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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거룩을 씨름하다
해운대숨쉬는교회 10월 13일 주일강단
성경: 사무엘상 21:7-15
[사무엘상강해 57]
제목: 두려움을 넘어서라.
서론>
지난 시간에 다윗이 한 거짓말을 상황윤리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상황에 따라 말씀을 어겨도 좋은가? 라는 물음에 말씀에 불순종해도 좋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 8절에서 만나는 다윗은 또다시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여 대답합니다. 제사장이 준 거룩한 떡, 진설병을 먹고 허기진 배를 채운 후에 이번에는 자기를 보호할 무기를 요청합니다. 그런데 다시 거짓말을 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위는 앞에 한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음식과 무기를 제공 받으려는 연속된 하나의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이러한 행위는 다윗이 처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사울의 눈을 피해 도망을 다니고 있습니다. 민가를 찾아 도움을 구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놉 땅의 실로 성소에 들러 제사장에게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왜 이렇게 다윗이 도망을 다니고 제사장에게까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잡히면, 사울 왕의 손에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공포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음이 본문10, 12절에 강조되어 있습니다. 어디 다윗만 두려움에 싸여 있을까요?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어제의 승리를 다시 경험하려면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7-9).
본문 7절을 보시면, 다윗은 지금까지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며 자기의 은신처를 숨겨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놉 땅에 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와서 한 일, 곧 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운 일이 탄로가 날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가 있었는데, 그는 사울의 신하인 목자장, 에돔 사람 도엑입니다. 사울의 목자장이라면, 다윗이 사울 왕의 미움을 받아서 도망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러다가 다윗이 어디 숨어 있으며, 도망 다니면서 다윗이 한 일이 낱낱이 밝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다가 다윗이 사울 왕의 손에 잡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분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시면, 다윗이 에돔 사람 도엑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배고픔을 해결한 후 이번에는 제사장에게 자기와 함께 한 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기를 요청합니다. 그는 이번에도 거짓말을 합니다.
왕이 급하게 명령해서 자기를 보냈기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칼이나 무기를 가질 겨를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왕의 호위대장이라면, 마땅히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데, 무기조차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 제사장에게 말이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도 본문 9절 말씀에 보시면,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무기를 줍니다. 제사장이 다윗에게 준 칼은 가드 사람 거인족 골리앗의 목을 벨 때 다윗이 사용했던 골리앗의 칼입니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른 것이 없고 그것밖에 없다고 했지만, 다윗은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키가 3미터가 가까이 되고, 골리앗이 입은 갑옷 무게만 57킬로그램에 육박합니다. 그러니 칼의 무게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창날의 무게만 약 6.8킬로그램 나갑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울 왕이 자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므로 사울을 두려워해서 피해 도망다니다가 거짓말까지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데, 골리앗의 칼이 다윗의 손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우연일까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본문 9절 말씀에 보시면, 칼이 보자기에 쌓여 있었는데, 칼을 보관한 위치가 제사장이 입는 세마포 에봇 뒤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골리앗의 칼은 승자로서 다윗의 전리품이자 이스라엘 군대의 전리품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성소에 보관한 것은 이스라엘에 승리를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은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군대가 거인 골리앗을 보고 벌벌 떨고 있을 때, 그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 칼과 창으로 나가지 아니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싸웠던 용맹한 다윗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두려움을 없애주기 위해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 승리했을 때를 떠올리도록, 그때의 다윗으로 돌아가도록 영감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한 칼을 다윗에게 주며 어제의 승리를 다시 경험하려면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용감한 다윗도 어제의 골리앗과의 승리의 감격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윗을 정신없이 도망다니게 하고,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다윗이 되게 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아무리 다윗이라고 하더라도 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제의 승리가 오늘의 패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렇게 용기도, 믿음마저 다운되어 있는 상태에서 골리앗과 같은 거인족을 또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려움이 극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가 싸우지도 않겠지만, 등 떠밀려 나가다 죽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일 것입니다.
혹 여러분도 다윗과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난날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 날을 추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걱정하지 않고 불안해 하지 않았던 그때의 여러분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어제의 승리를, 어제의 기적을 경험하려면 두려움을 반드시 극복해야 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면 어떻게 됩니까?
둘째로, 두려움을 피해 멀리 달아나는 것은 두려움에 지는 것입니다.(10-11).
