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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전략적 의미와 사례
10. 전략적 의미
그런 거 없다.
전략적 의미에서 보자면 대본영을 위시한 군인/관료/재벌들의 체면과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더 유지해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자살공격이었을 뿐이다. 다른 방송도 아닌 NHK 특집 다큐멘터리에서도 지적한 내용이다. 전략적 의미고 뭐고 일본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사실상 해군 전력이 궤멸당해버렸기 때문에 제정신이 박혀있었다면 이 시점에서 미국에게 항복선언을 하는 것이 조금이나마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할 수 있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미 악밖에 남지 않은 일본 군부 눈에는 그런게 보일 리가 없었다.
카미카제로 뻗댄 자들은 외교관 등 그나마 제정신 박힌 사람들이 "이제 다 끝났으니 인정하고 항복하자"고 했을 때도 "1억을 다 죽여서라도 항복할 수는 없다"며 자존심을 세우는 시늉만 하다가 핵 맞고 덴노가 GG 치자 바로 닥치고 버로우해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즉 일본 군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아니라 덴노를 명분으로 삼아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국민을 이용했던 집단이었을 뿐이다.
결국 '카미카제'란 일본 군부의, 일본 군부에 의한, 일본 군부를 위한, 일본 군인들에 대한 대학살 명령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사람을 죽인 이 연쇄살인마들이 알량한 자기 목숨을 가지고 할복을 하거나, 간에 씨알도 안 먹힐 도게자라도 한 책임자들은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은 종전 후에도 잘 먹고 잘살고 출세도 했으며, 지금도 카미카제로 죽인 부하들 팔아먹으면서 극우 행세로 잘 살고 있다. 실제로 정치계에 진출하거나, 책을 써서 잘 먹고 잘사는 놈들도 많다.
1945년 일본의 상황은 누가 보아도 닥치고 항복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완전히 사라졌다면, 그리고 상대국이 자국의 완전한 파멸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조국을 재건하기 위한 젊은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야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의무이다. 더구나 자동차 운전면허 소유자도 그리 많지 않았던 일본에서 '미숙하게나마 비행기 조종이 가능한' 젊은이가 지니는 의미는 상상 외로 큰 것이다. 군사전략 이전에 정치전략적으로 도저히 정식 편제가 되어서는 안 되었던 선택지가 카미카제였다.
심지어 이때 징집된 파일럿 대다수는 대학교 재학생, 졸업생 등 고등 교육을 받은 인재들이었다. 1960~70년대 우리나라만 해도 대학교 나오면 출세가 보장되고 엘리트로 인정을 받았는데 1930~40년대면 오죽하겠는가? 그땐 대학도 얼마 없었다. 그나마 미국이 일본을 항복시키려고만 했을 뿐 일본인 자체를 멸종시키려 들지는 않았고, 결정적으로 무지막지한 미국의 자본이 일본에 흘러들어가게 된 원인인 한국 전쟁이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이런 막장짓 한 번에 일본이라는 나라의 재건이 영영 불가능했을 수도 있다. 한 예로 위에 언급된 오가와 소위와 도미야스 중위는 둘 다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출신이다. 이런 인재들을 인간폭탄으로 쓰지않았다면 전후 부흥기에 얼마나 사회에 도움이 되었을까 생각해보자.
만일 일본이 원폭을 맞고도 항복을 하지 않고 끝까지 1억 총옥쇄를 계속해서 주장했다면, 연합군측은 일본 본토를 향해 총공격을 하는 계획인 몰락 작전을 진행했을 것이고, 그렇게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맞이했을 것이며, 모 제독의 말마따나 일본어는 저승에서나 들어볼 수 있는 언어가 되었을 것이다.
결론을 서술하자면 전략적인건 하나도 없다. 있다고 가정해도 '기득권을 잠깐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자국군 병사를 그리고 자국 자체를 희생시킨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0.1.1. 최악의 전술
소모전으로 그로기 상태가 된 일본군 입장에서 카미카제는 통상공격보다 명중률이 조금 높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윤리적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군국주의자들의 기득권을 연장시킨다는 목적에서도 카미카제는 최선이 될 수 없었다.
폭격기무적론이 내세운 주장과는 달리 항공기에 의한 공격은 전투기의 호위 및 제공권 확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적 전투기에 매우 취약하며 이는 영국 본토 항공전 등 수많은 실전에서 검증되는 바,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요약문는 대전기 일본 해군의 항공운용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다. 육군은 중일전쟁과 42년 남태평양에서의 항공 소모전을 겪으면서 폭격기의 높은 소모율과 능력의 한계를 실감한 후 전투기 중점 체제를 비교적 이른 시기에 확립하게 된다. 43년 9월부터 육군은 지상군을 줄여서라도 항공 전력 확충에 집중하며 폭격/공격기보다 탑승원 육성 및 생산이 용이하고 전장 상공의 항공 우세를 획득할 수 있는 전투기에 중점을 두기로 결정하고, 일명 '전투기 초중점주의' 에 입각한 신규 교범을 작성, 전투기:폭격기:습격기:정찰기:수송기의 비중을 56.4 : 8.4 : 7.7 : 12.8 : 15.4로 맞출 것을 계획한다.
그렇다고 육군이 카미카제나 특별공격대를 안 쓴 건 아니지만, 단순히 탁상 위의 계획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육군에서는 전투기를 중시한 전력 개편이 이루어져 대전기간 중 육군이 생산한 전투기는 13,700기, 그중 43년 이후의 신형기가 6,800기, 2000마력급 고성능기가 3,500기였다.
반면 해군은 43년 8월까지 벌어진 남태평양의 항공 소모전을 겪고도 체질개선에 실패해, 해군의 총 전투기 생산량은 12,300기로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것 같지만 그중 1만기 이상이 대전 초반 티어 전투기인 A6M 제로센이었고, 43년 이후의 신형기 및 2000마력급 고성능기는 1,900기에 불과했다.
신형기의 개발역량 면에서도 육군이 신규 채용한 공격기는 4식 중폭 Ki-67 히류(600여기 생산)에 그치고 반대로 1식전 Ki-43 하야부사 이후 거의 매년 신형 전투기를 개발해 채용했으며 말기에 등장한 5식전 Ki-100을 제외하면 하야부사, 라이덴과 동급의 요격기인 2식단전 Ki-44 쇼키, 3식전 Ki-61 히엔, 4식전 하야테가 모두 1천기 이상 양산된 반면 해군의 공격기는 원샷 라이터로 악명높은 G4M 일식육공을 비롯해 개전 후 신규개발된 모델도 B6N 텐잔, D4Y 스이세이, B7A 류세이, P1Y 긴가 등 다양하며 생산량 면에서도 1식육공 2,200기, 스이세이, 텐잔, 긴가가 각 1천기 이상으로 전투기에 쓰기도 모자라는 고성능 엔진을 대전 후반기까지도 공격 전력에 상당량 할애했다.
