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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0일 [대림 제2주일]
복음: 마르코 1,1-8
회개했다면: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지난 주일은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일, 곧 ‘사랑실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과 그의 낙타들에게 물을 마시게 함으로써 아브라함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요셉과 마리아를 맞아들일 줄 알았던 마구간과 같은 사람들 안에서만 태어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랑실천을 하고 있다면 이것이 ‘깨어있는 삶’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개의 세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하시려는 일은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뜻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나의 뜻은 죽는 나라가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맞아들인다고 하면서 자신을 믿고 자신의 힘을 믿는다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세례를 위해 파견된 인물이 있었으니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 목적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맞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요한은 광야에서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습니다.
길쌈을 하거나 경작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의존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옷을 만들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광야는 그저 주님의 뜻에 따라 살고 죽는 곳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을 믿지 않게 될 때야만 하느님의 힘에 맡기게 됩니다.
예수님을 맞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이 회개의 세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윤치영 목사가 ‘감옥조차 하나님 나라로’란 제목으로 간증을 한 내용이 유튜브에 있습니다.
윤치영 목사는 전도사 때부터 호주에서 사역하였습니다.
특별히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좋아 교회는 나날이 발전해갔습니다.
그런데 고3짜리 여자아이 때문에 교도소에 가게 됩니다.
그 아이는 남자친구와 문란한 생활을 하고 부모에게조차 폭력을 쓰고 있었습니다.
부모의 연락을 받고 윤 전도사는 다른 청년들을 동원해 그 아이를 강제로 교회로 데려옵니다.
하도 떼를 쓰는 바람에 아이의 등을 몇 대 때립니다.
그리고 뉴질랜드로 가려 하는 아이를 말리기 위해 스마트폰과 여권을 빼앗습니다.
부모는 윤 전도사가 한 일에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불만이었고 전도사를 고발합니다.
죄목은 납치, 집단폭행, 강도였습니다.
사실 죄목만 가지고는 수십 년의 형량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구치소에서의 생활은 끔찍했습니다.
모든 옷이 다 벗겨지고 마약 등을 몸속에 넣어오지 않았는지 개가 냄새를 맡았습니다.
그런 수치는 처음이었습니다.
1년 이상의 징역을 살면 호주에서 추방당한다고 합니다.
윤 전도사는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는데 자신을 이런 처지에 몰아넣은 주님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아니 고통 때문에 주님을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고 합니다.
재판이 다가옴에 따라 두려움이 급습해와서 머리를 벽에 처박고 싶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순간 기도가 나왔습니다.
“주님, 살려주세요!”
그날 주님이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머리에 손을 얹으셨는데 그때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두려움의 고통이 싹 사라졌습니다.
주님은 끊임없이 “내가 가르쳐주고 싶은 게 있다”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자 자신과 함께 있는 수감자들도 신앙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렇게 재판에 나아가게 됩니다.
아이의 부모가 많은 변호를 해주었지만 어쨌건 강제적인 위력이 행사된 것은 사실이기에 실형 1년을 살게 됩니다.
윤 전도사는 또 실망합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아주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께 삐져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감옥에서 이슬람교도들과 마찰이 있게 됩니다.
교도소 막사는 A에서 E까지 있다고 합니다.
처음 들어오면 A막사에 살고 E막사는 출소 직전에 있는 수감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A막사에 있던 윤 전도사를 어느 날 갑자기 E막사로 옮기라는 명이 떨어집니다.
그런 것은 거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사를 옮기고 나서 이슬람 사람들이 자신을 그다음 날 죽이려는 계획을 다 짜 놓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을 본 윤 전도사는 주님께서 자신의 생명까지도 쥐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숨까지도 주님께 맡기기로 합니다.
1년 형을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아이에 대한 분노로 공황장애와 공황발작, 폐쇄공포증 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를 몇 시간 남겨놓지 않고 눈물이 터졌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며 목사 안수를 받는데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다 사그라지고 병이 치유되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도 자신의 힘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임을 알았습니다.
어느 광고에 자주 나오던 문구가 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You can do it!)
포기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 안에 가진 생각입니다.
