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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22편 26절-27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당신이 우리들을 사랑해 주셔서 원근각처 어디에 있었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원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을 진리를 먹여서 보내주시고 빈 것으로 나가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26절: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겸손한 자가 누군가 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되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자다. 하나님의 것을 ‘이건 내 거다. 내 것을 하나님께서 주시는구나’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 겸손한 자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인가 주실 때는 ‘이건 내 것이다’ 하고 주는 의미가 되겠느냐, 아니면 ‘이것은 네 것이다’ 하고 주는 의미가 되겠느냐? 이 느낌에 따라서 신앙의 깊이가 달라지는 거다. 그 말이 그 말 같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이건 본래부터 내 것이 아니라 내가 너에게 주기로 되어있는 것을 너에게 주는 것이니 받아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실 때 이걸 받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냐, 겸손한 사람이냐?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것을 받으면 받는 그 사람은 마음이 기쁘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도 보면 일반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받으면 마음이 기쁘다. 이 때 마음이 기쁘면 속에서 울음이 나오느냐, 찬송이 나오느냐? 찬송이 나온다. 노래가 나온다. 이건 자동적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것을 받으면 그 마음이 기뻐서 자원적 순종이 나온다.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받는 자는 자원적 순종이 나온다. 이러면 사랑을 받는다.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은혜를 받는다는 거다. 순종함으로 은혜 위에 은혜를 받는다 그 말이다. 일을 하는 사람이 주인에게 잘 보이면 월급도 더 많이 주지만 ‘야, 이것도 좀 먹어봐라’ 하는 게 있다. 교회도 하나님 앞에서 마찬가지다. 이게 또 겸손한 사람이다.
‘겸손’이라고 할 때 교회에서, 성경에서 겸손하다고 하는 것과, 예수 안 믿는 일반세상에서 ‘저 사람 참 마음씨 좋고 겸손하다’ 하는 것과는 다르다.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이 아무리 마음씨가 좋아도 그 사람에게 ‘예수 믿읍시다’ 라고 하면 자기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처럼 그만 도망을 가버린다면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이냐, 교만한 사람이냐? 교만한 사람이다.
이게 이해가 안 된다면 이치적으로 이렇게 생각해 봐라. 친구들끼리는 ‘오거라. 가거라’ 잘 하는데 부모가 뭘 시키면 냅다 받아버린다면 이게 부모 앞에 겸손한 거냐, 교만한 거냐? 교만한 거다. 친구들끼리는 잘 하는데 부모 앞에서는 교만한 사람이 많다. 그런 것처럼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말은 잘 듣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다면 이게 겸손이냐, 교만이냐? 교만이다. 교만한 자는 은혜를 못 받는다.
아침바람은 어디서 어디로 부느냐? 그리고 저녁바람은 어디서 어디로 부느냐? 일정하지는 않지만 보통 보면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많이 분다. 바닷물이 빠질 때는 바람이 어느 쪽에서 어느 쪽으로 부느냐? 파도는 무엇에 의해서 일어나는 거냐? 바람에 의해 일어난다. 바람이 불면 무엇이 일어난다? 파도가 일어난다. 바람이 세게 불면 세게 불 수록 물결에 닿는 바람에 의해 파도가 생기는 거다. 그런데 바람이 안 부는 데도 파도가 치는 것은 무슨 징조냐? 지진이고 해일이다. 이것은 땅이 움직이니까 바다의 물도 같이 움직이게 되어서 파도로 밀려오는 거다.
