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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묵상글 들 ( 대림 제1주일 화요일. - 어떤 메시아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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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어떤 메시아를?
오늘 독서 이사야서는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이신지 얘기합니다.
이 이사야서를 읽다가 저는 문득 메시아가 어떤 분이시길
사람들이 원할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능력의 메시아?
어제 백인대장의 청을 받아들여 종을 고쳐 주신 주님처럼
내가 아플 때 그리고 내가 청할 때 언제든 고쳐 주시는 메시아?
사랑의 메시아?
고쳐 주시지는 못해도 손을 얹어주시는 메시아?
고쳐 주시지는 못해도 손을 얹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
다른 건 다 없어도 마음의 평화만 있으면 되니,
다른 건 안 주셔도 마음의 평화를 주시는 메시아?
이런 메시아가 내게는 좋은 메시아겠지만
이런 메시아가 진정 메시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이 이런 메시아이기를 거부하실 겁니다.
나만을 위한 메시아이시기를 거부하실 것이고,
나만을 위한 메시아는 메시아도 아니실 겁니다.
능력의 메시아도 맞고,
사랑의 메시아도 맞고,
평화의 메시아도 맞지만
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메시아라고 오늘 이사야서는 얘기합니다.
그래서 먼저 정의의 메시아라고 말합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재판하고
이 땅의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메시아는 정의로 평화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평안과 다릅니다.
평안은 나의 안정과 안전을 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얻어지는 것이기에
차라리 나 혼자 있을 때 평안하고 많은 사람이 이런 평안을 추구하고,
그렇지만 그런 평안을 깨지기 십상이며 그런 평안은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평화는 기본적으로 관계적이고 관계적이어야 합니다.
평안을 위해 관계를 피하고 배제하는 평화가 아니라
좋은 관계가 유지되는 평화이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평화입니다.
좋은 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고,
평화도 인간끼리의 평화만이 아닙니다.
사람과 짐승 사이의 평화, 짐승과 짐승 사이의 평화까지 모든 평화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그렇습니다.
메시아의 평화는 모든 평화이고
메시아의 사랑도 모든 사랑입니다.
메시아는 나만을 위한 사랑은 하실 수 없고 ,
평화도 나만을 위한 평화는 주실 수 없으십니다.
그래서 이런 메시아를 보는 눈은 행복하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떤 눈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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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대림시기”을 시작하면서 <복음>는 예수님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뜻 안에서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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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보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개 사람들은 취향에 따라,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게 됩니다. 같이 보거나 들어도 자기 시선으로 보고, 듣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을 낳게 마련입니다. 기왕이면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말을 꼭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철부지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을 다 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셈을 할 줄 모릅니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는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요즘 세상의 현실을 보십시오, 길고 긴 ‘코로나19’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데 여전히 자기주장만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고집을 피우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이들이 제발 백성을 위한다는 소리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만이라도 하느님 앞에 철부지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성령의 도움을 청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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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유대 랍비였던 시드니 그린버그는 이렇게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을 믿고 사람을 신뢰할 줄 알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불신하면 당신은 노인이다. 우리의 마음속에 행복을 갈망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갖고 있으면 청년이다. 그러나 과거만을 회상하면 노인이다. 남을 사랑할 줄 안다면 당신은 청년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남에게 사랑받기만 원하고 있다면 당신은 노인이다.”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나이로만 생각했는데 랍비는 청년과 노인의 기준을 생각과 인식의 차이로 구분하였습니다. 저도 이제 60이 되면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늙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인식을 바꾸면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었어도, 아마에 주름이 깊이 패었어도, 근력이 예전 같지 않아도 청년입니다. 꿈이 있다면, 신뢰가 있다면,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오늘 주어진 일에 감사할 수 있다면, 꿈을 위해서 거친 들판을 걸어갈 수 있다면 청년입니다.
생각하니 대림시기는 청년들의 이야기입니다.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청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나눔, 예수님의 헌신,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청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시는 청년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대림시기에 우리는 이사야 예언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임마누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꿈을 가졌습니다. 그는 사자와 어린이가 함께 손을 잡고 다니는 꿈을 꾸었습니다. 사막에 샘이 넘치는 꿈을 꾸었습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청년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 유향, 몰약을 준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청년입니다. 평생 성전에서 구세주의 탄생을 기다렸던 시메온과 한나는 비록 나이가 80이 넘었어도 청년입니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마리아는 나이 때문에 청년이 아닙니다. 권세 있는 자리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시는 하느님을 찬미했기에 청년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던 요셉은 나이가 많았어도 청년입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에서 언제나 대림시기를 지내는 ‘청년’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법대를 졸업하고 평생 판사로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나눔의 집’을 운영했습니다. 비록 부모님의 권유로 법대엘 갔고, 판사가 되었지만 정년퇴임을 한 후에 60이 넘어서 미국으로 유학을 갔습니다. 학생 때 좋아했던 물리학을 공부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80의 생일잔치에는 작은 음악회를 준비했다고 합니다. 틈틈이 악기를 배웠고, 그동안 함께 했던 이웃들을 위해서 80 생일에 작은 음악회를 마련했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배우려는 의지, 가진 것을 나누려는 선행, 어려운 이웃을 도우려는 자선의 마음이 있기에 80이 넘었지만 그분은 청년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구세주가 나올 수 없다며 새로운 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는 많은 지식이 있었지만 노인입니다.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2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죽였던 헤로데는 권력을 가졌지만 노인입니다. 1년 가까이 전쟁으로 러시아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사지로 몰아넣는 푸틴은 노인입니다.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이 땅에서 참된 평화와 자유를 꿈 꿀 수 있다면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고난과 시련을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로 여길 수 있다면 우리는 청년 예수의 제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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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계 최대 인터넷 검색 서비스 기업인 ‘구글’의 뉴욕 사무실에는 간식 휴게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간식 휴게실로 인해 직원들의 건강이 나빠졌다는 말이 많아졌습니다. 휴게실에는 각종 초콜릿을 비롯한 견과류, 쿠키, 과자, 맥주 등이 잔뜩 있는데, 직원들은 물 한 번 가지러 왔다가 간식을 한 움큼 집어 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직원의 몸으로 나타났습니다. 허리둘레가 늘어났고, 체력은 떨어져 갔습니다.
