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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7일
말씀 : 엡4:13
제목 : 교회의 성장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진리와 공의로’ 주의 백성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주의 백성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분의 언약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그들에게 동일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창17: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모세에게는 출29:45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레26:12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친밀한 약속을 하셨지만 그들은 그분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상숭배와 하나님을 배도하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선지자들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호되게 질책했습니다. 이사야는 ‘소도 자기 주인을 알고 나귀도 자기 주인의 구유를 아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그들을 책망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인간 세상에서도 아들은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느혜미야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을 일삼아 온 죄를 한목소리로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등졌고, 그분께 돌아오라고 권고하는 선지자들을 죽였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그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고집이 세고,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 백성들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의 강퍅한 불순종은 하나님을 근심하시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를 경외하며 내 모든 명령을 지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영원히 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처음 언약을 맺으실 때부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분을 공경하고 계명을 지킴으로써 영원히 복을 받기를 바라셨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명확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을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그분의 소원을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백성들을 모으시고,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로운 마음을 주심으로써 그분의 뜻에 복종하게 만드시는 계획을 품으셨습니다. 예레미야서에서나 에스겔서에서도 이런 약속의 말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렘24:7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37:21-22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잡혀간 여러 나라에서 인도하며 그 사방에서 모아서 그 고국 땅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땅 이스라엘 모든 산에서 그들이 한 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아니하며 두 나라로 나누이지 아니할지라’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타락과 무능함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런 인간들을 다시 불러모으는 일은 천지창조 못지않은 기적입니다. 세상이 창조될 때 아무 형체가 없는 허공을 맴도셨던 성령께서 지금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될 사람들의 마음속을 맴돌고 계십니다. 가증하고 부패한 인류로부터 그들을 거룩하게 구별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실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사건인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새 언약을 교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나갈 계획을 세우셨고, 이를 위해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고, 그 결과 우리는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들,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가 된 백성’ 곧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과 신약의 그것은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신약에서는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어 기름 부음의 은혜를 누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함께하심의 감동을 누리는 신약시대의 은혜는 구약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하시며 그분의 권세, 특권, 지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또한 천국에서 침례 요한보다 큰 자인 우리를 교회의 몸으로 부르셔서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함을 공유하게 하시고, 성령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돌보시며, 이 모든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과 신약의 우리들의 삶이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실패한 언약이 신약에서 이루어지긴 했지만, 하나님을 떠나 세상 문화에 젖어 들어 죄를 짓고 천국의 소망을 잃어버린 채 세상의 원리와 방법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통해 이 시대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회복기가 반드시 필요한 때입니다.
민족 공동체가 아닌 믿음의 공동체, 즉 교회를 세우시고 열방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드러내는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실패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약속은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신 것은 단지 공통된 소명이나 전통, 규례, 윤리, 신조, 규범 등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는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그 나라 백성의 삶을 주도하시며 복을 주시기 위해 하나로 묶으신 것입니다. 빛으로, 영광으로, 사랑으로, 그분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묶으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교회의 감격, 은혜, 충만, 능력, 권세, 지위, 축복 등을 깨닫기는커녕 그리스도와 묶여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형편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이런 귀한 것들을 누리고 체험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약점과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들로 인해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비난받고 있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역사가들은 십자군 원정에서 종교 재판에 이르기까지 교회가 저지른 수많은 잔혹한 행위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에게 두고두고 수치로 남을 역사입니다.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여론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기독교의 윤리관이나 도덕적 판단의 근거는 사회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성적 부도덕, 독선, 탐욕, 증오, 거짓 등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타나야 할 것들이 교회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종교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세력화, 정치화로 군중들을 선동하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그리스도와 연합된 지체로 살아가는 교회라면 이런 것들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가라지, 등불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 한 달란트 받은 자, 염소 등의 표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로 연합되지 못한 채 ‘잡족들’의 유혹과 불만에 동조하는 일들이 교회에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는 전혀 엮이지 못한 채 교회에만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이 저지른 잔악한 행위를 참 교회의 탓으로 돌리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이단 교주들의 성적, 물질적 타락이 교회의 행태로 오인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가 영적 충만함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교회가 훈련받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한 것도 포함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기도하지 않고 영적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이전의 삶을 즐기거나 옛 성품으로 살아가면서 영적 갈급함이 없고,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도 않으며, 죄인임을 고백하지도 못한 채 교회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에 대한 오해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00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조사했는데 70%가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고 해서 교회의 역할이 끝났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교회는 나머지 30%의 성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예로 서로 싸우고 패를 나누어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는 교회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모일 때마다 고성이 오가고 분노와 욕설과 위협이 난무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랑, 용서, 협력, 이해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과연 틀린 말일까요?
물론 성화되지 못해서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라면 분명 싸우고 대립한 후에는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죄를 지을지언정 죄 속에 파묻혀 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실수하거나 넘어지거나 시험에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즐기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쳐서 순종하려고 애를 씁니다. 돌이키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그렇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간섭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그런데 지속적인 다툼 가운데 화해와 회개와 용서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교회가 분리되고 깨진다면 이것을 진정한 교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비교하는 것은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루시는 방법과 원리, 우리를 훈련하시는 내용은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보고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참 교회’는 회개하고,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참 교회로 성령님께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잘못 가거나 잘못 판단하거나 나태할 때 어려움을 주시고 다듬어내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우리를 온전한 교회, 참 교회로 세우기 위한 그분의 방법입니다. 지난날 코로나로 인한 어려움도 이렇게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다루시며 다듬어내시는 일들은 성령께서 감당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질투하시기까지 그들을 다루시는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질투하시기까지 사랑하시며 온전히 빚어내심으로 그분의 뜻을 이 땅에 심어나가는 일에 우리가 함께하기를 원하십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함께 나누어봅시다.
엡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에베소로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이고, 둘째, 그분께서 너희를 왜 구원하셨으며 구원받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고 간증하면서 십자가의 ‘현관 앞’에만 모여 있습니다. 십자가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교회로 가야 합니다.
엡1:20-22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성도의 기업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우리와 묶어 예수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명칭에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묶여 있다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분의 부르심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전이 되어가야 합니다. 성전의 완성은 연단과 훈련을 통한 성숙으로 나타나는 완성을 뜻합니다. 이것이 교회론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행위는 ‘열심’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있습니다. 구원받았으면 큰일을 해야 하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식으로 신앙생활하다 보니 늘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신앙의 삶은 교회론적 관점으로 보아야 합니다. 교회론적 관점은 한마디로 함께 가는 싸움입니다.
엡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우리는 큰일, 위대한 일,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자라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두 가지 특별한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직분’입니다.
엡4: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다른 하나는 ‘은사’입니다.
고전12:27-28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직분과 은사를 주신 목적은 모두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입니다. 우월감이나 계급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허락하신 어떤 유익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크는 것입니다.
교회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곳입니다. 분파와 싸움은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의 성장을 위한 훈련과 연단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를 초청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님께 순종함으로써 든든히 세워지는 참 교회의 모습으로 서로 지어져가며 성장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