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신으로 모셔진 고구려의 국모
글 머리에..詩로 본 유화부인의 모습은 무엇일까
다음은,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 .[책읽는 마을]刊. 2002의 요약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편 고구려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유화부인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어머니이니 곧 고구려의 국모이다. 사후 부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어 고구려 군신과 백성들의 지극한 섬김을 받은 하백의 딸 유화부인은 어떤 여성이었는가. 이제부터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의 국모 유화부인의 파란만장했던 한삶을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그리고 고구려라는 국호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고구려나 고려라는 국호가 나오지 않지만, 역시 고구려 사람들의 손으로 새겨진 중원고구려비에는 ‘고려태왕(高麗太王)’ 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가 된 까닭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대의 고려와 국호가 중복되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 아리수 어느 나루에 하백을 자처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유화(柳花)․훤화(萱花)․위화(葦花)라는 딸 셋이 있었다. 이 세 자매의 이름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각각 버들꽃․원추리꽃․갈대꽃인데, 본편의 주인공 유화, 곧 버들꽃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몽골지역의 무당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그 젊은이는 번들번들 윤이 나는 매우 질좋은 가죽옷을 입었고, 그리고 나서 세 자매를 자신이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離宮)인가 별궁(別宮)인가 하는 집으로 초대했다. 세 자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했다. 젊은이가 자칭 천제의 아들이요 천왕랑이라는 바람에 감히 거절을 못 했는지, 아니면 그가 한눈에 반할 만큼 잘 생기고 씩씩한 멋쟁이였기 때문인지 어쨌거나 처녀들은 옷을 찾아 입고 그를 따라갔다. 한참 동안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올라가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구리로 만든 궁(宮室)이 나타났다. 그 집으로 따라들어가 젊은이가 대접하는 갖가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세 자매의 뺨도 술기운으로 저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노라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칭 해모수가 문앞을 가로막으면서 못 가게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한편, 캄캄한 밤중에 허둥지둥 엎어지고 자빠지며 집으로 도망쳐 돌아간 두 동생 훤화와 위화는 울며불며 하백이 기가 막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냅다 고함쳤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실린 내용이 약간 다르기에 함께 소개한다. 이야기는 하백이 패배를 인정하고 잔치를 베푸는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하백이 잔치를 열고 자칭 해모수와 유화의 혼인을 인정했지만 사실은 속셈이 따로 있었다. 크게 주연을 베풀어 해모수가 만취하여 정신을 잃어버리자 하백은 해모수와 유화를 커다란 가죽부대에 함께 집어넣어 물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천손이 그리 쉽사리 죽을 턱이 없었다. 죽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해모수는 가죽부대를 찢고 나와 혼자서 멀리멀리 달아나고 그때 금와왕이 신하들로부터 강물의 고기를 훔쳐가는 짐승이 잇다는 말을 듣고 어부로 하여금 쇠그물로 잡아내게 하니 마침내 한 여자가 걸려나왔는데, 입술이 너무나 길어서 말을 하지 못하므로 세 차례나 입술을 잘라버리자 그제서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금와는 유화가 천제의 아들의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궁궐의 별실에 기거하게 하였는데 햇빛이 늘 그 방을 비췄다. 유화가 피해도 햇빛이 따라와 비추더니,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커다란 알 하나를 낳았다. 금와가 괴이하게 여겨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고, 길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모두 피해 다녔고, 들에 내다버렸으나 온갖 짐승과 새들이 오히려 보호해주었다. 구름이 낀 날에도 신기하게도 알 위에는 늘 햇빛이 비치었다. <고기>, 또는 <구삼국사>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는 이 알의 크기가 닷되들이 만했다고 전한다. 금와가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깨지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 유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자 한 달 뒤에 껍질을 깨고 영특하고 기이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난 지 한 달도 어쨌든, 금와 또한 본래 동부여 임금 해부루(解夫婁)의 양자로서 왕위를 이은 인물이었다. 동부여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이었고 북부여는 이미 멸망한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각지에서 일어난 열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 열국의 하나인 고리국(藁離國) 사람의 후손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무리 500을 모아 자립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인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 57년- 서기전 239년 4월 8일이라고 고려 말기의 재야사학자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단군세기>와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는 전한다. 