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열차표 예매
김병우
이른 새벽녘 역사(驛舍) 대합실이 붐볐다. 추석 열차표 예매창구 앞에는 이동식 간이 의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였고, 그 주위를 푸른색 KORAIL 라인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그 안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모를 한 무리의 사람들로 빼곡했다.
첫차를 타고 서둘러 왔건만 예매 대기 고객 제1구역에는 이미 들어갈 수가 없었다. 부득불 제2구역의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예매하려면 서너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자리를 잡고 앉았다는 안도감으로 졸음이 쏟아졌다. 고객의 불편함은 아랑곳하지 않고 직원들 출근 시간에 맞춘 행정편의주의가 여기서도 판을 친다는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료한 시간을 옆 사람과 잡담으로 때워야 할 판에, 마침 옆에 앉은 사십 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건네 온다. 전방부대에 근무하는 아들이 추석 때 첫 휴가를 나오는데 오는 편은 본인이 버스로 오겠다고 하지만, 부대로 돌아갈 때만이라도 열차로 편하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했다. 오른쪽의 일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남자 분은 아들이 외국에 나가 있고 서울에 사는 며느리와 손자들의 표를 구하기 위해서 지난 설에 이어서 또 왔다고 했다. 다행히 이번 추석은 연휴 기간이 길고 불경기 탓인지 지난 설 때보다 대기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얘기도 곁들였다.
나 역시 서울에서 수년째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딸아이의 열차표를 구하기 위해서 꼭두새벽부터 수선을 떨고 나온 터였다. 작년만 해도 티브이 뉴스를 통해 명절 열차표 예매 장면을 보면서, 그런 건 저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 왜 부모들을 생고생 시키느냐고 욕을 했었던 나 자신이었건만, 나이를 먹고 보니 별수 없는 딸 사랑 바보 아비가 되었다. 딸아이는 해마다 인터넷으로 시도를 해봤으나 번번이 실패했다는데 어쩌겠는가. 퇴직 후 시간밖에 없는 백수가 자식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해 줘도 된다는 아내의 성화도 작용했다.
기다리는 동안 인터넷 발매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당첨소식을 연락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이탈한다. 내 옆에 앉았던 두 분 역시 아이들이 표를 인터넷으로 발급했다는 연락이 와서 먼저 간다며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대기석에는 대부분 나이든 분들이 주류를 이뤘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나처럼 등 떠밀려 나온 사람, 자식들만은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극진한 자식 사랑 어른들로 넘쳐나는 새벽녘 역 광장의 진풍경이 묻어났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 빠져나간 자리는 기다리는 순서대로 차례차례 앉아야 하는데 새치기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한동안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급기야 욕설이 오가고 두 노인네가 멱살을 잡고 바닥에 뒹구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말려도 보았지만 격분한 상태라서 소용이 없었다. 남자들 싸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 나이가 몇 살이야?” 주민증 까기에 이르렀다. 옆에서 들으니 여든에, 또 한 분은 여든셋이라고 했다.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젊은이 못지않게 힘들이 장사였다. 이런 장면을 객지에 있는 자식들이 본다면 어떨까? 추석예매 취재차 방송국에서 나온 카메라 기자들도 보이는데 말이다.
싸움은 철도경찰이 오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진정 되었다. 분을 이기지 못해 경찰에게까지 막무가내로 욕설을 퍼붓는 고약한 노인네들의 모습을 한참이나 더 보고 있어야만 했다. 성질 급한 민낯을 보는 내내 마음이 쓰렸다. 저네들 편하자고 나이든 부모를 사지로 몰아넣은 꼴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머잖아 초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 양로원 같은 시설에서 생활해야 하는 노인네들이 갈수록 더 많아질 테고 나 역시 그런 입장이 될 것인데 걱정이 앞선다. 시설관리자를 통해서 전해 들은 얘기는 여자 분들은 낯선 만남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쉽게 친구가 되어 적응이 빠른데, 남자들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만나기만 하면 네가 잘 났네 내가 잘 났네 왕년 타령이나 하면서 시비가 붙어 싸움닭으로 변하는가 하면, 온종일 대화 한마디 없이 고립무원으로 벽을 쌓고 지낸다고 한다. 그래서 시설에 들어온 남자 어른들은 몇 년을 못 버티고 다들 저세상으로 떠난다고도 했다.
남자 노인들의 이런 아집과 독선, 막무가내식 고집불통은 도대체 왜일까? 평생을 경쟁에 내몰려 긴장감 속에서 살아온 게 몸에 배어서 인가? 아니면 퇴직 후 주변 정리를 다시 해야 할 시점에 유일한 아군이라고 믿었던 아내마저 따로따로 한 세월 탓에 내 편이 아닌 경우가 많아서 그런 건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자가 늙어 필요한 건 돈, 딸, 건강, 친구, 찜질방이지만, 남자는 부인과 아내, 집사람, 와이프, 애들 엄마만 있으면 된다는 오죽하면 이런 우스갯소리까지 나왔겠는가.
예매시간을 기다리면서 앉아 있는 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래전 읽었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생각이 나서 혼자 멋쩍게 웃었다. 사는 그날까지 내 집에서 살다가 이승을 떠나는 것 또한 소시민의 작은 행복일진데 그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겠는가?
추석 열차표 예매는 접수창구에서 업무를 시작한 지 불과 1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모두 끝났다. 발급 받은 열차표를 손에 쥐니 입가에 알 수없는 미소가 흘렀다. 그제야 배고픔이 목구멍으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아침과 점심 사이다. 모처럼 가족을 위해서 좋은 일 했다는 뿌듯함에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역사(驛舍)를 빠져나오니 햇살에 눈이 부셨다. (2016.9.6)
첫댓글 열차표 예매 풍경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부인, 아내, 집 사람, 외이프, 애들 엄마 말고도 찾을 사람과 일거리를 많이 만들어야 겠네요. 잘 읽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내의 주가가 오르네요 젊은시절 울 영감 신랑시절 가족이 많이 아프거나 불이 나지 않으면 전화 못하게 했습니다.별 볼일없이 남편직장에 전화질 하는 여편네들 꼴 불견이라고 자연 남편 직장전화번호 몰랐지요.급한 볼일이 있어 사무실에서 학교전화번호부를 찾는 나의게 옆에 앉았던 남자직원이 그토록 전화 안하고 사느냐고 묻더랍니다. 지금은 내 휴대전화 밧데리 떨어질까봐 열심히 챙겨서 꼽아줍니다 어디서든지 부르면 답하라고 . 좀 늦다는 전화 없다고 하면 하도 전화하지 마르라고 해서 버릇이 되었다고요. 잘 읽었습니다. ㅎ ㅎ ㅎ
옛 세대 사람들이 모였을때의 풍속도.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찾아볼수없는 무질서에 익숙한 모습들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소문으로만 듣던 열차표 예약 잘 알았습니다. 고생하였지만 귀여운 따님이 좋아할 모습도 보는듯 합니다. 자식사랑을 누가 탓하겠습니까 큰일 하였습니다.잘 읽었습니다.
남의 나라 얘기 같은 열차표 예매풍경을 잘 구경햇습니다. 지금도 귀향 귀성 전쟁을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현장의 모습을 실감나게 스케치해 주셨습니다. 열차표 발급을 받게되어 축하드립니다.
저는 한번도 경험해보지못한 열차표 예매전쟁을 실감나게 그려주신 진솔하고 재미있는글 감사합니다.
따님을 위해 애쓰시는 어버이들의 마음 세상모든 어버이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