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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때 사진/지도 포함 답사 자료집( 37장 분량) 배포해드리겠습니다.
83차 정기답사 고령/현풍 답사자료집
* 일정표
07:00 서울 압구정동 출발
10:30 고령 우륵박물관 도착
11:30 우륵기념탑
12:00 점심
13:00 주산고분 트레킹 & 대가야박물관
15:00 양전동암각화 & 개포나루터
16:00 현풍석빙고
16:30 도동서원
17:30 현풍곽씨 12정려각
18:00 답사 마침/현풍 출발
22:00 서울 도착 예정
1)버스
이종원/원정/이화에월백하고/방앗간/인덕원참새/계수나무/덜깬주님/아낙수나문/동백아가씨/뮈토스/남해대교/범초/반딧불이/별꽃/동행2/포니/써니/똥구랑땡/맵시/은사시나무/홀로여행/관조/나라맘/스와니/풍경이/스위트콘/산드라/아르츠/휘리릭/구카/들바람/형아/향기야/늘푸름/청한/풀빵/비상/유오디아/안단테/장인아/포비/with/단지/제암산/미라지
2)개별차량
작은사랑/직녀/흙내음/영원/사계절/방울소리/말그니/노자/조아/영원한천국/레오/카메노/토깡이/레아/조은나무/정겨울/달새/보리/꽃님이/05엔젤/천우/법명/박초시/두레/두레모친/스카이2/요수이골/양말공장/양사모/밥줘/우드/대타/뜬구름/김사랑/너울/너울짝
■ 가야와 대가야의 차이는?
-가야란?
562년까지 낙동강 서안 지역에 있던 여러 정치세력과 국가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각 표기간에 지니는 의미상의 차이는 잘 알 수가 없지만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인 『삼국지』에 보이는 구야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가라(加羅)로 되어 있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통교사실을 기록한『남제서』에 加羅로 표기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당시 사용되던 공식 국명은 ‘가야’가 아니라 ‘가라’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는 가야란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아라가야(함안)·고녕가야(함녕)·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삼국유사』는 주로 가야(伽耶)로,『삼국사기』는 가야(加耶) 또는 가라(加羅)로 쓰고 있습니다. 학계에서는 이 두 사서에 나오는 국명을 따르고 있는데, 우리는 『삼국사기』에 따라 가야(加耶)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로 하겠습니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으로는 고려 문종 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인물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이를 발췌·정리한 「가락국기(駕洛國記)」만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야는 일찍부터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발달하였으며 풍부한 철을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하였고, 가야의 문화는 일본의 사회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은 당시 가야의 국력과 왕권이 어느 정도 성장했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과 달리 하나로 통일된 고대국가를 완성하지 못하고 각 지역별로 분립된 상태에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즉 지역 전체가 신라와 백제로 모두 흡수되어 갈 때까지도 가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지역의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각각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를 칭하는 지역연맹체적 성격의 국가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대가야의 경우에는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 무렵, 이른바 전성기를 구가할 때에는 고대국가의 초기 단계에 진입할 정도로 발전했었습니다. 그러나 가야권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는 국가는 이룩하지 못했습니다. 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 대가야(大加耶)는?
경북 고령을 도읍으로 하고 있던 나라로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삼국사기』에는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으로부터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동국여지승람』「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하는데, 이것은 고령지역의 대가야가 가야권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으로 부상하였음을 전해주는 자료입니다. 그리고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한 것은 3세기 중엽까지 김해의 금관국이 가지고 있던 주도권을 대가야가 계승했다는 자부심을 표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5세기 후반 무렵 대가야는 현재의 고령군 지역을 벗어나 합천·거창·함양·남원·하동·구례, 진안 등지를 포괄하는 큰 나라로 발전했습니다. 중국의 『남제서』「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이는 당시 대가야가 중국과 독자적인 교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대가야는 또 481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 변경지역에 침입했을 때, 백제군과 함께 출병해 신라를 도와 고구려군을 격파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562년 멸망할 때까지 가야권 전체를 통합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대가야는 가야보다 큰 대가야, 즉 Great Gaya가 아닌 것입니다. 규모면에서 오히려 가야가 대가야보다 컸지요. 가야 안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나라가 대가야였던 것입니다.
■ 가야에는 어떤 나라들이 속해 있었나?
가야의 구성국들은 성립시기나 존속기간 및 그 수는 시기에 따라 변화가 있었습니다. 첫째, 변한사회에서 가야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변한을 구성하였던 국들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둘째, 변한에서 가야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세력이 있습니다. 이들은 4세기 이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아마 규모가 작은 국(國)이었다가 가야사회로 전환하는 시기를 전후하여 신흥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세째, 진한연맹체의 일부가 이탈하여 가야사회에로 편입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가야를 구성한 나라는 10여 개가 넘습니다. 6세기 이 나라들의 정치발전 수준은 한기(旱岐)를 칭한 나라와 왕을 칭한 나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왕을 칭한 국은 안라국(아라가야), 가라국(대가야), 금관국(금관가야)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을 칭한 국들은 내부적으로 지배세력의 분화를 이룩하여 권역 내의 세력들을 중앙 귀족으로 전화(轉化)시키고 한기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이 한기들은 세력의 크기에 따라 상한기(上旱岐)·하한기(下旱岐)로 구분되었으며, 이들은 제한기회의체(諸旱岐會議體)를 구성하여 중요한 국사를 논의·결정하였습니다. 한편 왕은 상수위(上首位)-이수위(二首位)라고 하는 수위조직을 직속기구로 두어 귀족회의체에서 논의된 사항을 집행하였습니다.
고령의 자연환경
고령군은 경상북도의 남서쪽 끝에 위치하며 경상남도와 붙어 있고, 동쪽은 낙동강을 경계로 대구시와 붙어 있다. 군의 서쪽에 있는 가야산에서 대가천과 안림천의 물길이 시작되어 주변에 비옥한 평야를 만들며 흘러내려 고령읍에서 합쳐져 회천이 되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이처럼 고령군은 서쪽의 높은 산과 동쪽의 낙동강으로 보호되기 때문에 외적이 침입하기 어렵고, 한편으로 낙동강의 뱃길을 이용해 밖으로 쉽게 교통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다.
고령의 선사시대
고령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2~3만년 전인 구석기시대부터였다.
신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에 이르면 큰 바위로 만든 고인돌무덤(支石墓)과 긴 돌을 세워 지역을 표시한 선돌(立石)이 넓은 평야와 그 주변에 많이 만들어 졌다. 특히, 바위 면에 여러 가지 그림을 새긴 바위그림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현재 고령지역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바위그림 유적이 남아 있다.
고령의 바위그림
바위그림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고령지역에는 양전리와 안화리, 산당리와 화암리 등 곳곳에 다양한 형태의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이 남아 있다. 그림의 내용은 나이테모양ㆍ가면모양ㆍ윷판모양ㆍ별자리모양 등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 농사가 잘되고 자손이 번성하여 평화롭게 살기를 빌었던 장소이다.
양전리바위그림
고령읍 회천변의 알터마을 입구에 위치한 가로 6m, 세로 3m 정도 되는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그림은 나이테 같은 둥근 동심원과 마치 깃털이 달린 네모진 가면 모양의 그림 등이 여러 개 있다. 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며 가면 모양은 신의 모습을 의미한다. 풍년과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청동기시대의 제사 유적으로 추정된다.
* 역사의 아이러니 - 대가야사람들은 조상들이 숭배했던 바위그림을 훼손했다
1994년 대가야왕릉전시관을 세우기 위한 발굴조사 때, 대가야시대의 무덤에서 청동기시대의 바위그림이 나왔다. 대가야시대의 무덤의 돌방 뚜껑돌에 양전리ㆍ안화리에 있는 바위그림과 비슷한 가면모양과, 성기를 크게 표현한 사람 모습들이 새겨진 것이었다. 대가야시대 사람들이 무덤을 만들면서 청동기시대 바위그림이 새겨진 돌들을 떼어와 무덤 뚜껑돌로 사용했던 것이다.
대가야 건국신화
하나는 “가야산신과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이 깨어 6명의 동자가 되었는데, 가장 먼저 깨어 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가지의 가야 건국신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을 조선시대(1481)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대가야중심의 건국신화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중기인 1075~1084년 사이에 김해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어떤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駕洛國記)』를 고려후기(1281)에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쓰면서 인용한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이다.
대가야의 성립
삼한시대의 고령 - 변한의 작은 나라
기원전 100년부터 기원후 300년 정도까지 한반도 남부는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로 구성된 마한․진한․변한이 있었다. 그중 고령지역은 변한에 속한 작은 나라인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또는 반로국(半路國)이었다.
이 작은 나라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중심마을과 그 주변에 있는 몇 개의 큰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천군(天君)이라 불리는 제사장이 사는 특별한 마을도 하나씩 있어 나라의 제사를 담당하였다.
한시대의 무덤
고령지역에 있었던 삼한시대 사람들의 무덤은 나지막한 야산에 구덩이를 판 다음 나무로 만든 관에 죽은 사람을 넣고 철기와 토기를 함께 묻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쇠로 만든 농기구로 주변의 들판을 개간하며 농사를 짓고, 한편으로는 쇠로 무기를 많이 만들어 군대의 힘을 키워 주변의 마을 들을 하나씩 차지하면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가라국의 성립
서기 300년이 지나면서 삼한의 작은 나라들은 더 기름진 농토를 차지하고 더 많은 노예를 가지기 위해 각자 주변 지역으로 땅을 넓혀 나가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많은 무기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토기 굽는 기술도 발전하여 이전보다 훨씬 단단한 토기를 만들었다. 또 강을 이용한 뱃길로 다른 지역과 교류하기도 하였다. 이 즈음에 고령에 있던 반로국은 힘을 키워 가라국(加羅國)이 되었는데, 후에는 대가야국으로 불려 졌다.
