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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세계의 진실"
(하세가와 게이타로 著)
제4장 중국은 틀림없이 붕괴한다 (part1)
스텔스 전투기의 시험비행을 알지 못한 호금도
셰일가스 혁명에 의해, 극단으로 말하면 미국으로서는 중동이 필요 없게 되었다. 당연히 중동으로부터 철수한다. 이미 유럽으로부터는 철수해 있다. 그러면 미국의 세계전략은 본국과 그 주변으로 국한될 것인가를 생각할 때 당연 떠오르는 것이 중화인민공화국이다.
미국이 부활해 갈 때에 지금 첫째로 생각되는 전략은 중국을 어떻게 해서 쳐부수느냐 하는 것이다. 다만 미국은 중국을 자기의 무력으로 쳐부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점인데, 냉전을 열전으로 전환시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냉전에 참가하는 서방측 제국에 공통된 전략이다.
따라서 중국을 자기의 무력으로 적극적으로 붕괴시키려는 전략은 채택하지 않는다. 열전은 절대로 하지 않으면서 자동적으로 중국이 붕괴하는 것을 지긋이 기다린다. 왜냐하면 중국이 자동적으로 붕괴한다고 미국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지고 중국의 자괴를(스스로 붕괴한다고) 확신하는 걸까. 2011년 1월 11일의 일이다. 당시 게이츠 국방장관이 방중하여 국가주석 호금도(胡錦濤,후진타오)와 북경에서 만났다. 때마침 그날은 중국 공군이 스텔스 전투기 “섬(殲)20”(*1)의 시험비행을 실시하고 있었고 그 모습을 중앙 TV가 실황중계 했다. 당연 회담에서는 그것이 화제가 되었다.
호금도는 게이츠로부터 스텔스 전투기의 시험 비행 얘기를 듣고 “앗” 하는 표정을 떠올렸다. 결국 국가주석, 공산당 총서기이며 인민해방군 정상인 호금도가 최신예기가 시험비행 하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중앙 TV가 중계했다는 것도 몰랐다.
이것은 무엇을 얘기 하는가. 군으로부터 호금도에게 보고가 없었다는 것이다. 게이츠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리고 허리가 빠지도록 놀랐다. 국방장관 게이츠는 자기가 미국의 4군을 컨트롤하는 데에 어떠한 방식이 필요한가, 또 어떠한 처리 방식이 보통으로 행해지는 가를 알고 있다.
그것과 대조해 보면 중국 지도자와 군과의 관계는 너무나도 떨어져 있다. 그것은 즉 중국 공산당이 국가 권력을 장악함에 제일 중요한 골조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을 지탱하는 인민해방군이 중국공산당의 톱의 컨트롤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이츠는 황당하여 워싱턴으로 돌아와서, “공산당이 인민해방군을 컨트롤하는 문민 통제는 붕괴하고 있다”고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오바마는 그 위기적 상황을 이해하고 제7함대의 증강을 기획했다. 이리하여 3월 9일에 제7함대의 두 번째가 되는 핵항모 로날드 레이건이 센디에고를 출항, 일본으로 향했던 것이다.
태평양을 항행하고 있는 도중인 2011년 3월 11일에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났다. 그래서 로날드 레이건은 산리쿠 먼바다(三陸沖)에 14일 도착했다. 도착이 대단히 빨랐던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본인이 평화를 가장하고 있는 탓인지, 일본 매스컴은 기자회견에서 “로날드 레이건은 지진이 일어난지 3일 만에 산리쿠 먼바다에 왔는데 왜 이렇게 일찍 일본에 왔는가”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비행기로는 있을 수 없다고 하는 발상이 떠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1) 섬(殲) 20 : 중국 인민 해방 공군이 시험제작 중인 제5 세대의 스텔스 기.
*2) 제7함대 : 미 해군의 함대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서태평양과 인도양을 담당한다. 태평양 함대의 지휘 하에 있고 사령부는 요코스카를 모항으로 하는 기함 블루 릿지에 있다.
*3) 샌디에고 : 미국 최남서단의 도시. 미 태평양 함대의 기지가 있다.
미얀마는 왜 중국 의존 태도를 바꾸었나.
