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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亂場)
여러 사람이 어지러이 뒤섞여 떠들어 대거나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곳으로 그런 상태를 말한다. 과거를 보는 마당에서 선비들이 질서 없이 들끓어 뒤죽박죽이 된 곳을 말하기도 한다.
亂 : 어지러울 란(乚/12)
場 : 마당 장(土/9)
옛날에는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과거를 볼 때가 되면 오로지 급제를 위해 수년동안 공부를 한 양반집 자제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험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렇듯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들어 질서없이 들끓고 떠들어대던 과거마당을 난장(亂場)이라고 했다. 과거 시험장의 난장에 빗대어 뒤죽박죽 얽혀서 정신 없이 된 상태를 일컬어 난장판(亂場板)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난장판(亂場板)의 유래는 한정해서 살펴보면 난장(亂場)은 과거를 보는 마당에서 선비들이 떠들어대는 판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적으로 정형화된 것이다. 난장판(亂場板)은 여러 사람이 마구 떠들어 뒤죽박죽이 된 판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장의 하나였던 난전(亂廛)과 관련해서 착가하기 쉬운 오류이다. 즉 난전(亂廛)이란 정한 장날 외에 특별히 며칠간 터 놓은 장을 일컫는데, 시장에서 떠드는 판을 난장판(亂場板)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떠들기 때문에 원래의 난장(亂場)과 판(板)이 결합되어 같은 뜻으로 보게 되었다.
난장(亂場)의 유래에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타당하다. 문학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는 난전(亂廛)과 연계할 수도 있지만, 원래의 그 기원은 과거 시험장의 소음으로 봐야 할 것으로 본다. 역사 사전에 나와 있다.
난장판(亂場板)
여러 사람이 뒤석여서 떠들거나 뒤엉켜 뒤죽박죽이 된 상황을 일컬어 난장판(亂場板)이라 하는데 다음과 같은 3가지의 유래가 전하여 진다고 한다 .
첫째는 선비들이 시험을 치르는 과거 장에서 비롯 되었다는 설인데 다음과 같다. 옛날에 관리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오늘날 고등고시와도 같은 과거를 거쳐야 했는데 오직 출세의 길은 과거뿐이므로 과거를 볼 때가 과거 급제를 위해 수년동안 공부를 한 내노라하는 선비들이 전국 각지에서 시험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렇듯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 들고 보니 과거장은 질서가 없고 많은 사람들로 들끓어 정신이 없었다 이런 과거 시험장의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상황을 난장판(亂場板)이라 했다고 한다.
두번째는 시골의 5일장이 아닌 따로 열렸던 난장(亂場)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요즈음도 팔도시장이니 특산물 시장이니 하면서 기존 시장이 아닌 축제나 행사 같은데서 이벤트성 장이 서는것과 같이 시골 같은데 난장(亂場)을 트게 되면 전국 각지에서 장사꾼들과 놀이꾼들이 모여 들게 되는데 이러다 보니 사람도 많이 모이고 물건도 모이고 수많은 돈들도 유통 되다 보니 사기꾼도 소매치기도 들 끌어서 정신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난장판(亂場板)이라 했다고 한다.
세번째는 난전(亂廛)에서 왔다는 설이 있는데 난전(亂廛)이란 가게나 점포가 없이 시장바닥이나 길가에 물건을 놓고 파는것을 이르는데 가게가 아닌 길가에 물건을 내어 놓고 팔다 보니 어수선하고 사람들의 통행에 걸리적 거리고 질서가 잡히지 않아서 매우 복잡하고 시끄럽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을 난전(亂廛) 바닥 이라 했고 난전(亂廛) 바닥에서 난전판(亂廛板)이 되고 난장판(亂場板)으로 변했다고 한다.
난장(亂場)
시골에서 정한 장날 이외의 특별히 며칠간 터놓은 장, 한국의 장은 18세기 이후 농민의 농업 생산에 필요한 미곡, 농기구, 면화, 면포 등이 주요한 상품으로 등장하면서 발전하여, 19세기 초에는 전국적으로 1천여장이 설 정도로 크게 번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대개 5일 간격으로 열리는 5일장 체계가 일반화되었다. 이러한 5일장 외에도 특수지역 및 특수산물이 한꺼번에 많이 생산되는 지방에서는 난장이라는 부정기적인 장이 열리는 경우가 있었다. 이때 난장을 여는 것을 ‘난장을 튼다’라고 한다.
