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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
▪마르코 10, 2 - 16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사제로서 인생의 2막을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한 달을 뒤돌아보니 장소만 달라졌지, 아침에 미사 드리고 강론 유튜브에 올리고,
달라진 것은 아침, 저녁과 일요일 월요일을 제가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제게 다이어트 하느냐 물었는데, 짐 속의 체중계를 꺼내서 한 달 만에 측정하니 4.5kg이 빠졌어요,
특별히 아픈 곳은 없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에 몸무게가 준 것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뺄 살은 많고 나누어드리고 싶은 살들도 많습니다.
지난주에는 속리산과 태안 신진도를 다녀왔죠.
사진과 동영상은 카페에 올려져 있으니, 제 근황을 보고 싶으신 분은 카페에 가시면 됩니다.
또 제가 살 집이 궁금하신 분이 많은데, 아직 땅도 파지 못했습니다.
이상하게 법적으로 문제 하나 해결하면 다른 하나가 걸리고, 과정이 이렇게 복잡한 줄 몰랐습니다.
지난 2월에 짓기 시작해서 은퇴 후 바로 들어가려 했던 것인데, 속상하지만 마음 고쳐먹어야지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으면서 주님이 주신 카리스마를 갖고 마지막까지 신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 것인가’가
저의 묵상 거리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결혼에 관한 문제, 이혼에 관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또 제1독서에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 중간에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나옵니다.
이것이 혼인의 불가해소성입니다.
단일성은 죽을 때까지 한 남자 한 여자가 한 남편과 부인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톨릭 혼인 교리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혼인의 불가해소성’과 ‘단일성’입니다.
원칙적으로 가톨릭은 이혼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물론 시대 상황에 따라 사목적 배려는 해야 한다는 것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군인 주일이지만 복음이 군인과 맞지 않고, 또 군종 사목을 해서 할 말은 많지만,
결혼과 이혼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강론을 들으시는 분 중 이혼하신 분이 많이 계신 것 압니다.
이혼 후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다시 혼인성사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죠.
그런데 지난번 남편과도 혼배했지만 그것을 풀려니 너무 복잡해서 그냥 신앙 생활할 수 있어요.
이 경우, 세상 법으로는 갈라졌지만, 하느님이 볼 때는 부부죠.
아무튼 우리 신자들이 모든 여건상 도저히 살 수는 없어서 이혼을 하기는 했는데,
신앙 생활을 계속할 수 있냐고 묻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 이혼한 것을 성당 분들이 다 안다고 다른 곳으로 이사 가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세상 법으로 이혼 후 새로 결혼하지 않으면,
혼인 무효를 교회법을 통해 해결하지 않고도 고백성사보고 성체 모시며 신앙 생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 생겨서 같이 살고 싶다 할 때는 그 전 혼인을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먼저 본당 신부님께 상의드리고 교구청에 가서 혼인 무효 서류를 받아 양식을 작성해서 교구청 재판소에 올립니다.
서울 같은 경우는 워낙 서류가 많이 쌓여 보통 2년 이상씩 걸린다고 합니다.
교회법을 전공하신 신부님들이 판사, 검사, 변호사 역할을 다하십니다.
이렇게 해서 OO 날짜로 그전 혼인이 무효화 되었다 선언 받으면, 이제 자유가 된 거죠.
그러면 다시 새로 만나는 사람과 혼인성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유, 절대 다시 결혼 안 해요.’ 하시면, 혼자 사실 수 있습니다.
그 대신 신앙생활 철저하게 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강론을 좀 본격적으로 들어갑시다.
저는 항상 강론할 때 이천 년 전 그 시대로 돌아가려 애씁니다.
관상이라 했습니다.
2천 년 전 왜 예수님은 이런 말씀하셨고, 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졌을까?
그것에 대한 답은 그 시대 배경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천 년이라는 시간은 작은 시간이 아닙니다.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또 인간들의 사고방식도 많이 바뀌었고, 초대교회와 현재의 가톨릭 모습도 많이 달라져 있죠.