중국이 스스로 붕괴한다고 믿는 것은 미국뿐만이 아니다.
북한이 제3차 핵실험을 실시했을 때 UN 안보리에서 제재결의가 통과되었다. 이 제재결의는 중국에게 허용되는 빠듯한 한도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유엔헌장 41조 (*1 )에 의한 경제 제재라면 중국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2009년 2차 핵실험 때에도 그러했다. 그 때, 제41조를 발동할 것이 결정되었다. 그 내용은 북한에서 출항하는 화물선이 입항하는 나라는 입항하는 항구에서 임검한다는 것으로 적재화물이 군사물자인 경우에는 이를 몰수한다는 처결도 포함되어있다.
이것이 결정된 것이 2009년 4월 초이다. 그리고 4월 중반에 북한 소유 선박 중 가장 큰 1만5천톤 급 화물선이 남포를 출항, 그 화물선의 뒤를 미국 구축함이 미행했다. 통상 북한의 선박은 반드시 상해의 동쪽에 있는 주산군도(저우산군도, 周山群島)의 해군 기지에 기항한다. 주산 군도까지 오는 연료는 있지만 거기서 앞으로 갈 연료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에서 연료를 탱크에 가득 주유 받은 후 주산반도를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그 화물선은 주산반도에 기착하지 않았다. 그대로 남지나해로 나가 싱가포르를 돌아 말라카 해협을 빠져 나와 미얀마 먼 바다까지 와서 돌연 정지했다. 그리고 미얀마 항에 들어가지 않고 똑 같은 코스를 통하여 귀국했다. 이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이 화물선에는 무기, 탄약이 만재되어 있어서 그것과 바터로 쌀을 받아가려 했다고 당연 생각된다. 그러면 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미얀마가 이번에는 완전한 임검을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미얀마와 북한은 외교관계가 있다. 양곤의 북한 대사관이 버마 정부의 외무성에 대해 “이번 오는 배를 조용히 받아주겠는가. 싣고 온 무기. 탄약을 양륙한 후 거기에 상응하는 쌀을 내어주기를 원한다.”고 교섭했다. 이에 대해 미얀마 정부는 ”UN 헌장 제41조에 근거한 경제제재를 우리나라는 충실히 실행한다”고 하는 회답을 했다.
왜 미얀마는 북한에 그러한 대응을 했던 것 인가. 그것은 단지 북한과의 관계나, 자국이 국제사회에 복귀한다고 하는 목적만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얀마가 그때까지의 중국의존 태도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변국가에서 미얀마는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현재 중국은 미얀마에 대하여 경제개발이든 자원개발이든 모든 것에 걸쳐 발언권이 없다.
그러면 왜 미얀마는 중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나? 미얀마 정부가 중국에 장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중국이 붕괴한다고 보았다. 왜 중국이 붕괴하는가. 중국은 정치체제가 지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판단으로 미얀마는 중국의 주변국가에서 이탈했다.
*1) UN헌장 제41조 : 평화에 대한 위협, 평화의 파괴 및 침략행위에 관한 행동을 규정한 UN 헌장 제7장의 비군사적 조치에 관한 하나의 조항
자연히 만들어진 중국포위망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중국에 딸려있으면 자기들의 정권의 장래가 없다’라고 하는 인식을 아시아의 모든 정부 내지 정권 담당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견해는 이미 ‘중국은 장래가 없다’라고 하는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 몽골이 아베 수상을 받아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의 지원을 받아 미국과 싸운 베트남조차도 변화되어 중국은 적대국이 되어버렸다.
미국의 세계전략은 중국이 자연붕괴하는 것을 지긋이 기다리는 것이다. 중국의 주변국은 거기에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기보다 각국이 중국에 장래가 없다고 확신한 것으로 자연히 중국 포위망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인접국으로서 한국은 어떤가. 한일 관계가 지금은 상당히 좋지 않다. 이것은 변화될 것이다. 이번의 한국의 주일대사**에는 이전에 게이오 의숙대학에 있던 학자가 기용된 것이다. 그러한 인물을 데려간 것은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의 의사표시다. 잘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 박정희 전대통령은 위대했다. 가장 알기 쉬운 위대한 점을 이야기하면 집안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암살되었을 때, 남은 가족이 살 곳이 없었다. 리베이트를 받지 않았고 재산도 만들지 않았다. 한국의 정치가로서 그러한 사람은 더 없이 박정희 밖에 없다. 이것은 훌륭한 것이다.