실제로 해군이 전투기의 비중을 공격기/폭격기보다 우선한 것은 1945년 들어서의 일로, 44년 2월 제1함대(일본군)의 해대와 함께 뒤늦게 거함거포주의를 포기하는 것보다도 더 늦게까지 함대결전사상과 폭격기무적론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 실상이다.
물론 개념이나마 파악하고 있었던 육군 역시 미국을 상대로는 방공전이나 항공대치전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는 없었던 것이지만, 그런 육군보다도 항공전에 대한 개념이 후진적이었던 해군이 가지고 있는 얄량한 공격 전력으로는 결국 카미카제가 고작이었던 것. 그 카미카제조차도 주력 전투함으로 방비가 가장 튼튼한 정규항공모함이 최우선 목표였고 알프레드 새이어 머핸의 해양전략사상을 수박 겉핥기로 흡수해 러일전쟁 이후 해체 순간까지도 통상파괴는 뒷전으로 밀어두고 적 전투함 격파만 우선하는 함대결전사상에 매달린 나머지 효율은 한없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함대결전사상에 종지부를 찍은 것 역시 일본군 자신들이었다는 게 함정. 이에 대해서는 진주만 공습 문서를 참고하자.
10.2. 미국
카미카제는 전략적 의미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미군은 1945년 7월 30일에 작성한 '일본의 비밀무기:자살'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일본군이 '죽으면 야스쿠니 신사에 간다'며 자살공격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덕분에 일본인의 완전 소멸 또는 국가존속이 위협받아야 일본이 항복한다고 결론내렸다. 그래서 미국의 높으신 분들은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기로 결정했다.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참조할 것. 역설적이게도 이들의 무차별 공습을 막아낼 에이스와 신병기들은 바로 군부가 다 바다에 묻어버렸다.
결국 카미카제는 일본 군부가 일본 국민들과 군인들의 죽음을 앞세운 자해공갈이었고, 당시 이러한 비인도적인 카미카제 전략에 미국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는 연합국과 미국 측에서 도쿄 대공습과 원폭 투하에 대한 반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사실 당시는 원자폭탄을 그냥 '좀 쎈 신형폭탄' 정도로 인식했으니 굳이 카미카제에 대해 몰랐더라도 별로 거리낄 것이 없었다.
11. 기타
•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지명되어서 출격했다고 다 죽은 건 아니라서 간혹 생환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시기를 놓쳤거나 기계 고장, 컨디션 불량, 기후 불량 등으로 출격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간혹 목표를 못 찾아 그냥 돌아온 경우도 있었으나 미쳐 돌아가는 상부는 맨발의 겐 1권에서 나온 것처럼 이들을 갈군 뒤 다시 출격시켰다. 때문에 9번에 걸쳐 출격했으나 적을 찾지 못해 돌아온 특공대원이 있었다. 결국 그는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그는 와세다대학 졸업생이라고. 이쯤 되면 자국민을 갈아마신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위에 여러 번 서술되었듯이, 초등학교만 의무교육이던 당시에, 대학교까지 졸업한 사람이라면 나라의 미래를 짊어질 큰 인재인데, 이런 인재를 일회성 자살 공격에 몰아넣은 것이다.
• 이에 관련된 도시전설에 가까운(?) <고추잠자리>라는 전후 반전동화도 있다. 한 카미카제 파일럿은 적을 향해 날아가다가 우연히 계기판 안에 자리잡은 벌레를 보았고 찰나 생명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어서 자신과 벌레가 살기 위해서 원래 적기까지 갈 정도로 넣은 얼마 안 되는 연료를 적기가 아닌 무인도로 향해 돌려서 무인도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카미카제 파일럿의 이야기도 있고 한다.
• 특공대원으로 생환한 이들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니시무라 코우(탤런트), 내각 관방장관 겸 외무대신과 후생성 장관을 역임한 소노다, 항공자위대 교관 및 전일본공수 기장으로 반전단체 대표인 시다 등이 있으며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사람 중에는 <천하제일회>의 우치무라 켄이치, 특공대원으로 자신을 포장한 범죄자로는 <3억엔 보험금 살인사건>의 아라키 호미, 츠루타 코지 등이 있다.
• 1944년 10월 12일~15일에 대만 앞바다에 미 제3함대가 나타나자 역시 카미카제 공격을 시행했고 제26항공전대 사령관 아리바 소장이 직접 카미카제 대원이 되어 전사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게 아래에 나오는 명언으로 유명한 대만 항공전이다. 그런데 이 전투 결과 일본은 카미카제 공격=격침으로 여겨버려 '항모 11척 격침, 8척 대파'라고 선전해 일본 국민들을 잠깐 환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 소식을 윌리엄 홀시 제독은 코웃음을 치며
"도쿄 로즈가 전멸했다고 하는 제3함대는 현재 해저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을 향해 급속 퇴각 중"
라는 유명한 전문을 보내기도 했다. 실제로 미군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
• 기쿠스이 작전 등 카미카제 공격을 일선에서 총지휘했던 우가키 마토메 제독도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의 소식을 듣자 몇 명의 부하를 이끌고 카미카제 공격에 나섰고 당연히 사망했다. 이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해서 카미카제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책임자' 중 '진짜로 최대한 책임을 진'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 같지만은 사실은 부하 조종사에게 그 자살 폭격기를 조종하게 했고 자기는 그 뒷좌석에 타서 자살 돌격했다(...). 이 때문에 그 부하 조종사의 유가족은 물론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 등에게 "정말 책임을 지고 싶었다면 혼자 가서 뒈질 것이지 왜 죄 없는 부하들을 끌고 갔냐?" 면서 대차게 까였다.
• 아무래도 폭탄이나 어뢰 자체로도 위험한데 거대한 항공기까지 딸려 오는 셈이다보니, 오늘날 아무리 비효율적이네 발악이네 욕해봐야 공격당하는 미군 함선 입장에서는 매우 위협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미군의 대공포로 출중한 성능을 가진 40mm 보포스 대공기총이 유명하지만 항공기 자체를 박살내는 데에는 위력의 한계가 있다보니 대전기 말에는 카미카제 공격에 대비해 무려 76mm 대공포를 장착한 디모인급 중순양함이 건조되었다. 그러나 세계대전이 곧 끝나버렸기 때문에 정작 카미카제에 대항해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 조선인도 카미카제기에 태웠다고 한다. 귀촉도, 화사 등 1940년대 시인 중 한 명인 서정주는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 라는 필명으로 '매일신보' 에 '오장 마쓰이 송가(松井五長 訟歌)' 라는 시를 발표하여 레이테 만 해전 배경의 전시선전 및 카미카제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병크를 터뜨렸다. 김재규도 여기에 끌려갔다 살아나왔다고 한다.