가라국 사람들의 무덤
서기 300년대 무렵인 가라국 사람들의 무덤은 삼한시대의 무덤보다 규모가 훨씬 커진다. 나지막한 산위에 길이 5m, 너비 3m, 깊이 1m, 정도 되는 깊고 큰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이중의 나무덧널을 설치하여 죽은 사람과 많은 껴묻거리를 넣었다. 또 이와 달리 구덩이 속에 돌을 쌓아 긴 네모꼴로 만든 돌덧널무덤도 만들어져 차츰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쾌빈리1호 나무덧널무덤
고령읍 쾌빈리에 있는 가라국 사람의 나무덧널무덤 가운데 1호는 서기 370년 쯤에 만들어졌다. 무덤구덩이의 규모는 길이 482cm, 너비 305cm, 깊이 95cm로서 당시 이 지역 최고 지배층의 무덤이다. 이 무덤에서는 토기와 철기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지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것들 보다 앞선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고령의 옛 나라 이름
고령지역에 처음으로 나라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삼한시대로 당시의 이름은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또는 반로국(半路國)이라 하였다. 이 작은 나라가 점차 성장하여 가라국(加羅國)이라 불리다가 400년대 이후 크게 발전하여 가야 사회를 대표하게 되면서부터 대가야국(大加耶國)이 되었다. 그 후 562년에 대가야가 멸망하면서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시대의 경덕왕 때인 757년부터 지금의 이름인 고령군(高靈郡)이 되었다.
대가야 성장과 발전
대가야의 발전 - 대왕이 다스리는 나라
서기 300년대부터 가라국은 꾸준히 성장하여 대가야국으로 불렸다. 대가야는 주변의 철광산을 개발하여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어 농업을 발전시키고 군대의 힘을 키웠다. 그리고 백제나 왜와 교류하며 발달된 문물을 주고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서기 400년대에 접어들면서 크게 발전하여, 479년에 하지왕(荷知王)은 고구려나 백제, 신라의 왕들처럼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여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이름을 받아 왔다. 그리고 대가야의 왕은 대왕(大王)으로 불리며 서기 400년대 이후 다른 가야 여러 나라들을 이끌었고, 서기 500년대에 들어서는 백제, 신라와 비슷한 단계까지 성장하였다.
-대가야의 정치체제
전성기의 대가야는 합천ㆍ거창ㆍ함양ㆍ남원 등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넓은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정치제도의 발전이 백제나 신라와 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대가야 토기에 ‘대왕(大王)’이라는 글씨와 ‘하부사리리(下部思利利)’란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는데, 수도 고령에 있는 대왕이 하부라는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가야가 멸망할 당시까지 대가야 권역 안의 가야 지역에 대해서는 개별 나라의 이름들이 쓰이고 있어, 완전히 하나로 통합된 정치체제를 갖추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교류
대가야는 백제ㆍ신라는 물론 중국ㆍ왜와도 문물을 교류하면서 발전하였다.
고아리벽화고분의 무덤구조와 연꽃무늬, 지산리 44호분에서 출토된 청동그릇과 등잔 및 입큰구멍단지 등은 백제와의 교류를 보여준다. 또 야광조개국자는 왜와, 지산리45호분의 고리칼은 신라와의 교류를 나타낸다. 한편 일본 열도 각지에는 대가야계통의 토기와 철기들이 출토되고 있어 대가야문화가 활발히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왕들의 무덤
지산리고분군 - 대가야 왕들의 무덤
고령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산 위에는 대가야시대의 주산성이 있다. 그 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 400년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묘 왕릉인 지산리 44호와 45호 무덤을 비롯하여,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200여기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다. 이곳은 대가야의 독특한 토기와 철기, 말갖춤을 비롯하여 왕이 쓰던 금동관과 금귀걸이 등 화려한 장신구가 많이 출토된 대가야 최대의 고분군이다.
대가야 무덤의 특징
주로 뒤에는 산성이 있고 앞에는 마을과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와 산줄기에 위치한다. 왕 무덤은 한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하나 만들고, 그 주위에 껴묻거리를 넣는 돌방 한두 개와 여러 개의 순장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 돌방은 길이에 비해 폭이 아주 좁은 긴 네모꼴인데, 깬 돌을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고 그 위에는 큰 뚜껑돌을 여러 장 이어 덮었다. 무덤 둘레에는 둥글게 돌을 돌리고 그 안에 성질이 다른 흙을 번갈아 다져 가며 봉분을 높게 쌓았다.
지산리 30호분
지산리고분군의 가장 아래쪽에 해당하는 왕릉전시관 앞에 있으며 봉분의 밑지름은 18m 정도이다. 1994년 발굴조사를 했는데, 가운데 큰 돌방을 만들고 그 옆에 딸린 돌방과 순장자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가운데 돌방의 바닥 아래에 또다시 돌덧널이 만들어져 있어 무덤이 2층으로 되어 있다. 한편 순장자의 무덤에서는 어린아이 뼈와 금동관이 나왔다. 그리고 선사시대의 바위그림이 새겨진 돌을 깨어와 무덤의 뚜껑돌로 사용하였다.
지산리 32~35호분
지산리고분군의 능선 중간부분에 있는 무덤으로 모두 봉분 밑지름이 10~15m 정도 되는 것이다. 1978년 발굴조사에서 32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갑옷ㆍ투구 등이 출토되었고, 또 그 옆의 무덤에서도 봉황머리와 은으로 새긴 넝쿨무늬가 장식된 큰칼이 나왔다. 산 위쪽에 있는 큰 왕릉들 보다는 조금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주변에는 이보다 약간 규모가 작은 무덤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지산리 44호분
지산리고분군에서 규모가 큰 것에 속하며 능선 정상의 바로 아래에 있다. 1977년에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무덤의 밑지름이 27m에 이르며 가운데에 왕이 묻힌 큰 돌방이 있고, 그 남쪽과 서쪽에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 돌방이 2개 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작은 순장자의 무덤이 32개나 있다. 따라서 이 무덤은 모두 40명 이상의 사람이 한꺼번에 묻힌 왕릉으로 추정되며 대가야가 가장 국력이 컸을 때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지산리 45호분
지산리 44호분 바로 위에 있으며 역시 1977년에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무덤의 밑지름이 28m에 이른다. 가운데 왕이 묻히는 큰 돌방을 만들고 그 옆에 껴묻거리를 넣는 딸린 돌방을 마련한 다음, 주변에 11개의 순장자 들이 묻히는 무덤이 만들어졌다. 순장자는 14명 이상이었다.
지산리고분군이 만들어진 순서 - 산꼭대기 가장 큰 무덤들이 맨 나중에 만들어졌다
200여개가 넘는 지산리고분군의 대가야 무덤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대체로 아래쪽에 있는 무덤들이 먼저 만들어졌고 차츰 능선의 높은 쪽으로 올라가면서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크다. 이는 대가야 왕이 힘이 점점 커지면서 더 높은 곳에 더 큰 무덤을 만들려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무덤을 만드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축조과정
왕릉의 축조과정 : 지산리45호분 축조과정
1단계 : 무덤위치 선정 및 무덤구덩이 파기
왕이 죽으면 왕릉을 만들 위치를 정하고 주변을 잘 정비한다. 가운데에는 왕이 묻힐 큰 돌방과 그옆에 껴묻거리를 넣을 딸린 돌방을 만들고 그 둘레에 순장자들의 무덤구덩이(墓壙)를 판다.
2단계 : 무덤방의 둘렛돌 쌓기
주변의 채석장에서 돌을 깨어와 돌방과 돌덧널에 둘렛돌을 쌓는다. 더불어 무덤 주위에는 둥글게 돌을 돌려 무덤 구역을 표시한다. 그리고 완성된 무덤방 속에 왕과 순장자를 껴묻거리와 함께 넣는다.
3단계 :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덮개돌 덮기
왕과 순장자의 시신을 넣은 후 미리 준비해 둔 덮개돌을 덮는다. 그 후 무덤 앞에서 풍성한 제사상을 차린 후 제의를 지낸다.
4단계 : 봉분 만들기
제사에 사용된 토기와 음식을 무덤주위에 흩뿌리고 무덤방 위로 봉토를 쌓기 시작한다. 봉토를 쌓을 때에는 일정한 두께로 흙을 편편하게 쌓아서 다지는 과정을 반복하여 무덤을 완성한다.
교통로
대가야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고, 백제나 왜와 문물의 교류도 활발했으며, 전성기에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가야는 각 지방으로 통하는 도로를 가지고 있었고, 강과 바다를 오가는 뱃길을 이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가야의 교통로는 고령ㆍ거창ㆍ함양ㆍ남원ㆍ섬진강ㆍ하동ㆍ남해ㆍ왜ㆍ중국을 오가는 길과 고령ㆍ회천ㆍ낙동강ㆍ김해ㆍ왜로 통하는 길이 중심이 되었다. 그와 함께 남원ㆍ임실ㆍ정읍ㆍ부안(죽막동)으로 이어지는 통로도 이용하였다. 대가야는 이와 같은 길로 소나 말이 끄는 수레와 배를 이용하여 철과 곡물, 토기 등을 내보내고 바다생선과 조개, 소금 등을 들여올 수 있었다.
대가야의 집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은 현재의 고령읍내에 벽돌과 기와를 사용하여 큰 왕궁건물과 집을 짓고 생활하였다. 그리고 일반인들은 산기슭이나 골짜기 곳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특히, 일반인들은 사각형의 구덩이를 판 움집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바닥에는 한쪽으로 치우쳐 화덕자리가 있고, 벽을 따라 연기가 양쪽으로 나가도록 한 난방시설을 만들어 사용했다.
대가야시대 아이들의 장난감
대가야시대의 움집터에서 나온 흙구슬이다. 대가야시대의 아이들도 요즘과 같이 집 앞 마당에서 구슬치기를 하면서 놀았을 것이다.
대가야인의 먹을거리
대가야 사람들은 대가천과 안림천 유역의 넓은 들판을 이용하여 주로 농사를 지으며 오곡을 주식으로 삼았고 산나물과 과일을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가축을 기르며 물고기도 잡고 산짐승을 사냥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대가야 무덤에서 낫ㆍ괭이ㆍ쇠스랑 등의 농기구와 함께 기장ㆍ복숭아 등의 씨앗이 나오고, 말ㆍ닭ㆍ꿩ㆍ민물고기 등의 뼈가 출토되는데서 알 수 있다. 또한 토기 속에서 대구ㆍ청어ㆍ고둥ㆍ소라ㆍ굴ㆍ게 등 바다생선과 조개류가 출토되어 멀리 바다에서 잡은 먹거리도 들어 왔음을 알 수 있다.