부친 사후, 딸인 박근혜가 살던 집은 일본류로 말하면 정부가 제공하는 군인 유가족 주택이다. 2DK의 좁은 집이다. 호화주택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한일관계가 잘 되어 간다면 한국은 거의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하게 된다. 경제도 군사도 미국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점점 곤란해진다.
중국의 붕괴는 역사적 흐름으로서 멈출 수 없다
중국이 붕괴한다는 것은 역사적 흐름이다. 대저 중국이란 나라는 근본적 구조적 붕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공산당 독재란 도대체 어떠한 정치체제인가. 최대의 특징은 독재체제 하에서 당의 지도자가 국민 전체를 하나로 묶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말하는 것을 강제로 듣게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지도자를 국민이 뽑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을 듣도록 되어 있는 국민은 그에 대하여 반항하는 것 따위는 허용되지 않는다. 저항하려 해도 수단이 없다. 폭동을 일으켜도 군사력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곧 진압되어 버린다. 1989년 일어난 중국의 천안문 사건은 그것을 잘 얘기한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경우에 효과적인가. 전쟁 때이다. 공산당에 의한 정치체제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에 가장 적합한 체제이다.
그러나, .........(?)이다. 21세기의 세계는 전쟁의 방향으로 가는가 평화의 방향으로 가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평화 쪽으로 향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전쟁에 강한 정치체제, 전쟁에 적합한 정치체제는 따라서 21세기의 시대에는 맞지 않다. 전쟁을 위한 정치체제 따위는 세계의 정치 전체가 허락하지 않는다. 이것은 중요하다. 그래서 1991년 소련이 붕괴했다.
소련에서 일어났던 것은 중국에서도 일어난다.
소련의 붕괴에 관하여, 또 하나, 중국과 공통하는 부분이 있다. 소련이 붕괴하기 6년 전, 필자는 “정보화 사회의 진정한 읽는 법”을 썼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예언한 것은 “냉전에서 이기고 지고 하는 데에 가장 큰 포인트는 결국 군사기술의 레벨의 차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군사기술은 국가가 연구개발해서는 효과가 없다. 군사기술 개발은 민간 기업에 맡긴다. 그리고 민간 기업이 치열하게 경합함으로써 연구개발의 스피드가 오르고 레벨이 올라가는 것이다. 민간 기업의 경쟁을 군사기술에 적용하여 국방체제 가운데 편입시키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군사기술 연구체제이다.
미소 냉전에서 소비에트가 진 것은 거기에 원인이 있다. 예를 들면 소련의 탱크는 세계 최강이라 일컫는다. 그런데 실제로 필자가 본 적이 있는데 소련 전차는 차고가 낮아 조종석에 들어서면 받혀버린다(?). 조종석 해치가 닫혀지지 않는다. 그러한 전차에서 문제인 것은 자비가(?) 충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전차를 만들게 되었는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전차를 구성하는 3요소인 화력, 속력, 장갑의 밸런스를 취하는 데에 가장 좋은 방법은 전차의 높이를 점점 낮추는 것이다. 그래서 “전차의 차고를 낮게 하라”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결정했다. 이에 대해서 “그래서는 효과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전차 기술자는 있을 수 없다. 만약 그런 주장을 한다면 반당 행위가 된다.
그 결과, 1991년 1월에 시작된 걸프 전쟁(*1) 때, 소련제 전차와 미제 전차가 싸워 소련제 전차가 완벽하게 당해버렸다. 그 전차전의 비디오를 영국 통신사가 만들어 NHK가 방영했다. 필자도 그것을 보았는데 소련제 전차는 미제 전차에 대항할 능력이 없는 것이 명확했다.
