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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산유국에 껴들 수 있을까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도 그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냥 꿈으로 끝났습니다. 학교에서 세계지리를 배우며 자원이 없는 나라로 얼마나 탄식하였는지 기억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렇게도 교육열이 과열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사람이 재산이니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원이라고 해봐야 사람뿐입니다. 그 사람이 자원이 되려고 하니 지식으로 똘똘 뭉쳐져야 합니다. 우리 조상 적부터 알고 있었나봅니다. 교육열 하나는 세계 으뜸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이제는 출산율과 대비됩니다. 요즘 세대는 우리 부모 세대와 다릅니다. 나를 희생하여 자식을 키우려 하지 않습니다. 내 인생을 만들자는 의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이제 낮 기온 30도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름으로 들어섰으니까요. 이제 겨우 시작입니다. 인도에서는 50도가 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상상이 안 됩니다. 말 그대로 펄펄 끓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걸어가며 구운 고기가 되는 것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아직 살만합니다. 그런데 혹 포탄으로 구우려는 건 아니겠지요? 꼭 전쟁하자는 식으로 나가고 있는 듯해서 걱정입니다. 하지만 염려 없습니다. 믿습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입니다. 누가 감히 넘보겠습니까? 하나님을 상대할 자신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나라입니다. ㅋㅋ 또 주말입니다. 건강하게, 신나게!! 행복하세요. ^)^
2024년 6월 8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로마서 12 : 19)
<퓨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는 감정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아마도 증오와 복수심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설과 드라마 그리고 영화의 많은 주제가 복수를 담고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만큼 강하고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강합니다. 그래서 더 짜릿합니다. 우리 대부분이 바라고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 타령을 한다 해도 솟구치는 분노와 그에 따른 복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간을 기다리며 더욱 철저히 준비합니다. 시간을 아끼며 확실한 복수를 위해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걸 수도 있습니다.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생명에는 생명’이라는 보상규칙을 듣습니다. 성경에서 유래하였기에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복수의 하나님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심보를 알고 계신 하나님이 사전에 그 잔인함을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일반적인 심보를 생각해봅니다. 혹 발을 밟히면 상대방의 다리를 분질러버려 주고 싶습니다. 뺨을 한 대 맞으면 그 놈의 목을 잘라버리고 싶어집니다. 소위 되로 받고 말로 주는 것은 복수심리에서 철저합니다. 사람은 원가에 이자까지 얹어서 주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원가보다 이자가 배 이상 높아집니다. 그게 우리네 심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잔인한 본성을 막기 위해서 법으로 명시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받은 만큼의 이상은 절대 금지다, 한 것이지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그 이상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악당에게 잔혹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것을 현장에서 그대로 보았습니다. 비록 어린아이였지만 아니, 어린아이였기에 더욱 생생하게 기억에 담아두었을 것입니다. 반드시 배 이상으로 갚아 주리라, 어쩌면 그 이후의 삶이 어려웠어도 바로 그 증오심 복수심의 힘으로 살아남았으리라 짐작합니다. 복수를 위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나아가 철저히 자신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 이상의 힘과 실력을 갖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남았고 용사가 되었습니다.
SF 영화 대부분이 그리고 있는 우리 지구는 말 그대로 종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미래는 정말 이렇게 암울해야 할까요? 다시 원시시대로 돌아간 모습, 나아가 유인원의 지배를 받는 시대, 아니면 좀비가 활동하고 살아남아있는 인간들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인간의 지배를 받거나 외계인의 지배를 받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밝은 미래가 아니라 어두운 미래를 그리고 있습니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 하는 것일까요? 이제 배경은 도시가 아닌 황무지 사막입니다. 전 세계가 그렇게 황무지가 되어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옛날 기억을 살려 에덴동산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은 인간들이 물이 있는 꿈의 동산을 그리며 찾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만큼 물이 귀하고 당연히 값이 나갑니다. 또한 그 물을 찾거나 옮기기 위해 차량이 필요합니다. 그에 따라 동력을 만들어줄 연료가 필요하니 연료 역시 물 값만큼이나 비싸게 됩니다. 식량, 물 그리고 연료 즉 기름이 절대적인 권력을 차지합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또 빼앗으려고 싸우고 전쟁을 벌입니다.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우두머리가 생기고 지배체제가 만들어집니다. 권력구조가 생기고 조직의 힘이 생깁니다. 아마도 민주체제가 만들어지기 전에 가장이 있듯 부족장이 있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있게 됩니다. 권력이 집중되어야 움직이기 쉽고 대처능력이 빨라집니다.