난장은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하루 동안만 열리는 정기적인 장과는 달리 때로는 물자가 생산되는, 또는 집하되는 기간에 따라 짧게는 10일, 길게는 2개월까지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우 외에도 마을의 흉액을 예방하려고 난장을 트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마을에 흉년, 물난리, 산사태, 화재, 호환(虎患), 돌림병 및 지방관의 죽음 등과 같은 흉액이 자주 일어나 마을이 폐촌될 위기에 처할 때 이를 예방하려고 난장을 튼다. 난장을 열어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면 그 기세로 마을의 흉액을 일으키는 나쁜 귀신을 물러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 밖에도 난장과 비슷한 형태로는 황해도 연평의 조기 파시(波市)와 같이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 시장인 파시, 처음에는 한 해에 봄,가을 두 차례씩 열렸으나 뒤에는 가을 한 차례만 열어 약재만을 다룬 약령시(藥令市)가 있다.
대규모 난장의 경우는 주로 예성강의 고량포, 남한강의 목계, 금강의 강경, 영산강의 영산포, 섬진강의 광양·하동, 낙동강의 초계밤말(草溪栗旨),안동 등의 포구에서 열렸는데, 쌀,보리,콩 등의 곡물이 주종을 이루었고 그 지방의 주요 특산물이 함께 거래되었다.
이러한 난장에는 거래 물량이 많은 만큼 각지에서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소비와 유흥적 낭비를 조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파렴치한 행위가 난무하는 폐해도 심하였다.
난장(亂場)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은 난장이었다. 18세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정조 24년(1800년) 3월에 왕세자 책봉을 기념하는 특별과거가 이틀 동안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렸는데 수험생이 무려 21만 5417명이었고, 답안지 제출자는 7만1498명이었다. 그렇다면 응시자의 2/3는 응시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시험은 수험번호에 따라 좌석이 지정돼 있지만 당시에는 먼저 앉으면 제자리였다. 시험문제를 내건 현제판(懸題板)이 잘 보이는 앞자리를 차지하는 게 유리했다.
응시생을 가장한 사람들이 시험장 밖에서 밤을 새우며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먼저 들어가려고 몸싸움을 벌였다. 밀고 당기고 싸우는 그야말로 '난리속의 과거시험장' 곧 '난장(亂場)'이 되고 만다. 숙종 12년 명륜당에서 실시된 과거시험장에 먼저 들어오려고 난리를 치다가 8명이 압사하는 사건도 있었다.
본래 난장은 시장이다. 공터에 벌린 일시적인 장터다. 난장은 지역의 특산물이 다량으로 생산되는 시기나, 마을이 새로 생겼을 때 연다. 혹은 흉년·질병·호환·폐촌위기 등 흉액이 발생했을 때 액땜으로 며칠 동안 장을 여는데 이를 '난장 튼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의 기(氣)로 여러 악귀를 꼼짝 못하게 눌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난장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약장수, 엿장수, 뱀장수, 야바위꾼 등이 요란했고, 건달패와 소매치기가 설치고, 투전판에서는 싸움소리가, 술집에는 작부들의 노랫소리가 교태롭다. 이런 탓에 '난장'이라고 하면 '여러 사람들이 뒤엉켜 함부로 떠들거나 덤벼 뒤죽박죽이 된 곳'을 뜻한다. 이 말이 다시 무절제·무질서의 의미를 가진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시장은 난장판이 되어야 볼거리도 많고 재미도 있고 장보는 맛도 나지만 과거장이나 정치판이 난장판이 된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난전(亂廛)
조선 후기 전안(廛案: 숙종 32년부터 실시한 제도로,시전에서 취급하는 물종과 상인의 주소, 성명을 등록한 행위자의 臺帳)에 등록되지 않거나, 허가된 상품 이외의 것을 몰래 파는 행위 또는 가게를 말한다.