•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는 카미카제 특공대원들을 훈련시킨 이와키 비행장이 있던 곳에 세워졌음이 밝혀졌다. 이와키 비행장 기념비가 방사능 오염수 탱크 옆에 세워져 있다고.
•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카미카제의 희생양은 소련군의 소해정이던 kt-152이다. 시무슈 섬을 공격하는 소련군에게 8월 18일에 일본군 전투기 혹은 공격기가 카미카제를 하여 비행기와 정면충돌한 소련군 소해정은 즉시 침몰당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8일, 필리핀 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급유중이던 미 태평양 함대 제3함대가 세력이 비교적 약한 열대성 저기압으로 잘못 예측한 태풍 '코브라'의 직격을 받았다. 실제론 당시 코브라의 최저 기압은 최소 907hpa(...)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국에서 최악의 피해를 입힌 사라의 최저 기압이 최저 908.1 hpa, 한반도 상륙 당시 945hpa 수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태풍이다.
당시 레이더로 촬영한 코브라의 영상. 윗부분의 동그란 점처럼 생긴 부분이 태풍의 눈이다.
이로 인해 홀시의 3함대는 함대의 구축함 3척 침몰, 전함, 순양함, 구축함, 항공모함, 기타 함선 등 26척이 손상을 입고 그 중에서 9척이 심한 손상이었으며 항공모함들의 함재기 146여 기 손실, 약 790명의 사상자를 낸 후에 예정되었던 필리핀 작전 항공지원 계획을 중단하고 전열에서 이탈해야 했다. 게다가 이건 홀시 제독이 기상예보를 생까고 위치를 고수하다가 입은 피해라서 레이테 만 해전 때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한테 낚인 것과 더불어 더 까였다.
항공기 146기와 구축함 3척의 손실에 대형함들 역시 크고 작은 손상을 입은 이 피해는 웬만해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마지막 카미카제라 불러줄 법 하겠으나 상대는 바로 미국.
구축함 3척과 함재기 146기는 본국에서 몇 주면 찍어내는 물자에 불과했다. 물론 이로 인해 태풍 정보의 수집과 대응이 해군의 중요한 숙제가 되었고 이것이 현대 태풍예보체계 구축의 중요한 토대 중 일부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때 죽을 뻔한 인물 중 한 명이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제럴드 포드. 당시 포드는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는데 풍랑과 싸우다 떠내려갈 뻔하고 타고 있던 선박에 화재까지 나는 등 크게 고생했단다.
그리고 1945년,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때와 같은 카미카제가 일어날 뻔 하기도 했다. 종전식이 끝난 10월에 오키나와 동부에 정박한 미 해군 선단을 태풍이 덮쳐서 꽤 피해가 났는데 문제는 이 정박지는 일본 본토로의 침공이 시작될 경우 규슈 침공 부대가 머무를 정박지라는 것이다. 만약 계획대로 상륙이 이루어졌다면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큐슈 침공에 대해서는 몰락 작전 문서 참고.
11.2. 미화
이게 얼마나 수치스럽고 미친 짓거리인지 파악이 안되는 일본 극우들 사이에서 카미카제를 미화하는 사례가 다수 있다. 물론 전쟁 직후에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였기 때문에 이 일을 미화시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나고 반 세기 이상이 지난 지금은 극우 젊은층을 중심으로 카미카제를 미화하는 사례가 다수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무서명 형식으로 '카미카제에 지원하겠냐'라는 질문란에 모두 "아니오"를 선택하였다. 즉 본인들부터가 하지 않을 것을 남들도 하라고 미화하는 형식이다.
대부분의 클리셰는 나라를 위해 자신 한 몸 바쳐서 일본을 구한 구국영웅 식. 물론 위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카미카제 폭격기에 탑승해야 했으며, 어찌어찌 생환해서 돌아오면 사형을 시키는 케이스도 있을 정도로 당시 일본군 수뇌부들은 인간이 아니였다.
결국 조종사들은 국가의 강압적인 명령과 묵인, 압박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며, 이를 묵인하고 방조한 일본 제국과 이런 결정을 내린 당시 일본군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즉, 이들이 카미카제를 미화하는것은 살인자를 옹호하기 위해 그 피해자의 명예를 들먹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2014년에는 아예 이 카미카제 또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신청을 올렸다. 일본의 지자체인 가고시마 현에서 카미카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로 등재하려 시도했으나, 유네스코 일본 위원회에서 부결시켰다. 사유는 '일본 관점으로 기술된 기록밖에 없어서 자료의 편중이 심해 형평성에 어긋난다' 였다. 이 일을 추진한 가고시마는 2년 뒤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일본 극우들의 '미화'와는 달리 출격 전 카미카제 대원들의 실제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고 한다. 처참한 출격 전야... 그들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이쯤되면 극우들의 미화는 이들을 칭송하는게 아니라 고인드립하는거라고 봐야 할 지경
11.3. 미화에 대한 일본 내부의 반발
일본 극우파들의 미화와는 별개로 일본내에서도 당연히 '카미카제 미화'에 대한 비난과 비판적인 의견들 또한 상당수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본 보수일간지인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전 회장겸 주필은 일본의 우익들이 가미카제 특공대를 ‘천황을 위한 자발적인 순교자’로 미화하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천왕폐하 만세'를 외치며 용기있게, 기쁘게 떠났다는 것은 전부 거짓말"이라고 분개하며, "그들은 마치 도살장의 양들과 같았고,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비틀거리며 걸어갔다"고 회고한 뒤 "어떤 사람들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해서 기간병들에 의해 실려서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고 증언했었다. 와타나베 회장은 실제로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등병으로 입대했었던 인물이다. 요미우리 신문 회장 "무식한 고이즈미, 역사도 철학도 몰라" "무식한 고이즈미 공부도 하지않아"
거기다 생존해 있는 가미카제 대원들 또한 이같은 미화에 대해 “미친 짓”이라며 우려를 표명했다. 가미카제에 배치됐다 일제가 항복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칸베 유타카(89)씨는 "가미카제를 미화하려는 생각을 절대 지지할 수 없다. 그건 미친 짓"이라며 아베 정부의 우경화와 일본 젊은 세대들의 전쟁에 대한 무감각을 우려하며, “가미카제로 허망하게 죽어간 친구들을 평생 애도하며 살았다. 그렇게 친구들이 죽도록 내버려둔 것에 대해 후회하고 고통받고 있다"면서 "가미카제는 절대 미화해서는 안되며 다시 일어나서도 안된다"고 말했다.
