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때론 기이하다. 축구의 재미와 팬들의 환호가 언제나 골과 슈팅 숫자에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0대1의 패배가 5대0의 승리보다 더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하는 게 축구다. 골 장면이 희소한 종목의 특성상, 골의 순간을 엮어내기 위해 경쟁하는 바로 그 과정이 지난하다면, 팬들은 득점 장면의 유무와 상관없이 호응이 아닌 하품이나 야유를 보내고 마는 것이다.
지난 14일에 열린 세네갈 전은 이처럼 기이한 축구의 매력이 적절히 발휘된 인상적인 경기였다. 언제부턴가 한국 대표팀 A매치에서 사라진 것 같던 열기와 흥분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고 현장의 공기는 경기 내내 그 어느 때보다 들떠 있었다. 기대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선수들의 움직임을 뜯어보는 관중의 표정은 만족스런 미소와 뒤섞인 채였다.
한국 축구 공격의 사각 편대 |
결과는 ‘고작’ 2대0 승리였지만, 세네갈 전은 허정무 감독 부임 이후 최고 수준의 재미를 안겨준 수작이었다. 경기장을 뛰노는 선수들의 발끝엔 자신감이 그득했고, 그들이 공을 주고 받을 때면 객석에서는 언제나 기대감이 맴돌았다. 특히, 이 날의 전반전 45분은 한국 대표팀 축구의 발전상을 압축해 보여준 시간이었다. 유럽 진출 이후 물오른 기량을 과시하는 선수들과 국내에서 차곡차곡 재능을 쌓아올린 선수들이 저마다의 장점을 조화롭게 내보이며 관중을 매료시켰다. 달라진 국가대표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던 현장의 팬들은 특정 선수 몇몇에 대해서는 특히나 더 뜨거운 환성을 실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관중의 마음 속에서 갈채를 이끌어낸 까닭은 무엇일까.
1. ‘FC서울 트라이앵글’, 대한민국 공격 축구의 새로운 옵션
포백 앞까지 내려온 기성용이 짧게 전방을 응시한다. 과녁을 확인한 기성용은 잠시 고개를 숙이는 듯하더니 이내 왼쪽 팔을 슬며시 앞으로 내밀며 몸을 기울인다. 기성용이 느릿하게 뒤로 들어올린 발을 낮고 빠른 속도로 떠난 둥근 공은 어느새 전방을 휘젓던 박주영의 가슴에 닿는다. 가볍게 공을 퉁겨 공격권을 확보한 박주영은 수비수를 등진 채로 서서 측면을 파고 들던 이청용에게 가볍게 공을 밀어준다.
세네갈 전에서 이 세 명이 함께 뛴 전반전 45분은 축구팬들에게 한국 축구의 발전상을 시연한 시간이다. 불과 3~4초 만에 공을 주고 받은 세 사람의 협업은 한국식 공격 축구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경기장의 폭과 길이에 갇힌 움직임이나, 멈춰진 동료의 몸을 겨냥하는 상투적 패스로 답답함을 주던 지리한 축구는 더 이상 한국 축구에 걸맞는 서술이 아니다. 완장만큼 도드라진 박지성의 활약이 든든히 중심을 잡는 동안, FC서울에서 나란히 프로 데뷔전을 치렀던 세 명의 공격수는 경이로운 조화 속에 상대 진영을 압박해 나가는 중이다.
지금은 각자 다른 클럽의 유니폼을 입고 뛰지만, 과거 K-리그 FC서울에서 함께 뛰며 호흡을 맞췄던 이 세 명의 태극 전사는 이제 대표팀에서 자신들의 축구를 더욱 다듬어 나가고 있다. 서로를 너무도 잘 아는 이 세 명이 전개하는 공격의 순간은 우리 대표팀이 매 경기 상대를 압도하는 공격 장면을 언제든 연출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잡은 이들의 존재는 허정무 축구의 공격 전술이 이전 대표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매혹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
2. ‘한국형 지단’ 박지성의 건재
1998년 월드컵과 2000년 유럽선수권대회를 연달아 제패한 프랑스 대표팀에는 독보적인 중원의 지휘자 지네딘 지단이 있었다. 프랑스 전술의 중심에서 팀 전체를 총괄한 지단의 존재는 스스로의 뛰어난 플레이와 동료들의 신뢰를 묶어 프랑스가 최강자로 군림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
10년 전 프랑스에 지단이 있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박지성이 있다. 테크닉과 플레이 스타일은 다를지언정, 팀 공격의 전개를 효과적으로 유도한다는 점에서 박지성의 팀내 역할은 지네딘 지단의 한국적 변용으로 부를만 하다.