조선 후기 상업 발전과 더불어 성장한 비시전계(非市廛系) 사상인(私商人)이 상행위를 하여 봉건적 상업 구조를 어지럽힌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국역(國役)을 부담하는 육의전(六矣廛)과 시전상인에게 그 보상으로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고, 이 규정을 어기고 마음대로 상행위를 하면 난전이라 하여 금지시켰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도시의 인구가 늘어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서울의 경우 시전상가 외에 남대문 밖의 칠패(七牌)와 동대문 근처의 이현(梨峴) 등에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고 거리마다 난전(亂廛)이 생겨 시전의 전매품을 매매하게 되었다. 또한 비교적 큰 자본을 가진 사상도고(私商都賈)가 서울 외곽의 송파,동작진,누원점,송우점 등에서,삼남,동북지방에서 올라온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 성안의 난전(亂廛) 상인에게 넘김으로써 난전(亂廛) 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이러한 난전(亂廛)의 주체는 주로 서울의 권세가와 그들의 가복(家僕),각 관아의 저리(邸吏), 호위청(扈衛廳) 산하의 군병(軍兵)과 각 영문의 수공업자, 서울과 개성의 부상(富商), 도고(都賈)나 중도아(中都兒) 등이었다. 이들은 대개 봉건 특권층과 결탁하여 관부에 일정한 사업세를 내고 자신의 상권을 확보함으로써 육의전과 같은 특권적 시전상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육의전을 비롯한 시전상인은 한때 정부로부터 난전을 금지하는 금난전권을 얻어 난전(亂廛)에 압박을 가하였지만, 18세기 후반 금난전권의 폐지로 사상인층에 의해 주도된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막을 수 없었다. 이처럼 난전(亂廛)의 발전은 조선 후기 성장한 비특권적인 수공업자와 상인에 의해 봉건적인 상업 구조가 허물어지던 도시상업 발전의 반영이었다.
장터의 문화사, 그리고 난장(亂場)
조선후기 장터의 의미
충주를 찾았을 때 장터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 노인은 부인이 새재 넘어 경상도 문경 출신이라 하였다. 백두대간을 넘어야 하는 곳이지만, 이전부터 장길을 통하여 왕래하는 일이 빈번한 까닭에, 아는 상인의 소개로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태안 해변가 사람들은 부산이나 여수 사람들과는 혼인하지만, 공주 사람과 맺어지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한다. 물산이 이동하던 뱃길을 통한 교류 때문이다.
조선후기 장시가 발달하면서 소위 시장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상품만이 아니라 사람의 인연도 그 경로를 따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장시와 포구가 있었다. 조선후기 상업이 발달하면서 거점이 되었던 장시는 도회지로 성장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상업도시인 셈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하천변 포구였다. 한강의 마포와 금강의 강경이 그러한 곳이었다. 이들 포구는 보통 큰 하천에서 바다 조수의 영향이 미치는 곳에 위치하였다. 그리고 밀물을 이용하여 거슬러 온 바닷배의 해산물을 내리고, 육지의 미곡을 실었다. 해산물은 다시 강배로 옮겨 실어서 상류로 운반하였다.
바닷배는 풍랑을 견디기 위하여 폭이 넓은데, 따라서 강을 거슬러 항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리고 강배는 폭이 좁은 대신에 바다의 풍랑을 만나면 전복의 위험이 있었다. 이런 때문에 바닷배와 강배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기록에는 물윗배(水上船)와 물 아랫배(水下船)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여각과 객주는 흔히 이러한 포구에서 물산의 중계를 담당하였고, 때로는 외국과의 교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중간 규모의 장시도 있었다. 지역 내 거점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예를 들면, 당진에는 기지시리(機池市里)라는 마을이 있다. 장시가 섰던 탓에 시(市)라는 글자가 붙었고,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에도 그대로 남았다. 한글로는 틀모시라고 한다. 틀모시장은 조선시대부터 12장이었다. 과거 정기시장을 오일장이라 한 것은 5일에 한 번 장이 섰기 때문인데, 드물게 5일에 두 번 장이 서는 곳이 있었다. 1달이면 열두 번 장이 섰으므로, 12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포구를 통하여 물산이 드나들었고, 다시 소상인들은 지역 거점이 되는 장시를 중심으로 주변 장터를 순회하였다. 백성들에게 익숙한 상인은 등짐으로 내륙 곳곳을 누볐던 부보상들이었다. 소몰이꾼은 마방에 묵으면서 여물을 먹인 후 새벽길을 이동하였고, 등짐장수들은 때로는 길가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였다. 농민들은 새벽에 나서서 장을 보고 나서 어스름에 집으로 돌아온다. 1960년대까지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조선후기 농민들은 이러한 장터를 통하여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였다. 장시가 사회적 교류의 장이었던 것이다. 인근 지역의 소식은 이웃 마을 사람으로부터 들었고, 원거리의 소식도 상인들을 통하여 어렵지 않게 전파되었다. 임진왜란 때 부보상들이 맹활약을 했고, 조선 말 정부에서 부보상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었던 것은 모두 상인들이 외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난장의 놀이판
장터의 상인들도 이벤트를 통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했다. 대목이 될 시기를 택하여 사람들을 모을 수 있는 마당을 벌였던 것이다. 특히 세벌 김매기, 만물을 끝낸 음력 7월 백중절은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는 일만 남은 시기였다. 주인들은 머슴에게 새 옷을 해주고 용돈도 두둑하게 주었다. 장터 상인들은 그 호주머니를 노렸다. 놀이패까지 불러 모아 난장판을 펼쳤으니, 이것이 곧 백중(난)장이었다. 백중장은 머슴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여 머슴장이라고 하기도 한다.