저는 늘 묵상하고 관상까지 가서 그 관상을 통해 눈에 보이는 것을 잘 정리해서 여러분들에게 전달해 드리려 애쓰고 있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이론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의 결혼관은 굉장히 고상하고 신성했어요,
특별히 정절을 지킨다는 것을 매우 아름다운 가치로 여겼어요.
‘하느님은 간음한 죄 외의 죄는 오래 참으신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남녀가 정절을 지킨다는 것을,
특별히 남자보다는 여자가 정절을 지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죠.
또 ‘간음은 하느님의 영광을 떠나보내는 짓이다.’
또, 오죽하면 유대인들의 3대 범죄 중 하나가 간음죄였어요.
유대인의 3대 범죄는 우상숭배죄, 살인죄, 간음죄예요.
그리고 이 죄를 범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할 정도로 엄하게 다스렸죠.
여러분도 잘 아는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
간음하다 잡혀 동네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와 사람들이 동맹이 하나씩 들고 때려죽여도,
돌 던진 사람에게 법적인 책임이 없었죠.
부부생활을 깨지 않기 위해 간음죄를 강하게 하는 것이 겉으로 보면 부부의 권리를 다 지켜 주는 것처럼 보여요.
이처럼 유대인들의 결혼에 관한 이상은 아주 고상해 보였지만 실제도 그렇지는 못했어요.
그 이유는 ‘여자는 물건’이었어요.
결혼 전에는 아버지 물건이고, 결혼 후는 남편 물건이었죠.
그러니 여자에게 따라오는 법적인 권리는 없었어요.
그래서 남자는 마음만 먹으면 어떤 구실을 대고도 아내를 버릴 수 있었지만, 여자 쪽에서는 이혼하기가 쉽지 않았죠.
여자가 이혼하고 싶을 때는 ‘이혼 좀 해주세요.’ 하고 매달리는 정도예요.
여자가 이혼을 부탁하면 이혼 사유가 되는 것은 첫째 남자가 문둥병 걸렀을 때고,
두 번째는 좀 재미있는데, 남편이 가죽 만드는 직업을 선택했을 때에요.
가죽공장이 썩은 냄새가 많이 나는데, 온몸에 그 냄새가 배어 집에 오게 되죠.
셋째는 처녀를 남자가 겁탈했을 때, 마지막은 결혼 전 여자의 과거 행적을 끌고 와 시비를 거는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부탁하는 정도예요.
하지만 여자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오로지 남편의 의사에 의해서만 이혼을 당해야 했죠.
즉, 여자는 이혼을 당하는 것이고 남자는 이혼을 하는 것이었죠.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이혼에 관한 근거는 신명기 24장 1절입니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맞아들여 혼인하였는데, 그 여자에게서 추한 것이 드러나 눈에 들지 않을 경우,
이혼 증서를 써서 손에 쥐여 주고 자기 집에서 내보낼 수 있다.’
유대인 남자들은 이 구절로 기고만장했던 거예요.
여기에 여자 권리는 하나도 안 나오죠.
그런데 그 이혼장에는 정말 점잖게 적혀있어요.
‘이 이혼장을 가지고 당신이 원하는 어떤 남자와 결혼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주는 문서이며,
퇴거의 편지이며, 해방의 증서입니다.’
아주 그럴듯하게 써서 종이 한 장 둘둘 말아 집에서 내쫓습니다.
이 이혼장은 반드시 랍비가 2장을 썼는데, 한 장은 남편에게 주어 부인에게 주며 내쫓게 했고,
또 한 장은 산헤드린(Sanhedrin)에 랍비 3명이 가서 공증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혼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이 여자에게 수치가 되는 일이라 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해석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그 당시 제일 유명한 두 학파가 삼마이(Schammai) 학파와 힐렐(Hillel) 학파였어요.
심마이 학파는 수치스러운 일은 오로지 간음뿐이라 해석했죠.
아내가 비록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같이 악하다 할지라도 간음을 범하지 않으면 이혼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성서에 보면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은 아주 못된 왕비였죠.