그러면 사람의 마음은 왜 울렁거리는 거냐? 자체적으로 울렁거릴 때는 안 좋은 걸 먹은 거다. 속에 나쁜 게 들어가서 울렁거릴 때는 손가락으로 목구멍을 쑤셔서라도 끄집어내야 한다. 그래야 속이 편한 거다. 먹은 게 아깝다고 그냥 두면 안 된다. 그 외에 사람의 마음이 왜 울렁거리는 거냐? 마음이 울렁거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딱 잡아야 한다. 잡은 게 없으면 바람 따라 그냥 날려가 버린다.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는 자는 자원적 순종이 나온다. 자원적 순종으로 나오는 이 자가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도를 하고 은혜를 주시는 거다. 쉽게 인간의 용어로 말한다면 복을 주신다 그 말이다. 성경에 약속이 되어있다. 아무렴 말 잘 듣는 사람이 부가 많은 거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면 ‘나는 잘 한다’ 라고 할 때 자기가 잘 하고서 잘 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별 문제이겠는데 자기는 못하면서 말로만 자기는 잘 한다고 하면 이건 교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할 줄을 알면서도 그 사람에게 ‘너 이것 좀 하라’ 하면 ‘난 못해요’ 한다면 이건 겸손이냐, 교만이냐? 교만이다. 할 줄을 아느냐? 그러면 하라. 할 줄을 알아서 하는 게 얼마나 좋은 거냐? 그런데 할 줄을 아는 데도 이 사람이 안 하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시키니까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잘 못한다고 해서 자꾸 그걸 지적을 한다면 이 사람은 그런 말을 할 자격도 없는 거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순종으로 나가는 사람은 실력이 빨리 커진다. 한 번 하고 두 번 하고 할 적마다 실력이 커진다. 그러나 순종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실력이 안 커진다. 그리고 순종자는 명령이 무서워서 하는 게 아니라, 또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기뻐서 쾌히 하는 거다.
하나님 앞에서의 모든 봉사는 쾌히 기뻐서 단 마음으로 순종으로 하는 거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보시고 하나님도 단 마음으로 쾌히 기뻐서 ‘그래?’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주시려고 한다. 쾌히 기뻐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하게 되면 배가 고픈 사람이 먹으면 배가 불러지면서 만족해하듯이 만족이 되는 거다. 그래서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요’ 라고 말씀한 거다. 배가 부르다고 하는 것은 만족이요 기쁨이요 평안을 의미한다.
사람이 지어지기를 세상을 자꾸 섬기게 되면 고통이 계속 연속적으로 오게 되어있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고 자꾸 가까이 하면 고통이 점점 많아진다. 반면에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사람이 자꾸 기쁘다. 원리원칙이 그렇다. 예수 믿는 건 원리원칙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머리가 영리하냐, 둔하냐? 영리하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하나님의 명철하고 총명하고 지혜로운 것이 사람에게 닮아오는 거다. 깡패를 가까이 하면 자기가 편안하냐, 고통스러워지느냐?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가까이 하면 자기에게 뭐가 옮아오느냐? 담배냄새가 옮아온다. 몸에서 항상 담배냄새가 난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옮아온다. 하나님을 닮는다. 지혜도 닮고, 지식도 닮고, 하나님의 도덕성도 닮고, 사람이 인격적인 면에서 고차원적으로 영특해진다. 고상해진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참 매력 있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키 크고, 옷 잘 입고, 눈이 크고 쌍꺼풀이 지면 매력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은 겸손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을 매력 있다고 보신다. 그를 위해서 세상을 돌리기 시작을 하신다.
사람의 모양새를 보면 육모의 미모성, 육신의 모양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 다음에 얼굴은 못 생겼어도 마음이 고운 심모의 미모성이 있다. 사람은 육모의 미모성보다는 마음의 미모성이 더 중요하다. 그 다음에 더 올라가면 영적 신앙정신 면에서의 아름다움이 있다. 이게 진짜 미모성이다. 이 영모의 미모성을 가진 사람은 죽음 저 너머 천국에 가서도 아름다운 사람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좋아하신다.
구약의 에스더보다도 더 미녀가 아하수에로의 왕비 와스디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영모의 미모성은 에스더였다. 와스디가 자기 육모의 미모성을 내세워서 굉장히 교만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하수에로 왕이 6개월 동안 잔치를 벌였는데, 그 잔치 끝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를 잘 단장한 에스더를 왕비로 세웠다. 이 에스더가 왕비가 되어서 자기 민족을 구한다. 정말 큰일을 한 거다.
우리 궁극교회 교인들이 어릴 적부터 영모의 미모성을 잘 가꾸면 하나님의 큰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을 따라갈 필요는 없다. 지금 세상이 참 위태롭다.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 하는 것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잘 빼앗아 가는지 자칫 잘못하면 자기의 마음도 빼앗긴다. 사람이 날아다니는 낙엽 같아서 아무 힘도 없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못 받는다. 복을 못 받는다. 마음도 안정되지 못하고, 성경을 봐도 눈은 글씨를 보고 있지만 머리는 누굴 만나고 누굴 만나고 하려고 막 돌아다닌다. 그 때마다 그 마음을 얼른 잡아와야 한다. 겸손한 자는 순종자인데 기쁨이고 만족이다.