다윗에게 용기를 내라, 어제의 승리를 다시 경험하려면 두려움을 극복하라고 했더니, 그가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본문 10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사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다 못해 이제는 이스라엘의 적 블레셋 땅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한 것은 앞 단락 본문 7절 말씀에 나오는 에돔 사람 도엑 때문입니다. 사울의 목자장이 다윗이 지금 놉 땅에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다윗은 불안해서 이 땅을 떠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망명이라도 하지 않으면, 다윗의 목숨은 보장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본문을 보시면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해서 피해 도망다니면 다닐수록, 그가 자기 신분을 노출하기를 두려워해서 거짓말을 할수록, 어떻게 상황이 전개되고 있습니까? 그가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그가 숨어 다니며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노출이 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한 가지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블레셋 땅 가드 사람 아기스에게 망명한 것 때문에 사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을지는 몰라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두려움과 맞서 싸우기보다 도망다니는 다윗은 두려움에게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윗의 처지를 생각해 보면, 그럴만한 상황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어디 도피할 데가 없어서, 어디 피신할 데가 없어서 적의 나라로 망명했을까? 라고 좋게 생각한다고 해도 다윗의 이러한 모습은 골리앗의 칼을 든 이전의 다윗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보다는 도망치는 다윗의 연약한 모습을 보며, 우리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두려움에 지는 것입니다. 사울 왕 때문이라고 하지만,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정체를 노출시켜 버리십니다. 공교롭게도 다윗은 블레셋 땅 가드 사람 거인족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한 칼을 어깨에 메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이 진짜 모습을 알아본 것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한 이 노래는 다윗이 블레셋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승리했을 때 환영나온 여인들이 부른 노래입니다. 그래서 아기스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블레셋 군대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이스라엘의 왕 사울이 아니라 누구라는 것입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사울 왕보다 다윗을 마음에 왕으로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을 곁에 두는 것은 왕이나 블레셋에 위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블레셋 사람들은 다윗의 이름만 들어도 간담이 녹고 두려워 떠는데, 그런데도 지금 다윗은 사울 왕을 두려워해서 정치적으로 망명까지 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까?
다윗은 지금 자기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다윗에게 싸인을 주고 계십니다. 다윗아 너가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두려움에 지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계십니다. 도망 다니지 말고 두려움과 맞서 싸우라고 하십니다.
두려움에 지는 것은 곧 사울 왕에게도 지는 것이지만, 누구에게 지는 것입니까? 블레셋 군대에게 지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겁이 있습니다. 겁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벼랑 끝에 서는 것을 무서워합니다. 혹시 발을 헛디뎌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라고 무서워합니다. 저보고 번지 점프를 하라고 하면, 저는 처음에는 무서워할 것입니다. 등떠밀면 화 낼 수도 있습니다. 로프에 몸을 맡긴 채 아래로 뛰어내리다가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왜냐하면, 예전에 바이킹을 타다가 심장이 놀란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번지 점프를 해야만하는 상황이 온다면, 저도 제 안에 있는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만약, 두려워 번지 점프를 피해 도망다닌다면, 저는 평생 번지점프를 극복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다윗도 두려움을 피해 멀리 도망갔습니다. 지금 다윗은 두려움에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지게 되면 인생이 어디까지 추락하는 지를 신앙이 어디까지 추락하는 지를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셋째로, 두려움에 지게 되면 나의 민낯을 보게 될 것입니다. (12-15).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의 참모습을 알아보고 한 말 때문에 다윗은 지레 겁을 먹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후환을 없애기 위해 다윗을 죽여 없애자고 왕에게 고하지 않았음에도 다윗은 이제 정체가 탄로 났기 때문에 자기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것입니다. 땅이 꺼지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을 두려워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성경은 아기스의 신하들이 한 말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에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사울이 자기 신하들을 시켜서 다윗을 잡아 오라고 했지만, 그래서 죽여 없애려고 하지만, 아직 사울 왕에게 잡힌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는 사울 왕의 손이 미치지 않는 이스라엘의 적 블레셋 땅까지 피신해 와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 왕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자기 정체가 탄로가 나서 이를 알아본 가드 왕 아기스가 다윗의 목을 가져오라고 할까 봐 심히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정직한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해서 제사장마저 속이는 거짓말을 했는데, 이제는 가드 왕 아기스를 사울 왕 보다 더 두려워해서 그 행동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본문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그적거리다 라는 뜻은 “대문짝에 표를 하다”란 의미입니다. 침을 수염에 흘리며 대문짝에 알아볼 수도 없는 낙서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미친 체한 것도 상대를 속이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라며 그 땅의 왕은 사울이 아니라 다윗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아둔 그는 이렇게까지 자기를 망가지게 합니다. 이러한 행동은 다윗을 보는 사람들에게 미치광이 취급하게 해서 위기를 벗어나려고 다윗이 기지를 발휘한 것으로 보려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연기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연기는 다행히 가드 왕 아기스에게 먹힙니다. 그가 의도한 대로 본문 14, 15절 말씀을 보시면, 그를 미치광이 취급합니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다윗을 내치게 합니다. 아기스와 신하들 앞에서 미친 체하는 것을 보며, 나라도 다윗의 처지가 되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다윗의 편을 들어 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러한 일을 겪게 하셔서 그가 왕이 된 후 지금의 치욕을 후일에 블레셋에 갚아 줄 것이라고 마음먹게 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서 다윗의 민낯, 사람들에게 숨기고 싶은 두려움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이 다윗의 처량한 신세에 동정을 보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때의 다윗의 민낯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용기도, 두려움이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큰비가 오기 전의 하늘을 여러분은 쳐다 본적이 있습니까? 저 멀리 있던 시커먼 먹구름이 내 위에 하얗게 떠 있는 구름을 삼켜버리고 갑자기 어두워진 하늘을 보지 않습니까?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두려움이 내 신앙도, 나 자신도 삼켜버립니다.