토기 속에 담긴 음식들
대가야시대의 고분 속에는 복숭아 씨앗, 고둥, 생선뼈, 닭뼈 등이 담긴 토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1,500년의 시간을 넘어 대가야 사람들의 식탁에 올랐던 음식물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놓여 있다.
대가야시대의 한 근은 어느 정도 무게였을까?
대가야시대의 움집터에서 나온 무게를 달기 위한 돌로 만든 저울추이다. 무게는 대략 374g 정도 된다. 대가야 사람들도 돼지고기를 살 때 저울로 무게를 달았던 것은 아닐까.
어느 어부의 삶
길쭉한 대롱모양의 어망추로 모두 하나의 무덤 속에서 나왔다. 그 양으로 보아 큰 투망에 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어망추가 다발로 묻히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로 아마도 무덤 주인은 물고기를 잡는 어부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대가야의 왕을 위해 회천 앞내에서 열심히 투망질하며 철따라 은어와 누치를 잡던 어느 어부의 삶이 선하게 그려진다.
대가야인의 옷
대가야 사람들의 무덤에서는 실을 만드는 도구인 가락바퀴가 흔히 출토되고 있는데, 이는 베틀을 이용하여 옷감을 만들었다는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갑옷이나 금동관, 말방울 등 금속유물의 표면에는 가죽이나 직물의 흔적이 엉겨 붙은 채로 남아있기도 한데, 비단처럼 올이 고운 직물이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왕족을 비롯한 지배층에서는 비단옷도 입었다고 생각된다. 옷차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없지만 ≪일본서기≫에는 대가야 사람들은 신라 사람들과는 다른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교와 문화
-문화와 종교
삼국의 문화에 대해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씩씩하고 정열적이며, 백제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신라는 소박하면서도 조화미 넘치는 문화적 특징을 가졌다 한다. 대가야 문화는 무덤과 그 속에서 나온 토기ㆍ장신구ㆍ무구ㆍ말갖춤 등에서 ‘대가야 양식’으로 말할 수 있는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가야의 토기는 부드럽고 안정된 곡선미를, 장신구에서는 정밀한 세공기술을 보여주는 화려함을, 튼튼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투구에서는 무사의 장엄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대가야 문화는 세련된 예술성과 실용성을 함께 갖춘 특징이 있으며, 이는 단절되지 않고 가야금처럼 신라에 계승되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륵과 가야금
우리나라 전통 악기를 대표하는 가야금은 악성 우륵(于勒)이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만들었다. 가야금의 재질은 오동나무이며, 명주실로 12줄을 만들었다. 가야금의 둥근 윗판은 하늘을, 평평한 아랫판은 땅을 상징하며, 그 속이 빈 것은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을 뜻한다. 우륵은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12곡을 작곡하였는데 지금도 그 곡명이 전해온다. 고령읍 쾌빈리의 금곡(琴谷)은 속칭 정정골이라 불리는데,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서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대가야의 신앙과 종교
고령사람들은 선사시대 바위그림과 건국신화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초기에는 산신과 천신, 태양신 등을 숭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대가야시대가 되면 순장무덤에서 볼 수 있듯이 현실의 삶이 죽은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다는 생각도 가졌다. 또한 불교를 받아들여 왕의 무덤에 연꽃을 그리기도 했고 향나무를 담은 그릇을 넣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건축물의 이름을 불교식으로 붙이기도 했고 우륵은 불교의식을 행하는 가야금 연주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가야토기
대가야는 서기 300년대 이후부터 차츰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모양의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고령읍 내곡리의 대가야시대 토기가마터는 완만한 산기슭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데 깨어진 가마벽 조각과 불에 탄 흙덩어리들이 토기조각들과 함께 흩어져 있다.
비스듬한 지형을 이용한 굴가마를 사용했으며 대체로 서기 400년대부터 대가야가 멸망한 후인 6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사용되었다. 대가야 토기는 이곳에서 만들어져 점점 대가야의 세력이 미치는 곳으로 퍼져 나갔다.
토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고운 흙을 구해와 물을 붓고 발로 밟아 이겨 진흙을 만든다. 물레를 이용해서 그릇을 만들고 무늬를 새긴 후 그늘에서 말린다. 잘 마른 날그릇을 흙으로 만든 굴가마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1,000~1,200℃가 넘는 온도에서 토기를 구워 낸다. 이렇게 완성된 토기는 고령지역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까지 전해져 사용되었다.
부드러운 곡선미와 안정감
토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변천하는데, 고령을 비롯하여 대가야가 차지했던 영토에는 신라나 백제와 구별되는 토기들이 출토된다.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등으로 대표되는 ‘대가야양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이다. 굽다리접시는 접시가 납작하고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에는 좁고 긴 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 있다. 긴목항아리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들어 몸체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대야 같이 넓고 깊은 몸체에 여러 겹의 물결무늬와 솔잎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
확산과 변화과정
대가야양식 토기는 서기 300년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서기400년대 초에 완성되어 합천ㆍ남원 등 다른 지역으로 퍼져 나간다. 4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합천의 황강 상류로 진출하며, 400년대 말에는 거창, 함양에까지 전해진다. 이어 500년대에 들어서면 진주를 거쳐 고성지역까지 확대되고, 500년대 중반 경에는 남해안은 물론 마산, 창원에까지 퍼져 거의 가야지역 전체에 미친다. 이처럼 넓은 지역에서 대가야양식 토기가 발견되는 것은 그만큼 대가야의 국력이 컸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대가야 토기의 변화 과정
-토기로 추적해 본 대가야의 영역
고령을 중심으로 성장한 대가야는 400년대 초반부터 주변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400년대 중반부터는 합천 북부지역을 지나 거창ㆍ함양을 거쳐 전북 남원까지 세력이 미치게 되었다. 즉 합천을 중심으로 한 황강유역, 거창ㆍ함양ㆍ지리산주변과 진주 등을 중심으로 한 남강유역, 고성ㆍ하동을 중심으로 한 남해안 및 섬진강유역, 장수ㆍ진안ㆍ임실을 중심으로 한 금강상류유역 등 매우 넓은 지역에까지 세력을 떨쳤다. 전성기의 대가야는 고령지역을 도읍으로 하여 오늘날 경상남도 및 전라북도 일부까지 아우른 ‘대’가야국이었다.
철 생산
대가야가 국력을 키우는데 철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가야의 주요 철산지는 야로와 쌍림면 용리 등 미숭산(734m) 기슭으로 추정된다. 특히 야로의 철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을 만큼 품질이 좋았다. 야로와 쌍림의 제철유적에서는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철로(製鐵爐)의 파편과 슬래그(쇠똥:鐵滓)가 많이 흩어져 있고, 철의 원료가 되었던 철광석(鐵鑛石)과 사철 등이 채취된다.
철을 만드는 곳(고령 쌍림면 용리 제철유적)
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가까운 철광산에서 철광석을 캐와 잘게 부수고, 불을 지피기 위한 숯을 마련한다. 진흙을 이겨 제철로를 만들고 준비해 둔 철광석과 숯을 함께 넣고 불을 지핀 다음 풀무질로 바람을 불어 넣는다. 제철로의 온도가 1,000℃ 이상 계속 유지되면 철광석이 녹아 쇠는 바닥에 고이고 쇠찌거기는 흘러나온다. 이렇게 만들어진 철은 농기구나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거나 멀리 바다건너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하였다.
대가야의 무기
대가야의 고분에서는 고리칼, 쇠창, 쇠도끼, 화살촉 등 많은 무기들이 나온다. 이들은 전투에서 직접 사용되기도 했지만 묻힌 사람이 살았을 때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고리칼의 손잡이에는 금이나 은으로 용과 봉황, 넝쿨무늬(唐草文) 거북등무늬 등을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쇠창 중에도 나무 자루를 꽂는 쪽에 은판으로 둘러 장식한 것도 있다.
-갑옷과 투구
갑옷과 투구는 전투할 때 사용되는 것이지만 평소에는 입은 사람의 권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머리를 보호하는 투구에는 작은 쇳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것과, 대쪽같이 길쭉한 철판을 이어 붙여 만든 것이 있다. 또 요즘의 모자처럼 챙이 달린 투구도 있다.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도 작은 쇳조각을 연결하여 만든 비늘갑옷이 있고,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철판을 연결하여 만든 철판갑옷이 있다. 이밖에도 목이나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철판 가리개도 있다. 투구와 갑옷을 만들 때 쇳조각을 연결하는 방법은 쇠못이나 실, 가죽끈 등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갑옷과 투구는 신라보다 가야지역과 일본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어, 대가야와 왜의 교류관계를 알 수 있다.
금관, 금동관
대가야는 가야 여러 나라 중에 유일하게 금관과 금동관이 여러 개 출토되었다. 대가야의 왕이 쓰던 관은 다른 나라의 관과 구별되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 신라의 관이 나뭇가지와 사슴뿔모양인데 반해 대가야의 관은 풀잎이나 꽃잎모양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대가야의 관은 지산리30호분과 32호분 등에서 나온 금동관과 현재 삼성미술관과 일본의 동경박물관 등에 보관되어 있는 금관이 있다.
-지산리 30호분 금동관
띠 모양의 관테에 끝이 양파모양의 장식 3개를 세워 붙였고, 달랑거리는 동그란 장식을 곳곳에 달았다. 관테는 어린아이의 이마에 두를 수 있는 정도로 길이가 짧아 양 끝에 뚫린 구멍에 끈이나 가죽을 연결하여 착용하였던 것 같다.
-이 금동관은 왜 이렇게 작을까?
지산리30호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11살 이하의 어린아이가 썼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대가야 왕자의 혼이 깃든 애기 금동관이다.
-지산리 32호분 금동관
띠 모양의 관테 위에 광배모양의 금동판을 세우고 좌우에 끝이 양파모양인 가지를 세워 붙였다. 금동판의 꼭대기는 큰 꽃봉오리처럼 만들었고, 표면에는 못으로 두드린 점선무늬가 있는데 점선의 교차점이 황금분할점이다. 풀잎 또는 꽃잎 모양(草花形)을 장식한 대가야의 대표적인 관이다.