소련군 수뇌도 “냉전을 열전으로 한다면 반드시 진다. 우리 군이 장비하고 있는 전차는 미군 전차와는 1:1로 대항할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실은, “미군과의 군사력의 차이를 보면 소련군은 도저히 필적할 수 없다. 불가능은 아니더라도 그 격차를 메울 수 없다”는 것은 군사전문가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991년 8월에 쿠데타(*2)가 일어났을 때, 소련군 중심이 동조하지 않았고 러시아 공화국 옐친 대통령은 간단히 진압할 수 있었다. 군사적으로 당할 수 없다는 것을 군인이 인정하게 되자 정치세력 쪽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12월에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가 포기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현재의 중국도 공산당이 주도하는 체제이다. 이치로 말하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다는 보증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소련에서 일어난 것이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반드시 일어난다. 이것이 대전제이다.
그것을 오바마 대통령도 알고 있다. 그래서 미 7함대를 증강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붕괴할 경우에 일어날 수 있는 대혼란을 안정된 질서 속으로 편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군사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동아시아에 배치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위한 군사력이다.
예를 들면 왜 오스프레이(*2)를 오키나와에 배치했는가. 오스프레이는 대단히 항속거리가 긴 비행기이며, 오키나와에서 북경까지 무착륙으로 왕복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사천성 성도(成都, 청두)까지도 무착륙으로 왕복할 수 있다. 따라서 오키나와에 있는 오스프레이를 사용하면 중국이 붕괴했을 때, 중국 전토에 흩어져 있는 미국인 거주자의 구출이 가능하다. 그것이 오스프레이가 오키나와에 있는 이유이다.
*1 ) 걸프 전쟁 : 1990년 8월에 일어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대하여 1991년 1월 UN이 다국적군을 파견해서 시작되었다.2월에 이라크 군이 쿠웨이트에서 물러남으로써 정전했다.
*2 ) 1991년 8월 쿠데타 : 1991년 8월 19일, 소련에서 일어난 쿠데타 사건.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옐친의 저항으로 실패했다.
*3 ) 오프스레이 : 고정익기과 헬기의 특성을 함께 갖춘 수직이착륙기 군용기의 애칭. 종래의 헬기보다 고속이고 항속거리도 길다.
**이병기(李丙琪) 주일대사 약력 : 1947년생,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외시 8회. 대통령 의전수석비서관(노태우 정부), 국가안전기획부 2차장(김영삼 정부). 일본 게이오 대학교 객원 교수. 여의도 연구소 고문
기분 나쁜 “제2대 농민공(農民工)”
여기서 중국의 현상을 보아 두자.
년 8%의 성장이 10년 계속되면 경제 규모는 2배가 된다. 그것이 강택민 시대(*1)와 호금도 시대(*2) 2회나 연속되어 경제규모가 4배 이상이 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 경제성장을 떠받친 가장 큰 지주는 “세계의 공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계의 공장”이기를 계속했기 때문에 저만한 성장이 가능했다.
“세계의 공장”이란, 요컨대 수출이 경제의 지주라고 하는 것이다. 중국의 수출선으로서 최대의 마켓은 유럽이다. 수출의 대략 1/3이 유럽, 미국이 약 25%로 둘째, 일본이 약 20%로 셋째이다. 가장 중요한 유럽이 지금 유로 위기로 대혼란이다. 괴멸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탈리아, 그리스는 물론, 프랑스도 심각한 상태이다. 일본과 EU 사이에 FTP가 이루어진다면 자동차가 전멸한다고 유럽의 자동차 메이커는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FTP가 체결되지 않아도 현시점에서 시트로앙이 위험하며, 르노도 점점 더 쓸모없는 모습이다. 르노는 닛산으로부터 배당증액을 받고 있다. 닛산의 배당이 없다면 경영이 성립하지 않는 지경까지 와 있는 것이다. CEO 곤은 닛산과 르노의 어느 쪽에 비중을 둘지 선택의 압박을 받고 있는데, 어느쪽의 입장에 서든지 진퇴양난이다. 2014년 6월 임기가 끝날 때, 닛산의 CEO도 르노의 CEO도 사임하지 않을까 얘기되고 있다.