물론 시편에 다윗이 도피 생활하면서 또한 망명하면서 지은 시들을 보면, 그 믿음이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상 21 : 7-15절의 이 단락은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해서 블레셋 땅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신해서 망명했음과 정체가 탄로 나자 그가 아기스 왕을 심히 두려워해서 아기스 왕과 신하들 앞에서 미친 체하는 치욕을 경험했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에 대한 긍정적인 인물묘사가 아니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성경 기자의 의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두려움, 공포는 자기가 지금 불안해하고 있고, 걱정되는 것이 있는데, 보통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혼이 나갈 정도로 불안해하고, 걱정되기 때문에 그로 인해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보면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어제의 승리를 또다시 경험하려면 두려움은 극복해야 하고, 두려움을 피해 달아나는 것은 두려움에 지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지게 되면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신앙도, 자기도 망가지게 되고 이러한 상태에서 자기의 민낯을 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내 민낯을 언제 보았습니까? 어느 때 내 신앙의 밑바닥을 보았습니까?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심하게 불안해하고,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심하게 걱정하고, 하나님이 계시는데도 두려워할 그때가 가장 내 신앙과 내 인생의 민낯을 본 때입니다.
마가복음 4장 35절 이하에 보시면,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다에 광풍이 일어나서 배에 물이 들어와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배 안에는 어부로 잔뼈가 굵은 바다 사나이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풍이 거세고 배 안에 물이 쳐들어 옵니다. 제자들은 이대로 가다간, 배가 침몰해서 다 빠져 죽게 될 것만 같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제자들이 심히 불안해하고 심히 걱정하는 그 시각에 예수님은 고물을 배고 이런 상황에서도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서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돌아보지 않습니까? 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보시며,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왜 제자들이 주님이 계신데도 심히 불안해하고 심히 걱정하고 두려워했습니까?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꼈습니까? 아직 그들 안에 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두려움을 피할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제자들이 이런 상황으로 인도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복음전하다가 순교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죽음 앞에서 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에지지 말라고,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제자들을 보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제자들처럼 이런 상황을 만나면 믿음은 온데간데없고 심히 불안해하고, 심히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제자들의 민낯이 우리의 민낯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혼기가 지난 노총각 노처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면, 이러다가 올해도 결혼은 물 건너가겠다고 불안해 하고 걱정합니다. 암과 같은 중한 병에 걸려 있는 분은 이러다가 병이 낫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가 엄습하는 것을 느낍니다.
오랜 경기침체로 자영업자들이 폐업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이렇게 장사하다가는 본전도 못 건지겠다, 빚더미에 올라앉겠다, 이러다가 길바닥에 주저앉을 수도 있겠다 라고 합니다. 이러다가 노후에는 빈털터리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공직에 있는 분은 자리에서 물러날 수도 있겠다고 합니다. 또한 재수생은 올해도 이러다간 떨어지겠다. 라며 심히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이런저런 불안과 걱정하는 문제를 주님께서는 지금 당장 고요하라, 잔잔하라 하셔서 여러분에게 일고 있는 광풍을 잠재워 주실 수 있으신데도 이런 상황까지 오게 하신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은 저와 여러분이 두려움을 극복하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움에 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맞서 싸우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두려움에 져서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시편 62편 1, 2절에서 다윗은 이런 상황 가운데 있을 때 자기가 도망도 다녀보았고, 거짓말도 해보고 급기야 망명도 해 보았지만, 자기가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오직 하나님만 나의 구원이시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아멘.
이처럼 다윗과 같이 마침내 두려움을 이겨내고 믿음의 고백을 하시는, 승리의 고백을 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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