-고령에서 출토된 금관
고령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금관이다. 비교적 넓은 관테에 풀잎모양 장식 4개를 일정한 간격으로 세웠다. 동그란 장식과 곱은옥이 부착되어 달랑거리게 했다. 풀잎모양의 장식이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일본에 있는 대가야 금관
띠 모양의 관테 위에 가운데는 양파모양 가지를, 좌우 끝에는 두개의 나뭇잎 모양의 가지를 세워 붙였다. 중간에는 동그란 달림장식이 일정한 간격으로 달려 있으며, 가지의 끝부분에는 긴 하트모양, 중간 가지의 양옆에는 세로로 긴 풀잎모양의 장식이 달려있다.
-일본에서 출토된 대가야식 은동관
일본 후꾸이현(福井縣) 니혼마쯔야마(二本松山)고분에서 출토된 은동관이다. 띠 모양의 관테 위에 한 장의 큰 판모양의 세움장식을 달고 그 위에 양파모양 세움장식 3개를 붙였다. 세움장식의 정면 중앙에는 하트모양 달림장식이 있다.
-귀걸이
대가야의 전성기에는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 금귀걸이가 크게 유행했다. 귓불에 매다는 가는 고리 밑에 흔들거림이 좋은 사슬로 속이 빈 공모양의 중간 장식을 달고, 다시 그 아래에도 사슬로 연결하여 작은 금알갱이를 붙여 꾸민 여러 가지 형태의 끝장식을 달았다. 끝장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화려하게 변화한다.
-말갖춤
대가야의 말갖춤으로는 말고삐를 연결하기 위해 입에 물리는 재갈과 발을 끼우는 발걸이가 있고, 안장의 앞 뒤판에 붙인 장식, 띠를 연결하는 고리와 말띠 드리개, 말방울 등 매우 다양하다. 나무나 가죽, 천으로 된 화려한 장식은 썩고 남아있지 않지만 금속으로 된 말갖춤만 보아도 대가야에서 말을 화려하게 꾸미는 풍습이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대가야의 말갖춤은 왜에도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가야의 멸망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가야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지산리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를 보면 대가야가 멸망하는 시기인 서기 500년대 후반경이 되면 무덤과 토기의 모양이 신라식으로 변화되며, 더 이상 대가야식의 무덤과 토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대가야를 정복한 신라는 대가야의 지배층을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옮겨 살게 했다.
때문에 가야금을 만든 우륵은 신라의 중원경(中原京, 청주)으로 보내졌고,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强首)와 명필 김생(金生)도 대가야의 후손들이지만 고령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던 것이다.
따라서 가야 멸망 후 김유신(金庾信) 등 금관가야 출신들은 무(武)로서 신라의 통일에 도움을 주었다면, 대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문(文)으로써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대가야의 후예들은 해인사 창건에 크게 이바지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처럼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망국의 한을 이어 갔을 것이다.
토기 및 무덤의 변화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16대 520년간 지속되었던 ‘대왕’의 나라 대가야는 500년대 국제정세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신라에 병합되고 말았다. 하지만 멸망 이후 대가야의 모습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지산리고분군의 발굴조사 결과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500년대 후반경이 되면 대가야 사람들이 주로 만들었던 구덩식돌널무덤은 신라 양식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고, 무덤 속의 토기도 모두 신라 양식으로 변화된다. 이는 대가야 멸망 이후 대가야의 문화가 신라 문화로 급속히 바뀌어 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유적과 유물
1274년 몽고 세조 쿠빌라이 - “반룡사 손대지마!”
통일신라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에도 고령지역에서는 계속 불교가 융성하여 많은 절이 있었다. 특히, 반룡사가 유명한데 고려 무인정권기인 1200년대 초에는 전국의 유명한 승려들의 모여 신앙결사단체를 만들기도 했고, 1274년(충열왕 즉위년)에는 중국 원나라 세조가 절을 보호하라는 글을 내걸기도 하였다. 현재, 반룡사에는 고려초에 만든 다층석탑과 함께 조선시대에 만든 범종과 부도 등이 전해온다. 한편 개진면 개포리에는 서기 985년(성종 4)에 만든 관음보살상이 있는데, 조선초에는 이곳에 있는 포구를 통해 남해안과 낙동강을 거슬러 옮겨온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긴 곳으로 유명하다.
반룡사 다층석탑
이 석탑은 검은색의 점판암으로 된 납작한 옥개석(지붕돌)만 층층이 포개어 놓은 모양이다. 모두 12층의 옥개석과 그 아래에 연꽃이 돋을새김 된 기단 덮개돌이 2매 있다. 탑을 받치는 기단은 화강석을 사용했다.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개포리 석조관음보살좌상
이 보살상은 높이가 1.5m 정도 되며 머리에는 토속화된 모습의 보관을 쓰고, 손에는 연꽃을 들고 연화대좌에 앉아 있다. 특히 광배의 뒷면에는 30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고려 초인 985년에(성종4)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길 때 이용된 개경포구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조선 및 근대조선이 건국된 이후 1413년에 고령에는 현이 설치되어 중앙에서 현감이 내려와 다스리게 되었다. 그즈음 고령에 살고 있던 토박이 성씨인 박(朴)ㆍ신(申)ㆍ유(兪)씨들이 이름난 가문으로 성장하여 서울로 가서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령에 살고 있던 김면(金沔)은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며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이 되어 활약하다가 전장에서 순국하였다. 또 정유재란 때에도 고령의 의병장 박정완(朴廷琬)이 고령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895년에는 고령군이 대구부(大邱府)에 속했으나, 이듬해 다시 경상북도 고령군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유적과 유물
성리학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 조선시대가 되면 이전의 불교문화가 유교문화로 바뀌게 된다. 따라서 조선 초기인 태종 때에는 고령에도 향교가 세워져 성리학을 가르치며 공자께 제사하였다. 그 후 고령 곳곳에는 여러 서원들이 건립되어 많은 학생들이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시험을 보았다. 한편 고령에는 많은 제자들을 훌륭한 정치가로 키워낸 점필재 김종직선생의 종가와 정치가이자 대학자였던 죽유 오운선생의 종가, 임진왜란 때 영남지역 3대 의병장의 한사람인 송암 김면선생의 묘소와 유적이 있다. 또한 이와 관련된 중요한 책과 문서들이 전해오고 있다. 더불어 고령에는 효자와 열녀가 많았고 역대 고령 현감들의 비석도 많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후기에는 봇짐과 등짐장수들의 상인조직인 고령 상무사가 크게 번성하여 영남 내륙지방 상권을 좌우하였다.
고령지역의 도요지 - 1454년, “고령 도자기 품질 으뜸”(세종실록지리지)
도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질 좋은 점토와 풍부한 땔감, 그리고 이들을 쉽게 운반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고령지역은 이러한 요건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대가야시대 이래 끊임없이 좋은 토기와 자기를 만들어 왔다. 대가야 도공들의 장인정신과 빼어난 제작기술이 전해져, 고려ㆍ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가장 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궁궐에까지 납품되었다. 고령지역에는 현재 운수면, 성산면, 쌍림면, 고령읍, 우곡면 등 5곳에 대규모 가마터가 남아 있고, 지금까지 확인된 가마터가 1백여 곳이 넘는다.
악성우륵
우륵은 가야국 가실왕(嘉實王) 때 악사로 활약한 가야금의 명인이자 시조이다. 가야국 성열현(省熱縣)에 살다가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대가야(경북 고령)로 옮겨 궁중 악사로서 가야의 음악과 춤 노래 등을 통합 발전시켰다. 우륵은 당시 전해지고 있던 여러 형태의 현악기를 오늘날과 같은 가야금으로 만들었으며 가야 각 지역의 향토성 짙은 음악을 고급예술로 승화시킨 악성(樂聖)이다.
가야국이 매우 혼란해지자 신라로 망명한 우륵을 진흥왕은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안치시키고 신라의 관료 세 사람(계고, 법지, 만덕)을 파견시켜 음악과 춤·노래 등을 전수하게 하였다. 이후 우륵의 음악과 춤·노래 등은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大樂)으로 채택되어 우리 고유음악의 큰 기틀이 다져지게 되었다.
계고(階古) - 대나마(大奈麻, 신라 17관등의 10번째)가야금 전수
법지(法知) - 대나마(大奈麻, 신라 17관등의 10번째)노래 전수
만덕(萬德) - 대사(大舍, 신라 17관등의 12번째)춤 전수
가실왕은 누구인가
대가야(大加耶)말기의 왕으로서 가보왕(嘉寶王)이라고도 한다.
가실왕의 생존 연대는 우륵(于勒)과 신라 진흥왕(546~576)과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 가실왕은 우리 민족 특유의 악기로 민족의 얼을 담은 음악을 구상한 문화적 성군(聖君)으로, 여러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악기를 가야금의 형태로 통일시키고 우륵으로 하여금 각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은 12곡을 짓게 하였다. 이는 조선조 세종대왕이 당시 언어와 문자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업적이다.
12곡의 의미
우륵이 가야의 가실왕을 명에 의해 작곡한 12곡은 하가라도(下加羅都), 상가라도(上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하기물(下奇物),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 상기물(上奇物)이다.
가실왕이 ‘여러 나라의 방언이 그 성음에 있어서 서로 다르거늘 어찌 획일화할 수 있겠는가’하는 가실왕의 음악관에 따라 당시 가야 각 지방의 향토색 짙은 음악으로 작곡 연주하였을 것이다. 또한, 당시 대가야(경북 고령-상가라도)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이 미치던 지방과 소국의 음악 등을 가야금 음악으로 하나 되게 함으로서 정신적 결속을 다질 수 있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 중 9곡이 지방의 이름으로 밝혀졌으며 한편에서는 의식과 같은 굿거리의 일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고령과 우륵
고령지역은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어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교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고 선진 문물의 흡수도 다른 가야국들에 비해 빨라 5세기 후반 경에는 가야의 여러 소국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성장하였다. 또한, 대가야의 주요 교역품은 합천 야로 지역에서 생산되는 쇠와 안정된 농업 기반을 바탕으로 생산된 농산물 등으로 이를 바탕으로 대가야는 수준 높은 음악 예술을 향유하였을 것이다. 대가야의 가실왕은 이와 같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천재 예술가인 우륵을 통하여 가야국의 문화적 통일을 이루려고 하였다.
