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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랑 사람들
 
 
 
카페 게시글
이민영의 침묵(산문.덧상.메모.편안함) 스크랩 [시와사랑 이야기] 주몽-유화부인 이야기
익명 추천 0 조회 441 06.11.10 18: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신으로 모셔진 고구려의 국모

 

글 머리에..詩로 본 유화부인의 모습은 무엇일까

 

 

 

 

 

 

蘇生, 그대를 위한 (10부작중-제1부 시-물을 위한 빛의 묵상)

이민영

길 위에는 아직 소멸하지않는 엄니의 숨과 떠날 수 없는 엄니의 온기들이 있었다.

그때의 숨소리를 따라 걸어 온 빛의 웃음이 이내 자지면 그 모습은 순간을 파악하려는 듯 알갱이로는 시원 그 始原인 흔들린 영혼이였다. 말은 성찬聖餐을 이루고 성모상이 지엄至嚴한 손사래로 여기는 에덴의 동쪽 쯤 어디라고 외치는 찰나, 우리들은 그 승화되는 세월의 덧想에서 방관의 한 그룹에 남아 보이지않는 이념으로 만 존재했었다.

  여기 슬픈 눈을 아프게하는 것들, 슬픔을 감추고 웃어야하는 눈의 가슴을 아프게하는 것들, 그래서 한없이 멸렬하는 가슴의 학문을 조소해야하는 것들 , 망각忘覺이 그대의 귀 앞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담지말라고 애원하던 것들, 헤진 옷차림'이였으되 生覺을 사랑하는 불꽃인 것들- 끽연이 흡착되는 사랑의 터널에서 순치脣齒로 혀를 깨물던 것들, 어른거르던 날은 뒤돌아보니 과거의 오늘로 회귀해야한다는 것들 ,  

   이제 훌쩍 커버린 세상사람들의 할배와 딸의 미소 속에서' 천년사직의 주몽'을 바라보던 십육인치의 웃음이,

   다시 돌아가 되돌아오는 상념의 자리 속에서 자유- 처절해지고픈 날을 찾아가는 것들

 

   그런 날,
날마다 성찬을 준비하고 성모상聖母像이 여기는 에덴의 동쪽 쯤 어디라고 외치는 찰나
지피는 가슴애피를  끈끈한  입맞춤으로 위무하는 것들의,
생사의 모퉁이마다 몸통은 눕혀지고 숨의 나래는 눕다가는 물결 위의,



(1325-20030701)李旻影의 詩目錄 에서 총10부 연작시 中 제 1부의 詩

(사진은-안동의 수산나 님 제공)

위는 시인 이민영시인의 작품이다. 2003년 7월 1일 원작으로, 다시 2006년 수정 공개한 것이다.

詩想은 어머니的인 것으로 그날의 유화부인과 성모님을 대비하면서 얻은 것이다

독자들을 위하여 공개한다..보성/이민영詩人

 


이미지-mbc 제공

 

이하의 글-

다음은,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 .[책읽는 마을]刊. 2002의 요약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편 고구려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유화부인은 고구려의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의 어머니이니 곧 고구려의 국모이다. 사후 부여신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되어 고구려 군신과 백성들의 지극한 섬김을 받은 하백의 딸 유화부인은 어떤 여성이었는가.
또한 추모성왕의 아버지로 알려진 해모수(解慕漱)는 어찌하고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부여신이 되어 고구려의 여신으로 추앙받게 되었을까.

   이제부터 동북아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 고구려의 국모 유화부인의 파란만장했던 한삶을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
그리고 <한단고기> 및 중국의 여러 사서에 실린 기록들을 통해 되살려보기로 한다. 이야기의 전개 가운데
소설적인 부분은 이런 기록들을 바탕으로 저자가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묘사한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또 한 가지, 저자는 고구려 시조의 이름을 주몽이 아니라 추모로 쓴다는 점도 분명히 하겠다. 왜냐하면 이는 고구려 사람들 스스로 그들의 시조 이름을 주몽이 아니라 추모로 불렀기 때문이다. 움직일 수 없는 두 가지 증거를 들겠다. 고구려의 황성이었던 만주 집안시에 있는 영락태왕(永樂太王), 시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의 훈적비 첫머리에 이렇게 새겨져 있다. ‘예전에 시조 추모왕께서 나라를 세우실 때에 북부여로부터 나오셨는데, 천제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날 때부터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娘 剖卵降世 生而有聖)’. 또 대사자(大使者) 모두루(牟頭婁)의 묘지명에도 시조 추모성왕은 ‘본래 북부여에서 나왔는데, 하백의 외손이며 일월신의 아들이다(元出北夫餘 河泊之孫 日月之子)’라고 했다. 이처럼 고구려 사람들 자신이 새긴 기록을 믿지 않고 그로부터 700년이나 뒤에 쓰여진 <삼국사기>나 중국의 기록을 더 믿을 것인가.

  그리고 고구려라는 국호도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고구려나 고려라는 국호가 나오지 않지만, 역시 고구려 사람들의 손으로 새겨진 중원고구려비에는 ‘고려태왕(高麗太王)’ 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 이름을 고구려가 아니라 고려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가 고구려가 된 까닭은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당대의 고려와 국호가 중복되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해
고구려로 바꾸었다는 일부 학자의 주장이 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고려나 고구려는 각각 ‘고리’와 ‘고구리’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는 설이다. 이는 ‘麗’ 자의 새김이 ‘빛날 려’와 ‘나라이름 리’ 두 가지인 바, 고려나 고구려처럼 국호에 쓰일 경우 려가 아니라 리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문제 제기들이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고 또 중요하기도 하지만, 이 책은 역사연구서도 아니고 저자 또한 깊은 지식도 없으므로 보다 전문적인 이야기는 다른 기회로 미루고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
  송화강은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흑룡강과 합치는 만주의 젖줄이다. 옛 이름은 속아리였으니 곧 나라 안의 큰 강이라는 뜻이요, 고대에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아리라- 아리수의 하나였다. 단군조선의 유민인 부여와 고구려 사람들이 그 언저리에 마을을 세우고 모여 사는 강 이름이 모두 아리수였다는 사실은 나라의 중심이 되는 도읍을 모두 펴라- 평양이라고 부른 것과 마찬가지로서, 결국 아리수나 펴라는
늘의 한강이나 평양만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였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이 아리수 어느 나루에 하백을 자처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유화(柳花)․훤화(萱花)․위화(葦花)라는 딸 셋이 있었다. 이 세 자매의 이름은 우리말로 풀이하면 각각 버들꽃․원추리꽃․갈대꽃인데, 본편의 주인공 유화, 곧 버들꽃은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고대 몽골지역의 무당들이

 
신목(神木)으로 삼던 버드나무를 상징한 것이라고 한다.
  어느 해 여름날 세 자매는 더위에 못 이겨 강으로 물놀이를 나갔다. 처녀들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물가에 옷을 벗어 놓고 발가벗은 채 물속으로 풍덩풍덩 뛰어들어 미역을 감았다. 물장구도 치고 재잘재잘 지저귀기도 하고 까르르 웃어대기도 하면서 즐겁게 놀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웬 시커먼 사내 하나가 강가
에 나타나더니 떡 버티고 선 채 능글맞게 웃으며 처녀들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처녀들은 불쑥 나타난 젊은이 때문에 기절하도록 놀라 저마다 어머나! 하고 비명을 지르며 첨벙첨벙 물속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런 모습을 보자 젊은 이는 더욱 재미있다는 듯이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 그 젊은이는 번들번들 윤이 나는 매우 질좋은 가죽옷을 입었고,
머리에는 오우관(烏羽冠)이라는 까마귀의 깃털을 꽂은 관모를 썼으며, 허리에는 한 발도 넘어보이는 자루가 긴 장검을 찼고, 어깨에는 힘센 사람이라야 쏠 수 있는 강궁인 단궁(檀弓)을 메고 있었다. 어느 모로 보나 비범한 인물인 듯싶은 젊은이는 아니나다를까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천제의 아들인 천왕랑(天王郞) 해모수
라고 자기 소개를 하더니 처녀들이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던지더니 강물로 풍덩 뛰어들어 아가
씨들을 희롱하며 놀았다.