그 다음에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반드시 찬송을 한다. 찬송을 왜 하느냐? 기뻐서 찬송을 하느냐, 슬퍼서 찬송을 하느냐? 여기서는 기뻐서 찬송을 하는 거다. 마음이 슬프면 노래의 템포가 빨라지느냐, 느려지느냐? 느려진다. 그런데 이걸 조절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슬프면 노래로 슬픔이 나오고, 기쁘면 노래로 기쁨이 나오는 거다. 그런데 요즘 노래는 ‘저게 방언이냐, 어느 나라 말이냐?’ 할 정도로 분명히 한국말인데 잘 못 알아듣겠다.
여호와를 찾는 자는 반드시 기쁨이 찾아온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슬픔이 전제가 되어 있느냐, 기쁨이 전제가 되어 있느냐? 기쁨이 전제가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제성을 미리 내다보고 찬송을 하라는 거다.
‘그를 찬송할 것이라.’ 여호와를 찾는 자는 희망이 있다는 말이냐, 없다는 말이냐? 희망이 있다는 거다. 은혜가 있다. 축복이 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기쁨이 온다’고 했다. 그런데 찾는 것도 잘 찾아야 한다. 아무 교회에나 가서 하나님이 찾아지는 거냐? 아니다. 성경에 보면 거짓 종들이 있다. 거짓 종들도 십자가 붙이고 성경 놓고 보라고 말은 한다. 그런데 거짓 종은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부자로 살아라. 뭣도 잘 된다. 뭣도 잘 된다. 공부를 안 해도 일등이 된다. 일을 안 해도 부자된다’ 이런 식이다. 그러나 그런 법은 없다. 이치도 아닌 법은 없다. 이건 일반 이치적으로도 맞지 않는 거다.
예수를 믿으면 다 부자가 되는 거냐? 예수를 잘 믿다보면 순교도 당하고, 물론 부자 될 목적의 마음은 아니지만 예수를 잘 믿게 되면 부지런하다보니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또 시절이 잘못 돼서 경제의 환난이 불어서 가난해질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가난한데 예수 잘 믿는 나만 부자가 됐다고 하면 그 때에 자기는 없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내야 한다. 안 내고 ‘내 거다’ 하고 있다가는 맞아죽기 딱 알맞다. 배고픈 사람이 부자에게 ‘좀 달라’ 하는 건 잘못된 거다. 그러나 부자입장에서는 나눠주는 건 자동적이라야 한다. 우리가 성경의 이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는 자는 기쁨이 찾아온다. 많이 찾는 자는, 그리고 늘 찾는 자는 날마다 기쁘고 많이 기쁠 것이고, 간혹 찾는 자는 간혹 기쁠 거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기쁨을 빨리 맛보려고 빨리 찾고 날마다 찾아야 할까, 아니면 간혹 십 년마다 한 번씩 찾아야 할까? 우리가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치가 안 찾으면 안 기쁜 거다. 그런데 찾는 것도 ‘누구를 찾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성경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기쁘다고 했다. 도둑놈을 찾는 자는 기쁠 리가 없는 거다.
말세의 기독자들이 왜 주님을 찾느냐? 여기 온 분들도 주님을 찾기 위해서 이 자리에 온 거다. 찾되 더 찾아서 더 가까이 하려고 온 거다. 그러면 왜 주님을 찾는 거냐? 여호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요,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은 영원히 가는 것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것을 받게 되니 그 기쁨은 영원히 가는 거고, 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의 그 의욕성은 임시성이 아니라 영원히 가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으니 하나님의 것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과 결합이 되는 것이니 그 마음은 영원히 간다. 이게 신앙이다.
성경을 바로 깨달으면 모든 이치에 밝아진다. 어떤 게 부부냐? 시집장가 갈 때 ‘내가 번 돈은 내가 먹고 네가 번 돈은 네가 먹고, 잠은 같이 자고 일은 따로 나가서 해서 각자 번 것은 각자 은행에 넣고’ 이게 부부냐? 부부는 인격적 애정적 정신적 사상적 결합이다. 이게 원칙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그렇지를 못하다. 그러니 고통이다.