고령군청에서 서북쪽으로 인접되어 있는 지역인 쾌빈리(금곡)에는 우륵이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가야금을 가지고 12곡을 만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우륵의 가야금 연주소리가 “정정”하는 웅장한 소리가 났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현재 ‘정정골’이라 부르고 있다.
양전동암각화(보물 제605호)/고령읍 장기리 813
알터 마을 입구에 있는 높이 3m, 너비 6m의 암벽에 새겨진 바위그림이다. 바위그림은 암각화라고도 하는데, 암각화란 선사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이나 바램을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것을 말한다.
전 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로 볼 수 있다.바위그림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등이 있는데, 동심원은 직경 18∼20㎝의 삼중원으로 총 4개가 있다.동심원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십자형은 가로 15㎝, 세로 12㎝의 불분명한 사각형안에 그려져 있어 전(田)자 모양을 하고 있다.이는 부족사회의 생활권을 표현한 듯하다.
가면모양은 가로 22∼30㎝, 세로 20∼40㎝로 머리카락과 수염같은 털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안에 이목구비를 파서 사람의 얼굴을 표현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하다. 상징과 기호를 이용해 제단을 만들고 농경을 위해 태양신에게 소원을 빈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근처에 있는 금산령 석기 유적과 고인돌 유적에서 출토되는 석기와 토기를 통해 청동기시대 후기(B.C.300∼0)에 만들어진 암각화로 짐작된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신앙과 사회생활 등 선사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조각사와 회화사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양전동 암각화는 보물 제 605호로 지정된 암각화로 고령의 회천변 바위 면에 새겨진 청동기 시대의 바위그림이다. 현재는 제방사업으로 인해 회천변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해 있다. 전형적인 농경문화인의 작품으로 암벽전체 높이는 지상 3미터 너비 5.5미터 인테 그림의 높이는 1.5미터 길이는 약 5미터다. 새겨진 문양은 동심원, 십자형, 가면모양, 검파형의 문양등이 고 쪼기 수법으로 새겨져있다.
원을 세겹으로 겹쳐 새긴 동심원은 모두 4개가 있는데 직경이 약 18-20cm, 십자형 문양은 많이 마모되어 현재는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또한 바위 곳곳에 사람 얼굴을 그린것 같이 보이는 가면모양 또는 방패모양의 그림이 있는데 모두 7개다. 형태는 모두 같은 모양인데 위로는 머리카락 좌우로는 수염을 그려 넣었고 좌우로 뿔로 그려넣어 마치 짐승얼굴 모양 같기도 하다.
동심원 모양은 태양을 상징하는 것에 모두 인정하고 있는데 기하학적인 문양에 대해서는 신면상, 우두상등 달리 해석하고 있다. 이 모든 문양들은 모두 농경사회의 고유신앙과 관련된 요소라고 한다. 뜻은 알수 없으나 문양이 의미하는 것이 신앙과 제사, 풍요 다산등과 관련된 농경적인 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암각화가 위치한 곳은 삼한시대의 신성지역인 소도와 같은 곳으로 당시 수장의 주재 아래 제사를 올리고 물에 들어가 몸을 씻어 액을 물리치는 계절제를 올리던 장소라는 주장이 있다. 즉 양전동 암각화에서 청동기인들이 지내던 계절제가 대가야시대까지 계승되어 가야산신제를 지내는 것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는 설이 있다.
개포나루터
낙동강 변에 자리잡고 있는 개포리는 고령읍에서 동쪽으로 약 6Km 지점에 있다.
개포를 옛날에는 개산포(開山浦)라 불렀으나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이 포구에서 내려 해인사로 운반되었다'하여 개포나루터의 지명은 뫼산(山)자 대신 글경(經)자를 넣어 개경포(開經浦)라 불렀다.
이 곳은 기암절벽이 연이어져 있어 예로부터 시인 묵객의 놀이터로 혹은 곡물과 어염의 집산지로 알려졌으며 본시 개산포로 불렸으나 개경포로 개칭 되었고, 다시 일본의 침략으로 한국 사람들의 호학 애국의 혼을 말살한다는 의도에서 '경(經)'자를 빼고 그냥 개포라 부르게 되었다.
80여 가구가 살고 있는 이 개포리는 기암절벽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을 끼고 있으며, 낙동강 물이 오염되기 전에는 잉어, 붕어, 숭어, 뱀장어, 메기 등 수많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놀고 있어 주말만 되면 대구를 위시한 영남일대의 강태공들이 몰려와 만사 무심일조간(萬事無心一釣竿)이라 밤늦게까지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1580년대의 선조 때에는 이곳 개산포 낙동강 변은 낙강칠현의 뱃놀이 터로도 유명하다. 낙강칠현이란 낙동강 변의 일곱현인이란 뜻인데 즉 송암(松庵)김면( 金沔) 선생,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선생, 청휘당(晴暉當) 이승(李承)선생,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선생, 한강( 岡)정구선생, 대암(大庵) 박성(朴惺) 선생, 낙빈(洛檳) 이홍우(李弘宇) 선생을 말한다.
현재 가야산 해인사에 보관중인 유명한 팔만대장경이 조선 초에 이르러 인천에서 배로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해인사로 가는 가장 가까운 개경포에서 내려서 승려들이 머리에 이고 나른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 당시 팔만대장경은 선편으로 운반되어 서해안, 남해안과 낙동강을 통하여 고령 개포에 당도하였다. 팔만대장경이 개포에 도착하자 영남 일대의 승려들이 모여들어 경판을 머리에 이고 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었으며 알터와 고령읍을 지나 낫질 신동재를 넘어 해인사까지 운반되었다 한다.
개산포가 유명한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그 옛날에는 큰 포구로서 곡식과 소금을 실어 나르는 수십 척의 배와 수백 명의 사람들로 몹시 붐볐다. 창망(倉望)에는 그 옛날 대단히 큰 창고가 서있고, 지금도 그 밑에 있는 들판 이름을 창야(倉野)라고 부른다.
가을이면 세납(稅納)으로 받아들이는 곡식이 수만 섬에 이르렀고 화적떼가 때때로 몰려오기 때문에 창고 주위를 순라까지 돌았다고 한다.
뿐만이 아니라 이 포구에는 많은 소금도 들어와서 고령은 물론이고 합천, 성주, 거창, 금릉 일대의 내륙지방의 소금도 대부분 이 개포에서 운반되었고, 이들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곡물은 모두가 이 개포에서 집산 되었다.
역사의 애환을 간직한 채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는 이 개포는 결코 이러한 낭만과 평화로운 풍경만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왜병의 출몰이 수운을 이용할 수 있는 개포에 자주 나타나 인근 주민들을 괴롭혔다. 더욱이 1592년(선조25년)6월2일에는 왜적선 2척이 나타나 당시 의병도장으로 향토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송암 김면(金沔) 대장이 이끄는 군대와 일대 격전이 이 개포에서 벌어져 왜병1,600여명이 죽고 진기한 궁중보물을 빼앗아 행재소로 보낸 놀라운 피의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낙동강
우리나라에서 3번째로 긴 강이며, 길이 513.5㎞, 유역면적은 2만 3,860㎢이다. 강원도 태백시 화전동 천의봉(天衣峰:1,442m), 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경상북도 봉화군·안동시·예천군·상주시·구미시·칠곡군·고령군 그리고 경상남도 밀양시·김해시 등을 지난다. 강 하류지역인 김해시 대동면 남동쪽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는데 서쪽은 대동수문(大東水門)을 지나 서낙동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가고 본류는 계속 남쪽으로 흘러 부산광역시 서구 명호도(鳴湖島)와 사하구 하단동 사이에 놓여진 낙동강 하구둑 갑문을 지나서 남해로 흘러든다. 이 강에 합류하는 지류는 반변천(半邊川)·내성천(乃城川)·위천(渭川)·금호강(琴湖江)·밀양강(密陽江) 등 742개에 이른다.
삼국시대에는 황산하(黃山河)·황산강(黃山江)·황산진(黃山津)으로 불렸고 고려·조선시대에 와서 낙동강·낙수(落水)·가야진(伽倻津) 등으로 불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낙수로, 〈택리지〉에는 낙동강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래 ‘낙동’이란 가락(駕洛)의 동쪽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산물·세미(稅米) 등의 운송로로 이용되었는데, 이때 가락국의 땅이었던 '상주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이란 뜻으로 낙동강이라 불리게 되었다. 〈연려실기술〉 지리전고(地理典故)편에도 "낙동강은 상주의 동쪽을 말함이다"라고 했다.
또한 낙동강은 영남지방의 대동맥으로서 이 지역의 문화를 발달시킨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삼한시대에 낙랑군·대방군으로부터 대륙의 금속문물을 이곳 유역을 통해서 수입하여 진한(辰韓)과 변진(弁辰)의 부락국가를 발달시켰을 뿐만 아니라 상고시대의 부족국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각 국가세력의 각축장이 되었던 곳이다. 또한 남쪽 대마도나 일본과의 교통무역에도 이 수운로(水運路)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주요평야로는 상류부의 안동분지, 중류부의 대구분지, 하류부의 경남평야 등이 있다. 안동분지는 침식분지들이 연결된 비교적 규모가 큰 분지이고 대구분지는 낙동강 본류와 금호강 등 여러 지류의 연안에 분포하는 평야이다. 하류부의 경남평야는 창녕 이남의 본류 연안과 남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평지 및 김해평야를 포함한다. 낙동강 하류부에 발달된 김해평야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충적평야이다. 구포 상류 2㎞ 지점에서 낙동강은 2개의 큰 물줄기로 나뉘어 흐르며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고, 다시 망상(網狀)으로 분류하면서 대저도(大渚島)·명호도(鳴湖島)·맥도(麥島)·일웅도(日雄島) 등의 하중도를 이룬다. 이 강의 경사도는 극히 완만하여 하구에서 약 340㎞ 상류에 위치한 안동 부근의 하상고도(河床高度)는 해발 90m에 불과하다. 특히 하류 160㎞ 구간에 있어서의 경사는 1만분의 1 정도로 극히 완만하여 옛날에는 안동까지 배가 올라갈 수 있었다. 하상의 평균경사도는 1만분의 17로서 압록강보다 완만한 편이다. 강변에 발달한 구포·삼랑진·수산·남지·현풍·왜관·낙동·풍산·안동 등의 도시는 나룻터 취락이었던 곳이다. 이 강의 하류부에는 홍수방지와 삼각주 개발을 위하여 많은 인공제방이 축조되어 있다. 특히 염해방지와 용수공급을 위하여 1987년 11월에는 을숙도를 가로지르는 하구둑이 건설되었다.
