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이기(利器) 속에서
장석민
살다 보면 기분 좋은 날도 있고,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요즘 세상에는 그 기분을 좌우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첨단 문명의 이기(利器) 인 스마트폰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화가 없던 시절에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전하고, 그리움을 표현하고 사랑을 고백하기도 했었다.
전화기가 보급 되면서 서서히 편지가 줄어들다가 휴대전화가 생활필수품이 되어버린 현대사회에서는
편지 쓰는 사람은 아주 극소수인 듯하다.
가을이 되니 더욱 편지에 대한 추억이 많이 떠오르고 있다.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 밤새워 편지를 썼다가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 찢어버리고 다시 쓰고,
결국은 완성되지 못해 보내지 못한 편지, 다음 날 어설프게 다시 써서 보내고 며칠을 조마조마하고 있는데
답장이 왔을 때의 그 반가움, 그런 마음을 이제는 느낄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가끔 옛 생각이 나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보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마음뿐, 편지를 써서 보낼 곳도, 편지를 받아줄 사람도 없으니 이 또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편지가 사라진 요즘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에메일과 카톡,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다.
물론 이런 것들은 편리하고 필요할 때도 있다.
실시간으로 의사전달을 할 수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다.
시대가 바뀌었으니 그것에 맞추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가도 가끔은 그 편리한 기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을 때도 있다.
카톡이라는 것이 있다.
카카오톡(Kakao Talk)의 줄임말인데 (주)카카오가 제공하는 글로벌 모바일 메시지 서비스를 이르는 말이다.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세상의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는 것이다.
학교 동창, 직장 등등 단체 카톡 방을 만들어놓고 원치 않아도 누군가가 “초대” 형식으로 끌고 들어가게 된다.
물론 그 방에서 나올 수도 있겠지만 들어설 때 처음엔 낯설어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서 그냥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보고 있다.
산골에서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몇 몇 동창생들이 단체 카톡 방을 만들어놓고 누군가가 나를 끌고 들어갔다.
물론 “초대”라고 하였지만 나는 그 초대에 응할지, 응하지 말아야 할지 선택할 시간도 없이 그냥 그 방에 입장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들어간 단톡방에서 그 녀석들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다.
어느 날 한 녀석이 장문의 글을 올렸다.
“이 글은 끝까지 읽어야 됨” 이라고 서두를 시작하는 글이었다.
처음엔 “이 녀석이 뭔 말을 하려고 이러지” 하면서 읽기 시작 했는데 읽다 보니 내용인 즉
“어느 젊은 주부가 있었는데 둘째 며느리란다. 시아버지를 장남댁에서 모시지 않으려고 하니 둘째 아들이 모시겠다고 아내와 상의도 없이 모시고 왔더란다...” 이런 식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시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섬기는 둘째며느리가 되었다는 내용이라서 괜찮은 글이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 글은 거기까지만 읽었으면 아주 좋았을 것을.
그 아래 글을 읽다가 하마터면 전화기를 집어 던질 뻔하였다.
“이 편지는 영국에서 최초로 시작되어 일 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받는 사람에게...” 이렇게 시작되더니 “이 편지는 4일안에 당신 곁을 떠나야 합니다. ...”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다.
속된 말로 “낚였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화가 났다.
바로 그 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트럭 운전을 하는 그 녀석과 통화하기가 어려운데 그냥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조금 지나자 전화를 받는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목소리가 하이톤이다.
다짜고짜 “야! 행운의 편지 여기저기 보내니까 행운이 오더냐?” 했다.
이 녀석 눈치는 빨라서 “너 그거 보고 화났구나?”하면서도 “니가 나한테 먼저 전화를 하는 거 보면 행운이 왔나보다”라고 능글능글 너스레를 떤다.
그렇게 말하는 녀석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어서 이런저런 얘기만 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그 녀석도 누군가가 보낸 것을 아무 생각 없이 단톡방에 올렸다고 한다.
그 녀석은 나이를 먹었어도 산골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그 시절의 그 마음으로 장난스럽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위 행운의 편지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대 말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전에 조선시대에도 행운의 편지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1470년 성종실록에 나온 내용에는 박석로라고 하는 사기꾼과 그 일당을 체포, 심문한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그 일당은 사람들에게 퍼트리기를 「경인년 3월부터 바람과 비가 몹시 심해 약한 사람은 다 죽는다. 전염병과 전쟁의 변고로 경인년 신묘년 두해에 사람이 8분(分) 죽어서 집은 있으나 사람은 없으며, 땅은 있으나 경작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적다가 「이 글 한 벌(本)을 전하는 자는 자기 한 몸의 재앙을 면하고, 두 벌을 전하는 자는 한 집의 재앙을 면하고, 세벌을 전하는 자는 크게 평안함을 얻을 것이다...」이런 식으로 이 글을 베껴서 여러 사람에게 전하라고 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하긴 어느 시대나 혹세무민하는 자들은 있었으니 그 방법의 차이일 것이다.
현대사회는 문명의 이기(利器) 속에서 살고 있다.
전자기기 없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 문명의 이기라는 것으로 인해서 귀찮을 때도 있고, 상처 받을 때도 있다.
휴대전화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오거나 문자, 카톡 등 나에겐 필요치 않은 것들,
쓸데없는 것들이 너무 많이 오고 있다.
넘쳐나는 문명의 이기에 의한 부작용일 수도 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전화번호가 유출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계속해서 쓸데없는 것들이 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설정 해 놓아서 전화가 오거나 문자가 오거나 그냥 놔두면 되지만
나중에 전화기를 열었을 때 잡다한 것들이 보이면 지우는 것도 성가신 일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문명의 이기라는 것을 사용하는 대가로
그만한 불편은 감내해야만 하는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휴대전화가 생기면서 편지를 비롯해 인간미를 잃고 점점 멍청해지는 것도 느껴요.
예전엔 그래도 전화번호 몇 개는 외웠는데 모두 단축으로 해 놓다 보니 머리에 남은 전화번호는 없어요.
문명의 이기가 진화할수록 뇌가 퇴화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행운의 편지가 조선시대에도 있었군요.
좋은 정보입니다.
카톡, 문자메시지 등 문명의 이기(利器) 때문에 예절문화가 많이 파괴되었어요.
오죽하면 부모형제는 없어도 되지만 스마트폰은 꼭 있어야 된다, 라는 말이 있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시대가 그렇게 변하고 있는 듯합니다.
얼마전에도 장문의 행운편지를 카톡으로 받았네요.
중학생 때부터 받기 시작했으니 오고도 남을 행운인데 왜 아직 코빼기도 안보일까요?
행운은 언제 올지 모르지만
일상 속에서 날마다 행복한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얻는것 만큼 잃는것도 있다고 봅니다.
맞습니다.
문명의 이기가 진화할수록 얻는 것도 있겠지만
예전에 비해 사람들의 감성적인 면은 잃어간다는 느낌입니다.
행운 편지를
여러 방법으로 받아본 경험이 있지만
행운 편지는
받을 때마다 불편하더군요
이름부터 불편한 편지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불편한 편지 자체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ㅎㅎ
敍林 선생님!
그런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장난으로 시작했을지 몰라도
받는 사람은 기분이 좋지 않죠.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잘 지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