'앵화(벚꽃)'라는 암호명이 붙은 가미카제 분대에 속했던 전직 파일럿 아사노 아키노리(85)씨도 "우리가 왜 그런 명령에 따랐고 왜 죽어야 했는지 묻는 건 말이 안되는 일이다. 당시에 ‘나는 가미카제를 하지 않겠다’고 말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가미카제는 대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일제가 사실상 반강제적으로 운영했다고 비판한 셈이다. 아사노씨는 이어 “가미카제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다”면서 “일본 젊은이들이 그 비극과 공포를 실질적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고도 말했다. 가미카제 미화한 영화 '영원의 제로' 열풍에 생존자들 "미화해선 안돼" 경고
11.4. 일본 제국의 전쟁범죄
- (버밀리온 성역 회전 직후,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은하제국 재상과의 회담에서)
라인하르트: "(...)그런 자네는 어떤가? 싫어하는 이가 없는가?"
양 웬리: "제가 가장 싫어하는 이들은, 자기들만 안전한 곳에 숨어 전쟁을 찬미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타인을 전장으로 내몰아놓고서는 후방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그런 인간들과 한 깃발 아래 같이 선다는 것은 정말 역겨운 일이지요."
- (하이네센 사문회에서, 부패 정치가들이 전쟁을 찬양하자)
양 웬리: "그렇지요. 전쟁으로 친지들을 잃은 적이 없는 이들은 그리 믿을지도 모르지요. 전쟁을 이용하여, 타인의 희생을 기반으로 자신의 이익을 불리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신에겐 있지도 않은 애국심을 내세워, 남을 기만하는 이들에게도 전쟁이란 아름다운 것일 겁니다."
엔리케 올리베이라: "귀관은 지금 우리들의 조국애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양 웬리: "그렇게 조국의 방위와 국가의 존립을 위해 남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남에게 명령하기 이전에 스스로 전선에서 모범을 보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인류에 있어서 가장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입니까? 권력을 가진 이, 권력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 본인들은 안전한 곳에서 호의호식하며 타인들에게 애국심이나 희생정신을 강요하여 전장으로 밀어넣는 바로 그런 것 아닙니까? 우주의 평화를 원한다면, 은하제국과 전쟁을 계속하기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악질적인 기생충들부터 제거해야 합니다."
네그로폰테: "귀관은 지금 우리가 그 기생충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양 웬리: "이해가 빠르시군요."
- 다나카 요시키의 SF 소설 은하영웅전설의 등장인물인 양 웬리 자유행성동맹군 원수의 말. 참군인으로써의 면모가 잘 드러난다. 놀랍게도 일본 군부는 양 웬리의 지적에 하나도 어긋나지 않아 자기들만 안전한 곳에 숨어 전쟁을 찬미하고 애국심을 고취하며 타인을 전장으로 내몰고서는 후방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는 자들이며 스스로는 전선에서 모범을 보이지 않고 권력을 가지고 싶고 가졌으면서 자기들은 안전한 곳에서 호의호식을 누리고 타인들에겐 애국심,희생정신을 강요하는 '악질적인 기생충'이었다.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죽인 1차적인 살인자는 먼저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이다. 카미카제가 나쁜 연유도 그것의 본질이 '행정살인'이며, 살인의 주체가 다름 아닌 일본 제국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문단에 있는 일본 제국을 옹호하는 관점으로 서술된 기록밖에 없는 카미카제 조종사들의 유서가 기각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일본 극우들이 자신들의 아집으로 희생시킨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현대 정치공세에 써먹는 것을 비판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카미카제 = 전체주의자들의 기득권을 하루라도 더 연명하기 위한 인간 폭탄이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 군부의 실세들은 국민들이 얼마나 죽든지 상관없이, 군국주의 체제에서의 권세와 식민지의 자원을 지키고 싶었고 카미카제 조종사들은 군부 기득권층의 충실한 자살방패가 되었다. 나아가 일본 극우파들은 도리어 군국주의를 까는 인사들을 카미카제 조종사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조롱한다. 애초에 대체 누가 무엇을 위해서 그 많은 인명을 방패로 삼았는데?
카미카제를 미화한 영화가 공개되었을 때 일본인 기자가 중국인 기자에게 "카미카제로 조국을 지킨 일본 청년들이 자랑스럽다" 라고 하자 중국인 기자가 "카미카제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고 하는데 애초에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일어나지도 않을 비극이었다. 오히려 일본이 일으킨 침략전쟁으로 인해 희생된 연합군 청년들에게는 미안하지 않느냐?"라고 답했고, 그러자 그 일본 기자기레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11.5. 잘못된 정보
카미카제에 대해서 잘못된 정보도 여럿 있다.
주된 이유는 일본 정부와 극우주의자들은 카미카제의 희생자들에 대해 애국자로 포장을 하면서도 카미카제가 어떻게 운용됐는지 세부사항들과 절차들에 대한 구체적인 증언이나 기록등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
11.5.1. 비행기가 목적지까지 딱 갈 수 있을만한 연료만 준다?
결론부터 말하면, 카미카제 특공기에는 연료를 만땅으로 채워서 보냈다. 반만 넣고 그런 거 없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목표를 확실히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미 언급되었지만 카미카제 파일럿들은 대다수가 초급훈련만 간신히 마친 풋내기 파일럿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바다 위에서 목표를 찾아 날아가는 해상 항법에 대단히 서툴렀고, 툭하면 바다 위에서 헤매기 일쑤였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 베테랑들은 카미카제 작전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이 호위기로서 이 풋내기들을 이끌도록 되어 있었지만, 전쟁터의 운이라는 것이 있는 게 사실이니 계획대로 날아간 지점에서 적과 마주하지 못할 가능성도 높았다. 당연히 연료를 넉넉하게 넣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연료를 절반 가까이 소모하고도 미국 함대를 찾지 못하면? 돌아온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처 없이 헤매다 바다 위에서 연료가 떨어지면 기껏 결심한 자폭도 하지 못하고 값없이 죽게 될 뿐이니까. 때문에 목표를 찾지 못하고 연료가 떨어지면 다시 기지로 돌아와야 한다. 물론 죽으러 나가서 살아 돌아온 비겁한 놈 취급은 받겠지만, 적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자폭하지 못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처벌받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다음에 다시 출격할 뿐이다. 물론 그 창피를 당하느니 돌아가지 않겠다고 연료가 떨어질 때까지 바다를 헤매다가 추락하거나 운 좋게 미군을 만나 돌입한 비행기들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2.연료 자체가 폭발의 위력을 증대시킨다. 포클랜드 전쟁 때 영국 구축함 셰필드 호를 타격한 엑조세 미사일의 경우, 미사일의 탄두는 폭발하지 않았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발사된 탓에 아직 많이 남아 있던 미사일의 로켓 연료가 대화재를 일으켰다. 때문에 셰필드는 결국 화재로 침몰하고 말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의 항공기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의 제트기들은 비교적 인화점이 높은 등유를 쓰지만 당시에는 가솔린을 사용했고, 아직 탱크에 가솔린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군함에 격돌하면 빈 비행기로 들이받는 것보다 상대편 배에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이만하면 출격하는 특공기에 연료를 가득 채울 이유는 충분하지 않은가?