하지만 회개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더 깊이 공감합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윤 목사는 처음에 자신의 힘으로 한 아이를 회개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자유를 빼앗고 위력까지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무언가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여길 때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예수님께서 태어나셔도 곧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기 위해 끊임없이 “넌 나 없이 아무것도 못 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야 그분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 나라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
윤 목사의 광야는 감옥이었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크건 작건 이런 무너지고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런 경험들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힘을 빼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내 힘을 믿는 사람이고
아직 내 힘을 믿으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적당한 집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기 이전에 해야 할 일은 나의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는 베들레헴의 큰 여관들이 아니라 광야의 마구간처럼 오직 주님께 의지해야만 하는 나를 만들어갑시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0일 [대림 제2주일]
마르코 1,1-8
비자발적 가난의 슬픔과 교회의 역할
대림 시기 때마다 자주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인 한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옷차림이며 생활방식이 얼마나 청빈하고 소박했으면, 복음사가들 마다 그의 과도하게 없어 보이는 행색을 지적합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마르 1, 6)
낙타털 옷, 가죽 띠, 메뚜기, 들꿀...이런 표현들은 세례자 요한의 극도로 제한되고 겹핍된 삶을
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경험하는 것처럼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살아갈 때, 다시 말해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갈 때, 따라오는 한 가지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자신이 지닌 재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섭리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던 어느날,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보다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결핍과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난과 고통, 배고픔과 목마름 앞에 너무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친 결핍은 우리에게 굴욕과 비참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결핍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교회은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겸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가난은 영예요 기쁨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비자발적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오욕이요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태생적 한계로 비자발적 가난에 노출된 수많은 이웃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은 그런 이웃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우리 교회와 사회가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사회 교리! 말만 꺼내도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사실 사회 교리는 이 시대 가장 강조되어야 할 소중한 교리입니다.
사회 교리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초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로 인해 세세대대로 보존되어야 할 금수강산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굽이굽이 전 국토를 흘러 적시는 아름다운 강줄기를 잔인하게 토막내 버릴 때, 그것은 교회 밖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인해 국격이 완전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들이 만든 그릇된 제도로 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것은 남의 일이라 여기고, 높은 교회 담 안에서 우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연유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말이지 일관되게, 끊임없이 외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 제발 교회와 수도회 담 너머로 나가십시오.
안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낫습니다.”
교황 착좌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계속 반포하시는 일련의 회칙들의 주된 골자는 한결같이 사회 교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또 한 분의 대 예언자, 제2의 세례자 요한이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에 좀더 귀기울이는 대림 제2주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일 강론>
(2023. 12. 10.)(마르 1,1-8)
<회개, 신앙, 구원>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2-8)”
여기서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는 이사야서가 아니라 말라키서 3장 1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예언에서 말하는 ‘사자’는 엘리야 예언자입니다(말라 3,23).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이, 말라키서에 예언되어 있는 엘리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7,10-13).>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이사야서 40장 3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르코복음서 저자가 말라키서와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해서 세례자 요한을 소개한 것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은 메시아 예수님의 활동을 미리 준비하기 위한 것임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너의 길, 주님의 길, 그분의 길”이라는 말은 모두 메시아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
또는 우리가 메시아께 나아가는 길을 뜻합니다.
‘길’은 ‘삶’을 상징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래서 “너의 길을 닦다. 주님의 길을 마련하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다.” 라는 말은, 메시아를 잘 맞아들이기 위해서 ‘삶’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회개’를 뜻하는 말입니다.
4절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죄를 용서받다.’ 라는 말은 ‘구원’을 뜻합니다.
그런데 ‘구원’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십니다.
회개한다고 해서 곧바로(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고,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도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합해져야 합니다.
만일에 회개만 하고 예수님을 안 믿으면?
그것은 방향이 잘못된 회개, 또는 거짓 회개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져야만 진정한 회개입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으면?
그 믿음은 거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와 믿음을 동시에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복음을 믿다.’ 라는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즉 구원받기를 원한다면, 회개해야 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합니다.>
회개와 신앙이 합해져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없어도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치는 사람이 있다. 그 뉘우침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는 그분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뉘우치고서는, 그 은돈 서른 닢을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돌려주면서 말하였다.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으니 나는 죄를 지었소.’ ......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마태 27,3-5).”
유다의 행동과 말을 보면, 그가 진심으로 자기 죄를 뉘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죄를 뉘우치기만 했고,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과 용서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살했다는 것은,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절망 상태에 빠졌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뉘우침은 ‘회개’가 아닙니다.
자살이라는 더 큰 죄를 짓는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8절의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라는 세례자 요한의 말은, “나는 너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킬 뿐이고, 너희를 구원하는 일은 그분께서 하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물로 준 세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회개의 세례’이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는 ‘우리를 구원하는 세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거행하는 영세식에는 ‘회개의 세례’와 ‘성령의 세례’가 모두 포함되어 있고,
세례 받을 준비를 하는 과정은, 세례자 요한 때보다 더 엄격하고 철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성령의 세례’는 신앙 여정의 출발점(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다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끝까지) 가야 합니다.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멈추는 사람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