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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한 기억으론 보은 이라고 하면 속리산과 법주사 그리고 야들 야들한 맛이 홍시보다 더 달고 구수했던 물고구마 정도만
기껏 알던 시절, 난 청주에서 하숙을 하며 첫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아마도 1980년 어느 여름날로 생각 된다.
거의 24 시간 이상을 장대비가 쉼 없이 쏟아 붇는데 여지껏 그런 비를 본 적이 없다.
당시 함께 하숙을 하던 충북도청 공무원의 말을 빌리면 보은 읍내는 범람으로 완전 침수되었고 충북도청이 있는 청주로 오는 길
또한 심하게 유실되어 보은은 통신과 함께 하룻밤 완전히 잊혀진 세상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책임감이 강한 분이 밤새 비를 맞으며 걷고 또 걸어 동이 틀 무렵에야 도청에 도착하여 비보를 알리고서야 겨우 사태를 직감할
정도 였다고 한다. 핸펀이 없던 그 시절이 지금은 상상도 아니 되지만
다음 날 현장에 도착한 도지사 내외분 그리고 여러 공무원들은 그 참혹한 재해 앞에서 눈물보만 터 뜨렸다고 하는데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 보은을 가 보았더니 보은 읍내 옆을 흐르는 하천에는 최근에 설치한 교량이 있었는데 교각만 덜렁 서 있었다.
교량 상판 슬래브는 어느 거인이 공기 놀이를 하고 난 것 처럼 여기 저기 널부러져 있었다.
며칠 후 완전 고립되었던 보은 어느 산간 마을로 구조 헬기가 내려 앉자 맨 먼저 달려 온 그 지역 지서장(파출소장)이 헬기 발통을
부여 안고는 대성 통곡을 하더란 것이다. 사연을 물은즉
고립된 마을이 계속 범람하는 홍수물로 완전 침수되어 동네 사람들 전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 되자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열었고 결론은 누군가가 계곡물을 건너서 구조를 요청하러 가야 된다는 것인데 마을 사람들 전체가 지서장을 불러 내 세우곤
이구 동성으로 하는 말이 네 놈은 평소에 지서장이라고 잘 먹고 잘 살았으니 이때 마을을 위해서 희생양이 되라는 것이다.
계곡을 건너 자니 물에 빠져 죽을 노릇이고 안 건너 자니 마을 사람들 손에 맞아 죽을 지경에 까지 이르렀던 지서장의 일화는
실화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잠재 의식에는 관에 대한 불신 내지는 앙금이 화로의 불씨 처럼 언제나 상존하고 있다고 한다. 그 단초가 되는
사건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1592년 임진 왜란 당시 도성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개구라를 친 선조 임금은 그날 밤으로 장대비를 뚫으며 임진강을 건넌다.
경복궁은 곧 바로 불길에 휩 싸이고 만다. 왜놈들이 채 한양에 당도 하기도 전에 조선 민초들의 손에 의해... 다음은
1950년 유월 북괴군이 서울 문턱에 다다를 즈음 이미 대전으로 꼬리를 감춘 이 승만 대통령과 신 성모 국방장관은 우리 용맹한
국군들이 반격을 펼쳐 북진을 거듭하고 있으니 조금도 염려 말라며 헛쏘리를 씨부리고는 얼마 있지 않아 한강다리를 폭파한다.
피난민들은 어디로 가라고?
딱딱한 이바구는 이제 그만 집어 치우고 칙칙한 장마철이고 하니 오늘은 약간은 상큼한 그 무엇을 함 찾아 보죠 무어.
이곳 보은 출신으로 묘하게도 보은이나 은혜하면 늘 생각나는 천사가 한 분 있다.
연보라빛 나팔꽃 처럼 아름다웠던 천사와의 소중한 인연을 되 돌아 보면서...