그러니 심마이 학파에 따르면, 아내가 아무리 악독해도 간음을 안 했다면 쫓아낼 수 없어요.
하지만 아무리 천사처럼 살았어도 한 번 간음했으면 쫓아낼 수 있었죠.
심마이 학파는 수치스러운 일은 딱 한 가지, 간음이라고 생각했죠.
반면 힐렐 학파는 수치스러운 일의 해석을 좀 넓게 했어요.
이것대로 하면 정말 많은 여자가 쫓겨났을 거예요.
첫 번째 요리를 못하는 여자, 두 번째 낯선 남자와 이야기해도 쫓겨났죠.
지나가는 사람이 길을 물어 대답해주는 것 갖고도 이혼장을 써줄 수 있던 거죠.
세 번째 남편이 듣는 데서 시댁 쪽을 경멸하는 말을 했을 때도 사유가 되었죠.
네 번째 여자의 목소리가 이웃집까지 들릴 정도로 집에서 소동을 피울 때입니다.
그런데 이 힐렐 학파에 웃기는 랍비 아키바가 있었어요.
이 랍비는 남자의 눈에 아내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생겼을 때도 이혼 가능하다고 했죠.
정말 말도 안 되죠.
결국 여자는 물건, 사용하다 오래되면 폐기하는 물건과 같았어요.
우리 자매님들은 이런 이야기 들으면 분노가 막 끓죠?
그런데 지금 이런 수모를 아프가니스탄 여인들이 당하고 있죠.
그 더운 나라에서 모기장처럼 눈만 망사로 가리는 부르카를 입어야 하고,
학교는커녕 남자와 없이 혼자 나갔다간 종교 경찰의 회초리를 맞죠.
사실 구약과 이슬람교 뿌리가 같죠?
사라의 몸종에서 난 자식들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갈라져 나간 것이죠.
이삭과 이스마엘.
현재 유대인의 조상은 이삭이고, 이스마엘은 현재 이슬람 사람들의 조상은 이스마엘이죠.
우리 조선 시대도 그랬지만 구약의 율법은 여자들을 굉장히 무시했지요.
하지만 지금은 21세기인데도 탈레반이 정권을 잡으니, 여자들은 사는 것이 아니죠.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도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이 짓을 했잖아요?
써먹을 때 써먹고 필요 없으면 내쫓고, 여자는 그냥 물건이었죠.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러다 보니 예수님 시대에는 이혼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결혼이 안정되지 않았죠.
그래서 여자들은 결혼을 안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자해까지 했다고 합니다.
손가락을 자른다든가 해서 일부러 병신이 되는 거죠.
이렇게 여자들 살기가 너무 힘들었던 시대와 분위기 속에서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마음만 먹으면 아내를 버리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예수님에게 물어요.
‘버리면 안 된다’라고 하면 ‘신명기에 버리라 되어 있는데 당신 뭐야?’ 하며 붙들고 늘어지려는 거죠.
진퇴양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원칙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말 저런 말 하기 참 어려울 때, 제일 중요한 답변은 원칙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내가 항상 이야기하죠?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라.’
갈팡질팡하는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전통으로 돌아가는 길을 저는 한평생 알려드렸어요.
예수님도 올가미에 집어넣는 이렇게 알쏭달쏭한 질문을 받았을 때 항상 원칙을 이야기하셨죠.
예수님은 결혼을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회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혼을 금지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너희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이지,
즉 그 시대 상황에 할 수 없이 이야기한 것뿐, 그것이 영구히 지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제1독서에 나온 하느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는 것,
둘이 한 몸이 되게 해주어 갈라질 수 없게 해주었다는 것, 단일성의 원리를 주셨다는 이야기를 꺼내시며,
남녀 관계는 다시 회복되어야 하며 결혼 불가해소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요즘 우리 천주교를 보면 이혼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사제들은 사목적인 배려를 해야만 합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남자들도 있습니다.
매일 맞고 살고, 매일 성 노리개로 살고, 이것은 남편도 아니고 아버지가 아니에요.
얻어맞으면서까지 가정을 지켜라?
처음에는 권고하죠.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별거를 해보라고 권합니다.