문제는 이 우두머리의 성격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선한가, 악한가 따지면 됩니다. 욕심이 과할수록 그 나타나는 성품도 과격하고 잔인할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 욕심과 정욕을 채우려고 할 짓 못할 짓 다할 것입니다. 맘대로 착취하고 폭행하고 누립니다. 어느 날 ‘푸리오사’가 당합니다. 바이커 군단의 폭군 ‘디멘투스’에게 엄마를 잃습니다. 그 전에 엄마와 약속을 합니다. 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은 그 누구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녹지대이며 평화의 세상입니다. 퓨리오사는 디멘투스에 의해 양육됩니다. 무슨 목적에서 살려두고 기르는 것일까요? 결코 선한 목적이 아니리라 짐작합니다.
다른 영화들과 다른 것은 배경이 황무지 곧 사막이라는 것입니다. 요상한 자동차들과 막강 화물차 그리고 힘 있는 오토바이들이 사막을 횡단하며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특징이고 볼거리입니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물, 식량 그리고 기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지켜야 하고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인한 성품대로 악행을 저지르고 그에 따른 복수전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퓨리오사, 대단한 여자 용사입니다. 상상이 안 됩니다. 사슬에서 풀려나려 자신의 팔을 스스로 잘라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외팔이가 된 것입니다. 잘 알듯이 이 영화도 오랜 기간 시리즈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영화 ‘푸리오사 - 매드맥스 사가’(Furiosa: A Mad Max Saga)를 보았습니다.
그 때가 언제일까요?
성도들이 성경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또 때로는 성경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대부분 신앙생활 하며 이런 저런 기회를 만들어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기독교서점에 가면 성경공부 교재도 다양하게 나와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부터 시작해서 성경 각권을 가르치는 것도 있고 주제별로 나누어서 가르치는 것 등등 여러 가지가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예언과 비유 부분을 가르치고자 하는 교재는 찾기가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짐작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잘못 해석하면 자칫 온갖 비난과 비판, 나아가서는 이단이라고 정죄 받고 교단에서 쫓겨나기 때문입니다. 두렵지요. 그러니 그렇게 왈가왈부하는 내용을 성도들에게 가르쳐서 화를 자초할 것이 무엇이냐 하는 안이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러잖아도 배울 것이 많은데 뭐하려 긁어 부스럼 만드느냐 하는 것이겠지요. 그 많은 역사와 교훈들을 배우고 행하기에도 평생이 모자랄지 모릅니다. 사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만만한 일입니까?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지키려 고군분투했던 일을 상기하면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기도 힘든 마당에 비유나 예언에까지 신경 쓸 일이 무어냐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일지요.