2012년 EU 가맹국은 재정규율을 강화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것은 각국이 가진 채무에의 불안, 불신을 제거함으로써 유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인데, 현실적으로 재정적자를 0.6% 이하로 억제한다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독일뿐일 것이다. 그래도 각국은 긴축재정정책을 채택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재정출동(?)에 의한 경기부양책을 내놓는 것은 어렵고, 유럽의 경기 저조는 당분간 계속된다. 그것은 유럽을 최대의 마켓으로 하는 중국에게는 심각한 타격이 된다.
이미 유럽의 불황의 직격을 받아 중국경제는 참담한 상태에 있다. 우선 도시에서는 기업의 도산이 속출하고 실업자가 많이 생기고 있다. 지난번 중국을 방문했을 때, 지붕과 벽이 없는, 기둥만 있는 공장을 보았다. 도산하는 회사는 보통은 임금 미불이 발생한다. 도산한 회사의 종업원은 그것을 조금이라도 되찾으려고 공장에서 물건을 가져가는데, 기계나 책상과 같은 비품뿐 아니라 지붕이나 벽 까지도 가져갔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이상한 모습의 폐업 공장은 얼마라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회사가 도산해서 실업한 사람들에게 재취업의 가망은 없다. 게다가 농촌부에서 도시부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이 몰려온다. 이 사람들도 취직할 수 없기 때문에 도시부는 실업자로 넘쳐나고 있다. 도산에 의한 실업에 더해, 취직할 수 없는 젊은이가 늘어났다. 지금까지 농촌부에서 도시부로 와서 일하는 “농민공”의 실업이 화제였는데, 현재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할 수 없는 사람이 증가하여, “제2대 농민공”이라 불리는 그들의 수는 농민공의 실업률을 넘어섰다.
북경에는 “쥐족”이라고 불리는 젊은이들이 있다. 2단 침대가 놓인 작은 방을 여러 사람이 빌려 교대로 8시간씩 잔다고 한다. 쥐족은 대학을 나온 자도 많고 퍼스컴을 사용할 수 있으며 인터넷도 활용하여 여론형성을 적극적으로 하기도 한다. 반일 데모도 그들과 같은 젊은이가 연락을 취하여 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사이버 공격이나 해커 행위에 손을 댄 자도 있을 것이다.
*1) 강택민 시대 : 1993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선출, 2003년 퇴임.
*2) 호금도 시대 : 2003년,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에 선출. 2013년 퇴임.
GDP의 11%에 해당하는 부동산 재고
중국경제의 호경기를 지탱했던 요소에 부동산 버블이 있었다. 각지에 고층 맨션이 속속 건설되어 그 판매가격은 등귀 일로에 있었다. 바이어 측은 투기가 목적이다. 그 버블이 금융의 긴축에 의해 터졌다.
실업자가 증가하는 상황에 있고, 식료품 가격이 등귀하면 국민 불만이 팽창한다. 서투르게 하면 대규모 폭동이 발생할 위험성도 있다. 그래서 정부는 금융긴축의 정책을 취하고 인플레를 저지하려고 기도했다. 정부의 방침을 받아 금융기관은 부동산 융자도 목을 죈다. 그 결과 부동산의 매매가 감소하고 가격이 하락했다. 투기 목적이 위주이기 때문에 일단 내리기 시작하면 그 흐름은 가속화해 간다. 2011년 1백만 위안(약 1천2백만 옌)의 값이 붙어있던 맨션이 다음 해, 40만 위안으로 팔려 나갔는데 바이어가 붙지 않았다고 한다.
신축 맨션이 1개월 후에는 반값이 된 케이스도 있다. 높은 값으로 산 사람이 노하여 부동산 세일즈맨과 싸운 사건도 일어나고 있다. 손해 본 사람에게 습격을 받아 부서져버린 판매 사무소도 있다.