   그리고 나서 세 자매를 자신이 임시로 거처하는 이궁(離宮)인가 별궁(別宮)인가 하는 집으로 초대했다. 세 자매는 마치 무엇에 홀린 듯했다. 젊은이가 자칭 천제의 아들이요 천왕랑이라는 바람에 감히 거절을 못 했는지, 아니면 그가 한눈에 반할 만큼 잘 생기고 씩씩한 멋쟁이였기 때문인지 어쨌거나 처녀들은 옷을 찾아 입고 그를 따라갔다. 한참 동안 강줄기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올라가 보니 전에는 보이지 않던 구리로 만든 궁(宮室)이 나타났다. 그 집으로 따라들어가 젊은이가 대접하는 갖가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세 자매의 뺨도 술기운으로 저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노라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칭 해모수가 문앞을 가로막으면서 못 가게 했다.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어머나, 기가 막혀! 그제서야 해모수의 엉큼한 속셈을 눈치챈 세 자매가 깜짝 놀라 한결같이 비명을 지르며 마구 달아나기에 바빴다. 일석삼조는 천제의 아들이라도 힘들었는지 두 아우는 천만다행으로 문밖으로 달아나는데 성공했지만 맏이 유화만은 꼼짝없이 붙잡혀 그날 밤 해모수에게 정조를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캄캄한 밤중에 허둥지둥 엎어지고 자빠지며 집으로 도망쳐 돌아간 두 동생 훤화와 위화는 울며불며
아버지 하백에게 자초지종을 일러바쳤다. 하백이 두 딸의 말을 듣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라 부하들을 이끌고 자칭 해모수라는 자의 이궁인지 별궁인지 하는 곳으로 쳐들어갔다. 하백이 부하들을 시켜 집을 포위한 뒤 이렇게 고함쳤다.

 
   “이 천하에 흉악한 오입쟁이에 날강도 놈아! 어서 내 딸을 내놓고 이리 나와 내 칼을      받아라!”

 
  그러자 궁실의 문이 열리며 해모수가 나타나더니 능글맞게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장인 어른, 어서 오십시오! 사위 해모수의 절을 받으소서!”

  하백이 기가 막혀 온몸을 부르르 떨다가 냅다 고함쳤다.
   “이 놈아! 너처럼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도 모르는 놈이 무슨 얼어죽을 사위란 말이냐?    당치도 않구나!
먼저 내 딸을 내놓고 모가지를 바쳐라!”
  그리하여 두 사람은 대판 싸움을 벌였는데, 나이든 하백이 젊은 용사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강약이 부동이라, 기력과 무술이 못미쳐 패배를 인정한 하백은 마침내 잔치를 베풀고 두 사람의 사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비극은 그 다음에 시작되었다. 자칭 해모수라는 바람둥이가 결혼하면 3년간 처가에 봉사해야 하는 부여족의 미풍양속과 더불어 점점 배가 불러오는 유화를 헌신짝처럼 팽개쳐버린 채 어디론가 유유히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뭐, 천제의 자손은 서민과 혼인할 수 없다나 하는 말같지도 않은 핑계를 대면서였으니 딸을 버린 하백은 기가 막혔고 몸을 버린 유화는 눈앞이 캄캄했다. 화를 참지 못한 하백은 유화의 입술을 석 자나 잡아늘리고 태백산(백두산) 남쪽 우발수로 내쫓아버렸다.
  처녀가 아이를 배자 사내는 달아나버리고 아비는 집에서 쫓아내니 유화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짧지만 한많은 이승살이를 스스로 끝내려고 우발수 깊은 물에 풍덩 몸을 던졌는데, 죽는 것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나가던 어부가 유화를 물에서 건져올려 동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 바쳤던 것이다.
  금와왕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기에 유화가 할수없이 자칭 해모수라는 바람둥이와 사통하여 임신을 하고 부모에게 쫓겨난 사정을 이야기했다. 금와왕이 이야기를 듣고 자세히 살펴보니 비록 버림받은 여자라고는 하나 자태가 그지없이 빼어나게 아름답기에 자신의 후궁으로 삼을 욕심이 생겨 자신의 궁궐로 데리고 가서 방 하나를 주고 머물게 했다.
  그리하여 유화가 달이 차서 서기전 58년 음력 5월 5일 마침내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골격이 튼튼하고 외모가 영특하게 생겼으며 나면서부터 이내 말을 할 줄 알았다. 금와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고 미워하여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구가(狗加)․저가(猪加)․우가(牛加)․마가(馬加) 같은 여러 대가(大加)가 한결같이 천제의 아들인 해모수의 혈육이라는 이 기이한 아이를 죽여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므로 어쩌지 못하고 유화에게 돌려주면서 길러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삼국사기>와 <세종실록> ‘지리지’ 등에 실린 내용이 약간 다르기에 함께 소개한다.

  이야기는 하백이 패배를 인정하고 잔치를 베푸는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하백이 잔치를 열고 자칭 해모수와 유화의 혼인을 인정했지만 사실은 속셈이 따로 있었다. 크게 주연을 베풀어 해모수가 만취하여 정신을 잃어버리자 하백은 해모수와 유화를 커다란 가죽부대에 함께 집어넣어 물에 던져버렸다. 하지만 천손이 그리 쉽사리 죽을 턱이 없었다. 죽기 직전에 정신을 차린 해모수는 가죽부대를 찢고 나와 혼자서 멀리멀리 달아나고
말았다. 하백이 유화를 보고 가문과 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면서 입술을 석 자나 되게 잡아늘려서 우발수로 내쫓아버렸다.

   그때 금와왕이 신하들로부터 강물의 고기를 훔쳐가는 짐승이 잇다는 말을 듣고 어부로 하여금 쇠그물로 잡아내게 하니 마침내 한 여자가 걸려나왔는데, 입술이 너무나 길어서 말을 하지 못하므로 세 차례나 입술을 잘라버리자 그제서야 비로소 말을 할 수 있었다. 금와는 유화가 천제의 아들의 부인이라는 말을 듣고 궁궐의 별실에 기거하게 하였는데 햇빛이 늘 그 방을 비췄다. 유화가 피해도 햇빛이 따라와 비추더니, 그로부터 태기가 있어 커다란 알 하나를 낳았다. 금와가 괴이하게 여겨 알을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고, 길에 버렸으나 소와 말이 모두 피해 다녔고, 들에 내다버렸으나 온갖 짐승과 새들이 오히려 보호해주었다. 구름이 낀 날에도 신기하게도 알 위에는 늘 햇빛이 비치었다. <고기>, 또는 <구삼국사>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는 이 알의 크기가 닷되들이 만했다고 전한다.