11.5.2. 조종사가 타고 나면 승강구에 못질을 한다(혹은 용접한다)?
위에서 이야기했듯, 조종사가 목표를 찾지 못하고 돌아오거나 비행기의 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금방 돌아오는 경우는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될 경우 조종사를 내리게 하고 비행기를 다시 정비해야 하는데 조종석을 못이나 용접으로 봉인해 버리면 심히 곤란하다. 아예 출격하지 못하거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온 조종사는 일단 쉬게 하고 다음날 다시 태워서 보내면 된다. 컨디션이 좋아야 조종도 잘 한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말기 때 이등병으로 입대한 와타나베 전 요미우리 신문 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카미카제 조종사들이 제대로 서있지도 못해서 기간병들에 의해 강제로 비행기 안으로 밀어넣어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컨디션이 좋지 않아도 반강제적으로 출격을 명령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카미카제 특공대가 목표를 찾지 못할 경우 귀환하는 것을 전제로 삼고 있었다는 것은 적 함대를 발견할 때까지는 탑재한 폭탄의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만약 안전장치가 풀려 있으면 활주로에 착륙할 때 비행기가 폭발할 위험이 있고 비행중에는 안전장치를 다시 걸 수 없었기 때문에, 아직 적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절대 안전장치를 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랬더니 초짜 파일럿들이 적을 발견하고도 안전장치 푸는 걸 잊어버리는 바람에 기껏 자기 비행기를 미군 군함에 명중시키고도 폭탄이 터지지 않아 큰 피해를 주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거다. 당한 미군 쪽에서는 땡 잡은 거지만.
이건 카이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카이텐은 정말 말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 병기로, 항공대의 카미카제 특공대처럼 목표를 찾지 못해서 돌아오는 경우를 아예 상정하지 않았다. 카미카제가 원거리에서 비행기로 출격, 적을 탐색하여 그 결과에 따라 공격하거나 귀환하는데 반해 카이텐은 잠수함 상갑판에 적재, 잠수함의 잠망경으로 적함의 존재를 육안으로 확실히 인식한 뒤에야 출격했다. 일단 표적을 찾아야 하는 카미카제와 달리 뻔히 눈에 보이는 적을 상대로 하니, 돌아올 이유가 없다.
문제는 카이텐이 기계고장으로 출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거다. 표적을 발견, 카이텐을 발진시키려는데 고장이 나서 나가지 못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탑승원은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해야 하고, 고장 원인을 밝혀 수리한다면 재출격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안 되면 다시 카이텐과 함께 기지로 귀환해야 한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러자면 출입구를 용접하는 따위 일은 할 수 없다. 게다가 후기형 카이텐은 수중에서 발진했는데 수중 용접을 하고 있을 여유도 없다.
11.5.3. 술을 먹여, 혹은 마약을 먹여 출격시킨다?
카미카제 조종사들에게 출격 전에 주는 술은 사수관에서 조조가 관우에게 준 술 한 잔 정도의 의미일 뿐이다.해군 항공기지에서 청소부 일을 하던 사람의 회고록에 따르면 송별회, 그러니까 출격 전날 밤에 비참하게 맘껏 술을 마신다고 했다. 누구는 말없이 술만 마시고 누구는 울먹이며 유서를 쓴다고 한다. 카이텐 승무원의 경우에도 당일이 아니라 출항 전에 취하도록 실컷 술을 먹인다. "여섯 개의 손과 여섯 개의 눈"을 가지고 있어도 조종이 힘들다고 할 정도로 복잡한 자폭용 어뢰를 술 취한 상태로 조종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신이다.
히로뽕같은 경우에는 그 시절에는 피로회복제 내지 각성제로 그냥 일상적으로 먹었다. 물론 중독이 된 장병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일본군에서 병사들에게 특별히 의도적으로 먹이고 그런 게 아니었다. 피곤하면 기운 나라고 한 알, 졸리면 잠 깨라고, 죽음의 공포가 두려우면 먹고 힘 내라고 먹은거다. 애초에 당시에는 그 누구도 일본군도 그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매스암페타민의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연합군의 경우도 장거리 폭격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폭격기 승무원이나 호위기 조종사들이 지급받아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1.6. 의의(?) - 세계 최초 함대공미사일, T자 돌림 3형제의 탄생 계기
이 카미카제의 의의를 그나마찾아본다면, 최초로 실전배치된 함대공 미사일인 RIM-2 테리어와 RIM-8 탈로스, 그리고 더 나아가 RIM-24 타터, 이 T자 돌림 3형제를 만드는 계기라는 것이다. 미 해군은 카미카제라는 이 의미없는 자살돌격에 말려드는 것에 질려 2차대전 이후 대공포 이외의 효과적 함대 방공 시스템을 찾고 있었고 그러다 나온 것이 바로 '범블비' 프로젝트였다. '범블비' 프로젝트 가운데에 미 해군이 주목한 실험작들은 각각 SAM-N-6와 SAM-N-7였는데, 미 해군은 원래 SAM-N-6쪽에 먼저 투자를 했고, 그만큼 SAM-N-7보다 기대를 하였으나, SAM-N-6는 그만큼 개발이 느려 미 해군은 우선 SAM-N-7쪽에 먼저 개발 및 실전배치를 하게 된다. 이 SAM-N-7은 이후 'RIM-2 테리어'라는 제식명을 부여받았고 SAM-N-6 쪽은 이후에 'RIM-8 탈로스'라는 제식명을 부여받게 된다. 이후 RIM-24 타터마저 추가되면서 미 해군의 T자 돌림 3형제가 완성된다. 이 셋 모두 나름대로 성공한 자신들의 역사를 남기고 퇴역했으며, 그 계보는 현재 미 해군의 스탠더드 미사일(SM)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다. 재미있게도, 이 SM 시리즈 가운데 탄도미사일 방어를 담당하는 SM-3의 경우, 일본이 미국과 공동 개발국으로써 참가하고 있는데, 이 SM 시리즈의 계보상 조상인 T자 돌림 3형제의 개발 원인이 바로 카미카제를 밥먹듯 실행하던 일본임을 감안하면 참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12. 카미카제를 거부한 부대
당연한 소리지만, 일본군 중에도 제 정신이 박힌 지휘관이 없지는 않았기에 카미카제가 아닌 통상공격을 계속한 부대도 있기는 했다.