난장이 백중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장시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한강의 송파장에서는 정월 대보름을 시작으로, 초파일, 단오절, 백중절, 한가위 등 명절 때마다 놀이패들을 불러 모아 산대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49호) 판을 벌였다. 특히 백중절에는 7일 동안 놀이판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시대 경상우도에 속하는 합천의 율지, 의령의 신반, 진주, 산청, 마산, 충무, 고성, 창원의 진동, 남해의 가락, 거제, 사천의 가산 등지에 널리 분포하고 있는 오광대놀이 또한 큰 장시 또는 조창(漕倉)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오광대놀이는 동래의 들놀음(野遊)와 함께 초계 밤마리 장터[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통영 오광대는 정월 14일의 세시행사였다고 전하나, 뒤에는 3월 보름, 4월 초순의 봄놀이, 9월 단풍놀이 등에서 놀았다고 하고, 고성 오광대는 정월 대보름과 한가위에 판이 섰다고 하며, 동래 들놀음은 동래장터 사거리에서 수백 개의 등을 달고 놀았다고 한다. 이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6호와 7호, 그리고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기지시장의 이벤트로는 인근 농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하는 줄다리기가 있었다. 윤년이 드는 해마다 지름 1m 굵기의 거대한 줄을 제작하고, 인근 마을을 물 아래와 물 위로 나누어 줄을 당겼다. '줄다리기를 하는 난장'이라 하여 '줄 난장'이라고 했고, 과거에는 칠석 즈음 씨름 난장도 열렸다고 한다.
장터를 활성화하려는 목적의 행사였으므로, 이곳을 관할하던 예덕상무사 기지시 임소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다. "줄 난장 한번 하면 3년 먹을 게 나온다" 하였고, "난장이 서면 양조장 샘이 마른다." 할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벤트를 통하여 상인들은 막대한 이문을 남겼던 것이다.
장터의 민속은 조선후기 상업 발달을 주도했던 장시발달의 파급효과인 셈이다. 서천 남산장은 더 극적이다. 전통시대 시집을 간 여성은 친정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 보통은 시집살이 3년 만에 근친(覲親)을 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형편상 친정 나들이가 여의치 않았던 경우에는 친정과 시댁 중간지점에 경치가 좋은 곳을 택하여 모녀가 상봉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를 반보기라 하였는데, 이 용어가 생기면서 근친을 가서 친정에서 하루를 묵는 것을 온보기라고도 하였다.
서천에서는 추석이 지난 8월 17일에 서천장 자체를 남산으로 옮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인근 부녀자들이 모두 모여 보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시집간 여성들이 단순하게 친정 나들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인들에 의한 난장이라는 방식을 택하여 여성들의 축제를 개최했던 것이다.
서천에서 남산장을 열 때에는 '내세운다'는 표현을 쓰는데, 경기도 일원에서 백중장을 '백중 세운다'고 하는 표현과 맥이 통한다. 난장을 적극적으로 알린다는 뜻일 것이다. 상인들은 난장을 세워서 농민들을 불러 모으는 정도에 그치지 않았다. 홍성군 결성면 용호리 옛 용호장의 상인들은 조선 고종 때의 5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창룡을 초청하여 공연을 벌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농민들은 김창룡 명창에게 배운 가락으로 들일을 할 때에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충청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결성농요의 유래가 그러하다. 장터는 조선후기 이후 예능의 발전을 배태하는 요람이었던 셈이다.