   금와가 알을 깨뜨리려 했지만 깨지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어머니 유화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자 한 달 뒤에 껍질을 깨고 영특하고 기이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난 지 한 달도
못 되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추모대왕 또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거서간(朴赫居世居西干),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대왕(金首露大王)과 마찬가지로 신령스러운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다는 말이다. 알이란 둥근 것이요 하얗게 빛나는 것이니 곧 하늘의 해를 상징하는 것이다. 해모수의 성씨 해(解) 또한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해를 가리키는 것이요 그 알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것은 하늘의 자손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내려왔다는 천손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쨌든, 금와 또한 본래 동부여 임금 해부루(解夫婁)의 양자로서 왕위를 이은 인물이었다. 동부여는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이었고 북부여는 이미 멸망한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각지에서 일어난 열국 가운데 하나였다. 그 열국의 하나인 고리국(藁離國) 사람의 후손 해모수가 웅심산에서 무리 500을 모아 자립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인 47세 단군 고열가(古列加) 57년- 서기전 239년 4월 8일이라고 고려 말기의 재야사학자인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단군세기>와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는 전한다. 이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이른바 강단파와 재야파 사이에서 위서다 진서다 하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 <한단고기>에 실려 있다.

   어쨌든, 해모수는 타고난 자태가 위풍당당하고 사람을 쏘아보는 눈길이 신기하게 빛났으므로 두려워 복종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스물아홉 살에 5가를 통합해 아스라(아사달 : 하르빈)에 도읍을 정해 북부여를 세우고 스스로 천왕랑이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곧 천제의 아들, 천자라는 뜻이었다.

 
  <북부여기>는 또 이렇게 전한다. 해모수의 뒤는 모수리(慕漱離)가 이었는데, 그때는 중국에서 진왕(秦王) 정(政)이 나라를 통일하고 시황제(始皇帝)라 칭할 무렵이었다. 진 제국이 서자 연․제․조나라의 유민 수만 명이 우리 땅으로 망명 귀화했다. 모수리는 아우 고진(高辰)을 장수로 삼아 위만(衛滿)의 침공에 대비해 요동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은 중국 유민의 우두머리로서 명맥만 남은 조선왕 기준(箕準)을 간계로 속여 나라를 빼앗은 인물이었다.

 
  모수리 다음은 고해사(高奚斯), 그 다음은 고우루(高于婁)가 뒤를 이었다. 서기전 108년 한 무제(漢武帝) 유철(劉澈)의 군대가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멸망시키자, 아리라- 압록강 서쪽 지방에서 고두막(高豆莫 : 高莫婁)이라는 비상한 용사가 마지만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칭하고 군사를 일으켰다. 그는 졸본에서 즉위하고 동명왕(東明王)이라고 일컬으며 사람을 시켜 아스라의 고우루에게 전하게 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다. 장차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그대는 다른 곳으로 떠나라.”

  따라서 우리는 추모성왕에 앞서서 이미 동명왕을 칭한 영웅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 동명왕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부여의 시조 동명왕 존재의 근거가 되는 기록도 소개한다. 서기 60년께 후한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에 실려 있다.

 
 -  북쪽 이민족의 탁리국에 왕을 모시는 여자 시종이 임신을 하자 왕이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여종은 계란같은 큰 기운이 하늘에서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아 돼지우리에 버렸지만 돼지가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다시 마구간으로 옮겨놓고 말에 밟혀 죽도록 했으나 말들 역시 입으로 숨을 불어넣어 죽지 않았다. 왕은 아이가 아마 천신의 자식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모친에게 노비로 거두어 기르게 했으며, 동명(東明)이라고 부르며 소나 말을 치게 했다. 동명의 활솜씨가 뛰어나자 왕은 그에게 나라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그를 죽이려고 했다. 동명이 남쪽으로 도망가다가 엄체수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주었고, 동명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 추격하던 병사들은 건널 수가 없었다. 그는 부여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다. 이것이 북이(北夷)에 부여가 생기게 된 유래다.-

  부여의 시조 동명왕의 건국설화와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추모의 건국설화가 이처럼 매우 비슷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떤 학자는 후대의 고구려가 부여의 건국설화를 자기 나라의 건국신화로 만들었다고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그 반대라고 주장하는 등 이설이 많은데, 이 또한 지면관계상 뭐라고 길게 말할 형편이 아니다.  

 
  좌우간 그렇게 고우루가 겁에 질리고 근심 걱정이 병이 되어 죽으니 후사가 없어 아우 해부루가 뒤를 이었다. 해부루도 동명왕 고두막이 막강한 무력으로 잇달아 핍박하니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동북쪽 가시라, 오늘의 두만강가 훈춘으로 쫓겨가 국호를 동부여라고 바꾸었다. 해부루 또한 형 고우루와 마찬가지로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므로 하루는 산천에 제사올리고 뒤를 이을 아들을 점지해주십사 빌었다. 돌아오는 길에 곤연에 이르렀을 때 타고 가던 말이 갑자기 멈추더니 큰 돌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해부루가 괴이하게 여겨 그 돌을 치워보라고 하자 그 밑에 금빛나는 개구리처럼 생긴 사내아이가 있었다. 해부루가 기뻐하며, “이는 필시 하늘이 내게 주신 자식이 분명하구나!” 하고 데려와 이름을 ‘금개구리(金蛙)‘라고 짓고 길러서 자라나자 태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해부루가 죽자 양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모수를 사칭한 바람둥이의 정체는 구려후(句麗侯) 고진, 요동을 지키던 모수리의 아우 고진의 손자 불리지(弗離之)였다. 고진은 또한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의 둘째아들이었으니 불리지는 바로 증조부의 위명을 판 셈이었다.

 

 
 유화와 해모수 아닌 불리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났는데 어려서부터 활을 매우 좋아했고 잘 쏘았다. 파리가 귀찮게 굴어서 잠을 잘 수 없다면서 어머니 유화부인에게 활을 만들어달라고 하여 유화가 조그만 장난감 활을 만들어주자 그것으로 파리를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그리고 나이 일곱 살이 되자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대궐 안팎으로 돌아다니며 보이는 대로 쏘는데 역시 백발백중의 신기였다. 마침내 신궁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그는 추모(鄒牟)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이’, ‘우두머리’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뒷날 그의 이름을 한문자로 표기하면서 추모 외에 주몽(朱蒙)․중모(中牟)․추몽(鄒蒙)․중해(衆解)․도모(都慕)처럼 여러 가지로 음역되었던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고구려 시조의 이름은 광개토태왕릉비문이나 모두루묘지명의 기록에 따라 추모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고구려인들이 그렇게 불렀고 그렇게 새겨서 남긴 기록보다 더 정확한 것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추모가 그처럼 어려서부터 비상하게 빼어난 재주를 보이자 그는 이내 주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때 금와왕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었는데 무엇을 하고 놀아도 추모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했다. 맏아들 대소(帶素)가 부왕에게 “아바마마! 저 과부의 새끼 추모 녀석을 하루빨리 죽여 없앱시다! 일찌감치 후환을 없애버리자구요!” 하고 졸랐다. 하지만, 금와왕이 여러 부족의 우두머리인 5가를 무시하고 독재를 할 만큼 왕권을 확립하지 못했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죽일 수 없었기에 추모에게 왕궁의 마구간에서 말먹이는 천한 일을 시켰다. 그때 추모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다.

  하루는 어머니 유화부인이 추모에게, “얘야, 장차 왕자들이 너를 해코자할 터이니 미리부터 방도를 마련해둠이 좋지 않겠느냐?”하고 일렀다. 추모가 어머니의 말씀이 옳다 하고 다른 여러 말은 잘 먹여 살찌게 하고 오로지 준마 한 필만은 바늘로 혀밑을 찔러서 비쩍 마르게 만들었다. 금와왕이 마구간을 둘러보고 추모에게 말을 잘 돌보았다며 칭찬한 뒤 상으로 가장 여윈 그 말을 주었다.