이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이른바 강단파와 재야파 사이에서 위서다 진서다 하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 <한단고기>에 실려 있다. 어쨌든, 해모수는 타고난 자태가 위풍당당하고 사람을 쏘아보는 눈길이 신기하게 빛났으므로 두려워 복종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장차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그대는 다른 곳으로 떠나라.” 따라서 우리는 추모성왕에 앞서서 이미 동명왕을 칭한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 동명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부여의 시조 동명왕 존재의 근거가 되는 기록도 소개한다. 서기 60년께 후한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에 실려 있다.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건국설화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의 건국설화가 이처럼 매우 비슷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떤 학자는 후대의 고구려가 부여의 건국설화를 자기 나라의 건국신화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등 이설이 많은데, 이 또한 지면관계상 뭐라고 길게 말할 형편이 아니다. 그리고, 해모수를 사칭한 바람둥이의 정체는 구려후(句麗侯) 고진, 요동을 지키던 모수리의 아우 고진의 손자 불리지(弗離之)였다. 고진은 또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둘째아들이었으니 불리지는 바로 증조부의 위명을 판 셈이었다.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추모에게,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자할 터이니 미리부터 방도를 마련해둠이 좋지 않겠느냐?”하고 일렀다. 추모가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 하고 다른 여러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고 오로지 준마 한 필만은 바늘로 혀밑을 찔러서 비쩍 마르게 만들었다. 금와왕이 마구간을 둘러보고 추모에게 말을 잘 돌보았다며 칭찬한 뒤 상으로 가장 여윈 그 말을 주었다. 그해 10월 제천대회(祭天大會)에서 추모가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했는데 금와왕은 추모가 혹시 많은 짐승을 잡아 자기 아들들의 기를 죽일까 걱정되어 화살을 한 대밖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타고난 준마요 탄 사람은 하늘이 내린 신궁인지라 말달리고 짐승을 몰아 쏘면 쏘는대로 명중시키니 추모 혼자서 화살 한 대로 잡은 짐승이 일곱 왕자가 잡은 짐승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대소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또다시 아우들과 합세하여 추모를 기어코 죽여 없애려고 달려들었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이를 알고 추모로 하여금 한시바삐 먼곳으로 도망치도록 재촉했다. 마침내 추모는 평소 따르던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세 명의 심복을 거느리고 동부여의 도성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모가 도망친 사실을 안 금와왕과 대소 부자가 군사들을 풀어 그 뒤를 추격토록 했다. 그러면서 산 채로 잡아도 좋고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와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가운데 ‘동명왕편’의 내용을 참고한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름 없는 남녀의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며, <구삼국사>에도 기록된 동명왕의 신이(神異)한 일들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매우 간략하게 줄여버린 것을 통탄하여, 이를 시로 지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근본이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 고 밝혔다는 점을 여기에 덧붙여 소개한다. 추모 일행이 동부여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다가 그만 엄호수(엄체수, 개사수라고도 하며 지금 압록강 동북쪽이라고 한다 ; 필자)라는 큰 강물에 앞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벌써 저 멀리 추격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추모가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켜 탄식하며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해 이곳에 이르렀나이다! 천지신명은 이 가엽고 외로운 사람을 버리지 마소서!” 