장터의 쇠퇴, 그리고 무형문화재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에는 어머니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나, 장터에서 술 한 잔을 걸치고 팔자걸음으로 귀가하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이처럼 장터는 단조롭게 반복되는 생활에서 활력소가 되었던 곳이다. 특히 난장에서 펼쳐지는 놀이판은 농민들을 들뜨게 하는 힘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터의 놀이판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소박한 놀이보다 규모가 크고 화려해야 했다. 때로는 주변 농촌의 놀이를 통합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개항 후 다양한 예능 장르들이 소개되면서, 옛 장터의 민속들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판소리가 창극에 밀렸고, 놀이판은 서커스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하였다. 이 또한 장터가 유지되는 상황일 때의 모습일 뿐이다.
장터가 쇠퇴하고, 또한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공연문화가 자리를 잡으면서, 장터를 배경으로 했던 전통 공연문화는 과거의 추억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명맥이 끊어지는 상황에서, 1960년대 이후 무형문화재로 명맥을 유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최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일부 종목이 관광 상품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 亂(어지러울 란/난)은 ❶형성문자로 乨(란), 乱(란), 釠(란)은 통자(通字), 乱(란)은 간자(簡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새 을(乙=乚; 초목이 자라나는 모양)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란(실패에 감긴 실의 상하에 손을 대고 푸는 모양으로 일이 어지러움)으로 이루어졌다. 얽힌 것을 바로잡는 일로, 나중에 얽힌다는 뜻으로 쓰였다. ❷회의문자로 亂자는 '어지럽다'나 '손상시키다'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亂자는 실타래를 손으로 풀고 있는 모습과 乙(새 을)자가 결합한 것이다. (난)자는 엉킨 실타래를 손으로 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금문까지만 하더라도 '어지럽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는 여기에 乙자가 더해지면서 도구를 이용해 실타래를 푸는 모습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亂(란)은 ①어지럽다 ②어지럽히다, 손상시키다 ③다스리다 ④음란하다, 간음하다 ⑤무도하다, 포악하다 ⑥물을 건너다 ⑦가득 차다, 널리 퍼지다 ⑧난리(亂離), 반란(叛亂) ⑨위해(危害), 재앙(災殃) ⑩음행(淫行), 음란(淫亂)한 행위 ⑪버릇없는 행동 ⑫풍류(風流), 악장(樂章) ⑬요지(要旨) ⑭함부로, 마구잡이로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스릴 치(治), 다스릴 리(理)이다. 용례로는 전쟁이나 재해 등으로 세상이 소란하고 질서가 어지러워진 상태를 난리(亂離), 어지럽게 마구 추는 춤을 난무(亂舞), 총이나 활 따위를 함부로 쏘는 것을 난사(亂射), 이리저리 흩어져서 질서나 체계가 서지 않는 일을 난맥(亂脈), 질서없이 여기 저기서 마구 나서는 것을 난립(亂立), 몹시 거칠고 사나움을 난폭(亂暴), 어지러운 판국을 난국(亂局), 어지럽게 함부로 들어가는 것을 난입(亂入), 공기나 물의 불규칙한 흐름을 난류(亂流), 사물이 얽히고 뒤섞여 어지럽고 수선스러움을 난잡(亂雜), 질서를 어지럽히며 마구 행동하는 것 또는 그런 행동을 난동(亂動), 조화나 정상을 잃은 흐트러진 상태를 난조(亂調), 마구 때림을 난타(亂打), 어지러워 살기가 힘든 세상을 난세(亂世), 세상이 어지러운 때를 난시(亂時), 양편이 서로 뒤섞여서 어지럽게 싸움을 난투(亂鬪), 갈피를 잡을 수 없이 어지러움을 혼란(混亂), 시끄럽고 어지러움을 요란(搖亂), 뒤흔들어서 어지럽게 함을 교란(攪亂), 음탕하고 난잡함을 음란(淫亂), 야단스럽고 시끄러움을 소란(騷亂), 도덕이나 질서나 규칙 등이 어지러움을 문란(紊亂), 크게 어지러움이나 큰 난리를 대란(大亂), 마음이 어둡고 어지러움을 혼란(昏亂), 어수선하고 떠들썩함을 분란(紛亂), 왜인이 일으킨 난리를 왜란(倭亂), 사변으로 일어난 소란을 변란(變亂), 나라 안에서 정권을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는 난리나 반란을 내란(內亂),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 또는 불충한 무리를 일컫는 말을 난신적자(亂臣賊子), 한 오라기의 실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뜻으로 질서나 체계 따위가 잘 잡혀 있어서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일사불란(一絲不亂), 같은 패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일컫는 말을 자중지란(自中之亂), 헝클어진 삼을 잘 드는 칼로 자른다는 뜻으로 복잡하게 얽힌 사물이나 비꼬인 문제들을 솜씨 있고 바르게 처리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쾌도난마(快刀亂麻), 마음이 번거롭고 뜻이 어지럽다는 뜻으로 의지가 뒤흔들려 마음이 안정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심번의란(心煩意亂) 등에 쓰인다.
