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강림과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묵시 21,1-5; 루카 2,27-35 /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2024.5.20.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고 다시 시작된 연중 시기 첫 날에 교회는 사도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초대 교회의 중심을 잡아 주신 성모 마리아께서 ‘사도들의 모후’가 되신 사연에 이어 사도들이 기반을 닦은 교회의 어머니도 되심을 선포합니다. ‘교회의 어머니’라는 호칭은 이미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교회헌장에서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2018년에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월요일을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제정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령 강림 이후 마리아께서는 사도들이 주축이 된 교회를 돌보셨고, 여기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드러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과연, 성자 예수님께서 사도들 위에 세우신 교회는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여 있던 사도들과 신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써 탄생하여 역사를 순례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정의 시작 때에 마리아께서 그 한가운데에 계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이 조용하면서도 경이로운 시작의 순간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도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4) 이 말씀 안에 이 성령 강림 대축일과 성모성월에 우리에게 다가온 표지인 성령 강림과 성모 신심의 은총이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교회는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믿음과 성령의 강림으로 역사 안에 탄생했다는 뜻입니다. 진정,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사실, 마리아께서는 교회의 이 여정보다도 훨씬 더 먼저 성령과의 친교를 맺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자의 탄생을 알리던 그 순간부터, 성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후 예기치 않았던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마리아께서는 그 일들이 성령의 이끄심을 알려주는 징표로 느끼시고 당장에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아도 마음속 깊이 간직해 놓고 두고두고 묵상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복음사가 루카는 이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이 신비스런 묵상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베들레헴 동굴에 요셉과 마리아를 알 리가 없는 낯선 목동들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겠다고 왔을 때(루카 2,14)에도 이어졌습니다. 더군다나 훨씬 더 멀리서, 장차 메시아가 되실 위대한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알 리가 없을 것 같은 먼 나라에서부터 이방인 동방 박사들이 경배하러 왔을 때(마태 2,11)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기의 할례식 날이 되었을 때에도 오래 전부터 성전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노예언자 시메온이 보자마자 그 아기가 메시아이시라면서 받아 안고 축복을 내려줄 때에도(루카 2,29-32) 그러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열두 살 된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 버렸다가 다시 찾았을 때 들었던 황당한 답변, 즉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아들의 성장 과정에서 일어난 이 모든 일들 속에서 마리아께서는 성령께서, 그 아들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일깨워 주시는 표지로 알아보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께서 당신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앞길을 이끌어 주고 계심을 확신하셨기에 마리아께서는 예수님의 공생활에도 늘 함께 하셨습니다. 역사상 첫 기적으로 알려진 일, 즉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일은 그래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요한 2,1-12) 예수님께서는 아직 당신의 때가 오지 않았다며 짐짓 버티어 보기도 하셨지만(요한 2,4), 이미 성령께서 그분의 때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셨던지 마리아께서는 막무가내로 마치 상관이 부하에게 하듯이 일을 시키실 태세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못 들은 척 일꾼들에게,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고 배짱 있게 밀어붙이셨습니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마리아를 모시고 봉양하던 예수님의 친척 형제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요한 7,5 참조) 게다가 바리사이들이 퍼뜨린 악소문이 들려오자 귀도 얇았던 이들 조카들에게 등 떠밀리다시피 버선발로 쫓아가 본 적은 있었으나(마르 3,31), 역시 마리아께서 직접 눈으로 확인한 광경은 아들 예수님께서 마귀에 들려 있기는커녕 오히려 마귀들을 쫓아내며 마귀들려 고통받던 부마자(付魔者)들까지도 하느님의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계신 멀쩡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순간에 이들 모자(母子)는 서로의 마음을 읽었던 듯합니다. 이미 모자간에 이심전심으로 상통하고 계셨음을 전제로 해서만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머니가 듣고 계신 바로 그 자리에서 군중을 향하여,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마르 3,33) 하고 반문할 수가 없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어머니이신 마리아가 어느 누구 못지않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분임을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대목이지요.
그래서 공생활 내내 여인들과 함께 그분과 제자들 일행을 따라 다니시며 복음 선포 활동에 함께 하셨던 마리아께서는 아들 예수님께서 기가 막힌 십자가 처형을 받으실 때에도 그 여인들과 함께 묵묵히 그분 곁을 지키셨습니다.(요한 19,25) 이때 요한 외에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죄다 도망쳐 버렸고, 막달레나가 전해준 부활 소식을 듣고서도 제자들은 헛소리로 치부하며 좀처럼 믿지 못했지만(마르 16,11; 마태 28,17; 루카 24,11 참조), 성령 강림이 예고되었던 그날 제자들은 여인들과 함께 기도에 전념하던 마리아 주변에 꾸역꾸역 모여 들었습니다.(사도 1,14; 2,1 참조) 그리고 마침내 다 함께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았습니다.(사도 2,2-4 참조) 그러니까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복음 선포의 여정을 시작하기까지 한결같이 성령의 이끄심과 현존을 철썩같이 믿으시고 중심을 잡아주신 분이 성모 마리아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도들의 어머니’로 불리십니다.
돌이켜 보면, 맨 처음 영보와 잉태의 순간부터,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아들 예수님을 낳으시던 순간은 물론 장성하신 예수님께서 온갖 고난을 겪으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내내 마리아께서는 성령의 현존 속에서 길을 걸으셨고, 그리하여 흔들림 없이 성령을 기다리시는 그 모습에 끌려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한 사도들이 다 함께 성령을 받아 교회의 주춧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 유다인들로부터나 로마인들로부터 박해가 끊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리스 출신으로 입교한 신입 신자들 중에 여러 이단에 빠져 교회를 어지럽히던 초대교회 시절에도, 성모 마리아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이런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모시고 에페소에서 천수(天壽)를 누리며 봉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성모 마리아의 삶이 교회의 어머니로서 오늘날 우리가 지닌 성모신심의 근거가 됩니다. 성모신심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 어떻게 동행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나침반과도 같습니다. 최초의 조상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된 원죄 사건을 극복한 첫 인간이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을 때나 특히 죽음을 앞두고 마리아의 전구와 보호를 청합니다. 그러면 용감하게 유혹을 떨치고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으신 그 모범을 따라 우리도 주어진 길을 흔들림 없이 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지만, 그 성령의 이끄심을 받을 수 있는 한결같은 마음가짐을 유지하도록 전구와 보호를 해 주시는 분은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그래서 매일 바치는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일생을 관상하면서, 성령의 이끄심과 더불어 성모 마리아의 전구와 보호를 청하는 좋은 기회를 줍니다. 이로 인한 은총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악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어막과도 같아서, 우리 영혼을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게 보호해 줍니다. 죄가 가득 찬 땅 위에 살면서도 새 하늘을 살 수 있게 늘 신선한 자극과 거룩한 영감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 유익함과 함께 겨레와 나라를 위해서도 지향을 두고 묵주기도를 바쳐야 할 것입니다. 우리보다도 더, 우리 겨레의 복음화를 염원하시는 분이 성모 마리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하나, 우리 한국교회를 각별하게 사랑하셨고 직접 방문도 하셨던 요한 바오로 2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간절한 호소와 충고에 따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 복음화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하느님께서나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또 보편교회가 오랫동안 여망하고 있는 대로, 아시아 복음화를 위해서 교회 쇄신과 신앙 활성화의 희생을 바치면 한반도 평화와 민족 복음화는 덤으로, 선물처럼 주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