀를 이기는 권능은 주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마귀의 일을 소멸하시는 주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그분만 바라보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마귀의 일을 멸하셨을까요? 물론 전에도 마귀를 대적하사 이기게 하셨고, 지금도 여전히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를 대적하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분 안에 있으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우리는 마귀를 대적하고 마귀의 일을 소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마귀의 일을 소멸하신 최고의 사건이 있습니다.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마귀의 일을 완전히 수포로 돌리셨습니다. 십자가는 마귀가 자기들이 승리했다고 환호할는지 모르지만 마귀의 완전한 실패요, 패배였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십자가는 마귀들이 만들어놓은 덫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귀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는 마귀가 고안한 방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를 통해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한 인류 구원의 스케줄을 마련해 놓고 계셨던 것이지요. 나무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스케줄에 마귀가 말려든 것이지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들만의 승리의 찬가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들을 최고로 흥분시켰던 것은 예수님이 무덤에서 잠드신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축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끝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사흘 만에 주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이지요. 부활이 사망을 이긴 것이요, 생명이 사망을 삼킨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마귀의 일을 완전히 멸하신 것이지요. 마귀의 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닙니다. 죽일 자를 찾아다니는 것이지요.
여기서 죽음은 영원한 죽음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영혼들을 붙잡아 지옥으로 끌고 가는 특공대요, 심부름꾼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 주님에 의해 마귀의 일은 완전히 소멸당한 것입니다. 비록 잠깐 최후의 발악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과가 뻔하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들이 하는 일을 멸하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씨를 심으러 오셨습니다(9절)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신 일 중에 두 가지 일은 소극적인 측면에 속할 수 있습니다. 죄를 없이하려는 일이나 마귀를 멸하려는 일은 소극적인 측면에 속한 반면, 적극적인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는 자들 안에 하나님의 씨를 심어주시는 일입니다. 생명 얻을 자들 안에 하나님의 씨를 뿌리러 오신 것이지요.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씨가 있다함은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말이지요. 생명은 씨에 있습니다. 물론 죽은 씨도 있고, 죽을 씨도 있습니다.
죽은 씨는 생명이 없는 씨요, 죽을 씨는 생명을 낳고 없어질 씨입니다. 살아 있는 씨는 땅에 떨어져서 죽습니다. 그 씨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이 태동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땅에 떨어지기 전에 죽은 씨도 있습니다. 그런 씨는 땅에 떨어지면 다시 죽지 않습니다.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에 떨어지기 전에 죽은 씨는 생명이 없습니다. 그냥 그것은 물건일 뿐입니다. 생명과는 상관없이 땅의 일부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그냥 흙에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명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씨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는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씨는 예수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의 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남겨두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의 씨앗을 감추어 놓으셨다는 말입니다. 생명의 씨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다시 사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썩지 아니할 씨라고 말입니다. 베드로전서1장23절을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말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씨가 존재합니다. 썩어질 씨가 있고, 썩지 아니할 씨가 있는 것이지요. 썩어지지 아니할 씨는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천지가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거든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생명의 씨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과 말씀으로 함께 계셨습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의 거듭남은 말씀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썩지 아니할 씨가 우리 안에 떨어진 것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씨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가 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썩어지지 아니할 씨요, 말씀이 육신을 입은 예수님이 생명의 씨인 것입니다. 예수님만 우리를 거듭나게 할 생명의 씨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께 나오지 못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버지께 나올 수 있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도 아버지께로 나올 수 없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아버지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오신 보혜사요, 안내자이며,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반드시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장12절과13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과 권세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니라”고 말입니다.
누구나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해야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예수 안에 있고, 예수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씨는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씨입니다. 생명의 씨, 곧 영생의 씨인 것이지요. 그 씨는 죄와 상관없는 씨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고 죄를 짓지도 못하는 씨입니다. 죄를 없이하려고 오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생명의 씨를 뿌려주신 것입니다. 또한 죄의 가라지를 우리 안에 뿌려놓은 마귀의 일을 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마귀를 쫓아내고, 죄를 소멸하사 생명의 씨를 뿌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제 죄를 짓지 아니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9절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들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씨는 죄를 태우는 씨요, 죄를 미워하는 씨입니다. 그 씨는 마귀를 대적하는 씨요, 마귀의 일을 소멸시키는 씨입니다. 그 씨는 영생을 얻게 하는 씨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씨입니다. 그 씨를 뿌리기 위하여 우리 주님이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것입니다. 그 씨가 자기 심령에 뿌려져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듣고 절대 잊어서는 안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성육신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죄를 없이하려고 오셨고,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으며, 하나님의 씨를 뿌리러 오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른바 표면적인 이유가 그럴지라도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지요.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말씀한 여러 가지 목적들은 결국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살전5:10).
물론 믿는 자들은 이 말씀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살 것을 믿는 정도이지요. 지금 천국을 믿는 분들이 많지 않아요. 현재적 천국을 믿는 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적 천국과 미래적 천국을 동시에 믿게 합니다. 장차 죽은 다음에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복음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부터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입니다. 믿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법에 통치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의 법에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끄심과 인도하심과 통치하심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서도 천국을 경험하고 사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우리와 함께 살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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