“인민일보”가 2012년 4월에 보도한 바에 의하면 중국에 있어서 부동산의 재고는 금액으로 해서 대략 5조 위안(약 60조 옌)으로, GDP의 11%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 영향은 부동산에 머무르지 않고 건설이나 시멘트, 강재에도 미치는데 도산하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동산의 가격이 내리는 것으로 금융기관은 다액의 불량채권을 안게 되었다. 중국의 4대 은행 어느 것이든 경영이 악화되고 있다. 지방의 금융기관도 마찬가지이다. 지방 정부는 경제정책으로서 각종 시설의 건설 프로젝트를 밀어붙여 왔다. 거기에 지방의 금융기관이 융자했던 것인데 부동산가격이 내린 것으로 어느 것이나 불량채권화 했다. 경영 기반이 약한 곳은 언제 도산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로서는 지방의 금융기관을 도산시키지 않는다. 예금보호 제도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금융기관의 도산에 의해 예금자는 예금한 돈을 모두 잃는다. 그렇게 된다면 폭동은 필지이다.
게다가, 그것은 그 지방에서 끝나지 않는다. 1건이라도 지방의 금융기관의 도산이 일어난다면 전국에서 예금 인출 소동이 발생하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명백하다. 그렇게 된다면 공황 상태가 되고, 전국에 대폭동이 빈발할 것이다.
국내에 대혼란을 불러 일으키지 않기 위해, 중국 정부는 분식 결산을 하게 해서라도 금융기관의 도산을 방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더구나, 금융기관의 불량채권 문제는 국가 프로젝트인 고속철도 건설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거기까지 자금조달을 받아 온 국유 은행이 대출을 억제했기 때문에 건설이 진전되지 않는 노선이 생기고 있다. 공사를 중단한 것은 좋으나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폭동으로 번진 사례도 있다.
또, 이미 운행되고 있는 고속철도의 경영상태가 나쁘다. 상정했던 수만큼의 승객 유치가 안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운임이 비싼 것이다. 고속철도는 종래의 철도 운임의 3배나 된다. 이래서는 서민이 경원해도 당연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종래의 특급을 이용하고 있다고 한다.
2011년 7월, 절강성 온주시에서 일어난 고속철도의 충돌사고(*1 )에서 사망이 60명으로 적었던 것은 승객이 그다지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 온주에서의 사고 이후, 안전성을 의심받게 되어 속도를 떨어뜨려 운행하기 때문에 스피드의 메리트도 엷어졌다.
게다가, 전술한 LCC(저가항공)가 발전했기 때문에 고속철도는 속도, 가격 양면에서 경쟁력을 잃었다. 무어라 해도 광대한 나라이다. 예를 들면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운남성 곤명까지 7천 Km를 잇는 LCC가 취항하고 있다. 종래의 노선도 포함되는데 철도를 사용하면 3박4일 걸린다. 비행기라면 5시간이다. 운임에 큰 차이가 없으면 모두 비행기를 사용하기로 결정할 것이다. 적자로 증수의 전망이 서지 않는 사업에 융자하는 것은 없다. 고속철도 사업은 실질적으로 파탄해 있다고 해도 좋다.
도금공장에서 사용할 수 없는 양자강 물
연 8%의 경제성장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하는 중국인데, 현재의 상황은 겉보기 이상으로 악화되어 있다. 게다가 더욱 곤란한 것이 있다. 그것은 환경파괴다.
이것이 실로 심각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그다지 지적되고 있지 않으나 첫째 문제는 물이다. 지금, 중국에서 마셔도 해롭지 않은 물을 공급받는 사람은 13억 인구 가운데 1억도 안 된다.
수질 문제뿐이라면 그래도 괜찮으나, 물 그 자체가 부족하다. 황하는 하구에서 1천Km 상류까지 물 흐름이 없다. 물은 강 밑바닥 아래 지하수로서 흐르고 있다. 그 지하수를 퍼 올리기 위해 주변의 농민이 황하의 밑바닥에 들어가 우물을 판다. 그렇게 하면 물은 점점 하류로 내려가지 않게 된다.
또, 지금 세계에서 가장 넓은 강은 양자강인데 이것이 점점 오염되어 상해에 가는데 수로안내인이 없다. 선원의 코라도 있으면 좋다. 냄새가 심해지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키를 잡고 가면 상해에 도착한다. 이것은 우스개 소리가 아니라 실화이다.