  그해 10월 제천대회(祭天大會)에서 추모가 그 말을 타고 사냥대회에 참가했는데 금와왕은 추모가 혹시 많은 짐승을 잡아 자기 아들들의 기를 죽일까 걱정되어 화살을 한 대밖에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은 타고난 준마요 탄 사람은 하늘이 내린 신궁인지라 말달리고 짐승을 몰아 쏘면 쏘는대로 명중시키니 추모 혼자서 화살 한 대로 잡은 짐승이 일곱 왕자가 잡은 짐승을 다 합한 것보다도 많았다. 대소가 참을 수 없는 질투와 분노로 또다시 아우들과 합세하여 추모를 기어코 죽여 없애려고 달려들었다. 어머니 유화부인이 이를 알고 추모로 하여금 한시바삐 먼곳으로 도망치도록 재촉했다.

 
그해에 추모는 스물한 살. 그 전해에 예씨부인(禮氏夫人)에게 장가들어 어른이 되었으며, 그때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후궁 아닌 후궁으로 대궐 한구석에서 오로지 아들 하나만 바라보고 늙어가는 홀어머니 유화부인과 아직도 신혼이나 마찬가지인 아내 예씨, 그리고 아내의 뱃속에 든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는 발길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고 가슴도 미어지는 듯했지만, 추모로서는 일단 목숨부터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고 시급했다.

  마침내 추모는 평소 따르던 오이(烏伊)․마리(摩離)․협보(陜父) 세 명의 심복을 거느리고 동부여의 도성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추모가 도망친 사실을 안 금와왕과 대소 부자가 군사들을 풀어 그 뒤를 추격토록 했다. 그러면서 산 채로 잡아도 좋고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부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와 백운(白雲) 이규보(李奎報)의 문집 <동국이상국집> 가운데 ‘동명왕편’의 내용을 참고한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해서, ‘이름 없는 남녀의 입에도 자주 오르내리며, <구삼국사>에도 기록된 동명왕의 신이(神異)한 일들을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매우 간략하게 줄여버린 것을 통탄하여, 이를 시로 지어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나라의 근본이 성인(聖人)의 나라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 고 밝혔다는 점을 여기에 덧붙여 소개한다.

  추모 일행이 동부여 군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나다가 그만 엄호수(엄체수, 개사수라고도 하며 지금 압록강 동북쪽이라고 한다 ; 필자)라는 큰 강물에 앞길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배도 없었고 다리도 없었다. 벌써 저 멀리 추격군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추모가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켜 탄식하며 이렇게 소리쳤다.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해 이곳에 이르렀나이다! 천지신명은    이 가엽고 외로운 사람을 버리지 마소서!”

  그렇게 소리쳐 기도한 뒤 활을 들어 강물을 치니 갑자기 수많은 자라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머리와 꼬리를 이어 다리를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추모 일행이 건너자 조금 뒤 추격병들이 뒤따라 건너려다가 자라들이 흩어지므로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이 대목은 구약성서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한다. 추모가 엄호수를 건너는 광경이 마치 모세가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파라오 람세스2세의 추격에서 벗어나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덕분에 무사히 홍해를 건넜다는 이야기와 구조가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쩌면 추모가 금와왕의 군사들에게 쫓겨 위험한 지경에 빠졌을 때에 강의 신을 자처하던 어머니 유화부인의 친정아버지, 곧 추모의 외할아버지 하백의 부족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실이 이런 식으로 신화화된 것이 아닐까.

  어쨌든 그렇게 강을 건넌 추모 일행은 큰 나무 아래에 둘러앉아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때 비둘기 한 쌍이 나무 가까이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추모가 활을 들어 쏘자 두 마리가 한꺼번에 날살을 맞고 땅에 떨어졌다. 추모가 비둘기들을 주워들며 이렇게 말했다. “이 비둘기들은 어머니께서 보내신 사자(使者)가 틀림없어!” 추모가 동부여에서 도망치기 직전에 유화부인이 “이 어미 걱정일랑 말고 어서 가거라!”하면서 보리의 종자를 싸주었는데 경황없이 도망치는 중에 잃어버렸던 것이다. 추모가 비둘기의 부리를 벌리고 보니 과연 입안에 보리씨가 들어 있었다. 추모가 보리씨를 꺼내고 물을 뿜자 비둘기들이 되살아나 다시 날아갔다.

  일행이 발길을 재촉해 모둔곡을 지나가다가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옷을 입은 재사(再思)요, 또 한 사람은 장삼을 입은 무골(武骨)이요, 나머지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묵거(黙居)였다. 추모는 이들이 성이 없었으므로 재사에게는 극씨(克氏), 무골에게는 중실씨(仲室氏), 묵거에게는 소실씨(少室氏)라는 성을 각각 내려주고 모두에게 일렀다.

   “내가 바야흐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창건하고자 하는데 마침 어진 인물 세 명을 만났으    니 이 어찌 천우신조라고 아니 하랴!”

  그리고 그들을 수하에 거두어들이고 다시 길을 떠나 마침내 졸본천 흘승홀성에 이르렀다. 졸본은 곧 홀본이요 흘승홀이니 이는 오늘의 만주 땅 환인으로 비정된다. 돌이켜보건대 추모가 동부여에서 도망칠 때 거느리고 왔다는 오이․마리․협보 세 명은 동부여에서부터 추모를 따르던 지지세력의 우두머리들이요, 모둔곡에서 거두어들인 재사․무골․묵거 세 명은 망명 도중에 포섭한 추종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모두 추모가 졸본부여에서 새나라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 핵심세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개국공신이다.

  하지만 동부여에서 쫓겨온 젊은 망명객에 불과한 추모가 이들 소수의 추종세력만 거느리고 고구려 건국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이룩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졸본부여 땅에는 소서노(召西努)라는 여걸이 있어서 추모의 건국사업을 적극적으로 돕게 되는데, 소서노는 바로 다음 편의 주인공이기도 하므로 그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뒤로 미룬다.

  그렇게 졸본부여에 다다른 추모의 망명집단은 오늘의 혼강인 비류수 강가에 집을 짓고 마을을 만드는 등 근거지를 마련한 뒤 새로운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고 하고, 나라 이름을 따라 왕성(王姓)을 고씨(高氏)라고 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는 이 대목에서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보매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그의 딸로써 아내를 삼게 하였고, 왕이 죽으매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때에 주몽의 나이 22세라고 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는 ‘주몽이 북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에 이르자 부여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딸만 셋이 있었다. 주몽을 보자 비상한 인물임을 알고 둘째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얼마 뒤에 부여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 그리하여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는 비류(沸流)라 하고 둘째는 온조(溫祚)라 했다’고 하여 추모가 새로 얻은 부인이 졸본부여 임금의 둘째딸이라고 좀더 자세히 나온다.

  그러나 추모성왕의 고구려 건국이 이처럼 오로지 새장가를 잘 간 덕분에 식은 죽 먹듯이 손쉽게 이루어졌으리라고 볼 수는 없다. 다른 나라 임금과 왕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도망쳐온 불과 21세의 젊은이가 아무 밑천도 없이 그저 인물 하나만 잘난 탓에 아들 없는 졸본부여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즉위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시조가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2천여 년 전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단순하고 동화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또 한 가지, 추모가 동부여에서 금와왕 부자의 핍박을 피하여 남쪽으로 망명했는데, 광개토태왕훈적비와 모두루묘지명 등에는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왔다고 기록하여 서로 다르니 이는 어찌된 일인가. 혹시 고구려 당시에는 동부여로 부르지 않고 처음에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의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은 아닐까.