간식 담당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간식인데, 오히려 건강이 안 좋아지니 미안한 마음과 더불어 걱정이 커졌습니다. 오랫동안의 고민 끝에 간식 담당자는 간식 위치를 바꿨습니다. 직원의 눈높이에 간식이 있어서 그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눈높이 선반에는 생수를 놓고 설탕이 들어간 탄산수와 초콜릿 등의 간식은 냉장고 아래나 반투명 유리 뒤에 놓은 것입니다.
이렇게 위치를 바꾸고 7주가 지나자 직원들이 생수만을 주로 가져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허리둘레를 늘려주는 초콜릿이나 탄산수의 소비량이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대상이 달라지자, 행동도 변한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을 보는 사람은 자기 행동이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닌, 주님의 뜻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십니다.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사람에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감추시고, 세상 안에서 어리석다는 말을 듣는 제자를 비롯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시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종말의 시간이 가까울수록 구원의 열쇠를 들고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따르는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나의 일상 안에서 알아보고 있을까요? 아니 주님을 잘 바라볼 수 있도록, 내 눈높이를 맞추고 있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사야 예언자는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라.’(이사 11,2)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세상 안에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말을 들으려고 주님을 보지 않는 어리석은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의 길에 가까워지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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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자세히 보면 할 말이 많아진다. 자기 삶이 자세히 보인다. 그 일상을 구체적으로 쓰면 글이고, 그리면 그림이다(김용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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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129. 대림 제1주일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소서, 성령이여!"
-주 성령님께 마음을 열라-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72,7ㄴㄷ참조)
36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대구가대 연구과 시절, 철학교수 정달용 신부님의 오늘 미사 강론중 제1독서 이사야서에 대한 찬탄입니다.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에 대한 유토피아, 이상향에 대한 내용이 예언자들은 물론 혁명가들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인류의 염원이 담긴 평화의 꿈이 참 아름다운 시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정말 이보다 멋지고 아름다운 이상향에 대한 시는 동서고금 어디에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 아름다운 이상향에 대한 꿈이 예수님 성탄을 통해 그대로 실현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탄 밤미사 제1독서는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11,1-10) 내용을 그대로 노래 합니다. 대림시기 바로 평화의 메시아의 도래를 간절히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성령칠은을 노래한 “오소서 성령이여”(성가142장)도 여기서 유래합니다. 이사야서에 성령의 여섯가지 은사에 자비의 영을 덧붙여 성령칠은이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야말로 성령칠은의 메시아라할 수 있습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대로 이런 성령 충만한 예수님을 통해 실현될 세상에 대한 묘사가 뒤를 잇고 있습니다.
“힘없는 이들을 정의로 판단하고, 가련한 이들을 정당하게 심판하리라.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어제 주석을 읽다보니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를 ‘예수님의 초상화’라 언급했는데 공감이 갑니다. 이어지는 이상향의 풍경은 얼마나 평화롭고 조화로운 모습인지요! 그대로 인용하니 소리내어 낭독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유토피아 세상을 노래한 시도 없을 것입니다. 생존경쟁 치열한 약육강식, 적자생존, 각자도생, 승자독식, 아비규환의 지옥같은 세상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위에서 장난하며
젖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이사11,6-10)
그날이 바로 대림시기의 오늘입니다. 모두가 생략할 수 없는 귀한 내용이라 전부 인용했습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메시아의 꿈인 평화를 앞당겨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예언자들이, 우리 주 예수님이 꿈꾼 하늘나라의 모습이 바로 이런 평화가 완전히 실현된 세상입니다. 참으로 성령으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송가 142장을 노래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소서, 성령이여, 우리 맘에 오소서.
위로자신 이여, 주님 찾는 슬기를, 우리에게 주소서.
맘의 위로자여.”
1절에 이어 7절까지 성령칠은의 은혜를 간청하는 성가입니다.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님”과 더불어, “오소서, 주 성령님” 호흡에 맞춰 기도로 바쳐도 좋겠습니다. 정말 간절히 청할바 성령의 은사입니다. 성령에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 때 온전한 참나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도 참 아름답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그대로 실현됨을 봅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성령충만함 중에 아버지께 감사기도를 바칩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눈이 열릴 때 선물로 가득한 세상에 저절로 감사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 기도로 바치고 싶은 감사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참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철부지 72제자들의 성공적 귀환에 마냥 감사하며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런 감사로 가득한 마음, 그대로 성령충만한 삶임을 입증합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던 제 감사기도 일부 내용도 다시 나눕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감사기도 역시 깊고 아름답습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고백하는 아버지와 완전히 하나된 예수님의 신원을 보여줍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의 여정은 성령의 은총으로 날로 이런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일치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며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해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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