12.1. 343 해군항공대
第343海軍航空隊.
이런 이름을 쓰는 부대는 2개가 있다. 첫번째는 1944년 1월 1일에 창설된 하야부사 부대(隼部隊)이지만, 이 부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칠면조 사냥의 대상이 되어 개발살나고 해체되었다.
그 후에 창설된 것이 '검부대(剣部隊)'라는 별칭을 가진 343항공대로 사카이 사부로가 잠시 소속됐었던 바로 그 부대이다.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대파시켰던 시가 요시오가 비행대장이었으며, 이 사람이 비행대장으로 있을 당시 부대에 카미카제 명령이 떨어지자 "너희 윗사람 중 한 명이라도 특공에 동승할 사람이 있다면 카미카제 명령에 동의하겠다."라는 식으로 당시 343 항공대 사령관이던 겐다 미노루를 통해 대본영에 전달, 이후로 단 한 번도 카미카제 명령을 받지 않았다. N1K-J 시덴 카이를 주력기로 삼았으며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상당한 전과를 기록했는데 대표적인 예로 7월 24일, 343 해군 항공대의 기체 21기가 출격해 미군기 16기를 격추했다. 문제는 그날이 구레 군항 공습이었다. 미군 기록에 의하면 1747기가 출격한 그 전투 맞다.
12.2. 그 외
도쿄 방공임무를 맡은 302 해군항공대와 야간폭격과 정찰 등의 임무를 맡은 634 해군항공대도 카미카제 전법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634 해군항공대는 원래 이세와 같은 항공전함에서 운용될 부대였지만 관련 항목에 나왔듯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별도로 운용되었다.
이런 부대가 카미카제보다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일본군도 이런 부대를 육성하는 데 힘을 써야 하겠지만 개막장 일본군은 그러지 않았고 그리고 망했다.
'카토 하야부사 전투대' 라는 별칭에 동명의 군가까지 만들어진 일본 육군 최강 네임드 비행전대인 버마의 64전대는 정예부대라는 이유로 카미카제 대원 차출이나 특공기 호위명령이 내려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본의 해군항공대인 부용부대도 카미카제를 하지않았는데 이는 해당항공대 재량권이 미노베 타다시 소좌에게 있었던 터라 면했다 추가로 해당부대가 주력으로 굴리던 기체는 카미카제에도 안 쓸 정도로 안 좋기로 유명한 D4Y 스이세이였고 그 호위로 52형 제로센이 있었다.
대전 말기의 육군에서는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라는 공대공 특공대를 편성해 운용했다. Ki-61 히엔 등 그나마 고공성능이 좋은 전투기로 B-29에 몸통박치기를 걸고 파일럿은 탈출하는 것, 폭탄을 싣는 것이 아니라 운이 좋으면 낙하산으로 생환이 가능하고, 고고도까지 올라간다는 것 자체가 숙련된 비행기술을 요구하기에 가능한 생환할 것이 요구되었다. 244전대 등 정예부대 출신의 베테랑 파일럿들은 B-29를 격추시키고 살아 돌아오는 활약도 드물게 보여주었지만 진천제공대에서 전과를 올리지 못하면 일반 특공부대(본 항목이 설명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카미카제)로 좌천되었다고 한다.
13. 사례들
13.1. 일본 육해군
카미카제용으로 육해군 공동으로 만든 자폭 항공기가 있다. 바로 위에서도 수차례 언급된 나카지마 Ki-115 츠루기인데 여기서 츠루기(剣)는 육군에서 붙인 이름이며, 해군에서는 이걸 토카(藤花, 등나무 꽃)라고 불렀다. 그리고 Ki(キ 번호)라는 형식명에서 알 수 있듯 육군에서 주로 사용한 것이다.
13.1.1. 인간어뢰
비행기 외에도 일본군은 신요, 가이텐이라는 해군용 자폭병기를 개발했다.
신요는 한마디로 말해서 폭탄을 가득 실은 자살용 모터보트인데 조종하기가 힘들며 파도가 조금만 쳐도 운항을 못하고 무게중심이 너무 앞으로 쏠려서 제멋대로 움직여서 팀킬이나 하는 병기였다.
그 외에도 어뢰를 이용한 자폭 공격도 심도 있게 논의되었는데 그 결과 개발된 것은 남아도는 어뢰를 약간 개조하여 만든 가이텐. 사실 유인 어뢰 공격은 이탈리아의 마이아레나 영국의 채리엇 등이 이미 있었으나 이것들은 저속으로 추진되며 사실 어뢰라기보다는 폭파장치를 휴대한 특공대원이 그 위에 올라타고 가는 수중추진기였다. 하지만 가이텐의 경우는 내부 탑승식이라 외부에서 문을 닫아버리면 탈출이 불가능했으며 방수가 충분히 되지 않거나 구조 자체가 약하여 우그러든다거나 혹은 산소부족으로 조종불능 상태에 빠진다거나 해서 명중률조차 앞선 둘보다 훨씬 떨어졌다. 결정적으로 개조에 소모되는 자원은 별 차이도 없었다고 하니 이뭐병.
이와 관련해서는 인간어뢰 문서 참고.
13.1.2. 달려라 카미카제
지상전에서도 카미카제 전법이 사용되었다. 원래부터 일본군의 장비가 빈약해서 전투 능력이 떨어지므로 반자이 어택이나 대전차총검술 같은 막 나가는 작전이 수행되었지만 전쟁 말기에 이르자 자돌폭뢰나 갈고리 폭탄 같이 사용하면 바로 터져서 저승 가는 티켓을 발급하는 무기가 등장하더니 드디어 아무 폭탄이나 들고 전차에 돌격해서 자폭하는 대전차 자폭조가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만주 작전에서 소련군은 관동군에게 전차 및 자주포, 돌격포 78대와 야포 및 박격포 232문을 잃었는데 소련군의 대부분의 대전차 손실은 일본군 대전차 자폭조에 의한 것으로 소련군은 대전차 자폭조를 스메르트니키(smertnik)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다. 소련군은 이 망할 자폭병들을 막기 위해 보병들의 평균수명 2주의 위엄을 자랑하는 탱크 데산트 전술을 다시 꺼내들어야 했다. 문제는 탱크 데산트는 탱크 데산트지만 이들에게는 PPSh-41과 노획한 MP계열 기관단총이 충분히 있었다는 것이다.
13.2. 외국
타국에서도 병기를 충돌시켜 적의 병기를 파괴하는 개념은 있었다.