  <삼국사기>에서 말한 졸본부여의 공주라는 여자는 사실은 소서노로서 계루부의 부족장 연타발(延陀勃)의 딸이었다. 소서노는 처음에 우태(優台)라는 사람에게 시집가서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두었으나 우태가 먼저 죽는 바람에 과부가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 여자였다. 추모와 소서노가 처음 만났을 때 추모는 21세, 소서노는 29세. 나이도 8세 연상이요, 게다가 두 아들까지 딸린 과부였지만 추모가 소서노를 만난 것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격이었다. 소서노의 아버지 연타발은 졸본부여의 유력한 호족이었을 뿐만아니라 으뜸가는 부자였기 때문이었다. 추모로서는 연타발 부녀의 영향력과 재산이 절실히 필요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무리 절세의 영웅이라도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인재와 재물이 필요한 법인데, 추모는 그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소서노라는 보물샘을 발견한 셈이었다.

  비록 연상의 여인이지만 소서노의 미모도 보통은 넘었을 것이고, 또 씩씩하게 잘 생긴 데다가 배짱도 두둑하고, 백발백중하는 신기의 활솜씨까지 갖춘 불세출의 젊은 영웅 추모를 만난 소서노는 첫눈에 완전히 반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연타발도 추모가 천왕랑 해모수의 후손이라는 말에 참으로 피는 못 속여!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으니 저렇게 사람이 준수하고 무술도 빼어난 게 아니겠어! 하고 속으로는 흐뭇하게 여겼을 것이다. 좌우간 이렇게 서로의 속셈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추모는 소서노에게 새장가를 들었고, 그녀의 전 남편의 아들 둘도 친자식처럼 귀여워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추모는 한 해 동안 재물을 풀어 사람들을 모으고 궁실을 짓고 성벽을 쌓는 등 건국사업에 전심전력한 끝에 마침내 새나라 고구려의 건국을 만천하에 선포했으니 그때가 기원전 37년 10월이라고 했다. 대왕으로 즉위한 추모는 해모수의 후손이므로 자신의 성씨가 해씨였지만 고씨로 창씨하여 왕성으로 삼았다. 추모라는 걸출한 젊은 영웅이 나타나 졸본부여 땅에서 일어나 고구려를 세웠다는 소문은 발 없는 말을 타고 사방으로 퍼져나가 나날과 다달을 이어 여러 씨족과 부족이 찾아와 신민으로서 보호받기를 자청하여 백성들은 점점 늘어갔다. 따라서 고구려의 인재와 군사들도 늘어갔다.

  추모대왕은 건국 직후부터 자신이 오래 전부터 품어오고 키워오던 원대한 꿈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꿈이란 단군왕검의 대조선과 천왕랑 해모수의 대부여를 잇는 천손(天孫)의 나라,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조상의 옛 터전을 되찾아야만 했다. 옛 조선의 유민들이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져 세운 수십 개의 나라를 다시 하나의 대제국으로 아우르는 것이 추모대왕의 꿈이었다. 선조의 고토를 회복하는 ‘다물’, 그것이야말로 대고구려의 건국이념이었던 것이다.

  대왕은 안으로는 관직을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백성들이 생업에 전념하여 헐벗고 굶주리지 않도록 하는 한편, 젊고 날랜 무사들을 뽑아 실전과 다름없는 맹렬한 훈련을 통해 하나같이 일당백의 강병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렇게 강한 군사력을 갖춘 대왕은 나라 주변의 위협이 되는 말갈족들을 멀리 쫓아버린 다음, 소국들을 상대로 하나하나 정복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즉위 첫해에 가장 먼저 군사를 이끌고 간 곳이 비류수 상류의 비류국이었다. 그 나라는 다 같은 단군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로서 송양(松讓)이라는 임금이 다스리고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구삼국사>를 인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추모대왕이 비류수 중류로 채소잎이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그 상류에 사람이 사는 줄 알고 사냥을 하면서 거슬러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고 했다. 하지만 머리가 비상하게 뛰어난 추모대왕인지라 졸본부여에 정착한 뒤 인근 지역의 사정부터 살펴보았을 것이니, 고구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이미 비류국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준비를 완전히 갖춘 뒤에 겉으로는 사냥행차처럼 꾸며 비류국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송양왕 또한 국경의 경계와 방어를 허술히 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인근 졸본부여 땅에 새로 들어선 고구려의 임금이 사전에 아무 통보도 없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자기 나라 국경을 넘었다는 보고를 받았을 것이다. 어쨌든 두 나라 임금의 만남은 불가피한 숙명이었다. 양쪽 군사가 맞선 가운데 영토를 침범당한 송양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비류국 대왕 송양이라 하노라... . 내 비록 바닷가 구석진 곳에 외따로 살고 있으므    로 그동안 훌륭한 사람을 만나보기 힘들었는데, 이제 우연히 그대와 서로 만나게 되니 참    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노라. 하지만, 그대가 어디서 온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궁금하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자신이 누군지 먼저 밝혀주기 바라노라.”

  추모대왕이 대답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 천왕랑 해모수의 자손 추모라고 하노라. 비류수 하류 졸본 땅에 도읍    을 정하고 대고구려국을 세웠느니라.”

  송양왕이 입을 크게 벌리고 웃으며 그 뒤를 받았다.

   “우리 비류국은 이미 오래 전에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여러 대째 이어오고 있노라. 또한    그대 고구려 왕이 보다시피 이곳은 땅이 좁아서 두 임금이 나누어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느니라. 듣자 하니 그대는 나라를 세운 지 얼마 되지 않는다니 차라리 나에게 복종하여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떻겠는고?”

  추모대왕이 그 말에 더욱 큰 소리로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더니 활을 꺼내들고 말했다.

   “그대도 사나이, 나도 사나이. 아녀자들처럼 입씨름만 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활로써 재주를 겨루어 지는 쪽이 항복하기로 함이 어떻겠느뇨?”

  그리하여 활쏘기 재주를 겨루게 되었는데, 송양왕이 어찌 절세의 신궁 추모대왕의 적수가 될 수 있으랴. 송양이 마침내 무릎을 꿇고 고구려의 신민이 되기로 맹세했다. 그는 나라를 정리한 뒤 이듬해 6월에 약속대로 졸본성으로 찾아와 영토와 백성을 바치고 항복했다. 대왕은 비류국을 다물도(多勿都)로 개칭한 뒤 송양으로 하여금 다물후로 봉해 그 땅을 그대로 다스리게 했다. 뒷날 다물후 송양의 딸이 바로 제2대 유리명왕(琉璃明王)의 황후가 된다. <삼국사기>는 비류국정복 기사의 끝에 ‘고구려 말에 고토를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 지방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족주의 사학자들 가운데는 이 다물이 곧 추모성왕의 연호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구려가 건원칭제한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곳곳에 남아 있다. 다만 고구려가 중국과 다른 점은 호칭을 황제가 아니라 성왕․대왕․태왕 등으로 불렀다는 사실이다.

  비류국을 정복하여 건국이념인 ‘다물사업’에 힘찬 첫발을 내디딘 추모대왕은 즉위 4년째인 서기전 34년 7월에 도성인 졸본성과 궁궐의 신축을 완공하여 황실과 국가의 권위를 드높인 데에 이어 재위 6년 10월에는 오이와 부분노(扶芬奴) 두 장수를 보내 태백산 동남쪽의 행인국을 정복하고 그 땅을 영토로 삼았으며, 재위 10년 11월에는 장수 부위염(扶尉厭)을 보내 북옥저를 쳐서 없애고 그 땅을 영토로 편입시키는 등 쉴새없이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늘려 힘차게 부국강병의 길을 달렸다. 그리하여 건국 10년쯤 되자 고구려는 더 이상 신생 약소국이 아니라 추모대왕의 목숨을 위협해 망명길에 오르게 했던 나라, 어머니 유화부인과 본처 예씨부인을 두고 도망쳤던 동부여와 맞먹을 정도의 강국으로 우뚝서기에 이르렀다.