물론 이 기간에도 찾아가 횡포를 부리는 인간들도 많아요.
경찰의 보호를 받아라?
한국은 아직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경찰이 보호해 주지는 않아요.
그런 면에서는 한국은 선진국이 아니죠.
오늘 예수님이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라 한 것은 그때 사람들이 완악했기 때문이라 하셨듯이,
사제들은 사목적인 배려를 통해서 분별해 주어야 합니다.
아마 제가 언젠가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정말 원수 같은 부부가 있었어요.
그런데 성당은 열심히 주일을 빠지지 않아요.
주일에 주임신부님 보좌신부님 고백소 앞에 남편과 아내가 항상 1번으로 서 있어요.
1주일 내내 싸웠으니 성사는 봐야 하잖아요?
고해 시간도 비슷해서 거의 같은 시간에 나왔죠.
애들도 커서 독립했으니 이제 편하게 이혼하자고 신부님을 찾아갔어요.
그때는 수십 년 전이니, 지금보다 천주교 법이 더 엄했을 때죠.
‘신부님, 우리 이혼식 좀 해 주십시오, 혼배가 있으면 이혼식도 있는 것 아닙니까?’
‘그래, 내가 한 번 만들어 보지. 제대 앞에 둘이 무릎 꿇고 있어. 준비하고 나갈게.’
이혼식을 해준다는 말에 신이 나서 제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다립니다.
신부님이 수단 입고 영대까지 걸치시고 뒤에서 나오시더니 두 사람 앞에 뒷짐을 지고 섰습니다.
여러분 성수채 아세요?
옛날에는 성수채가 아주 길고 구리 같은 것으로 만들었죠.
이 성수채를 뒤에 숨겼다가 꺼내시더니, 아직도 두 사람 이혼하고 싶냐고 물으셨죠.
‘네, 신부님!’
신부님은 성수채로 남자 머리를 한 대 탕, 여자 머리를 한 대 탕 때리셨죠.
너무 아파 뒤로 발라당 자빠졌어요.
‘아직도 이혼하고 싶으십니까?’
‘네, 신부님!’
그러자 다시 타당!
‘신부님, 이혼시켜주시지 왜 때리세요?’ 물으니, ‘둘 중 하나가 죽어야 이혼 가능하니, 한 명 죽을 때까지 내가 때리는 거지.’
두 분은 이혼 안 한다고 손잡고 나가셨대요.
이 정도로 혼인의 불가해소성이 가톨릭의 중요한 혼인 교리입니다.
지금도 신부님들은 일반 혼인식을 했건 성당에서 혼인식을 했건,
부부가 갈등이 있을 때는 최대한 그 갈등을 해소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제가 방문하고 좋은 프로그램 보내 주고, 또 눈물로 기도할 때 두 사람은 변화된다고 봐요.
이렇게 해도 소용이 없고 목숨의 위험까지 받는다면 사제는 별거를 권하는 것이 좋습니다.
떨어져 있으면 안 보였던 내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죠.
그렇게 다시 합칠 수도 있고, 여전히 화해가 안 되면 ‘혼인 무효화’를 시켜 자유를 줍니다.
이런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지 흑백 논리로 나가는 것은 이 시대에 굉장히 위험합니다.
이것은 저의 긴 사제 생활을 통해 느낀 거죠.
결혼은 신성하고 아름다운 겁니다.
하지만 절대 만만치 않죠.
혼자 사는 것도 힘든데 둘이 사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그리고 둘만이 아니라, 아이들, 시댁, 친정 끈들이 서로 엉켜 얼마나 복잡합니까?
가정을 꾸미는 부부를 위해 교회는 지극한 관심을 갖고 기도합니다.
여러분들 가정에 축복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또 남편과 아내와 갈등이 있으신 분들, 갈등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 십자가를 보시고, 자식들을 바라보시며 그 위기 위기를 잘 넘기 바랍니다.
여러분들 사랑합니다.
♣2021년 연중 제76주일 (10/03)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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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원문보기 글쓴이: 하늘호수♡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