그러나 타국의 자폭병기들이 일본의 카미카제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비슷한' 것들은 사람이 직접 몰더라도 사람은 폭탄을 '수송'만 하는 개념이었지 충돌 직전엔 반드시 탈출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들이거나, 아니면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원자를 받아서 현장의 판단에 의해서 이뤄진 일이었던 반면, 일본은 아예 병기에 사람이 타고 그대로 폭격하는 병기를 정식 편제로 운용했다는 것. 당시 일본군에게 가혹행위와 더불어 얼마나 인명경시 풍조가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덕분에 기본적으로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편이던 서양인들에게 그걸 더 심어주는 역효과만 낳았다.
사실상 이 항목의 제목과 가장 부합하는 건 미드웨이 전투에서 격추되는 와중에 일본 전함에 돌진한 미군 조종사들 정도다. 여기 나온 예시는 대다수 카미카제와는 관계 없는 것들이다. 엄연히 특수작전, 유도 병기에 해당하는 것들을 자살 공격이라고 하는 건 어폐가 심하다.
13.2.1. 독일
이 문서에 가장 부합하는 사례가 있는데, 전투기 조종사들에게 서약서를 받고 연합군 폭격기를 들이받는 임무에 투입했다. Sonderkommando Elbe, 특수사령부 엘베가 이를 위해 만들어졌었다. 장갑 등을 다 뜯어낸 메서슈미츠 Bf 109를 사용했으며, 무장이라곤 기총 하나에 60발 넣어둔게 다였다. 말로는 일단 충돌 후 낙하산을 이용해 생환할것이라고 기대되기도 했고 낙하산을 이용해 살아 돌아온 조종사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죽은 경우가 더 많다. 자원병을 대상으로 한 작전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이 자원이었는지 아니면 반강제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게 사실 어중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게, 당시 독일군은 소년병이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부대원 생존자들도 갓 20세 혹은 그보다 안 되는 청년들이었다고 증언하고 있었고, 그 당시 상황상 14-15세의 대공포병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가치관 정립도 안 된 애들을 세뇌해 밀어넣는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소년병 참조.
그 외에는 유선 혹은 무선으로 만든 무인 자폭차량인 골리아트라는 무기가 존재했다. 주로 공병용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필요하면 전차 밑에 굴러들어가서 폭발하거나 적군이 배치된 건물을 파괴할 때 쓰이거나 필요하면 적군 탐색에서 적 앞에서 자폭까지(...) 일본의 카미카제식 자폭 공격과 거의 같았다. 그러나 차이점은 이건 사람은 조종만 하고 자폭은 무인기계가 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독일군들은 자폭 외에도 사격유도나 전선 설치용으로 아주아주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항공기 쪽으로는 이와 비슷한 아이디어가 제시됐는데 다행히도 이쪽도 유인 항공기가 아니라 폭탄을 가득 실은 무인 폭격기 위에 전투기를 얹은 디자인으로 목표 지점까지 다다르면 조종을 하던 전투기가 폭격기와 분리되어 귀환을 하고 폭격기는 목표에 충돌해서 자폭하게끔 하는 방식이었다. 일명 미스텔이라고 불리며 주로 Bf109나 Fw190에 Ju88 폭격기를 결합하는 것이었지만 Me262 제트전투기에 Ar 234 제트 폭격기를 결합하는 계획도 존재했다.
또한 V-1 로켓을 개조해 유인으로 조종하는 것도 있었다. 유인 V-1 로켓을 주장한 사람은 독일의 유명 여성 조종사 하나 라이치(Hanna Reitsch, 1912.3.29 – 1979.8.24)와 오토 슈코르체니. 하나 라이치는 세계 최초의 여성 테스트 파일럿이자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종을 조종한 여성으로 수륙양용기, 헬리콥터, 제트추진비행기, 로켓추진비행기, 심지어 V-1까지 조종했다. 특히 V-1은 실험 단계에서 자꾸만 발사 직후 추락하는 일이 이어지자 원인 및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탑승했던 것. 그 결과 V-1의 비행 불안정성이 확인되어 대대적인 설계 개수 끝에 실전 투입을 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아줌마는 히틀러를 마지막으로 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당시 제6항공군 사령관 로베르트 폰 그라임 상급대장과 함께 히틀러를 탈출시킬 작정으로 비행기를 소련군이 바글대는 베를린에 뛰어들어 총통관저 앞 공터에 비행기를 착륙시켰던 것.
유인 자폭 항공기를 사용하지 못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유인항공기 계획은 '충돌 직전에 조종사가 탈출하는' 개념이었는데도 인명 존중 문제로 반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자살 공격은 독일 민족과 맞지 않다." 후퇴의 '후' 자만 들어도 게거품을 무는 그 히틀러가 말이다.
그러나 실험은 해본다고 V-1 로켓을 개조한 것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1945년 전쟁 종결 직전 연합군이 베를린 가까이 진격하던 시점에도 계속 설득을 했고 히틀러도 패전이 눈 앞이라 전황만 돌릴 수 있으면 될 대로 되라면서 동의해서 엘베 특별공격대가 조직되어 히틀러가 반대했던 유인 항공기에 의한 "자살공격 비슷한 시도" 가 감행되기도 하였다. 다만 일본처럼 조종사와 함선이 황천길 길동무로 동행한다기보다 아군기를 적기와 충돌시키면서 조종사는 낙하산으로 탈출한다는 방식이라 그나마 동반자살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물론 작전 개념상 그렇다는 것일 뿐 현실은 다르지만, 애초에 탈출을 전제로 해서 운용하려 한 것이었다. 시작부터 다르다. 게다가 이것조차 TV 카메라를 장착한 무인 버전을 제작하기도 했다. 현대식 SAM의 조상.
일단 미스텔의 경우 사실 2차대전 말기에 나온 아이디어인 만큼 독일측에선 불필요한 존재인 남은 폭격기의 유일한 활용 용도였을 테고 또 잘만 맞춘다면 꽤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었겠지만 활약 기록이나 그런 건 찾긴 힘들다. Action 24라는 이름으로 비스와 강의 소련군 도하를 막기 위한 교량 파괴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흐지부지되고, 성공 사례는 1945년 3월 오데르 강에서 소련군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교량 파괴에 투입된 것들 중 일부밖에 없다. 많은 미스텔들은 실질적으로 투입되지 못했거나 투입되더라도 극소수의 희생과 훨씬 적은 전과만을 거둔 채 끝났다. 애초에 독일군은 조종사를 아깝게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고, 조종사가 교량을 폭격한 후 스스로 강에서 헤엄쳐 돌아오는 식의 자살공격 같지만 자살공격이 아닌 애매한 작전만 짜다가 끝난 것이다.
