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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a Universalis
 
 
 
카페 게시글
역사게시판 동아시아 조선시대의 법률제도 중 지금의 항소에 해당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입니다.
패러독스. 추천 0 조회 308 10.11.17 12:39 댓글 1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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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1.17 16:07

    첫댓글 부민고소금지법은 중앙집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지방의 품관, 향리들이 중앙에서 임명한 수령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을 막기 위한 거였다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수령의 전횡을 낳았죠...;;

  • 10.11.18 19:51

    정조시대 격쟁의 경우 정조 시기에 궁에 있을 때 보단, 주로 정조가 화성 행궁으로 행차 할 때 잦았다고 합니다. 신문고의 경우, 아예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주로 양반들의 노비 소유 관련 분쟁에 자주 쓰였다더군요;; 아무래도 궁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게 아니다 보니...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항소' 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살인 사건의 경우 지방 수령의 재판을 거쳐 한양으로, 결국 왕의 재가를 받아야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 10.11.20 12:19

    격쟁의 경우는 임금의 출행이 있을 때 자주 일어났습니다. 정조의 화성행행도 물론 사례 중의 하나겠지만, '능행' 등 임금의 행차가 있을 때가 격쟁의 기회였죠. 그러나 나중에 이런 관행조차 사전에 '뒷돈'을 먹여야 가능했다고 하네요...-_-;

  • 10.11.19 13:42

    전근대국가에서 무슨 항소가 있습니까. 그리고 부민고소급지법은 지방의 아전들이나 토호들이 관리알기를 일개 개만도 못하게 여겨서 고소가 남발하기에 만든것인데 오히려 이것때문에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버젓이 저지르고 다녔습지요.

  • 10.11.20 12:17

    위의 개념은 항소라기 보다는 [고소]라고 보아야 맞을 것 같네요...^^; 또한 본격적으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판을 치게 된 것은, '부민고소금지법'이 제정된지 수백년이 지난 정조 이후의 일입니다. 향촌사림의 지방관 전횡 억제장치가 정조에 의해 박살나면서,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죠...-_-;

  • 10.11.20 14:30

    이미 조선조의 부패는 이 그전부터 있던일아닌가요? 정조때 본격화되었다는것은 정조가 자정능력 자체를 없앴다는건데. 그럼 정조가 사람을 탄압한것인가요. 아님 서원의 대한 규제라도 내린것인가요?

  • 10.11.20 14:52

    정조 이전까지는 이른바 '향촌사림'들에 의한 수령권에 대한 견제가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수령의 비위에 대한 견제나 중앙정부에 대한 '신고'가 상당히 활발하게 작용하죠...^^; 근데 정조시기가 되면, 수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면서 향촌세력들의 퇴조가 나타납니다. 즉 수령의 비위에 대한 견제장치가 망가지게 되었던 것이며~ 오히려 일부 사족들이 수령과 결탁하여 "총체적인 부패"가 진전되게 되는 겁니다...-_-;
    또한 정조시기가 되면- 이런 조류에 따라 향촌세력들의 힘이 약해지고, '경화사족(서울양반)'들의 힘이 매우 막강해집니다. 경향간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고, 이는 경제 및 학문의 수준에까지 영향을 미치죠.

  • 10.11.20 14:53

    조선 중반기까지 향촌사림들도 어느 정도의 학문수준 구비와 정치진출이 가능했지만, 이때쯤 되면 지방선비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바람에 조정에서 특별한 배려를 할 정도가 됩니다. 게다가 한양에서 치러지는 부정기 시험, 즉 '경과', '증광시' 등은 일정에서부터 지방사족들에게 매우 불리했고요...-_-;

  • 10.11.20 17:40

    지방관의 권한강화가 오히려 지방관의 전횡을 만들었군요 ㅡㅡ; 향촌선비들의 실력이 떨어져서 결국 무반으로 진출하는 양반들이 조선후반기의 대량생산; 되는거군요. 고맙습니다

  • 10.11.21 09:02

    조선후기 양반들의 무반진출은 향촌선비의 실력이 떨어져서라기 보다는 '연줄', '당색'의 영향이 상당히 컸습니다. 과거라는 것이 실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이인좌란 이후 영남은 아예 소외되다시피 했구요... 남인이라...-_-; 게다가 경화사족들이 정치를 좌우하면서, 정약용의 시에 의하면 "정승판서도 그놈들이 다 해먹는" 상황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관직'은 아니더라도 소외된 양반들의 [신분보장]은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필수요소였고, 때문에 "합격의 문"이 매우 좁은데다 요직으로 진출이 가능한 문과 대신- '무과'의 합격선을 확대시키는 겁니다...-_-; 천과(千科), 만과(萬科)라고 일컬어질 정도니...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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