우리 어릴 적만 해도 하루 일과를 마친 어르신들은 동네 어귀 주막집에서 탁빼기 한 주전자와 김치 쪼가리 한 종재기
탁자 위에 놓고는 연신 흥에 겨워 젓가락을 두들기며 옆쩌언 여얼다앗냥 하며 흥을 돋우신다.
술을 파는 곳은 주막이요 농사일을 하다 잠시 쉬는 곳은 농막이요 볏짚이나 억새풀로 농막을 만들면 초막이요 산중에 지으면
즉 요즘의 대피소 같은 곳은 산막이 되는데 오두막이란 말은 또 어떻습니껴? 웬지 모를 친근감이 돌지 않습니까? 허지만
이런 말들 보다 더욱 더 정겨운 말이 있습니다. 선술집에서 왕대포 한잔. 크흐
우리 학창시절만 해도 서울 변두리 지역에선 뽀사시한 사발로 만든, 큼직한 대접에 텁텁한 술지개미 냄새가 물씬 풍기는
탁배기를 대폿잔으로 팔던 주점이 많이 있었는데 대포란 큰 댓자에 바가지 폿자 즉 말술이나 됫박술이 아닌 잔술이란 의미인데
바가지 중에서 엄청 큰 댓자 바가지도 모잘라서 임금 왕짜 접두사를 또 한번 더 붙인 울트라 슈퍼 잔술이란 의미이고
선술집은 일본에선 다찌노미라고 부른다. 즉 서서 술을 마시는 간단한 설비의 주막이란 뜻인데 서양에선 요즘 동네마다 들어 선
호프집 간판에 보면 퍼브라는 말이 있죠? public house의 준말 입니다. 이 퍼브에서
하루 일과를 마친 서양 노동자들은 션한 맥주를 마시며 동네일을 비롯한 여러 잼난 담소를 나누며 지친 심신을 달래었다면
이 보다 한 품격 진일보한 즉 귀족들의 모임이 바로 요즘의 카페란 것입니다. 남과 더불어 세상을 살면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면서 다른 이의 궂은 일에 대해 가슴 아파 하기도 하고 때론 승질 더러븐 시에미 우지직 씹어 찢어 발기기도 하고
뺑덕에미 보다 더 갈롱 맞은 시누이년 오금을 확 분질러 버릴 수도 있는 참으로 필요하고 유익한 모임의 장이라 할 수가 있는데
전 오래 전 이곳 분당으로 이사를 오면서 참으로 우연한 기회에 몇 몇 뜻이 맞는 분들과 한달에 한번 정기적인 부부동반 모임을
만들었었는데 얼추 십여년이 되었나 봅니다.
나이,성별,고향 살아 온 길이 제각각인 천태만상의 인물들이 모인 이 군집 중에서 유달리 내 시선을 끄는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되는 양반은 외모나 언행이 한마디로 표현하면 때때 메뚜기를 연상 시킵니다. 방아개비와 모양이 비슷한 이 때때 메뚜기는
우선 크기가 방아개비의 절반도 아니 되는데 승질 꽤나 있는지 사람이 접근할려고 들면 아주 날랜 날개짓으로 재빨리 날아
오르는데 때때때 하는 날개짓 소리가 참으로 신경질 적인 존재 입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은 속에 들어 있는 말을 내 뱉지 않으면 잠이 오질 않는다고 하는데 옆에 앉아 있는 부인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천사다.