예수님이 걱정하셨던 일이 무엇입니까? 눅 18 : 8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 다시 오실 때에 여기 믿는 자가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리스도인이 8백 만이 넘는다 하는데 아니 주님은 어째 그런 걱정을 하신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원하시는 믿음과 이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전혀 딴판으로 가는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22 - 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게 쉽게 아멘, 하고 대답이 나옵니까? 예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과 기적을 일으켜도, 하다못해 예수 이름을 불러가며 말씀을 전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그들은 한 마디로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된다는 뜻입니다. 천국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기막힐 일입니까? 한 평생 예수 이름 붙들고 사역했는데 혹 그것이 불법을 행한 일이라면 이처럼 황당한 일이 어디 있으며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역자라면 생각도 하기 싫은 경우입니다. 더구나 내노라하는 큰 교회를 목회한 것도 아니고 소위 개척교회라는 소규모 교회를 지키며 고생, 고생하며 살아왔는데 정작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정말 기가 찰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소개해주셨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바로 영생 즉 천국 가는 길입니다. 역사와 교훈을 아는 것은 기초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의 세상에 살기 때문에 시간의 세상 즉 역사가 있는 것이고 그 속에서 서로 부딪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교훈이 필요합니다. 날마다 쏟아지는 신지식 배우기도 바쁜 마당에 과거의 기록인 역사는 뭐하려 배우느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몰라서 하는 말이지요. 고전 10장에 보면 출애굽 당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하기를 6절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아멘! 역사는 우리에게 거울이 됩니다. 사람이란 시대가 달라도 그 심성이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환경만 다를 뿐 하는 짓거리는 비슷합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할지 어떤 실수를 할지 예측 가능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짐작합니다. 그래서 그 역사를 거울삼아 비슷한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와 교훈은 육의 세상에서의 길잡이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생으로 이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천국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오셔서 천국 비밀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나에게 다 공개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 비밀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 나라에 도움을 주겠습니까, 해를 주겠습니까? 답은 뻔한 것이지요.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난 마귀가 하나님 나라에 유익을 줄 리가 만무합니다. 적군이 아군의 암호를 알면 아군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멸망시키려 그 암호를 악용할 것이 뻔합니다. 그렇다면 이 천국의 비밀을 마귀가 알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지키려 비유로 말씀하셨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알 수가 없다면 즉 천국 백성조차도 알 길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통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벧후 1 : 20 - 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아멘! “경의 모든 예언”이라고 말씀하지요. 다시 말해서 성경의 모든 예언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니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을 통하여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비밀은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셨지요. 마 13 :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자기 소유를 다 걸어도 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마 13 :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서 천국 비밀을 허락받지 못한 ‘저희’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당시 누가 예수님을 방해하고 핍박하였습니까?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롬 10 : 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그랬습니다. 하나님께 열심은 특심하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열심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들이 뱀이고 독사의 자식들(마 23 : 33)이었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던 바로 그들이 실제로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그 속에 진리는 없었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비밀은 암호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할 약속이고 예언입니다. 그 안에 어마어마한 보화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비밀을 풀어야 합니다. 그 보화를 캐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보물섬 지도를 가지고 있는데 그 지도를 판독하지 못한다면 그 지도는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 지도를 볼 줄 모르면 보물을 찾지도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선 필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지도부터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어디 있습니까? 역시 성경에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잘 아는 것부터 실험해봅니다. 구약 성경의 비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 2 : 6 - 8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아멘! 하나님의 그것은 감추어졌던 비밀이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았더라면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겠지요. 한 마디로 구약의 비밀은 바로 메시야의 오심, 곧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하나님의 백성은 영접하지도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었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짖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의할 것은 신약성경에도 비밀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여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것처럼 우리 또한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인들 예수님 다시 오실 때 그런 짓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습니다. 예를 듭니다. 계 1 : 19 - 20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그 오른손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곱 별의 비밀’이 나옵니다. 17 :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여기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이 나옵니다. 그리고 10 : 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여기서도 하나님의 비밀이 나옵니다. 그 비밀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일곱 번째 나팔을 불 때입니다. 도대체 이 비밀들이 무엇일까요?
주님이 다시 오시리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실까요? 행 1 : 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아멘! 그러면 구름을 뚫고 비행접시 내려앉듯 그렇게 오실까요? 살전 5 : 1 - 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이 말씀처럼 도적 같이 몰래 아무도 모르게 오실까요? 그렇지 않으면 살전 4 :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말씀하신 것처럼 호령, 천사장의 소리 그리고 나팔까지 불며 떠들썩하게 오시겠습니까? 도무지 헷갈리네요. 사실 이 모든 것이 육적인 것으로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비유를 모르면 우리 또한 예수 초림 때 저지른 유대인들과 같은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들은 메시야가 왕으로 오실 것으로 생각하여 대단한 모습으로 올 것을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사 53 :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아멘! 오실 메시야 그 분은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와는 얼마나 차이가 있었는지 짐작이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과 동떨어진 분을 기다렸으니 자기네 기대와 다르게 오신 예수를 영접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만왕의 왕, 생각만 해도 어마어마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실제 예수님이 나타나 보이신 행적은 전혀 달랐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잘 깨닫고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또 다시 실수하거나 잘못을 범하지 않고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이 비유하신 천국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1. 비유가 무엇을 빙자한 내용인가 하는 것입니다.