그렇게 소리쳐 기도한 뒤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갑자기 수많은 자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리와 꼬리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추모 일행이 건너자 조금 뒤 추격병들이 뒤따라 건너려다가 자라들이 흩어지므로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대목은 구약성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추모가 엄호수를 건너는 광경이 마치 모세가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람세스2세의 추격에서 벗어나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덕분에 무사히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와 구조가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쩌면 추모가 금와왕의 군사들에게 쫓겨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에 강의 신을 자처하던 어머니 유화부인의 친정아버지, 곧 추모의 외할아버지 하백의 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실이 이런 식으로 신화화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렇게 강을 건넌 추모 일행은 큰 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비둘기 한 쌍이 나무 가까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추모가 활을 들어 쏘자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날살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추모가 비둘기들을 주워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비둘기들은 어머니께서 보내신 사자(使者)가 틀림없어!” 추모가 동부여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유화부인이 “이 어미 걱정일랑 말고 어서 가거라!”하면서 보리의 종자를 싸주었는데 경황없이 도망치는 중에 잃어버렸던 것이다. 추모가 비둘기의 부리를 벌리고 보니 과연 입안에 보리씨가 들어 있었다. 추모가 보리씨를 꺼내고 물을 뿜자 비둘기들이 되살아나 다시 날아갔다. 일행이 발길을 재촉해 모둔곡을 지나가다가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은 재사(再思)요, 또 한 사람은 장삼을 입은 무골(武骨)이요, 나머지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묵거(黙居)였다. 추모는 이들이 성이 없었으므로 재사에게는 극씨(克氏),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각각 내려주고 모두에게 일렀다. “내가 바야흐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창건하고자 하는데 마침 어진 인물 세 명을 만났으 니 이 어찌 천우신조라고 아니 하랴!” 그리고 그들을 수하에 거두어들이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졸본천 흘승홀성에 이르렀다. 졸본은 곧 홀본이요 흘승홀이니 이는 오늘의 만주 땅 환인으로 비정된다. 돌이켜보건대 추모가 동부여에서 도망칠 때 거느리고 왔다는 오이․마리․협보 세 명은 동부여에서부터 추모를 따르던 지지세력의 우두머리들이요, 모둔곡에서 거두어들인 재사․무골․묵거 세 명은 망명 도중에 포섭한 추종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추모가 졸본부여에서 새나라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 핵심세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개국공신이다. 하지만 동부여에서 쫓겨온 젊은 망명객에 불과한 추모가 이들 소수의 추종세력만 거느리고 고구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졸본부여 땅에는 소서노(召西努)라는 여걸이 있어서 추모의 건국사업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는데, 소서노는 바로 다음 편의 주인공이기도 하므로 그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룬다. 그렇게 졸본부여에 다다른 추모의 망명집단은 오늘의 혼강인 비류수 강가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드는 등 근거지를 마련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나라 이름을 따라 왕성(王姓)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는 이 대목에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때에 주몽의 나이 22세라고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뒤에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는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 했다’고 하여 추모가 새로 얻은 부인이 졸본부여 임금의 둘째딸이라고 좀더 자세히 나온다. 그러나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이 이처럼 오로지 새장가를 잘 간 덕분에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이루어졌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다른 나라 임금과 왕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도망쳐온 불과 21세의 젊은이가 아무 밑천도 없이 그저 인물 하나만 잘난 탓에 아들 없는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2천여 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단순하고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또 한 가지, 추모가 동부여에서 금와왕 부자의 핍박을 피하여 남쪽으로 망명했는데, 광개토태왕훈적비와 모두루묘지명 등에는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왔다고 기록하여 서로 다르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혹시 고구려 당시에는 동부여로 부르지 않고 처음에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에서 말한 졸본부여의 공주라는 여자는 사실은 소서노로서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優台)라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두었으나 우태가 먼저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여자였다. 추모와 소서노가 처음 만났을 때 추모는 21세, 소서노는 29세. 나이도 8세 연상이요, 게다가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유력한 호족이었을 뿐만아니라 으뜸가는 부자였기 때문이었다. 추모로서는 연타발 부녀의 영향력과 재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절세의 영웅이라도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인데, 추모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서노라는 보물샘을 발견한 셈이었다. 