불가의 표현을 빌리면 백의 관음보살 이라고나 할까요. 이십대 몸매,백옥 같은 피부,쌩머리를 뒤로 살짝 묶은 말총머리에
에메랄드나 사파이어 같은 눈동자는 잠시만 똑 바로 쳐다 보면 마치 블랙홀 처럼 내 온몸이 빨려 들것 같은 강한 흡입력을
가졌는데 잔잔한 미소 외에는 남푠이 제 아무리 될 말 아니 될 말을 씨부려도 타박은 커녕 말이 한마디도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 모임을 하면서도 만남이 있는 날이면 항시 미완의 숙제로 남았던 의문점은 대체 저 부인이 때때 메뚜기와 함께
살을 맞대고 일평생을 함께 사는 이유가 과연 몰까? 하는 바로 그것 이였는데
어느 해는 어떤 말 못할 사유로 모임 자체가 흐지부지하게 되어 버리면서 나 자신의 일 또한 밤낮을 가리기 어려웠었는데
모임의 총무께서 핸펀이 온다. 몇 몇 사람과 미리 연락을 나누곤
분당의 어느 종합병원 입원실로 찾아 드니 몸 전체에 골절상과 타박상을 입은 때때 메뚜기가 링거 주사를 꽂은 왼손을 간신히
침대 난간 위로 올려서 악수를 청한다.
이 부부는 참으로 묘하게도 아리랑 같은 옛날의 성인잡지 펜팔코너에서 처음으로 만나 연서를 주고 받다가 처가가 있는 이곳
충청도 보은땅에서 처음으로 상면을 하였는데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장인 장모와 처남을 비롯한 처갓집 식구 전원의
결사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요한 구애로 결혼에 성공하였다고 하는데 본인의 말에 의하면 결혼 이후 오늘날까지 두 부부가
떨어져서 자 본적은 단 하룻밤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친정집에도 혼자 보낸 적이 없을 뿐 더러 이러한 연유 때문에 남들 처럼 직장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형편이라 부부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사업만을 했었다고 하는데, 물론 그 전에는 쪈을 낙낙히 잘 벌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한창 모임을 가지던
그 시절에는 줄 잡아 칠 팔년을 백수로 살고 있었다.
급기야는 부부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자그만 가게를 오픈 하였다. 물론 이 정도면 약간의 의처 증세가 있는 건 틀림 없다.
오로지 당신만을 위한 삶에서 가장 무서븐 부작용(side effect)이 바로 의처 증세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보편적인 견해로 본다면 어떤 작자가 스물 다섯 시간을 잠시도 떨어 지지 않고 옆에서 처억 들러 붙어 있다면
거의 고문에 가까울텐데 천사는 싫은 기색은 일체 보이질 않는다 뒷풀이로 가는 노래방에서의 오직 하나뿐인 레퍼토리 또한
가관이다. 천상의 재회? 지겹지도 않나?
늦은 밤에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향하던 기억 밖에 없다고 한다.
도로 공사판의 장애물을 발견하지 못한 차량은 정면 추돌을 하였고 조수석에 앉았던 남편은 여러 부위 골절상을 입기는 했지만
생명이 위태로운 건 아니고 운전대를 잡았던 부인은 핸들에 온 몸이 실리면서 심한 장기 손상으로 의식이 분명치 않다고 한다.
묘한 일은 이 부부는 각기 다른 병원에 입원이 되어 있었고 또 다른 병원에 있는 부인은 물론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면서 울먹이는데 도무지 위로할 말이 없다.
간신히 휠체어에 몸을 의지할 정도로 회복된 남편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환자복 위에 담요 한장 덮곤 손을 호호 불며 혼자서
휠체어를 타곤 부인을 찾는다. 의식이 분명치 않은 부인의 손을 부여 잡곤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애들을 위해서 라도 여보! 불구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달라고
목 놓아 울기를 여러 날, 하던 가게는 이미 개값에 넘겨 버리고 살던 집 줄이고 줄여 끝내는 반지하 연립 단칸방에 월세로 들어
갈 즈음 주치의의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있다. 포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망한 마음으로
이리 저리 수소문을 하여 병원을 옮기니 새로운 병원의 의사 말이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 없다. 간단히 수술만 하면 그리
대수로운 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오래 전 일본에서 거의 신의로 알려 졌던 한 외과의사가 은퇴를 하면서 양심 고백을 한다.
자신이 이제까지 해 온 진료의 약 20 %가 오진이란 것이다.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어 진다. 특히나 의학계에서...
