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0:33-46)
1.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당시 바벨론이라는 국가는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의 기준에서
긍정하거나 수용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럼에도 굳이 하나를 말하자면,
그들이 추구하고 소유한 세상적인 힘과 원리를
하나님께서 유다의 범죄를 응징하는 도구로
잠시 사용하신 적이 있다는 점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정의롭거나 옳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
악한 것조차 넘어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사용하셨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들을 마치 정의로운 존재인 것처럼
추종하거나 정당화한다면
이것은 무지라기보다
그 추종자들 안에 숨은 또 다른
자기 욕망에서 비롯된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죄악이다.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이나 유다 백성 중
바벨론을 추종한 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안타깝게도 오늘 대한민국에는
그저 세상 권력, 물질, 우상을 추종한 것뿐인데
자신의 이익과 합치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둔갑시켜
극렬하게 추종하는 믿지 못할 일들이
다수 교회와 교인들 사이에서 결코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은
바벨론을 처절하게 응징하고
무너뜨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만약 오늘의 예언을 바벨론의 추종자들이 들었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가짜 뉴스라 하거나, 과장이라 하거나,
하나님의 예언 자체를 부인하려 들었을지 모르겠다.
오늘 바벨론에 대한 응징의 표현이 특별하다.
특히 45절에 등장하는 영어 단어 appalled가 눈에 띈다.
확인해 보니 히브리어 원어 역시 유사한 의미인데,
단순한 충격이나 놀람을 넘어
‘경악’, ‘넋을 잃을 만큼의 참혹함’을 의미한다.
마치 군에서 전쟁의 극한의 공포를 표현할 길이 없어
‘가공할 만한 상황’으로 표현하는 것과 비슷하다.
바닥에 깔린 초원과 잔디가
다가오는 파괴를 미리 감지하고
몸서리치는 듯한 표현이다.
바벨론이 느끼는 공포를 더 이상 설명할 말이 없어
마침내 선택된 단어가 ‘경악스러운 상황’인 셈이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사람을 속이는 이들에 대한 심판이 그렇다.
2.
본문을 읽으며
나는 또 하나의 불편함과 마주했다.
바벨론을 향한 무서운 징벌의 언어와 달리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서는
묘하게 ‘옹호’의 기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구속자’,
‘그들의 송사를 변호하신다’,
‘안식을 주신다’는 표현들 속에서
이스라엘과 유다는
분명 보호와 회복의 대상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내 마음에 걸린 질문은 이것이었다.
바벨론이든, 이스라엘이든
결국은 같은 인간, 같은 영혼이 아니었던가?
유다 백성 역시
끝까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대안을 붙든 자들이 많지 않았는가?
왜 하나님은
사람을 기준으로 공정하게 다루는 대신
민족을 구분하여 말씀하시는가?
이 불편함의 배경에는
아마도 오늘날 한국 교회 안에 깊이 자리 잡은
왜곡된 ‘선민의식’이 있을 것이다.
선택받음이 우월감이 되고,
구원이 도덕적 면허가 되며,
하나님의 편이라는 말이
타자를 단순화하고 도구화하는 근거가 되는 현실 말이다.
그러나 본문을 차분히 음미해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말할 때에는
‘한 사람’의 관점으로 말씀하시고,
바벨론을 말할 때에는
개인의 영혼이 아니라 시스템과 구조를 다루신다.
무력, 우상, 문명, 권력, 질서.
바벨론은 ‘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유혹하는 체계’로 등장한다.
그래서 오늘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한 보호와 회복은
배타적인 민족 우대가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대표적으로 드러낸 표현이다.
이미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의 대안을 붙든 자들을
심판 속으로 사라지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
남은 자와 후대의 ‘인간’을 향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든 바벨론이든
마지막까지 기회를 거부한 자에게는 심판이 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영혼을 보호하고 회복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심판 이후에도
남은 자를 통해,
후대를 향해
다시 말씀하신다.
오늘 본문의 분위기는
이스라엘은 선하고
다른 민족은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관계 맺는 한 영혼’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유다를 서사적 중심 인물로 삼으셨고,
세상을 유혹하는 죄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바벨론을 등장시키신 것이다.
마치 영화에서
모든 인물을 주연으로 세울 수 없듯,
구원의 드라마를 따라가게 하기 위해
서사적 중심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한 영혼보다
존재론적으로 더 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을 주연으로 등장시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모든 인간을 동일한 존엄으로 다루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모든 사람이 주연은 아니지만,
모든 영혼은 공정하게 사랑받는다.
이런 인식은 어떤 면에서 편하지 않다.
뭐든 것이 딱 떨어지는 느낌이 아니라서 말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은
나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 사이의
헤아릴 수 없는 간극에서 오는 것이다.
불편함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하나의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쉽고 편한 결론으로 서둘러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불편함을 품고,
질문할 용기를 내고,
진리 안에서 견디려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께서
열어 주실 때를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