비록 연상의 여인이지만 소서노의 미모도 보통은 넘었을 것이고, 또 씩씩하게 잘 생긴 데다가 배짱도 두둑하고, 백발백중하는 신기의 활솜씨까지 갖춘 불세출의 젊은 영웅 추모를 만난 소서노는 첫눈에 완전히 반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연타발도 추모가 천왕랑 해모수의 후손이라는 말에 참으로 피는 못 속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으니 저렇게 사람이 준수하고 무술도 빼어난 게 아니겠어! 하고 속으로는 흐뭇하게 여겼을 것이다. 좌우간 이렇게 서로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추모는 소서노에게 새장가를 들었고, 그녀의 전 남편의 아들 둘도 친자식처럼 귀여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추모는 한 해 동안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궁실을 짓고 성벽을 쌓는 등 건국사업에 전심전력한 끝에 마침내 새나라 고구려의 건국을 만천하에 선포했으니 그때가 기원전 37년 10월이라고 했다. 대왕으로 즉위한 추모는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자신의 성씨가 해씨였지만 고씨로 창씨하여 왕성으로 삼았다. 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나타나 졸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를 세웠다는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나날과 다달을 이어 여러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으로서 보호받기를 자청하여 백성들은 점점 늘어갔다. 따라서 고구려의 인재와 군사들도 늘어갔다. 추모대왕은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오고 키워오던 원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꿈이란 단군왕검의 대조선과 천왕랑 해모수의 대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상의 옛 터전을 되찾아야만 했다. 옛 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는 것이 추모대왕의 꿈이었다. 선조의 고토를 회복하는 ‘다물’, 그것이야말로 대고구려의 건국이념이었던 것이다. 대왕은 안으로는 관직을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들이 생업에 전념하여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한편, 젊고 날랜 무사들을 뽑아 실전과 다름없는 맹렬한 훈련을 통해 하나같이 일당백의 강병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게 강한 군사력을 갖춘 대왕은 나라 주변의 위협이 되는 말갈족들을 멀리 쫓아버린 다음, 소국들을 상대로 하나하나 정복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즉위 첫해에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간 곳이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이었다. 그 나라는 다 같은 단군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로서 송양(松讓)이라는 임금이 다스리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구삼국사>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추모대왕이 비류수 중류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줄 알고 사냥을 하면서 거슬러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비상하게 뛰어난 추모대왕인지라 졸본부여에 정착한 뒤 인근 지역의 사정부터 살펴보았을 것이니,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이미 비류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준비를 완전히 갖춘 뒤에 겉으로는 사냥행차처럼 꾸며 비류국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송양왕 또한 국경의 경계와 방어를 허술히 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인근 졸본부여 땅에 새로 들어선 고구려의 임금이 사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자기 나라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두 나라 임금의 만남은 불가피한 숙명이었다. 양쪽 군사가 맞선 가운데 영토를 침범당한 송양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비류국 대왕 송양이라 하노라... . 내 비록 바닷가 구석진 곳에 외따로 살고 있으므 로 그동안 훌륭한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었는데, 이제 우연히 그대와 서로 만나게 되니 참 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노라. 하지만, 그대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궁금하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이 누군지 먼저 밝혀주기 바라노라.” 추모대왕이 대답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 천왕랑 해모수의 자손 추모라고 하노라. 비류수 하류 졸본 땅에 도읍 을 정하고 대고구려국을 세웠느니라.” 송양왕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그 뒤를 받았다. “우리 비류국은 이미 오래 전에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여러 대째 이어오고 있노라. 또한 그대 고구려 왕이 보다시피 이곳은 땅이 좁아서 두 임금이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느니라. 듣자 하니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니 차라리 나에게 복종하여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떻겠는고?” 추모대왕이 그 말에 더욱 큰 소리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활을 꺼내들고 말했다. “그대도 사나이, 나도 사나이. 아녀자들처럼 입씨름만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활로써 재주를 겨루어 지는 쪽이 항복하기로 함이 어떻겠느뇨?” 