역시 명의란 것이다. 외과 영역에서 가장 오진이 많은 병이 먼줄 아세요?
이젠 수술로도 취급을 않는 맹장염 입니다.
흐지 부지 되었던 우리들 모임을 거의 삼년만에 재건한 첫 날에 놀랍게도 메뚜기 부부가 비록 성치 않은 몸이긴 하지만
자리를 함께 해 주셨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그 부부를 반겨 주었는데 아직은 완쾌 되지 않은, 쫄 청바지를 입은 천사의
다리가 다리가... 도요새나 종다리 다리를 연상 시킨다.
너 자신을 알라며 자신에 대한 성찰로 평생을 고뇌 하였던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리고 세계 3대 악처 중의
하나로 명성을 떨친 크샨디페, 과연 크샨디페가 천부적인 악처의 재능을 타고 난 여자 였을까요?
개똥철학을 한답시고 허구헌 날 집꾸석으로 아는 놈 모르는 놈 오만 잡동사니 같은 놈들을 끌어 모아선 밤이 새도록 토론이나
하다가 지겨우면 길거리로 나가 헛소리나 씨부리고 다니는 소크라테스네 집 솥단지엔 집에서 키우던 개를 잡아 삶을 지경이고
쇠털 처럼 많고 많은 밤을 베겟닢에 얼굴을 묻곤 눈물을 찍어 발르던 크샨디페가 드디어 격분을 하여 바가지를 긁어 댄다.
헌데 이놈의 남푠이란 작자는 명색이 철학자라면서 도무지 대꾸가 없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다는 것이 관성의 법칙인데 소크라테스란 인간은 지구 물리학을 무시한다.
사람 염장 질르는데는 무저항 내지는 무반응 이거 멀쩡한 년 꼭지 돌게 맹급니더. 야마가 대가리 끝 꺼정 치민
크샨디페가 마침내는 금복주 영감처럼 틀고 앉아서 명상에 잠긴 소크라테스의 대가리에 끓는 물을 퍼 붇고는 개 패듯 두들긴다.
실컨 얻어 터진 소크라테스 왈.
남편을 패는 일은 아내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란 것이다. 이쯤 되면 패던 년이 외래 허파 뒤집어 진다.
퇴근을 서두르고 있는데 핸펀이 울린다.
오빳야! 오늘 저녁에 시간 있나? (어술리 여사나 껏님 가튼 오촌 여동생이 아니고 친 여동생임다.)
와 멋땀시?
으 으 음 아는 사람이 자연산 전복을 째매 보내준 게 있는데
시간 없어도 잇따. 빛의 속도로 달려 가니
다용도실에서 동생이 사과 궤짝 보다 헐 큰 스티로폼 박스 뚜껑을 연다.
손빠닥 만한 자연산 전복이... 눈깔 뒤집어 진다.
커다란 비닐 봉다리로 한가득 채우길래 황급히 집어 드는데 오빳야! 한 봉다리 더 주까?
(스틸로폼 박스 통째로 다 준다꼬 해도 싫타 소리 안한다 이 노무 지지바야.)
차 트렁크에 전복 두 봉다리를 싣곤 바람의 속도로 분당 수서간 도로를 달리는데 머리통엔 왼통 참이슬과 오들 오들한 전복회,
그리고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전복 내장 생각 뿐이다. 난 이 세상에서 제일 미운, 아니 때리지기뿌고 싶은 놈 일호가 바로 내가
마시는 참이슬을 옆에서 거들면서 축을 내는 놈이고 이호가 껄쭉한 술안주 연신 집어서 없애 버리는 년이다.