  한편 동부여에 두고 온 추모성왕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아내 예씨부인은 그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그토록 미워하던 추모가 도망쳐버리자 혹시 금와왕과 대소 형제의 화풀이 대상이 되어 박해받고 멸시당하며 지내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그들 고부가 학대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궁성에서는 쫓겨났을 것이다. 어쩌면 금와왕 생존시까지는 왕실에서 이들 고부의 생계를 지원해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나중에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절로써 후히 장사지내주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가장인 추모가 망명하자 집안에는 두 명의 과부만 남게 되었다. 추모의 홀어머니 유화도 과부, 추모의 부인 예씨도 졸지에 생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유화부인이 추모의 아비 불리지, 천왕랑 해모수를 자처하던 천하의 바람둥이, 그리고 이제는 까마득히 먼 옛날의 추억이 되어버린 첫사랑 불리지를 다시 만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배게 하고 집에서도 쫓겨나게 만든 사내, 그래서 한때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게 만든 원수같은 사내였지만 이제는 그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비록 두 번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첫사랑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고, 게다가 그는 자랑스러운 외아들 추모의 아비가 아닌가.

  유화부인이 손자를 본 것은 아들이 망명한 지 반년쯤 지난 서기전 37년 초였다. 추모가 달아나기 한 해 전에 혼인한 예씨가 그때 임신중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밝힌 바와 같다. 손자가 태어날 당시 유화부인의 나이는 40세 전후로 추정된다. 그리고 <삼국사기>에 따르면 추모대왕 재위 14년(서기전 24년) 8월에 동부여에서 파란만장했던 한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고 했으니 그때 나이 55세 전후였을 것이다. 요즘은 한창 나이지만 2천여 년 전에 55세라면 이미 고령의 할머니였다.

  손자 유리(類利 : 孺留)가 태어났을 때 유화부인은 시어머니요 할머니로서 즐거운 마음으로 해산을 도왔을 것이고,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개구쟁이가 되고, 다시 장가들 나이인 15세의 의젓한 총각으로 자라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을 것이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에서, ‘추모왕의 뒤에 아들 유류왕이 사위(嗣位)하고, 유류왕의 뒤에 아들 대주류왕이 사위하니, 유류는 ’본기‘의 유리명왕 유리니, 유류(儒留)․유리(琉璃)․유리(類利)는 모두 ’누리‘로 독할 것이니, ’세(世)‘란 듯이며, ’명(明)‘이란 뜻’ 이라고 주장했다. 유리는 그 옛날 아버지 추모가 동부여에서 그랬듯이 아비 없는 자식의 설움을 안고 자라났다. 당시의 모습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유리명왕조 첫머리는 이렇게 전한다.

-   유리가 어려서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기를, “이 아이는 아비가 없기 때문에 이렇게 못되게 구는구나!” 하였다. 유리가 부끄러워하며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시지요?”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너의 아버지는 보통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므로 이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남쪽 지방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단다. 떠날 때에 어미에게 이르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거든 나의 유물이 일곱 모진 돌 위의 소나무 밑에 묻혀 있다고 일러주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이 틀림없을 것’ 이라고 하신 바 있다”하였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곧 산골로 들어가서 찾다가 그것을 찾지 못하고 지쳐서 돌아왔다. 유리가 어느날 마루 위에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서 보니 주춧돌이 일곱 모로 되어 있었다.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한 동강이를 찾았다. 드디어 이것을 가지고 옥지(屋智)․구추(句鄒)․도조(都祖) 등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보고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동강이를 꺼내 붙여보았더니 완전한 칼로 연결되었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세워 태자를 삼았던 바,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 -

  마지막에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 되었다’는 것은 서기전 19년 추모대왕 재위 19년 되던 해를 가리킨다. 이보다 앞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19년조에는, ‘여름 4월에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추모대왕이 40세 한창 나이로 세상을 떠서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동명성왕이라고 했다고 썼다.

  그것은 유화부인 사후 5년 뒤의 일이고, 추모대왕의 어머니요 고구려의 국모인 유화부인은 꿈에도 그리던 아들의 모습을 한 번 더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않았을 것이다. 어찌 어머니로서 자식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더구나 인편을 통해 아들이 새나라를 세우고 대왕이 되어 천하 사방을 호령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 그 장한 아들의 모습을 죽기 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지 않았으랴. 하지만 유화부인은 그 마지막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던 것이다.

  추모대왕이 비록 창업과 국력신장의 대업으로 분주한 까닭에 동부여에 남겨두고 온 어머니와 아내를 고구려로 모셔오지는 못했지만 단 한시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짐작컨대 나라를 세운 이후에 수시로 사자들을 보내 안부를 주고 받았으며, 또한 동부여의 왕실에도 모후와 예씨부인, 그리고 아비없이 자라고 있는 아들의 안전을 부탁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유화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전에는 그토록 핍박하고 목숨까지 위협하던 금와왕이었지만 마치 자신의 모친상을 당한 듯 태후의 예를 갖춰 정중하게 장사지내고 신묘(神廟)까지 세워주었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사신을 통해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추모대왕이 그해 10월에 금와왕에게 사신을 보내 고마운 뜻을 전하고 아울러 졸본지방에서 나는 귀한 토산물을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도 그런 친선관계를 전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추모대왕이 고구려를 건국하는 데에는 졸본부여에서 새 아내로 맞은 연상의 여인 소서노의 조력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알고 잇다. 또한 소서노에게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비류와 온조 두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다음 ‘소서노편’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추모대왕이 동부여에 있는 본부인 예씨와 친아들 유리를 빨리 데려오지 못한 데에는 아마도 자신의 건국사업의 기반이 된 졸본지역의 기존세력인 연타발과 소서노의 계루부를 의식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소서노가 추모를 도와 고구려를 건국하고, 뒷날 두 아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백제를 창건하는 등 우리 고대사에 빛나는 자취를 남긴 비상한 여걸이었으니, 추모대왕 생시에 자신의 소생으로 태자로 삼고 대왕 붕어 후에는 그 아들로 제위를 잇게 하여 태후로서 자신과 부족의 안전을 도모하였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 소개되는 이설에 따르면 사정은 소서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돌아가게 된다. 즉, 추모대왕이 동부여에서 친아들 유리가 어머니 예씨부인을 모시고 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리를 태자로 책봉했으며, 비단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본부인 예씨는 황후로, 그때까지 황후 노릇을 하던 소서노는 소후로 강등하고 말았던 것이다.

 

 의붓자식보다 친자식을 후계자로 삼는 것도 그렇고, 제2부인 대신 본부인을 황후로 삼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막상 배신당한 입장이 되면 누군들 즐겨 좇으랴. 졸지에 소후로 강등당한 소서노와 더부살이 혹같은 신세로 전락한 비류․온조 형제는 기가 막혔을 것이고, 또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것이다. 대왕이 붕어하고 태자 유리가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면 정권안보를 위해 숙청을 단행, 더부살이들은 모조리 목을 치거나 멀리 내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어쨌든 유화부인의 이승살이는 그렇게 막을 내렸는데, 비록 인간 유화부인의 일생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여신으로 고구려 백성들의 가슴 속에서 거듭태어나게 된다. 고구려는 추모대왕이 스스로 천제의 아들, 하백의 외손이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천손국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히 컸다. 그러한 천손사상이 또한 백성들의 정신무장을 튼튼히 하고 결속력을 뒷받침했다. 그래서 그들은 추모대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에게 성왕, 곧 ‘성스러운 대왕’이란 묘호를 바치고 신상을 만들어 신묘에 모시며 고등신이라는 칭호의 시조신으로 받들었다. 또한 추모성왕- 시조신의 어머니 유화부인도 여신상을 만들어 신묘에 모시고 부여신이라고 부르며 자자손손 받들어모셨다.