비유란 장래 나타날 실체를 그 비슷한 땅의 것을 빌어다가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성경에 ‘어린양’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장래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 당장 실체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적이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암호를 적에게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비유하는 말씀을 잘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문자적으로만 읽혀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 나라 또는 장래사를 이야기하는 경우에 말입니다. 세상에서도 비유의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을 ‘돼지’라고 말하고 교활한 사람을 가리켜 ‘여우’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표현합니다. 잠 30 : 2 - 3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 이 말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 ‘짐승’이라는 것입니다. 단어는 ‘짐승’으로 표현되었지만 그 짐승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 말씀하는 7머리 10뿔의 짐승도 사실은 짐승이 아니라 사람을 지칭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러면 또 한 가지 궁금한 것, 도대체 비유로 예언한 그 천국 비밀의 실체를 언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 속에 천국 비밀이 들어있습니다. 그것은 물론 장래사를 이야기하는 예언서에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궁금한 것은 도대체 언제 그 실체를 보느냐 하는 것이지요. 잘 아는 대로 성경에는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때가 있다고 말씀합니다(전 3: 1).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여기 ‘비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다른 말로 ‘비유’지요. 그런데 때가 이르면 더 이상 비유로 하지 않고 밝히 이르리라 말씀합니다. 그 때가 언제일까요? 단 12 : 8 - 9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아멘! 선지자 다니엘도 궁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지 않았기에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고 간수하라 하셨습니다. 다니엘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렘 23 : 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말일에 가서야 완전히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 또는 ‘말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말세’ 또는 ‘세상 끝’ 다 같이 사용하는 말입니다. 엉덩이든 궁둥이든 방댕이든 다 같은 뜻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의미의 세상 끝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지진이 나고 전쟁이 나는 것을 보며 흔히들 말세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과연 그 때를 말세라고 이야기하는가? 제자들이 세상 끝의 징조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 24 :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해주십니다. 7 - 8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 사실 이런 사건은 인류 역사가 존재하면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온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문자대로 보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 전에 경고의 말씀이 먼저 나옵니다.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절에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빌어 미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하라는 것이지요. 다른 곳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선지자 노릇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고 다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말세’ ‘세상 끝’이 언제인가? 예컨대 구약의 약속 즉 메시야가 온다는 말씀이 드디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시대가 종결이 되고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때를 가리켜서 말세라 합니다. 히 9 :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아멘! 분명히 초림 예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 오셨다고 합니까?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즉 하나님의 약속(구약)이 이루어진 때를 ‘세상 끝,’ ‘말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또한 다시 오실 그 때, 즉 신약이 이루어지는 때, 말세를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천국의 비밀이 드러나는 때는 바로 ‘세상 끝, 말세’입니다. 그 때는 약속하신 분이 오시는 때입니다. 초림 때는 하나님이 약속(예언)하신 목자 곧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재림 때는 예수님은 영으로 계시니 그 영이 함께 하시는 사자, 목자가 올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이르면 ‘밝히 이르겠다,’(요 16 : 25)고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곧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이 하늘의 비밀이 모두 풀리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자기 집에 들어갈 때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이것 모르면 자기 집도 못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그 때 우리는 이 하늘의 비밀을 알아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초림 때 하나님 백성이라 칭하던 유대인들이 도무지 관심도 없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우리도 그래야 하겠습니까? 아버지 집 천국에 들어가는 일인데 관심도 없습니까? 유대인들처럼 버림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찾아다니며 알려고 하고 배워야 합니다. 단 12 :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가만있어 될 일이 아닙니다. 빨리 찾아다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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