우리는 주님과의 인격적 애정적 정신적 사상적 결합이 되어야 하느냐, 주님 따로 나 따로냐? 주님이 내 마음 가운데 계신다는 게 뭐냐? 결합을 말한다. 주님의 마음 가운데 누가 들어있어야 하느냐? 주님이 일반사람들처럼 그 마음 가운데 돈이 들어있겠느냐, 인간 자기가 들어있겠느냐? 성경에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하는 것은 결합을 말하는 거다. 주님은 그러기를 원하신다. 이게 진짜 사랑이다.
27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첫째는 어느 나라 어느 시대 어느 고을에서 태어났던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을 듣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거다. 두 번째는 영적 이스라엘이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서 땅 끝까지 흩어져 생활하던 자들이 복음 선포자들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말이다.
세 번째는 정신적 사상적으로 마음이 세상을 따라 흘러가서 땅 끝, 즉 멀리 끄트머리에서 버림받은 자처럼 살고 있던 자들 중에 영원한 복음의 선포를 듣고 ‘아, 내 속에 하나님 말씀의 깨달음이 없구나’ 하고 자기의 곤고함을 느낀 겸손한 자가 성령의 소리를 듣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그 마음의 소리는 성령의 소리요, 이 성령의 소리를 듣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다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성도들이 어디에 있던 인도해 내신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면서 예언하고 방언이나 하는 이런 사람은 이런 사람들대로의 쓰레기를 수거하듯이 그 쪽으로 모아서 수거해 가신다.
요즘 동네마다 아파트마다 분리수거를 하는데, 이 안에는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성경의 뜻이 들어있다. 교인들이 워낙 못 깨달으니까 성경의 뜻을 알게 해 주시려고 안 믿는 사람을 통해서 분리수거를 하게 해서 우리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는 거다. 진리의 성도들은 그들대로 모이게 하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은사 은사’ 하는 사람들은 또 그 쪽으로 모이게 하고, 또 예언 방언하는 사람들은 또 그 쪽으로 모이게 해서 때가 되면 그 무리들에 맞게 처리를 하는 거다.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얼마나 알곡으로 여물어졌는지 반드시 분리해서 털 날이 온다.
어제 떴던 해가 오늘 또 뜨고, 아니면 오늘 떴던 해가 인간 자기 보기에는 오늘 뜬 것 같으나 실은 어제 떴던 바로 그 해다. 그러면서 벌써 시 분 초가 넘어갔다. 이와 함께 자기의 세포조직도 벌써 그만큼 늙은 거다. 어제 없던 사람이 오늘 태어나고, 오늘 있던 사람이 죽는다. 이게 시간이 넘어갔다는 증거다. 자기 앞의 시간은 화살촉처럼 사정없이 지나간다. 지금도 지나가고 있다. 우리를 이런 가운데 살게 하신 이유가 뭔지를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육적 가견적으로 눈에 보이게 각 나라 민족 속에 흩어져 살고 있던 영적 이스라엘이 복음 증거자들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임을 알게 되어서 경건 된 신앙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를 한다는 것은 경건생활을 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우리교회에 여기저기서, 멀리서도 오고 가까이에서 오기도 하지만 주일날 왜 물건을 사느냐? 절대로 그렇게 하지 말아라. 그러면 은혜 다 털어버린다. 최대한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고 애를 써라. 평소에 6일 동안 성경을 안 봤다면 주일날만큼이라도 성경을 봐야 할 게 아니냐? 먹어서 뒤로 빠지는 밥은 날마다 먹으면서 영의 양식은 일주일 동안 굶고 있다면 이 사람은 분명히 영적인 면에서 신앙도 없고 힘이 없다.
다윗 왕이 유명한데, 이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것을 아침저녁으로 먹는 밥처럼 여겼다고 했다. 얼마나 힘 있는 왕이냐?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을 생각을 해봐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줬지, 환경을 조성시켜 줬지, 사실 이 세상을 보면 자기가 게을러서 못 먹고 못 사는 거지 자기가 부지런만 하면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해 주셨다. 그런데 왜 성경을 읽을 시간조차 없이 살고 있느냐?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를 한다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자는 경건 된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이다. 이래야 은혜가 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다. (계속)
28-29]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22편 28절-29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28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여호와’라고 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이면서 불도적 식으로 밀고 나가서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룬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인간 네가 어떻게 살아도, 네가 좋아하던 싫어하던, 네 마음에 없는 거라도 하나님인 내가 밀어붙여서 너에게 영원히 좋도록 내 뜻을 이루겠다’ 하는 게 들어있다. 그러니까 인간 우리가 잘났다고 하나님 앞에 까불 필요가 없다. 까불다가는 얻어맞는다.