상해 시를 흐르고 있는 것은 양자강의 지류의 하나인 황포강인데, 거기에 1만 톤의 돼지 새끼의 사체가 떠내려 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그렇게 되었지만 장소가 상해이기 때문에 TV에 보도되어 아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양자강 물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상해에서 조금 오지로 들어가면 보산이라는 제철소가 있는데 여기에 도금공장을 만들려고 했다. 도금하는 데는 대량의 물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까운 양자강에서 물을 끌어 오면 좋다”고 보통은 생각한다. 그러나 도금한 것을 씻는 데에 양자강 물을 그대로 쓴다면 터무니 없는 것이 된다. 일단 양자강 물을 정화한 다음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물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정수용 풀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기술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도 선채로 죽어 가고 있다(?).
공산당은 개혁을 위해 도산을 인정할 수 없다
전술한대로 지금까지의 20년간, 연 8%의 경제성장을 성취하여 중국경제는 4배의 규모가 되었다. 그 근간은 외국으로부터의 자본 유입, “세계의 공장”으로서 물건을 만들고, 유럽이나 미국에 물건을 판다고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주된 수출선인 유럽 경제가 악화되었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은 “그 정도까지의 GDP가 되어, 그 정도의 인구가 있다면, 지금부터의 중국은 경제를 수출 의존에서 내수형으로 전환하여 착실한 경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 되는 건 아니나 중국에서 그러한 것은 가능하지 않다. 노선을 전환하면 지금까지의 노선으로 경영을 계속하는 기업이 도산하게 된다. 일본도 경제노선의 전환 때 마다 몇 번이나 대량 도산이 일어났다. 소화 40년 공황(*1 ) 등이 바로 그러하다.
실은 경제노선의 전환이 성공하는 데는 기업의 도산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노선에 대응할 수 없는 기업은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공산당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루블 지폐를 찍어 내는 국립은행 고스방크(Gosbank, 구소련 국립은행)의 총재와 아직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대에 만난 적이 있다. 대형 증권회사의 경영자 10인과 함께 1990년 모스크바에 갔을 때의 일이다. 고스방크의 총재와 만나기 전에 모스크바의 일본대사관저에서 일본식의 접대가 있었다. 대사가 내게 “내일의 예정은?”하고 묻기에 “내일은 10시에 고스방크에 가서 총재 게라셴코와 만납니다”고 답하자 대사는 뛰어오를 듯했다. “바로 말씀 드리는데 우리 경제담당 공사를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한다. “어째서입니까”하고 물으니, “경제담당 공사가 고스트방크의 총재 게라센코와 만나고 싶다고 몇 번이나 외무성을 통하여 어포인트를 요청했으나 한번도 어포인트를 주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하세가와씨는 느닷없이 날아와 게라셴코와 어포인트 되었읍니까. 정말이지 불가사의합니다.”고 말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필자는 1990년 3월 소련의 대 신문 이즈베스챠에 긴 논문을 기고했다. 이것을 게라셴코가 읽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하는 녀석이 모스크바에 오는가”하는 것으로 만났던 것이다. 당시, 소련에 개혁의 기운이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유럽, 미국의 지식인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게라셴코의 사무실에 가니 자연 기고한 논문 이야기가 나왔다. 그 표제는 “경제의 재건에는 땀과 눈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땀이 있는 것은 잘 알겠다. 모두가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눈물은 왜 필요한가” 게라셴코의 질문이었다. 필자는 나쁜 것을 부수지 않고서는 경제는 잘 되지 않는다”고 하는 얘기를 했다. 그러자 게라셴코는 “그것을 알 수 없다. 믿어지지 않는다.” 고 말한다.
이쪽 편에서는 놀랐는데, 공산당의 체질로서 그러한 것이다. 마찬가지의 것을 중국 공산당에도 말할 수 있다. 개혁을 위해 기업을 부수는 것을 할 수 없다. 그래서는 잘될 이유가 없다.
*1) 소화 40년 공황 : 1964년부터 65년에 걸쳐 일어난 불경기로 “증권부족”이라 부른다. 1964년에 선우드와 일본특수강, 65년에는 산요특수제강이 도산하여 증권시장이 저조하자 대형 증권사들이 적자에 빠졌다. 1965년 5월 정부는 야마이찌 증권에 일본은행 특융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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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흥미롭게 읽어보앗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