 
  고구려는 해마다 음력 10월이면 동맹(東盟)이라는 거국적 축하잔치를 베풀어 천신과 지신, 그리고 고등신과 부여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위로는 대왕에서부터 아래로는 하부의 천민에 이르기까지 즐겁게 어울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며칠 밤낮을 두고 신명나게 놀았다. 이는 한 해의 수확을 천지신명과 조상신에게 감사드리고 새로운 한 해의 번성과 안전을 기원하며 부족간의 유대를 다지는 최대규모의 한마당 잔치였다.


 요즘으로 치면 미혼모에 불과했던 유화부인은 이렇게 해서 대제국 고구려의 여신으로 신성화․신격화될 수 있었다. 그녀가 여신으로 영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조 추모성왕의 어머니라는 사실에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물의 신인 하백의 딸이라는 신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망명 직전에 오곡의 종자를 챙겨주었다는 설화로 미루어보건대 이미 백성들의 의식 속에는 유화부인이 곧 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는 수확의 여신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출처 <한국사를 바꾼 여인들>(책이있는마을)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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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여기 상
휴애거사 범장 지음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癸亥二年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分置五加之兵屯田自給以備不虞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冬十月立公養胎母之法敎人必自胎訓始l 壬申十一年北漠酋長山只喀隆襲寧州殺巡使穆遠登大掠而去庚辰十九年丕薨子準襲父封爲番朝鮮王遣官監兵尤致力於備燕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辛巳二十年命祭天于白岳山阿斯達七月起新闕三百六十六間名爲天安宮癸未二十二年滄海力士黎洪星與韓人張良狙擧秦王政于博浪沙中誤中副車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分置於上下雲障遣將監之己亥三十八年燕盧 復修遼東故塞東限浿水浿水今 河也丙午四十五年燕盧 叛漢入凶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是歲冬帝崩葬于熊心山東麓太子慕漱離立

二世檀君 慕漱離 在位二十五年丁未元年番朝鮮王箕準久居須臾嘗多樹恩民皆富饒後爲流賊所敗亡入于海而不還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月支卓之生鄕也是謂中馬韓於是弁辰二韓赤各以其衆受封百里立都自號皆廳用馬韓政令世世不叛戊申二年帝遣上將延 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 觀戰龍圖知變也辛未二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四世檀君 高于婁(一云解于婁) 在位三十四年辛酉元年遣將討右渠不利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甲子四年帝遣將攻海城三月而不克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以東悉降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甲午三十四年十月東明王高豆莫汗使人來告曰我是天帝子裝欲都之王其避之帝難之是月帝憂患成疾而崩皇弟解夫婁立之東明王以兵 之不己君臣頗難之國相阿蘭弗奏曰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 宜五穀可都遂勸王移都是謂迦葉原夫餘或云東夫餘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

임술원년 단제께서는 자태가 용맹하게 빛나시니, 신과 같은 눈빛은 사람을 꿰 뚫어 그를 바라보면 과연 천왕랑이라 할 만하였다. 나이 23세에 하늘에서 내려 오시니, 이는 47세 단군고열가 57년으로 임술 4월 8일이라. 웅심산에 의지하여 궁실을 난변에 쌓았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모자를 쓰시고 용광의 칼을 차시며 오룡의 수레를 타셨다. 따르는 종자 500인과 함께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저녁엔 하늘로 오르시더니 이에 이르러 즉위하였다. 계해 2년 이해 3월 16일 하늘에 제사하고 연호의 법을 제정하더니 오가의 병력을 나누어 배치하여 밭 갈아 자급자족함으로써 뜻밖의 일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기사 8년 단제께서 무리를 이끌고 가서 옛 도읍의 오가들을 회유 하시니 마침내 공화의 정치를 철폐하게 되었다. 이에 만백성들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겨울 10월 공양태모의 법을 세워 사람을 가르침에는 반드시 태교부터 실시하도록 하였다. 임신 11년 북막의 추장 산지객륭이 영주를 습격하여 순사 목원등을 죽이고 크게 약탈질하고 돌아갔다. 경진 19년 기비가 죽으니 아들 기준을 아비의 뒤를 이어 번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 관리를 보내 병사를 감독하고 연나라를 대비하는 일에 더욱 힘쓰게 하였다. 연나라는 장수 진개를 파견하여 우리의 서쪽 변두리 땅을 침략하더니 만번한에 이르러 국경으로 삼게 되었다. 신사 20년 2명을 내리사 백악산 아사달서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하시고 7월 새로운 궁궐 336칸을 지어 이름하여 천안궁이라 하다. 계미 22년 창해역사 여홍성이 한나라 사람 장량과 함께 진나라왕 정을 박랑사 가운데에 저격하였으나 빗나가 부차를 박살내다. 임실 31년 진승이 군대를 일으키니 진나라 사람들이 크게 어지러웠다. 이에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의 백성들이 도망해서 귀순하는자가 수만명이나 되었다. 이들을 상하의 운장에 갈라 살게 하고 장군을 파견시켜 감독케하였다. 기해 38년 연나라의 노관이 다시금 요동의 옛성터를 수리하고 동쪽은 패수로써 경계를 삼으니 패수는 곧 오늘의 난하이다. 병오 45년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하니 그의 무리인 위만은 우리에게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께서는 이를 허락치 않으셨다. 단제께서는 병으로 인해 스스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번조선 왕 기준이 크게 실수하여 마침내 위만을 박사로 모시고 상 하 운장을 떼어서 위만에게 봉해주었다. 이 해 겨울 단제께선 붕어하시고 웅심산 동쪽 기슬에 장사지내니 태자인 모수리가 즉위하였다.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35년

정미원년 번조선 왕은 오랫동안 수유에 있으면서 항상 많은 복을 심어 백성들이 매우 풍부하였다. 뒤에 떠돌이 도적떼들에게 패하여 망한뒤 바다로 들어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오가의 무리들은 대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함께 산을 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월지는 탁의 태어난 고향이니 이를 가리켜 중마한이라 한다. 이에 이르러 변 진한의 두 한도 역시 각각 자기들의 받았던 땅 백리를 가지고 수도도 정하고 나름대로 나라 이름을 정했는데 모두 마한의 다스림을 따르며 세세토록 배반하는 일이 없었다. 무신 2년 단제께서 상장 연타발을 파견하여 평양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떼와 위만의 무리에 대비케 했다. 이에 위만도 역시 싫증을 느꼈던지 다시는 침범치 않았다. 기유 3년 해성을 평양도에 속하게 하고는 황제의 동생 고진을 시켜 이를 수비케 하니, 중부여 일대가 모두 복종하매 그들에게 양곡을 풀어 주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경향분수의 법을 세웠으니 서울도성은 곧 천왕이 직접 수비를 총괄하며 지방은 네 갈래로 나누어 군대를 주둔하도록 하니 마치 윷놀이에서 용도의 싸움을 보고 그 변화를 아는 것과 같았다. 신미 25년(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해사가 즉위하다.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