강 유역은 전체적으로 내륙분지형 기후의 특성을 나타낸다. 연평균기온은 12~14℃ 정도이다. 연강수량은 대구분지를 중심으로 하는 내륙지역이 900㎜ 이하의 과우지역인 데 반하여 하류지역은 1,400㎜ 이상의 다우지이다.
이 강 유역의 주요식물상을 보면 상·중류 지역은 남부 난온대 낙엽·활엽수림지대, 하류지역은 조엽(照葉)수림대에 속한다. 최근 낙동강 하류지역의 식물조사에 의하면 총 151과 910종의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낙동강 하구의 을숙도는 철새도래지(천연기념물 제179호)로 유명했으나 을숙도를 지나는 낙동강 하구둑의 건설로 철새들의 터전이 줄어들고, 낙동강 연안의 공업단지에서 배출되는 오염물질과 농업·생활 폐수의 유입 등으로 1970년을 고비로 이들 철새는 그 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강 유역에는 1969년에 건설된 남강댐, 1976년에 건설된 안동댐, 1992년에 건설된 임하댐 등이 있다. 강 유역에는 전국 석탄생산량의 약 1/3이 매장되어 있으며, 흑연·석회석·시멘트·적색고령토 등도 대량으로 매장되어 있다. 이밖에 주요 금속광물로 텅스텐·납·주석 등이 생산되며, 약간의 구리·아연·망간·몰리브덴·철·은 등도 생산되고 있다.
현풍석빙고(玄風石氷庫 보물 제673호)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다. 남북으로 길게 축조되어 있으며, 출입구가 개울을 등진 능선 쪽에 마련된 남향구조이다. 돌의 재질은 모두 화강암으로 외부에서 보면 고분처럼 보인다. 입구는 길쭉한 돌을 다듬어 사각의 문틀을 만든 후 외부공기를 막기 위해 돌로 뒷벽을 채웠다. 외부는 돌을 쌓고 점토로 다져서 흙을 쌓아 올렸다. 잘 다듬어진 돌로 벽과 천장을 쌓았는데 천장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4개 틀어 올리고 그 사이사이에 길고 큰 돌을 얹어 아치형을 이루게 하였다. 천장에는 통풍을 위한 환기구가 두 군데 설치되었고 빗물에 대비한 뚜껑이 있다. 바닥은 평평한 돌을 깔고 중앙에 배수구를 두었다.
당시에는 얼음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규모가 작은 현풍고을에 이러한 석빙고가 만들어진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82년 석빙고 주위의 보수작업 때 축조년대를 알려주는 건성비(建城碑)가 발견됨으로써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깊은 계곡의 맑은 물이 얼면 그 얼음을 떠다가 저장하였다. 석빙고는 개울이 흐르는 쪽에 입구를 설치하지 않고 능선을 향하여 돌아앉아 남향하고 입구에는 외기를 막기 위해 옹벽(擁壁)을 쌓았다. 무지개형인 홍예(虹霓)를 틀어 구성한 석빙고의 바닥에는 돌을 깔았고 여름에 얼음이 녹지 않도록 통풍과 배수가 고려되어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졌다고 전하는 이 석빙고는 아직도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당시 고을마다 얼음곳간을 둔 것이 아니었는데 그리 크지도 않은 현풍현(玄風縣)에 석빙고를 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도동서원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한 도동서원은 병산서원, 옥산서원, 소수서원, 도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의 5대 서원 중 하나이다. 창건 연대는 1568년으로 이때는 비슬산 기슭에 쌍계서원이란 이름으로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중 소실되고, 1605년 지금의 도동리 자리에 다시 중건되어 보로동 서원이라 불리웠다. 1607년에 도동서원이라 사액되었다. 도동이라는 의미는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도동서원에서 눈 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토담과, 중정당이란 강당, 수월루, 그리고 수령 400년 된 은행나무이다. 토담은 수막새의 장식무늬 등이 빼어나 토담으로서는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를 지나면 먼저 수월루에 오를 수 있다. 수월루에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평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 낸다. 수월루를 지나 중정당에 들어서면, 중정당 기단에 여의주와 물고기를 물고 있는 4개의 용머리를 조각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사물잠이라 하며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의미한다고 한다. 도동서원에는 한훤당 김굉필 선생과, 한강 정구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2월 중정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첫머리(首賢)에 차지하는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2년(1865)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당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선조 6년(1573) 임금이이 서원에 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 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享祀)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一人一社)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道東)은 성리학의 도(道)가 처음으로 동(東)으로 건너오다((道果東矣)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도학의 으뜸스승(近世, 道學之宗)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시대를 열어 주셨다.
우리 나라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몽주에서 시작하였고, 김굉필 선생은 포은의 도학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통론(道統論)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 (신도비 참고). 우리 대구야말로 처음으로 도학이 뿌리를 내렸던 도학의 발생지(發生地)으로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실천을 더욱 강조하는 우리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굽이치는 낙동강을 보듬고 있는 도동서원은 동방 5현의 수장인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배치나 기교면에서 서원건축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서원 입구 일명 ‘김굉필나무’라고 불리는 은행나무는 400년 수령을 자랑하고 있다.
2층 누각 수월루에 오르면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과 오밀조밀한 산이 한 눈에 잡힌다.
‘주인을 부르는 문’을 뜻하는 환주문은 항아리 모양의 장식과 사모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고 이마가 닿을 정도로 낮은 문에 문턱에는 꽃봉오리를 새긴 돌을 놓아 자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서원에 진입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으며 강학공간인 중정단 기단석은 색상을 달리한 모자이크 그림을 보는 듯하며 네 마리의 용과 물고기, 다람쥐, 봉황조각의 석물도 눈길을 끈다.
봄철 후원은 꽃으로 만발하며 암키와와 수막새를 이용한 꽃담장은 한국전통의 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소나 돼지를 단에 올려놓고 제수로 적합한지 검사하는 생단과 대청앞 기단에 세워진 조명시설 정료대는 서원건축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구조물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병산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 소수서원과 더불어 우리나라 5대 서원으로 손꼽힌다.
현풍읍내로 나가려면 다람재를 넘어야 하는데 정상 팔각정에 서면 활처럼 휘어 흐르는 낙동강과 도동서원 그리고 아늑한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 한원당 김굉필 선생
김굉필 선생(1454년-1504년)은 서흥 김문(瑞興金門)으로서, 호(號)를 한훤당(寒 찰 한, 暄 따뜻할 훤, 堂 집 당)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한훤당은 단종대왕 때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여기 달성군 현풍에서 성장하셨고, 연산군 10년 51세의 나이로,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
선생은 당시 가까운 이웃 고을 함양군수로 계셨던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인으로 들어가서,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선생은 언제나 소학을 생활의 모범으로 즐겨 배우고 익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지어 불렀다. 소학은 어린이가 일상생활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예절과 수양에 관한 내용을 적은 유학 기본서이다. 선생은 사헌부 감찰을 거쳐 형조좌랑에 이르렀지만,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戊午)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휘말려 평안도 전라도로 유배되었다.
한훤당은 도학정신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선비의 거룩한 모습을 보여 주셨다. 한훤당은 전라도 순천의 유배지에서 효수형을 당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형장에서도 얼굴빛을 편안히 하시고, 수염을 간추려 입에 머금고 신체발부 수지부모 불감훼상(身體髮膚, 受之父母,不敢毁傷, 이 수염은 부모에게 물려받아서니 칼날에 다치게 할 수 없다) 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돌아가셨다. 선생은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에 임하는 선비의 엄숙한 모습을 보였으며, 죽음 앞에서도 수염하나까지 부모를 생각하는 효(孝)의 실천을 잊지 않았다.
선생은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에 힘쓰시어, 마침내 영남 사림의 도학을 경기도 전라도 등 전국으로 확대한 업적을 이루었다. 특히, 평안도 희천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에게 도학을 전해서, 조선에서 도학이 뿌리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하였다. 모재 김안국, 사재 김정국 형제와 금헌 이장곤 및 신당 정붕 등 이른바 기묘명현(己卯名賢)들도 선생의 문인들로서, 중종대왕 때 실행하였던 왕도정치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다. 한훤당은 우의정으로 추증받았고, 문경(文敬)으로 시호를 받았다. 광해군 2년에 선생은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선생과 더불어 조선 5현의 수현(首賢)으로서, 조선의 선비로서는 최초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을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도동서원의 유래
도동서원은 조선 5현의 첫머리(首賢)에 차지하는 문경공(文敬公)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선생의 도학을 계승하기 위하여, 퇴계 이황과 한강 정구 선생의 주도로 유림의 협조를 받아 세워졌다.
1607년 선조 대왕 40년에 도동서원으로 이름 지은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2년(1865) 흥선 대원군이 서원을 정리할 때에도 한훤당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문을 닫지 않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64년 선조 원년(1568)에 비슬산의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지는 당성군 유가면 쌍계리 초곡천 산기슭에 세운 쌍계서원(雙溪書院)이다. 선조 6년(1573) 임금이이 서원에 에 필요한 현판과 책을 하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때 왜병의 방화로 불타고 말았다.
그 후 선조 38년(1605) 현재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보로동서원(甫勞洞書院)이라 하였다 2년 후 나라에서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는 뜻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이라 이름지어 사액하여, 마을 이름도 도동리라 고쳐 불렀다.
선생은 전라도 순천시의 옥천 서원을 비롯한 전국 6도 15개 서원에서 향사(享祀)받았지만, 선생이 성장하시고 묘소를 모시고 있는 연고지의 도동 서원을 제외하고, 나머지 서원은 일인일사(一人一社)의 원칙으로 모두 문을 닫게 되었다. 1962년에 사당과 중정당 및 토담이 보물 350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토담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우면, 전국에서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되었다.