괜찮은 술안주에 쐐주 한빙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 아니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검색하곤 벨을 울리니 전번을 바꾸지 않았던 가 보다. 다소 풀이 죽은
때때 메뚜기의 낯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풍덕천 바람이 몹시도 차갑게 부는 수지 지구 어느 공터에 파킹을 하고 한참을 기달리고 있으니 멀리서 다리를 절룩이며 걸어
오는 메뚜기의 안스러운 모습이 보인다. 날씨가 워낙이 추운 탓에
채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차 뒤로 돌아 서서 트렁크를 열면서 자연산 전복이 쪼금 있어서 하며 고개를 돌리니 그 짧은 순간에
메뚜기의 양 볼엔 눈물이 마치 식용유를 끼 얹은 듯 하다. 두 옷소매로 연신 볼을 닦으며
병후 회복엔 전복이 좋다 하여 아내에게 꼬옥 사 주고 싶었는데 하며... 목이 매인지 말을 제대로 하질 못한다.
트렁크에 대가리를 쳐 박곤 잠시 잔대가리를 굴려 본다.
큰 봉다리를 주느냐 아님 작은 봉다리를 주느냐. 나도 모르게 큰 봉다리에 손이 가길래 언능 집어서 건네 주니 고맙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곤 촌각을 지체치 않고 다리를 절룩 거리며 아내가 있는 반지하 월세집으로 죽을 힘을 다해 달린다.
한참을 추위에 떨며 메뚜기가 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그 뒷모습을 지켜 보던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아뿔싸
하는 소리가 튀어 나온다.
작은 봉다리도 마져 줄 껄.
고암 큰스님은 조계종 종정 자리에 세번이나 추대되었던 고승 이셨는데 평소 물욕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주머니에 몇 푼 돈이 들어 오기 바쁘게 찾아 오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남김 없이 주어 버리자 옆에서 시봉하던 제자분들이
연세 더 드시면 약도 잡수셔야 하고 용돈도 필요할텐데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 말을 들은 고암 스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옛날 빚 갚기도 바쁜데 어찌 저금을 하라는 건가? 하시면서 스님의 젊었던 시절의
얘기 한토막을 들려 주신다.
스님께서 스무 살 무렵 묘향산을 갈려고 임진강 나루터에서 배를 탈려는데 나룻배 배삯은 10전인데 주머니엔 단돈 5전 밖에 없어
사공에게 통사정을 해봤지만 별무 소용이 없어 망연한 모습으로 강 건너 만을 건너다 보고 있는데 나룻배에 타고 있던 한 젊은
아낙이 아기 젖을 물리다 말고 돌아 앉아선 허리춤에서 5전을 꺼내서 뱃사공에게 건네 더란 것이다.
자신의 신세가 너무도 처량하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하여 어디에 사시는 어느집 며느님인지 물어보지도 못한 채 헤어지고
말았는데 그날 이후 스님께선 아침에 눈만 뜨면 그 아낙과 그 자손이 잘되게 도와주십사고 간절히 기도를 드렸건만 그 빚 5전은
스님의 가슴 속에서 지금도 계속해서 늘어 나고 있다는 것이다.
고암 스님은 속세 나이 90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러 제자 스님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열반에 드셨는데 마지막 당부 말씀이
온 몸에 소름이 끼치도록 매몰차다.
비록 수행을 하지 않으셨던 분이라도 인생 90년을 사시다 보면 하루 천기 정도는 보는 법이다 하물며 일생을 청정한 생활로
수도를 하셨던 큰스님의 마지막 말씀이라면 결코 허투루 지날칠 일이 아닌 듯 하다.
조심해서 살거라... 인과응보는 분명하니라...
지난 달 모임에서 만난 메뚜기 부부는 건강면에선 거의 회복을 한 듯 보인다. 서로의 안부 인사가 끝난 뒤에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우리들은 예전 처럼 아무리 떠들어 보아도 내 주머니에 일전 한푼 생기지 않는 용인 경전철의 시행착오
에서 부터 노통의 북방한계선 문제 꺼증 하늘이 무너져라 땅이 꺼져라 얼굴이 싯뻘개 지도록 격론을 벌이다 자리를 파했는데
신발을 신는 내 옷소매를 슬며시 끄는 이가 있다.