그리하여 활쏘기 재주를 겨루게 되었는데, 송양왕이 어찌 절세의 신궁 추모대왕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송양이 마침내 무릎을 꿇고 고구려의 신민이 되기로 맹세했다. 그는 나라를 정리한 뒤 이듬해 6월에 약속대로 졸본성으로 찾아와 영토와 백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대왕은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한 뒤 송양으로 하여금 다물후로 봉해 그 땅을 그대로 다스리게 했다. 뒷날 다물후 송양의 딸이 바로 제2대 유리명왕(琉璃明王)의 황후가 된다. <삼국사기>는 비류국정복 기사의 끝에 ‘고구려 말에 고토를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지방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 가운데는 이 다물이 곧 추모성왕의 연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구려가 건원칭제한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곳곳에 남아 있다. 다만 고구려가 중국과 다른 점은 호칭을 황제가 아니라 성왕․대왕․태왕 등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비류국을 정복하여 건국이념인 ‘다물사업’에 힘찬 첫발을 내디딘 추모대왕은 즉위 4년째인 서기전 34년 7월에 도성인 졸본성과 궁궐의 신축을 완공하여 황실과 국가의 권위를 드높인 데에 이어 재위 6년 10월에는 오이와 부분노(扶芬奴) 두 장수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정복하고 그 땅을 영토로 삼았으며,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땅을 영토로 편입시키는 등 쉴새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그리하여 건국 10년쯤 되자 고구려는 더 이상 신생 약소국이 아니라 추모대왕의 목숨을 위협해 망명길에 오르게 했던 나라, 어머니 유화부인과 본처 예씨부인을 두고 도망쳤던 동부여와 맞먹을 정도의 강국으로 우뚝서기에 이르렀다. 한편 동부여에 두고 온 추모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아내 예씨부인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그토록 미워하던 추모가 도망쳐버리자 혹시 금와왕과 대소 형제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박해받고 멸시당하며 지내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 고부가 학대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궁성에서는 쫓겨났을 것이다. 어쩌면 금와왕 생존시까지는 왕실에서 이들 고부의 생계를 지원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나중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절로써 후히 장사지내주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인 추모가 망명하자 집안에는 두 명의 과부만 남게 되었다. 추모의 홀어머니 유화도 과부, 추모의 부인 예씨도 졸지에 생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유화부인이 추모의 아비 불리지, 천왕랑 해모수를 자처하던 천하의 바람둥이, 그리고 이제는 까마득히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린 첫사랑 불리지를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배게 하고 집에서도 쫓겨나게 만든 사내, 그래서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게 만든 원수같은 사내였지만 이제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비록 두 번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첫사랑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고, 게다가 그는 자랑스러운 외아들 추모의 아비가 아닌가. 유화부인이 손자를 본 것은 아들이 망명한 지 반년쯤 지난 서기전 37년 초였다. 추모가 달아나기 한 해 전에 혼인한 예씨가 그때 임신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손자가 태어날 당시 유화부인의 나이는 40세 전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추모대왕 재위 14년(서기전 24년) 8월에 동부여에서 파란만장했던 한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으니 그때 나이 55세 전후였을 것이다. 요즘은 한창 나이지만 2천여 년 전에 55세라면 이미 고령의 할머니였다. 손자 유리(類利 : 孺留)가 태어났을 때 유화부인은 시어머니요 할머니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해산을 도왔을 것이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구쟁이가 되고, 다시 장가들 나이인 15세의 의젓한 총각으로 자라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추모왕의 뒤에 아들 유류왕이 사위(嗣位)하고, 유류왕의 뒤에 아들 대주류왕이 사위하니,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유리니, 유류(儒留)․유리(琉璃)․유리(類利)는 모두 ’누리‘로 독할 것이니, ’세(世)‘란 듯이며, ’명(明)‘이란 뜻’ 이라고 주장했다. 유리는 그 옛날 아버지 추모가 동부여에서 그랬듯이 아비 없는 자식의 설움을 안고 자라났다. 당시의 모습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 첫머리는 이렇게 전한다. - 유리가 어려서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못되게 구는구나!”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시지요?”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 지방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단다.