도동(道東)은 성리학의 도(道)가 처음으로 동(東)으로 건너오다((道果東矣)라는 뜻으로, 조선에서 도학이 이제 시작되었다는 자부심이 넘치고 있다. 일찍이 선생이 남명 조식 선생과 퇴계 이황 선생에게 도학의 으뜸스승(近世, 道學之宗)으로 존경받았을 만큼, 조선에 처음으로 도학의 시대를 열어 주셨다.
우리 나라의 도학은 포은(圃隱) 정몽주에서 시작하였고, 김굉필 선생은 포은의 도학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통론(道統論)에 바탕으로 두고 있다. (신도비 참고). 우리 대구야말로 처음으로 도학이 뿌리를 내렸던 도학의 발생지(發生地)으로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조선의 성리학은 학문보다는 인격 수양을, 지식보다는 실천을 더욱 강조하는 우리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은행나무
서원 입구에 은행나무 한 그루가 울창한 나무 가지를 잔뜩 드리우고 있다. 한강 정구(鄭逑)선생이 도동서원 사액을 기념(1605)하여 기념해서 심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은행나무는 도동 서원의 역사를 같이하고 있는 400년 이상 세월을 지냈다. 수령이 400년 된 이 은행나무는 높이 20m, 가슴둘레는 7.9m, 수관 폭 31m * 30m 이고, 동쪽가지는 30m, 서쪽 25m, 남쪽 28m, 중앙 22m이다.
은행나무는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기운이 강해서 기상 높은 선비를 기르는 최고의 상징으로, 서원이나 향교 앞에는 한 두 그루 심어져있다. 은행나무는 해마다 많은 열매를 맺듯이, 해마다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려는 소망이 들어 있다.
은행나무는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울음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자 북쪽으로 뻗은 가지가 부러졌지만 나무 밑에 놀던 어린이들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부러지면서도 어린이들을 보호한 나무이지만 오랜 연륜으로 제 힘으로 스스로 이기지 못하고 굵은 콘크리트기둥(1977년에 설치)5개에 의지하고 있다.
도동원규
중정당 벽에는 많은 현판이 걸려있다. 제일 오른 쪽에는 임금님께서 내리신 전교문(傳敎文) 현판이 걸려있다. 다음은 중국의 주자(朱子)가 제정한 백록동규(白鹿洞規)의 현판이 걸려있다. 백록동규는 중국 백록동 서원의 학규(學規)로서, 유교의 기본사상과 교육의 목적 및 교육의 방법에 대해서 간단하게 적혀있다.
한강 정구선생은 사당에서 동향으로 배향받고 있다. 도동 서원은 정구 선생이 제정한 서원의 학칙인 원규(院規)를 따르고 있으며, 원규(院規)를 적은 현판이 중정당 벽에 걸러있다.
영남 서원의 원규는 거의 대부분 퇴계 선생이 최초로 제정하여 전국의 서원에서 시행한 영주(榮州)의 이산원규(伊山院規)를 모범으로 따르고 있다. 한강의 도동원규(道東院規)는 내용이 구체적이고 독창적인 성격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의 주자가 제정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학규(學規)에서 퇴계의 이산원규(伊山院規)에 이르는 서원교육의 전형을 벗어나서, 한국적인 개성을 뚜렷이 나타내는 원규라고 할 수 있다.
1. 향사(享祀)의 날짜를 정하는 방법.
2. 원장의 자격과 임무,
3. 유사(有司)의 자격.
4. 원생의 입학 자격.
5. 자리의 순서.
6. 교육 방법과 내용,
7. 선생을 맞이하는 예절.
8. 금지사항을 8 개조로 나누어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중정당기단
중정당의 기단은 우리 선조의 정성과 기술이 가득 들어있다. 기단은 가파른 산비탈에 튼튼한 건물을 세우기 위하여 보통 성인의 키만큼 앞면을 높이 쌓아올렸다. 돌은 거의 같은 모양을 볼 수 없을 정도로, 6각형 내지 심지어 12각형 모양으로 하나하나 다듬어서 모든 정성을 기울여 끼어 넣었다.
크기와 색깔을 더하거나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섞여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 잇고 짝을 지어 맞물려서 일체가 되어 조화를 이루며 높은 기단을 유지하고 있다.
같은 사물이라도 미묘한 차이로 모양과 색깔을 다르게 하고 있어도, 어떤 미묘한 차이도 서로 짝짓기에 의해 안정과 조화를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여러 빛깔의 돌들이 농도를 달리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모양과 빛깔은 말 그
대로 예술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학술명으로는 다듬은 돌 허튼 층 쌓기로 알려져 있다.
기단은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가 서로 잇고 짝하며 서로 맞대고 맞물리는 조화를 이루고 있다.주역 계사전(繫辭傳) 상(上)에서는, 한 번은 음(陰)이 되고 한 번은 양(陽)이 되는 것이 도(道)라고 한다. 도(道)는 음양의 2기가 잘 어울려서 변화하는 법칙을 말한다. 음양이 서로 잇고 짝하며 서로 맞대고 맞물려서 조화를 이루어서 만물을 낳고 끝없이 변화하는 원리이다. 한 번은 음이되고 한 번은 양이 되어 음양이 서로 반대하고 대립하면서도, 서로 옮기고 바뀌면서 하나로 합하고 있다. 위와 아래(上下), 해와 달(日月), 추위와 더위(寒暑) 그리고 밝음과 어둠(明暗) 등 서로 반대하는 성질이 모여서 긴밀하게 조금의 틈도 없이 화합을 이루는 것이 조화이다.
높은 기단에는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고 있는 네 마리의 용이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고 있다.눈이 둥글게 뜨고 있어 위엄을 보이기보다는, 가까이 다가서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바로 밑의 사나운 거북 모습과는 전혀 달리하고 있다. 용(龍)은 물을 다스리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용두석은 홍수로 강이 넘치는 수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들어있다. 그리고 좌우로 생기가 넘치는 작은 호랑이(細虎)가, 동쪽은 해(日)와 함께 서쪽은 달(月)과 함께 오르고 내리는 모습을 재미있게 새겨두었다. 주역에서 해는 양(陽)을 나타내고, 달은 음(陰)을 뜻한다. 바로 음양(陰陽)을 조화를 상징하는 중정(中正), 중용(中庸)을 말하고 있다.
북향으로 자리잡은 중정당 아래에 놓여있는 거북 모양의 북현무(北玄武)와 사당 앞에 새긴 봉황 모양의 남주작(南朱雀)의 석조물은 용맹한 모습을 과시하며, 예(禮)를 갖추기를 요구하고 있으며, 기단석 위에 새겨놓은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은 재미있는 모습을 자랑하며, 자연과 조화를 바라고 있다.
수월루(水月樓)
서원을 들어서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강 건너 고령군 개진면의 넓은 들판이 보이는 수월루(水月樓)라는 정자가 있어 공부하던 유생들의 머리를 식혀 주었다는 물위에 비친 달빛으로 읽는 수월루(水月樓)이다.
수월루는 유생들이 엄격한 서원생활에서 슬며시 벗어나 시를 지어보거나, 경치를 즐기는 누각이다. 수월루 밑의 외삼문(外三門)으로 들어가서, 좁고 가파른 계단을 걸어올라 환주문으로 들어간다. 문 입구에 문턱이 놓여야 할 자리에 꽂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놓아서, 잠시 머물러 복장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재치도 숨어있다.
수월루는 정면 3칸, 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이다.
거인재와 거의재
좌우에 낮고 작은 양재는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였던 거인재(居仁齋)와 거의재(居義齋)이다. 거인(居仁)과 거의(居義)는 맹자 이루 상(上)장에 자신이 인(仁)에 머물러 의(義)를 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吾身, 不能居仁由義, 之謂自棄也)에서 나오고 있다.
바로 자기의 재주를 뽐내지 말고, 언제나 인을 바탕으로 의를 실천하는 것이 가장 가치있는 삶이다는 뜻이다. 논어 학이편(學而篇)에서 군자는 생활에 편안함을 찾아서는 안 된다(君子, 食無求飽, 居無求安)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선비들은 불편한 생활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좁고 답답한 방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문을 익히는데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다.
논어 팔일편(八佾篇)에서도, 예는 겉을 화려하게 꾸미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한다 (禮, 與其奢也, 寧儉)라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절약과 검소함은 예의 기준이 되었다. 규모는 생활하기에도 불편했을 정도로 작았지만, 건물의 구조는 검소하고 소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
서원 정원은 임금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은 20명으로, 문중(門中)서원은 15명으로 법으로 정하였고, 성균관 문묘에서 배향받는 선생을 모시는 서원은 30명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서원의 유생들은 군역 면제의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정원보다는 훨씬 많았다고 볼 수 있다. 지금 관리소로 쓰이는 전사청(典祀廳)에는 유생 식당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당
사당은 서원에서 가장 높이 자리 잡고, 엄숙한 분위기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사당은 정신세계와 현실세계를 분명히 구분되도록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당 입구의 문은 삼문(三門)으로 갖추어져서, 내삼문(內三門)으로 부른다. 내삼문 밑에는 계단이 2개만 놓여있다. 오른쪽 계단과 문은 제례를 집행하는 제관이 다니는 계단으로, 제례를 집행하는 제관은 중정당 벽의 현판에 쓰여있다.
한 가운데의 문은 신문(神門)으로 부르면, 위패(位牌)를 모시거나, 제물을 옮길 때에 문을 열고 있다. 계단 아래에 봉황이 무서운 얼굴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이 곳은 신성한 장소로, 사람은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된다라고 묵묵히 말하고 있다.
사당은 문경공 한훤당 김굉필선생의 위패를 중앙에 모시고, 문목공 한강 정구선생의 위패를 동향으로 배향되고 있다. 그리고 사당안에 선조 40년(1607) 도동서원을 다시 건립할 때 그린 것으로 보이는 벽화 두 점이 좌우 벽면에 있다.
오른쪽 벽화는 가로 130cm, 세로 150cm의 크기이며 노송(老松)에 눈이 쌓여 있고 그 가지 사이로 둥근 달이 걸린 풍경화로 회벽한 흰 면에 검정색과 주황색을 이용하여 그린 설로장송(雪路長松)벽화이다.