그때 그 전보옥,,, 보석처럼 빛나는 천사의 눈동자를 쳐다 보는 그 순간 이미 말끝은 흐려지고 우린 잠시 시공을 초월한
염화시중의 미소만을 나눌 따름 이였다. 우주가 열리던 그 날의 정적이 영겁의 시간처럼 길게 느껴질 즈음...
잠시 뒤 남편이 다가 오자 여보오! 머리를 이렇게 하고 다니면 안돼지 하면서 남편의 헝클어진 직상모 머리를 연신 매 만져 주곤
스마트폰을 꺼내 더니 지난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 남편이 찍어 준 것이라며 사진 한장을 띄운다.
오색 연등 사이에서 얼굴을 빼꼼히 내 밀고 있는 천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노라니 그날의 일이 새삼 떠 오른다.
아주 오래 전 우리 회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천사께서 친정집에서 내려 오는 비방 이라며 돌솥에 오곡밥을 지어 주신 적이
있는데 이미 술과 안주로 내 뱃때지는 터질 지경이였지만 난 그 오곡밥을 누룽지 한톨 냉기지 않고 아니 물을 부어서
강아지 처럼 싹싹 핥고 또 핥아 먹었다.
내 평생 그런 소중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다.
마을버스가 다가 오자 두 부부는 다정스레 손을 잡곤 하직 인사를 하더니 총총히 차에 오른다.
내 시야에서 차 불빛이 완전히 사라질 때 까지 난 버스 정류장 주위를 서성이며 두 부부의 행복을 위해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다.
남자란 자신을 알아 주는 이를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는 동키호테 같은 존재라면
여자란 오직 자신만을 사랑해 주는 이의 가슴에 앵기는 지고지순한 존재라고 한다.
날씨도 덥고 심심하기도 해서 약간 쟝르를 바꾸어 보았는데 역시나 재미들 없으시죠? 넘 염려 마셔요.
다음 산행기부터는 어김없이 언제 어느 때 들어도 마냥 재미난 껄쭉 질퍽한 얘기로 도배를 해 올리겠습니다.
느림보 벗님들 지겨운 장마와 무더위를 힘찬 산행으로 이겨 내십시다. 핫팅.
분당 탄천변에서 붉은머리 오목눈이 돌삐 드립니다.
첨언 : 장마철이라 보은 구병산은 그득히 산을 메운 운무 덕분에 천지를 분간키가 어려웠습니다. 구래도
우리 느림보님들은 마냥 즐거웠습니다. 전 급한 용무 때문에 문경 새재가 있는 이화령 꼭대기에서 아득한 땅 처럼 멀어 보이는
보은 구병산을 잠시 건너다 보긴 보았습니다. 흐 흐.
벗님들과 함께 산행을 못한 아쉬움을 늦은 밤 집에서 올만에 탁배기 두빙으로 달래곤 꼬꾸라 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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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구병산에서 뵙진 못했지만
재미난 이야기로 울님들께 인사를 전하시는군요.
구름에 가려진 보은의 구병산은 정상까지 오르긴하였지만 풍경은 반밖에 보지못해
단풍 고운 가을날 코스를 달리해 다시 가겠습니다.
그때는 돌삐님도 꼭 함께 해주세요.
습하고 더운 여름..건강하시구요^^
돌삐님의 감동적인 사연이 가슴을 울리네요...
구병산은 제 고향 뒷산인 청화산 시루봉에서도 조금 보이는 명산이죠..
그나저나 붉은머리 오목눈이를 제대로 보기는 하셨나요?? ㅎㅎ
하천변에 흔하디 흔한 새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얼마나 귀여운 새인데..
제가 중학교때인가 한두마리 잡아서 잠시 길러봐서 압니다..
사람한테 재롱도 잘 부리고 무지무지 귀여운 새인데 돌삐님하곤 영 매치가 안돼서 말입니다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