13.2.2. 소련
소련 육군에서도 자폭 병기를 운용했는데 사람이 아니라 개였다. 전차 하단은 장갑이 매우 얇다는 것과 파블로브의 조건반사를 이용한 것으로 개에게 폭탄을 매달고 이 개가 조건반사적으로 독일군 전차 밑에 파고 들어가게끔 훈련시킨 것이다. 그러나 소련군 전차를 이용해서 훈련시키는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실전에 투입된 개들이 소련군 전차 밑으로 파고 들어가는 대참사를 가져왔으므로 이 계획은 포기되었다.
13.2.3. 이탈리아, 영국
이탈리아 해군도 가이텐과 유사한 특수 어뢰를 만들었다. 이쪽은 카미카제나 가이텐처럼 돌격해서 적과 충돌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적함 밑에 가서 자석이 붙은 기뢰를 배 밑바닥에 부착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어뢰의 탄두는 당연히 제거되었고 단지 이동용 택시로 쓰기 위해 만들었으며, 말 그대로 어뢰라 잠수함에서 발사되었기 때문에 귀환할 수는 없지만 적당히 근처 육지에 상륙할 수는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이 어뢰가 투입되었을 때 붙잡히지 않은 나머지 4명은 상륙하여 적당히 외국인인 척을 하다가 연락책과 만나기 전에 잡혀서 포로가 되었다.
이걸 타고 알렉산드리아에 잠입했던 이탈리아 해군 승무원 6명 중 어뢰가 중간에 고장나 붙잡힌 2명은 자기들이 폭탄을 설치한 군함에 포로로 잡혀서 구조되어 심문을 받다가 폭탄이 터질 때가 다 되자 "5분 후 이 배는 폭발합니다" 라는 명언을 남겼고 정말로 5분 후에 배가 폭발했으며 이 공격으로 영국군은 전함 2척이 대파당했고 동지중해의 제해권을 상실할 뻔했다. 이때 대파된 게 바로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의 1번함인 퀸 엘리자베스와 3번함인 밸리언트이며 영국군은 "이탈리아 해군의 용기는 타고 있는 배의 크기에 반비례한다" 는 말을 남겼다. 모든 이탈리아 해군이 이런 짓 하면서 연합 해군을 괴롭히면서 지중해를 방어했으면 북아프리카 전역이 망할 일은 없었다(...). 이 작전에 참가한 이탈리아군 승무원들은 포로수용소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이탈리아가 추축국에서 탈락한 후에는 신생 이탈리아 해군의 일원이 되어 독일군에 대항해 싸웠다.
이후 영국 해군도 이탈리아군 어뢰정과 비슷한 물건을 만들어 채리옷이라고 명명했고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 티르피츠를 앉은뱅이 오리 꼴로 만드는 데도 나름대로 공을 세웠다. 그리고 이때 활약은 수중폭파 전술이라는 특수전 전술의 한 획을 그어 70년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의 특수부대들이 활용하는 대표적인 전술이 되었다.
(애초에 가이텐은 자폭 용도로 대량생산을 한 것이고 이건 전장에서 임시로 때운 것에 가깝다. 이는 잘 읽어보면 자폭병기가 아니라 현대의 SDV 같은 특수부대 수송용 '이동수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3.2.4. 한국
한국전쟁 시기에는 많은 육탄전이 있었는데 이때 한국군이 처한 상황이 37mm포를 탑재한 M8 그레이하운드가 유일한 기갑차량이었다. 당시 한국군에서는 장갑차건 자주포건 진짜 전차건 구분 없이 탱크라고 불렀을 정도로 기갑차량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실정, M1 바주카도 T-34/85를 잡기에 부족해서 부랴부랴 M37 슈퍼 바주카를 도입한 뒤에 겨우 상대할 수 있었다.
춘천-홍천 전투에서는 매복한 57mm 대전차포로 적 기갑차량 측면 10m 거리에서 발포해서 전과를 올린 경우도 있고 육탄 11용사가 시체로 위장하고 있다가 적 전차를 기습, 11대의 기갑차량을 파괴하고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육박전을 하더라도 자살 공격만 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 공군이 해인사 폭격 명령을 받았으나 팔만대장경판을 파괴를 막기 위해 무기를 사용하지않고 일부러 가까이 접근해서 프로펠러로 위협해서 북한군을 쫒아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이건 항공기의 몸체 자체를 무기로 쓴 건 비슷하다만 자폭공격은 아니다.
북한 공군도 전쟁 후반기에 몇몇 조종사들이 유류저장시설에 자폭공격을 시도한 적이 있다. 북한군도 AN-2기를 이용해 유사시 운용할 자살특공대를 준비하고 있다고도 한다.
13.2.5. 미국
미국의 경우에는 폭약을 가득 채운 폭격기에 일단 승무원이 탄 뒤에 이륙, 일정 고도에서 탈출한 뒤 이 무인상태가 된 폭격기를 뒤따르는 항공기가 무선으로 조종하여 목표물에 들이받게 한다는 아프로디테 계획이 연구된 적 있다. 이 역시 유도병기지 자폭병기가 아니다.
9.11 테러 당시 테러범들에게 납치당한 유나이티드 93편을 격추시키기 위해 긴급 출격했던 미 공군의 F-16 전투기도 자폭 공격을 감행하려 했다고 한다. 다만 이 경우에도 당시 출격했던 전투기들은 훈련 비행을 마치고 귀환했다가 새로 무장을 장착할 시간도 없어서 바로 출격한 상황이라 정말 답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전투기는 사출좌석이 있어서 설령 자폭 공격을 했더라도 날개만 서로 부딪치는 식으로 하고 사출좌석으로 탈출하면 거의 100% 생존 가능하다. 이 정도로도 격추하긴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지끈 하는 순간 사출좌석을 당겨버리면 조종사는 훈련 받던 대로 내려오면 되는 것. 혹은 조금 더 안전한 방법으로 여객기와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사전에 비행 경로를 설정하고 미리 탈출한 뒤 전투기가 자동 비행으로 알아서 충돌하는 방법도 있었다. 게다가 여객기는 속도가 빠르지도 않기에 생존율에 문제가 생길 이유도 없다. 당시 조종사들도 이런 날개로만 부딪히는 방식을 쓰려 했으나, 정말 불가피할 때 동체충돌할 각오는 했었다고. 유나이티드 93편은 충돌 작전을 시행하기 전에 승객들의 저항으로 추락해서 카미카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후 미국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한 남성이 부부싸움을 크게 하고 자신이 일하는 회사 소속 경비행기를 훔쳐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진하여 부딫혔다. 결과도 실제 카미카제와 같이 남성만 죽고 아무런 인명피해가 없었다.
조지프 스탁이라는 사람은 미국 국세청 건물에 카미카제를 시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