왼쪽 벽화는 가로 130cm, 세로 94cm의 크기이고 회칠한 흰 면에 검은색으로 그린 벽화이다.벽화 우측에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라 적혀있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서원을 방문한 손님이 도동 강나루에서 나룻배 한 척을 띄워 놓고 혼자 앉아서 달빛을 받고 있는 벽화이다.
이 두 점의 벽화는 한훤당이 도학정신을 시로 표현한 내용을 그린 설로장송(雪路長松)으로, 선생이 자연을 노래한 시의 내용을 그린 와 한훤당이 도학정신을 시로 표현한 내용을 그린 설로장송(雪路長松)으로 이름 지어졌다. 벽화들은 색채가 뛰어나고, 보존이 잘 되어있다.
토담
토담은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하여 튼튼하게 쌓아올리고, 암키와를 지붕으로 덮어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드문드문 수키와를 엇갈리게 끼어 넣어 무늬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렸다. 암키와와 숫키와를 사용하여 음양(陰陽)의 조화를 통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앞면은 직선으로 수평의 담을 쌓아올렸고 시선 차단효과를 노렸다.
옆면은 지형의 경사에 맞추어 높낮이를 바꾸어 가며,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듯이 꾸몄다. 특히, 사당 아래의 왼쪽 토담은 주위의 배롱나무와 함께 자연의 조화를 이루어, 마치 선경(仙境)에 둘러싸여 있는 듯한 분위기로 이끌고 있다. 비록 토담이 사람의 손을 거쳐 지어졌지만, 전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넘쳐흐르고 있다.
사당입구정원
중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못 다른 풍류가 감도는 아름다운 후원이 다가온다. 나지막한 언덕을 적절히 나누어, 5단으로 석축을 쌓아올려서 편평한 정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바로 위에는 하늘을 향해서 날아갈 듯이, 수직으로 하늘높이 내삼문(內三門)을 세웠다.
하늘을 날아 다니는 새들과 함께 구름다리를 밟고 건너면, 마치 세속을 벗어나서 선경(仙境)에 이르는 듯한 깊은 감동을 일어나게 한다. 언제나 주위에는 우물에서 솟아 나오는 명당수가 사철내내 넘쳐흐르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참꽃과 모란과 배롱나무와 국화가 차례로 꽃피운다. 사철의 변화와 변하지 않음을 함께 즐기면서, 자연과 벗삼아 학문의 도를 이루고자 하였다.
비록 사람이 만들었으되, 하늘이 스스로 열어 놓은 듯하다.(雖由人作, 宛自開天, 宛 비슷할 완). 선비는 모든 자연의 경치를 자기의 삶 속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이상세계를 세워나갔다.
높은 담 밑에는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배롱나무가 심어 져있다. 배롱나무는 7월부터 9월에 이르기까지 붉은 꽃을 피우므로 백일홍(百日紅)으로 부르기도 하며, 그렇게 빨리 자라지 않는 정원수로 널리 심어져 있다.
배롱나무는 청순하고 늠름한 기품이 흐르고 있어서, 선비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중국의 은거시인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음주(吟酒)의 시를 보면, 동쪽 울 밑에 핀 국화를 따서, 한가로이 남산을 바라보노라. (采菊, 東籬下. 悠然, 見南山, 籬 울타리 리, 悠 한가할 유)라는 시구(詩句)가 있듯이, 동쪽 울 밑에는 국화가 계절의 마지막을 알려주고 있다.
중정당(中正堂)
중정(中正)은 중국 송(宋)나라의 유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선생이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나오고 있다. 성인은 알맞음과 바름과 인의(仁義)로써 모든 일을 정하였고, 고요함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의 기준을 세웠다.(聖人定以中正仁義, 而主靜, 立人極焉.)
중정(中正)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실천한다는 뜻이다. 바로 중용(中庸)을 나타낸다. 중정당 현판 밑의 창호를 열어보면, 계단이 한 가운데를 꿰뚫고 달리고 있다. 중정당에 앉아 바라보는 건너편 산과 들의 경치는 알맞은 조화를 이루어 한눈에 들어온다. 중정당 한 가운데에는, 선조대왕께서 하사하신 사액(賜額)현판이 걸려있고, 현판의 글씨는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선생의 친필이다. 선생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서, 망우당 곽재우 선생과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방어하셨다.
현판은 경상감영 도사(都事)로 계실 때 쓰셨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선생은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 중정당 현판은 봉조하(奉朝賀) 이관징(李觀徵)선생이 쓰셨다. 봉조하는 정3품(正3品)이상 당상관(堂上官)이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임명받는 명예직으로, 근곡(芹谷) 이관징 선생은 숙종대왕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해서(楷書)에 뛰어났다.
환주문(喚主門)
환주문(喚主門)은 부를 환(喚) 주인 주(主)로 읽고,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다. 갓 쓴 선비들은 고개를 숙여 들어오도록 처음부터 문을 낮게 지웠다. 배움의 문으로 들어서는 선비는 스스로 마음가짐을 낮추고, 내 마음의 주인을 불러보게 한다. 옛 선비의 높은 정신 문화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지붕 위의 꽃병 기와는 선비의 갓을 떠오르게 한다. 비록 선비는 고개를 낮추고 들어오지만, 선비는 갓을 쓰고 들어오는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서원은 선비의 기상이 넘치는 꾸밈없는 직선미를 띠고 있다. 논어 이인편(里仁篇)에서 나의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吾道, 一以貫之)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수월루(水月樓), 중정당(中正堂), 사당(祠堂)의 주요 건물이 남북 일직선으로 놓여져 있고, 계단은 서원 한가운데를 꿰뚫는 중심축이 되고 있다. 그리고 좁고 가파른 산비탈에는 여러 가지 꽃들과 배롱나무를 가꾸어 꽃계단으로 쌓아 올리고, 꽃계단 위에 자리잡은 환주문의 정자 같은 멋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세련된 예술미를 보여 준다.
도동 서원은 도학정신과 예술미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정(中正), 바로 중용(中庸)의 미가 이루어진 아름다운 서원으로 칭찬받고 있다. 논어 옹야편(雍也篇)에는 중용의 덕이야말로 아름답지 않는가. (子曰, 中庸之爲德也. 其至矣乎.) 라는 공자의 말씀이 나오고 있다.
현풍곽씨12정려각
현풍 곽씨 집안의 유교 도덕에 기본이 되는 삼강(三綱)을 지킨 28인의 정려비로, 선조 31년(1598)부터 영조 때(재위 1567∼1608)까지 포상된 12명을 한 곳에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을 잘 지키면 이를 국가에서 포상하며 기리도록 하였다. 한 마을의 한 성씨(곽씨)에서 12명의 포상자가 나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로서, 정려를 받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때 안음현감 곽준이 황석산성에서 두 아들과 같이 전사하게 되자 며느리와 출가한 딸이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훈의 아들 4형제가 임진왜란 때 병환 중에 있는 아버지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였기에 선조가 정려했다.
곽재기의 부인 광주 이씨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물에 빠져 죽었기에 선조가 정려했고, 곽홍원의 부인 밀양 박씨는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죽음으로써 남편을 보호하였기에 현종이 정려했다.
곽수영의 부인 안동권씨는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자신이 대신 죽기를 기원했으나, 남편이 죽게 되자 먹지 않고 따라 죽게 되니 현종이 정려했다.
건물은 앞면 12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정려각 안에는 2개의 비석과 12개의 현판이 있다. 건물과 현판은 최근 것이나, 12정려각은 그 유례가 흔치 않은 것으로 중요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솔례(率禮)의 현풍곽씨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
현풍에서 구지 방향으로 차를 몰고 10분 쯤 가다 보면 솔례라고 불리는 제법 큰 동네가 나온다. 행정상의 지명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대동 또는 대리라고 불리는데, 예로부터 현풍(玄風) 곽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솔례(率禮)라는 말은 예(禮)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된 현풍곽씨 십이정려각은 이 마을의 초입에 다소곳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찾아 갔을 때, 문이 잠겨 있었지만, 관리하시는 분을 찾아뵙고 간곡히 부탁을 드려 어렵사리 안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삼강문(三綱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조그만 문을 들어서자, 한 지붕 아래 12칸으로 나누어진 한 채의 건물이 보인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문에 따르면 이 건물은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때까지 솔례촌(率禮村)의 곽씨 일문에 포상된 12정려를 한 곳에 모신 정려각으로서, 이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조선 영조 때 한 곳에 모아 세웠다고 한다. 각 칸마다 정려를 받은 사람을 나타내는 현판과 행적을 그린 채색화가 놓여져 있다.
유교를 국가통치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삼강(三綱)을 잘 지키면 상을 내려 이를 널리 알리고 다른 이들이 본받도록 하였다. 그런데 보통 한 마을에서 한 사람도 정려를 받는 일이 쉽지 않은데, 이곳 솔례에서는 12정려가 나왔으니 현풍곽씨 후손들이 크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마을의 초입에 정려각을 세워 조상들의 올바른 삶의 행적을 본받고 마을의 자랑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리라. 정려각에 모셔진 12분, 그들 모두가 다 심금을 울리는 절절한 사연의 주인공이지만, 그 중 임진왜란 때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지킨 사효자(四孝子)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본다.
망우당 곽재우의 사촌동생인 곽재훈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결, 둘째는 청, 셋째는 형, 넷째는 호라고 하였다. 이 4형제가 임진왜란 때에 병든 부친을 모시고 비슬산 기슭의 굴속에서 피난을 하다가 왜적이 침입하여 부친을 해치려 하자, 4형제가 차례로 부친을 보호하려다 죽임을 당하고 부친만 살아남았다. 왜적은 그 효행에 크게 감동하여 석방하면서 그의 등에 ‘사효자지부(四孝子之父’)라는 다섯 글자를 쓴 패를 달아 다른 왜적들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화려한 단청으로 꾸며진 정려각을 살펴 본 후, 밖으로 나와 정려각을 감싸고 있는 흙담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충과 효, 그리고 절개라는 만고불변의 도덕과 가치를 좇아 생명을 초개처럼 버린 옛 조상들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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