어느새 주장 완장을 차고 후배들을 통솔하게 된 박지성은 허정무 감독의 월드컵 구상에서 핵심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팀내 비중이 높을수록 동료들과 리듬을 맞추는 건 쉽지 않은 일. 자신의 장점과 타인의 장점을 교묘하게 배합하는 박지성의 플레이가 돋보이는 것은 바로 그래서다. 톱클래스 무대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과 동료들의 무한 신뢰 속에서 박지성은 팀 공격의 중심적 역할을 무리 없이 수행한다.
박지성은 소속팀 맨유에서 걸출한 동료들의 빈틈을 메워주는 스쿼드 플레이어로 활약하지만, 대표팀에서는 전술의 중심이자 동료들의 ‘믿을맨’으로 이중의 부담을 짊어진다. 소속팀에서는 마무리와 승리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지만, 대표팀에서는 경기장 안팎에 산적한 해결 과제 틈에서 여러 가지 임무를 소화해야 한다.
세네갈 전의 경우, 공격의 물꼬를 트는 역할이 기성용과 이청용에게 집중되자 박지성은 중원에서 최전방으로 시원시원하게 넘어오는 팀 공격의 연결자로 나섰다.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언제나처럼 동료들과의 조화를 우선시하는 플레이로 FC서울 트리오의 오랜 호흡 틈에 온전히 스며들었다.
팬들이 박지성이 공을 잡을 때마다 환호하고 함성을 내지르는 것은 단순히 그가 유명 클럽에 속한 셀러브리티이기 때문은 아니다. 공을 잡았을 때 무언가를 만들어내리라 기대를 하게 만드는 박지성의 존재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박지성은 자신만의 주도적 역할을 서서히 완성시켜가는 것으로 대표팀 공격의 리더로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굳혀가고 있다.
|
3. 돌아온 차두리, 유럽형 풀백의 가능성
이날 관중의 박수 갈채를 집중적으로 받은 또다른 인물은 오랜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차두리다. 축구팬들은 차두리가 공을 잡을 때면 매번 기대섞인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이젠 더 이상 공격수가 아닌 수비수지만, 차두리가 아무리 후미진 곳에서 공을 잡는다 하더라도 팬들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달려, 부딪혀!” 차두리는 특유의 스피드와 힘을 강화시켜 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유럽의 거구들을 과격한 수비로 제압하는 측면 수비수의 존재는 한국 축구의 숙원이다. 발빠른 윙어와의 경쟁, 그리고 횡으로의 활동폭이 넓어진 최전방 공격수들과도 쉴 새 없이 맞닥뜨려야 하는 현대 축구의 풀백은 힘과 스피드를 겸비해야 한다. 차두리를 향한 기대감의 기저에는 그래서 유럽형 풀백에 대한 로망이 깔려 있다. 축구팬들은 세네갈 전에서 차두리를 통해 그 가능성을 엿본다. 공중볼 다툼에서도 유용한 옵션이 될 수 있는 차두리의 등장은 그래서 오른쪽 풀백 주전 경쟁 구도를 크게 흔들어놓을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2002년을 4강의 중심에서, 2006년을 중계석에서 보낸 차두리는 2010년을 다시 태극마크와 함께 보내길 원한다. 하지만, 3년만에 돌아온 세네갈 전에서 차두리는 부담을 털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차두리는 유럽에 진출한 한국 선수들 가운데 (박주영과 함께) 1부 리그에서 붙박이 주전으로 뛰는 ‘드문’ 인재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매주 월드클래스 선수들과 경합하는 차두리는 선천적 재능을 풍부한 경험으로 치환하며 현대 축구가 원하는 풀백에 점점 더 다가가는 중이다. 최고 수준의 무대에서 자신의 역량을 확인한 차두리는 타고난 재능을 쉼 없이 단련해 자신감까지 토핑했다. 세네갈 전에서 예상보다 많은 시간 그라운드를 누빈 차두리의 가능성은 그래서 활짝 열려 있다. 돌아온 차두리를 반기는 팬들의 환호가 대단했던 것도 이러한 변화가 눈에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중을 흥분시키는 선수의 존재는 팬들에게 언제나 큰 위안이 된다. 축구팬들은 차두리를 잊지 않았고, 차두리는 우리 시야 밖에서 큰 발전을 이뤄 돌아왔다. 측면 풀백 경쟁에 새로운 긴장감을 부여한 차두리의 존재는 월드컵으로 가는 국가대표 축구팀에 더 큰 기대를 갖게 하는 이유다.
첫댓글 중앙 수비는 이정수, 조용형, 곽태휘(부상 복귀), 오른쪽 풀백은 오범석, 차두리, 왼쪽 풀백은 김동진, 이영표.. 수비수들의 경쟁은 점점 재미있어 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