임신 원년 정월 낙랑왕 최숭이 곡식 300섬을 해성에 바쳤다. 이보다 앞서 최숭은 낙랑으로부터 보물을 산처람 가득히 싣고 바다를 건너 마한의 서울 왕검성에 이르니, 이때가 단군 해모수 병오년의 겨울이었다. 계축 42년 단제께서 몸소 보병과 기병 만명을 이끌고 위만의 도둑떼를 남여성에서 쳐부수고 관리를 두었다. 경신 49년 일군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이해 9월 단제 붕어하시고 태자 고우루가 즉위했다.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

신유 원년 장수를 보내 우거를 토벌하였으나 이로움은 없었다. 고진을 발택하여 서압록을 수비하도록 하니 병력을 늘리고 많은 성책을 설치하여 능히 우거를 대비하는 데 공이 있었으므로 승진시켜 고구려후로 삼았다. 계해 3년 우거의 도적들이 대거 침략하니 우리의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해성 이북 50리의 땅이 모조리 우거의 땅이 되었다. 갑자 4년 단제께서 장군을 보내 성을 공격하였으나 석달 걸려도 이기지 못하였다. 병인 6년 단제가 몸소 정예군 5000을 이끌고 습격하여 해성을 격파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르니 구려하의 동쪽은 모두가 항복해 왔다. 정묘 7년 목책을 좌원에 설치하고 군대를 남여에 두어 이로써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케 하였다. 계유 13년 한의 유철이 평나를 노략질하여 우거를 멸망시키더니 4군을 두고자 하여 사방으로 병력을 침략시켰다. 이에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가는 곳마다 한나라 침략군을 연파하였다. 이에 그 지방의 백성들 모두가 사방에서 일어나 호응함으로써 싸우는 군사를 도와서 크게 떨쳐 보답하였다. 갑오 34년 10월 동명왕 고두막한은 사람을 시켜서 고하기를 '나는 천제으 ㅣ아들인데 장차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자 하니, 왕은 이 땅에서 옮겨가시오.' 라고 하니 단제는 매우 곤란해졌다. 마침내 단제는 걱정으로 병을 얻어 붕어하셨다. 동생인 해부루가 이에 즉위하였는데 동명왕은 여전히 군대를 앞세워 이를 위협하기를 끊이지 않으매 군신이 매우 이를 어렵게 여겼다. 이때 국상인 아란불이, '통하의 물가 가섭의 벌판에 땅이 있는데 땅은 기름지고 오곡은 썩 잘됩니다. 서울을 둘만한 곳입니다.' 라고 하며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도성을 옮겼다. 이를 가섭원부여라 하며 또는 동부여라고도 한다.

 

 북부여기 하--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의 <북부여기>



五世檀君 高豆莫(一云豆莫婁) 在位二十二年 在帝位二十七年癸酉元年是爲檀君高于婁十三年帝爲人豪俊善用兵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乙亥三年帝自將傳 所至無敵不旬月衆至五千每與戰漢寇望風而潰遂引兵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古 離國之地甲午二十二年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帝遣將破裵川之漢寇與遺民幷力所向連破漢寇擒其守將拒以有備乙未二十三年北夫餘奉城邑降屢哀欲保帝廳之降封解夫婁爲候遷之 陵帝前導鼓吹率衆數萬而入都城仍稱北夫餘秋八月與漢寇屢戰于西鴨綠可之上大捷壬寅三十年五月五日高朱蒙誕降于 陵辛酉四十九年帝崩以遺命葬于卒本川太子高無胥立

六世檀君 高無胥 在位二年壬戌元年帝卽位于卒本川與父老會于白岳山立約祭天頒行事例內外大悅帝生而有神德能以呪術呼風喚雨善賑大得民心有小解慕漱之稱時漢寇騷亂遍于遼左屢戰得捷癸亥二年帝巡到寧古塔得白獐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先是帝無子見高朱蒙爲非常人以女妻之至是卽位時年二十三時下夫餘人將欲殺之奉母命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行至 陵水欲渡無梁恐爲追兵所迫告水曰我是天帝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者垂及奈何於是魚鼈浮出成橋始得渡魚鼈乃解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재위 22년, 제재위 27년

계유원년, 이해는 단군 고우루 13년이다. 제는 사람됨이 호탕하고 용맹하여 군사를 잘 다루었다. 일찌기 북부여가 쇠약해지고 한나라 도둑들이 왕성해짐을 보고 분연히 세상을 구할 뜻을 세워 졸본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이라 하였는데 어떤 이들은 고열가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을해 3년 제가 스스로 장수가 되어 격문을 전하니 이르는 곳마다 무적이었다. 열흘이 못되어 5000명이 모여 한나라 도둑들고 싸울 때2마다 먼곳에서 그 모습만 보고도 무너져 흩어져 버리므로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구려하를 건너 요동의 서안평에 이르니 바로 옛 고리국의 땅이었다. 갑오 22년 단군 고우루 34년에 제가 장수를 보내어 배천의 한나라 도둑들을 쳐부수고 유민과 힘을 합하여 향하는 곳마다 한나라 도둑떼를 연파하더니 그 수비장수까지 사로잡았으며 방비를 잘 갖추어 적에 대비했다. 을미 23년 북부여가 성읍을 들어 함복하였는데, 여러 차례 보전하고자 애원하므로 단제가 이를 듣고 해부루를 낮추어 제후로 삼아 분능으로 옮기게 하고는 북을 치며 나팔을 부는 이들을 앞세우고 수만군중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북부여라 칭하였다. 가을 8월에 서압록하의 상류에서 한구와 여러 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임인 30년 5월 5일에 고주몽이 분능에서 태어났다. 신유 49년 제가 붕어하고 유명에 따라 졸본천에 장사지냈다. 태자 고무서 등극하다.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

임술 원년 제가 졸본천에서 즉위하고는 백악산에서 장로들고 함께 모여 사례에 따라 널리 하늘에 제사할 것을 약속하니 모두가 크게 기뻐하였다. 제는 나면서부터 신과 같은 덕이 있어 능히 주술로써 바람과 비를 불러 잘 구제하므로 민심을 크게 얻어 소해모수라고 불렀다. 이때에 한나라의 오랑캐들이 요하의 왼쪽에서 널리 소란을 피웠으니 여러차례 싸워서 크게 이겼다. 계해 2년제가 영고탑을 순시하닥 흰 노루를 얻었다. 겨울 10월 제가 붕어하고 고주몽이 유언에 따라 대통을 이었다. 이보다 앞서 단제는 아들이 없었는데, 고주몽을 보고 사람이 범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였었는데 이에 이르러 즉위하니 이해 나이가 23세 였다. 이때에 부여인이 그를 죽이려 하였는데 오이 마리 협보 등 세사람과는 덕으로써 사귄 친구였던지라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서 함께 길을 떠나 분릉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으므로 뒤 쫓아 오는 군사들에게 몰릴까 두려워하여 물에 고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인데 오늘 도주함에 있어 추격병은 다가오고 있는데 어찌하란 말인가?'하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 따위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므로 주몽이 건너가자 물고기와 자라는 다시 흩어졌다.

 

 

--2006년 엠비시 사극 주몽의 한장면-오연수가 분한 극중 모습





“해모수님을 모시고 여생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2006-MBC 월화극 ‘주몽’에서 유화부인(오연수 분)의 눈물샘이 마르지 않고 있다.
방송된 ‘주몽’에서 서로의 생사조차 몰랐던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20년 만에 극적 재회를 이루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이와 함께 유화부인이 금와왕에게 해모수의 생존 사실을 알린 후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여생을 해모수와 함께 하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해모수의 생존 소식에 금와왕 역시 누구보다 기뻐하면서도 후궁 유화부인의 간청에 씁쓸해한다-엠비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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