나라는 누구의 것이냐? 여호와의 것이다.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여호와 하나님이 세상의 주인이라 그 말이다. 나라라 할 때는 그 나라에 누가 있느냐? 통치자가 있고, 통치자가 있으면 백성도 있는 거다. 그리고 또 뭐가 있느냐? 영토가 있다. 그러니까 땅이 있고, 백성이 있고, 통치자가 있으면 그것은 나라다. 이걸 작게 축소시켜서 보면 자기의 집도 하나의 나라다. 자기 집에 통치자가 있고, 자기 집의 땅이 있고, 백성인 식구들이 있으니까 나라다.
일반적인 면에서 나라란 그런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모인 이것이 누구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누가 있느냐? 통치자가 있다. 말씀 통치자가 있다. 이걸 목사로만 보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는 말씀으로 인도하는 통치자도 통치자이지만 각 성도들 속에는 하나님이 왕으로 들어있다. 그래서 자기 혼자라도 개인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거고, 많이 모이면 또 단체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거다. 이게 교회라.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고 속사람이 하나님의 인격으로 커지는 거다. 간단히 말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누구처럼 닮아져 있을까? 우리교회 교인들이 마지막 날 하늘나라로 들어가면 누구처럼 닮아져 있을까? 목사처럼 닮아져 있겠는지, 하나님처럼 닮아져 있겠는지? 하나님을 닮았다.
그러면 말만 하나님을 닮은 거냐?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봐라. 거짓 교회, 거짓 종, 세상적으로 예수를 믿는 교인들은 누구를 닮았을까? 세상을 닮았다. 우리교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이걸 잘 봐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 갈 때 아무 교회나 함부로 가지 말아라. 갈 교회가 있고, 안 갈 교회가 있는 거다.
내가 목사 되기 전에 어느 교회에 가니까 부흥집회를 하는데, 강사 목사님이 구멍이 뚫린 오바단추를 입 안에 넣고 단추구멍으로 ‘휙 휙’ 하는 바람소리를 내면서 ‘성령을 받아라’ 라고 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휙 휙’ 하는 바람소리가 날 때마다 쌍손을 들고 야단법석을 했다. 그러면 이런 교회가 자기가 갈 교회냐, 안 갈 교회냐? 가면 안 된다.
목사가 능력이 있다고 해서 손을 이렇게 하면 교인들이 이렇게 넘어가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넘어가고. 이게 뭐냐? 소림사에서 배운 장풍이냐? 교회는 이런 장난을 하는 곳이 아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부자 된다’ 라고 하는 곳에 가야 되느냐, 안 가야 되느냐? 안 가야 한다. 이런 곳은 예수 믿는 똑똑한 자기가 갈 곳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으로 지혜지식이 자라져 있고, 도덕성이 자라져 있는 백성들이다. 이게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팔팔 뛰며 복 달라고 하고, 돈 달라고 하고, 아파트 달라고 하고, 자동차 달라고 한다면 이게 뭐냐?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도 그러지 않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게 뭐냐? 예수 믿는 건 이런 게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게 아니다. 진리 인격화 되는 성도들이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아주 값어치가 있는 성도들이 돼야지 하나의 교인, 하나의 신자가 되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 언약하고 약속된 백성들에게는 애정권 치리, 사랑권 치리, 생명권 치리, 진리권 치리가 들어있다.
거짓된 목사들은 뭐라고 가르치는가 하니 ‘충성봉사 일 많이 하라. 왜 일을 안 하느냐?’고 하면서 말을 가지고 사람을 친다. 그러나 옳은 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기를 깨닫게 해준다.