▶️ 場(마당 장)은 ❶형성문자로 埸(장)은 통자(通字), 场(장)은 간자(簡字), 塲(장)은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昜(양, 장)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昜(양, 장)은 해가 솟아오르다, 오르다, 밝다, 흙을 쌓아 높이고 위를 평평하게 하여 신을 모시는 곳으로 제단(祭壇), 나중에 그러한 넓은 마당, 장소의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場자는 ‘마당’이나 ‘구획’, ‘장소’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場자는 土(흙 토)자와 昜(볕 양)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昜자는 햇볕이 제단을 비추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볕’이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햇볕이 내리쬐는 모습을 그린 昜자에 土자가 결합한 場자는 넓은 마당에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場(장)은 (1)장소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 (2)많은 사람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팔고 사는 곳. 지방에 따라 다르나 일반적으로 한 달에 여섯 번섬. 시장 (3)장날 (4)막보다 작은 연극 진행의 한 부분 어떤 한 막중 무대 정경(情景)의 변화가 없이 한 장면. 장면으로 구분한 부분 또는 이것을 세는 단위로도 쓰임 (5)물리학에서의 기초 개념의 하나. 고립된 물질이 공간에서 어떤 힘을 받았을 때, 공간 자신이 그와 같은 힘을 작용시키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지게 하는 것과 같은 공간 힘의 성질에 의하여 중력장(重力場), 전장(電場), 자장(磁場), 핵력장(核力場) 등으로 불림 (6)발생 초기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기관의 형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도입된 개념. 기관의 재생에 관해서도 이 개념이 쓰임 (7)정신 현상이나 사회 현상이 생기는 전체 구조나 또는 상황을 상호작용의 관점에서 이르는 말. 물리학에서의 장의 개념을 도입한 것임 (8)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마당 ②구획(區劃) ③때(시기), 경우 ④곳, 장소 ⑤밭, 논밭 ⑥들판, 일구지 않은 땅 ⑦무대(舞臺) ⑧시장, 장터 ⑨시험장(試驗場) ⑩신을 모신 곳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어떤 일이 이루어지거나 일어나는 곳을 장소(場所), 어떠한 장소의 겉으로 드러난 면 또는 그 광경을 장면(場面), 어떠한 처소의 바깥을 장외(場外), 어떠한 처소의 안을 장내(場內), 그 장면의 광경을 장경(場景), 시장의 시세를 장세(場勢), 도회지에 날마다 서는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을 시장(市場), 처하여 있는 사정이나 형편을 입장(立場), 무슨 일에 어떠한 사람이 나타남을 등장(登場), 많은 노동자를 써서 물건을 만들거나 가공이나 생산에 종사하는 시설을 공장(工場), 일이 생긴 그 마당을 현장(現場), 지금 바로 이 자리 또는 닥쳐 있는 현재를 당장(當場), 너른 마당이나 너른 빈터를 광장(廣場), 장내나 무대 등에서 물러남을 퇴장(退場), 물건을 파는 곳을 매장(賣場), 장내로 들어감을 입장(入場), 장면이 갈리어 바뀜을 장면전환(場面轉換), 과거 보는 자리에서의 득과 실이라는 장중득실(場中得失)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