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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컴앤씨월드미션 원문보기 글쓴이: 瑤翰 김요한
성경의 저자는 참 순수한 분들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고린도전서 5장과 같은 내용을 쉽게 취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복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성경에서 인간의 죄와 그 결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의 경전은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러한
인간의 치부를 다루는 것은 그 타락한 결과를 치료하기 위한 처방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이란 제품의 사용설명서라고 말하는 겁니다.
성경은 그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거룩이기 때문에 바로 성경입니다.
부패한 과정의 이야기는 타락한 인간을 치료하는 과정이 됩니다.
우리 육신의 병도 진단이 되기만 하면 치료의 방법이 나오는 것과 같은 이칩니다.
성경에서 부패한 인간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처방을 제시하는 것은 예를 들면
집나간 탕자를 찾기 위해 아버지가 사창가를 돌아다니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부정하고 추잡스러운 인간의 이야기들이 들어 있다고
성경의 거룩한 권위가 약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경은 죄인과 병자를 다룹니다. 의사들이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환자의
온갖 오물을 다 감당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더럽고 추잡한 부분을 다 드러내어
치료를 해 나갑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은 이 후 나타나는 현상은 그 전 보다
더 많은 실패를 맛보고, 더 형편이 없는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런 인간이 가진 취약한 문제를 왜 심각하게 생각하는 걸까요?
바로 고린도교회의 율법적인 성향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조상 곧 12지파의 전통을
중요시 합니다. 특히 장자의 계통을 우대합니다. 한국도 옛날에 그런 전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족보에는 치욕적인 사건이 많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자입니다(창35) 그 장자가 서모 빌하를 범하는 일(창49, 대상5장)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장자의 이름은 있으나 그만 명분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빌하는 단과 납달리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단은 형제들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히틀러 같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다윗에게
까지도 그대로 계속이 됩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후궁들을 고의로 범합니다(삼하16:22이하)
아비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도전입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근친상간을 금하고 있습니다
1절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음행, 아비의 아내 곧 권위에 도전하지 마라입니다.
왜냐하면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겔22:7절 네 가운데서 부모를 업신 여겼으며
10절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는 자도 있었으며
11절 어떤 사람은 그 이웃의 아내, 어떤 사람은 그의 며느리
어떤 사람은 그 자매 곧 아버지의 딸과 관계했답니다.
12절 나를 잊어버렸도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고린도교회도 바로 하나님을 잊어버린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래서 고전5장은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에 도전하는 일을 고린도교회가 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2절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너희가 교만하여져서... 분명 고린도교회의 범죄는 하나님의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로 그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은 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고후13:5)
성령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영이십니다(사11:2) 그렇지만 고린도교회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육체들이었습니다(3장)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
곧 임재의식이 없으므로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거듭나서 성령이 임한 사람의 증거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식인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없는 것이 율법적인 신앙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문제점입니다.
3절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바울은 영으로 이미 고린도교회의 문제의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심판이 되었습니다.
치리 방법은 4절의 기준으로 5절입니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입니다.
바울은 말씀과 영으로 다른 사람을 치리했습니다. 육신은 사단에 내어주고
영은 구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사람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귀를 끌고 와라’
하면 그대로 되었고 귀신을 향해 ‘나가라’하시니 그대로 되었습니다.
풍랑을 향해 ‘잔잔하라’ 또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 등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처럼 성령 안에서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은 그 입의
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비밀은 너무 커서 이해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말씀을 받은 자만 아는 주관적인 겁니다. 바울은 그의 영으로 원격으로 치리를 합니다.
4절 “주 예수 이름 이름으로 나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주 예수의 이름 안에서 내 영이 너희와
함께 있다는 바울의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한 영적인 권위를 위임을 받아서 치리를 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5절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육신이란 옷을 입고 있다가 다른 옷을 갈아입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 겨울옷을 벗고 봄옷으로 갈아입어야 하듯이 죽음을 통해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옷을 갈아입습니다. 이것이 육신이 죽은 다음의 신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뱃속에 있는 아기가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듯 우리는 이 땅에서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신비를 그리워합니다.
어차피 인간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귀신이든 성령이든 양쪽 하나입니다.