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나의 유물이 일곱 모진 돌 위의 소나무 밑에 묻혀 있다고 일러주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이 틀림없을 것’ 이라고 하신 바 있다”하였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곧 산골로 들어가서 찾다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유리가 어느날 마루 위에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서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한 동강이를 찾았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보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동강이를 꺼내 붙여보았더니 완전한 칼로 연결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를 삼았던 바,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 마지막에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는 것은 서기전 19년 추모대왕 재위 19년 되던 해를 가리킨다. 이보다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조에는,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추모대왕이 40세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서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동명성왕이라고 했다고 썼다. 그것은 유화부인 사후 5년 뒤의 일이고, 추모대왕의 어머니요 고구려의 국모인 유화부인은 꿈에도 그리던 아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않았을 것이다. 어찌 어머니로서 자식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더구나 인편을 통해 아들이 새나라를 세우고 대왕이 되어 천하 사방을 호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 그 장한 아들의 모습을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으랴. 하지만 유화부인은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추모대왕이 비록 창업과 국력신장의 대업으로 분주한 까닭에 동부여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와 아내를 고구려로 모셔오지는 못했지만 단 한시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짐작컨대 나라를 세운 이후에 수시로 사자들을 보내 안부를 주고 받았으며, 또한 동부여의 왕실에도 모후와 예씨부인, 그리고 아비없이 자라고 있는 아들의 안전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전에는 그토록 핍박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던 금와왕이었지만 마치 자신의 모친상을 당한 듯 태후의 예를 갖춰 정중하게 장사지내고 신묘(神廟)까지 세워주었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추모대왕이 그해 10월에 금와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마운 뜻을 전하고 아울러 졸본지방에서 나는 귀한 토산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그런 친선관계를 전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추모대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는 졸본부여에서 새 아내로 맞은 연상의 여인 소서노의 조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고 잇다. 또한 소서노에게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 두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다음 ‘소서노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추모대왕이 동부여에 있는 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빨리 데려오지 못한 데에는 아마도 자신의 건국사업의 기반이 된 졸본지역의 기존세력인 연타발과 소서노의 계루부를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소서노가 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뒷날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창건하는 등 우리 고대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긴 비상한 여걸이었으니, 추모대왕 생시에 자신의 소생으로 태자로 삼고 대왕 붕어 후에는 그 아들로 제위를 잇게 하여 태후로서 자신과 부족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 소개되는 이설에 따르면 사정은 소서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게 된다. 즉, 추모대왕이 동부여에서 친아들 유리가 어머니 예씨부인을 모시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으며, 비단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본부인 예씨는 황후로, 그때까지 황후 노릇을 하던 소서노는 소후로 강등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붓자식보다 친자식을 후계자로 삼는 것도 그렇고, 제2부인 대신 본부인을 황후로 삼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배신당한 입장이 되면 누군들 즐겨 좇으랴. 졸지에 소후로 강등당한 소서노와 더부살이 혹같은 신세로 전락한 비류․온조 형제는 기가 막혔을 것이고, 또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것이다. 대왕이 붕어하고 태자 유리가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면 정권안보를 위해 숙청을 단행, 더부살이들은 모조리 목을 치거나 멀리 내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출처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책이있는마을)2002년 .........................
북부여기 하--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
--2006년 엠비시 사극 주몽의 한장면-오연수가 분한 극중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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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랑의시인-이민영李旻影의 행복한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