예수를 믿는다면 사람이 바로 돼야 한다. 게으른 사람도 옳은 진리이치에서 깨닫고 부지런한 사람이 돼야 하고, 미련하고 속이 좁았는데 말씀을 받다보니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격이고 하나님의 마음이니까 하나님의 그게 닮아지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하나님의 말씀통치를 받고 성격도 고쳐지고, 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성질도 하나님처럼 말씀으로 고쳐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존재적으로는 하나님은 아니로되 마음이 하나님을 닮는 거다.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성경에 보면 성전 안이 있고, 성전 밖이 있다. 계:에 보니까 스룹바벨인가를 통해서 단을 잰다. 왜 재느냐? ‘맞느냐, 안 맞느냐? 네가 가진 정신이 정확한가? 마음이 정확한가? 신앙사상이 정확한가?’를 자로 재는 거다. ‘아, 이건 정확하지 않구나. 성 밖으로 내쫓아라.’ 성 밖으로 내쫓기면 밟히는 거다. 이럴 경우는 하나님의 애정권 사랑권 치리권 안이 아니라 그 밖이 되는 거다.
귀신이 어느 사람에게 잘 들어가느냐? 하나님의 신 성령은 어떤 사람에게 잘 들어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워 넣는 사람은 하나님의 신이 좋아하기 때문에 성령이 따른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따른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이 사람 속에 뭐만 들어있을까? 세상정신 마음만 가득 들어있기 때문에 여기는 마귀의 시험을 타고 귀신이 들어가게 되어있다.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사람이 있고, 밖에 있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쉽게 말하면 부모님의 말을 잘 들으면 ‘방안에 들어오너라. 이거 먹어라. 저거 먹어라. 따뜻하게 자거라’ 하지만 말을 안 들으면 왜 공부를 안 하느냐? 왜 아침에 나가서 밤늦도록 쏘다니느냐? 너 밥 안 준다. 밖으로 나가거라‘ 하게 된다. 이러면 어떻게 되느냐? 이게 부모의 사랑권 밖이다. 이 밖에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춥고 배고프고 무섭고 슬프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권, 하나님의 사랑권, 하나님의 애정권 밖으로 나가지 말아라. 하나님이 밀어내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거다. 신앙이 어떤 건지도 모르는 사람은 자기가 나간 건지, 들어간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어느 권 안에 살아야 하느냐? 생명권, 말씀권, 하나님의 애정권 안에서 살아야 자기가 평강이 된다. 기쁘고 즐겁다. 현재 자기는 어느 권 안에 사는 자기냐?
29절: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풍비한 자는 세상의 것으로 아무리 풍부해도 만족도 기쁨도 없다. 왜 그러냐? 영적인 면에서 속사람이 꽤꽤 말라있기 때문이다. 쉬운 이치로 몸은 건강한데 아는 면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아는 면에서 풍부하게 가진 거냐, 바싹 말라있는 거냐? 말라 있다. 세상의 것으로, 물질의 것으로, 먹는 것으로, 돈으로, 가진 것으로 아무리 풍부해도 영의 눈을 가지고 보면 꽤꽤 말라 있다.
사람은 세상의 모든 부자라도 영적인 하나님의 말씀,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의 말씀을 먹어야 만족을 받을 수 있다. 그래야 경건한 믿음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경건한 생활을 잘 하려면 영적으로 풍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까도 말했지만 경건 된 생활, 하나님 앞에 바로 살려면 자기 속에 말씀을 자꾸 채워야 한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진토에 내려가는 자란 무덤으로 내려가는 자, 죽음으로 내려가는 자다. 이런 자가 어떻게 자기 영혼을 살릴 수 있을까? 자기가 이 지경이 되면 결국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보면 진토에 내려가는 자는, 땅으로 자꾸 내려가는 자는, 정신과 마음이 땅으로 내려가는 자는 교만해서 자기 고집대로 살다가 결국은 그 신앙정신 사상이 죽음으로 내려가는구나. 죽음 직전으로 내려가면 결국은 어쩔 도리가 없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굴복을 하게 되더라. 그러니까 인간 자기가 세상적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꾸 고집을 피우면 얻어맞고 발발 기고 나오게 된다.
개들도 아무 데나 오줌 싸고 똥 쌌다고 해서 두들겨 패면 땅에 엎드려서 오줌을 질질 싼다. 무슨 말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따르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살다가 허송세월을 다 보낸 후에 결국은 내리막길에서 꺾이고 굴복하고 만다. 그러니까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고 빨리 깨닫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