‘주 예수의 날’ 구원이 완성되는 날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치리로
인해 육신이 멸해진 사람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로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인 중에는 남자는 병치레가 20년 여자는 30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하나님의 치리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몸 곧 육신의 자유가 아니라 영의 자유입니다(고후3:17)
고린도교회는 영의 자유를 몸의 자유로 사용하고 말았습니다. 방탕이죠.
그러므로 천국은 언제나 영적인 차원에서 말해야 합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지 말라고 하셨음에도 강행을 하여 결국 치리를 당했습니다.
이건 구원과 상관이 있는 죄가 아니라 육신에 징계가 주어지는 치리적인 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에서 용서는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범한 몸으로 행한 죄는 치리적인 용서로 인해 해결이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치리적인 고난이나 질병은 제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6절 “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랑이라고 했는데 바울의 자랑은 교회와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에겐 성도가
자랑의 면류관입니다(살전2:19) 따라서 우리는 서로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고후1:14)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랑하고
자신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간증을 할 때에 각별히 주의 할 점은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교회 저 교회에 돌아다니며
간증하다가 그만 신앙을 버려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증이라는 것 그리 좋은 게 아닙니다.
특히 천국 지옥을 봤다는 간증은 정말 유치한 일입니다. 그건 본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으로 초대하는 극적인 방법이신데 계급장인 양 자랑하고 다니면 어떡합니까?
7절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롬11:16절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니 떡 덩이도 그러하다’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해 누룩 없는 떡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성도의 저력은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거룩에 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이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 곧 죽음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 죽으심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살으심으로 부활에 연합이 된 걸 기념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육체가 있는 동안에는 반복 생각하므로 거룩함으로 보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 된 사실을 늘 기억하고 묵상해야 하는 겁니다.
구약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반드시 각자가 대속물을 가지고 갑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양으로 드려진 후에는 죄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복을 받으러 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아버지여 죄인이옵니다’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죄인으로 출발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죠.
아담 안에 있던 우리의 범죄함을 위해 단번에 죽으시고 우리의 의를 위해 다시
살아나신(롬4:25) 그리스도를 주를 믿고 따르므로 의롭게 된 사실을 항상 유념해야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월절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유월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말입니다.
8절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명절을 지키되 절기가 아니라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이신 그리스도로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완전함에 나아가라는 뜻입니다.
묵은 누룩은 율법적입니다. 곧 유대적인 것입니다. 유대인은 율법도 성전도
받은 민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죽이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볼 때에
아직까지 그들은 이방인이 되고 있습니다. 묵은 누룩의 떡을 기념하고 있는 겁니다.
율법 아래서는 결코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율법이 있으면 율법에
의한 죄를 성전에서 해결하는 법인데 주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하시므로 이 땅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으로는 죄를 처리할 수 있는 길이 없는 겁니다.
새 덩어리를 이루라는 뜻은 죄를 이기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성령 안에서 한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죄다 그러므로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이렇게 해야
된다고 말해서는 결코 되지 않습니다. 죄가 싫어져야만 죄를 이깁니다.
자연은 진정한 자유가 뭔지 보여주는 우리의 뜰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태의 흐름보다 자연의 흐름에 민감해야 합니다.
자연은 말은 없고 신호만 있을 뿐입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영은 우리 안에서 이와 같은 영적인 분별과 이치를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생각의 성향을 바꿉니다.
만일 죄라는 소리를 많이 하는 사람은 아직 죄 중에 있을 가능이 큽니다.
의인은 영의 생각으로 성향이 기울어지기 때문에 죄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정죄하고 있는 사람은 의인이 아니라 바로 그가 죄인인 겁니다.
인간의 불행은 가난 무지 그리고 나쁜 환경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고
사랑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모든 만물은 다 인간의 차원입니다. 인간은 어디서나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시23: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만 아니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악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인간의 죄 문제를 볼 것이 아니라
거룩한 누룩이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상태에서 인간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 거듭나서 영생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리스도를 사랑하여
그와 하나가 된 계명을 지키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서 형제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는 결심으로 죄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이깁니다.
또한 여차하면 어둠에 빠져 허둥대기 때문에 주권을 그리스도께 드려 주님은
내게서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며 겸손하게 주님 앞에 엎드립니다.
또한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요14:31) 하신 주님께 이끌려 그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를 향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게 됩니다. 바로 누룩 없는 떡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나머지 고전 5:9-13절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보길 권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