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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개봉 & 2016 재개봉 / 114분>
=== 프로덕션 노트 ===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출연 : 키키 키린 & 아베 히로시 & 나츠카와 유이 & 하라다 요시오
한적하고 조용한 요코하마 시의 어느 여름 날, 가족이 품은 비밀과 거짓말, 진실과 오해
전 세계 평단과 관객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2년 만의 신작
가족의 모습을 솔직하게 담아낸 감독의 자화상
<히어로> 아베 히로시, <아무도 모른다> 유,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키키 키린 등 일본 연기파 배우들의 총집합, 완벽한 앙상블로 최고의 연기를 펼친다
깨끗하게 닦은 구두만 남겨져 있었어. 그 광경이 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
햇볕이 따갑던 어느 여름 날, 바다에 놀러 간 준페이는 물에 빠진 어린 소년 요시오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뛰어든다. 그로부터 10여 년 후. 각자 가정을 꾸린 준페이의 동생들 료타와 지나미는 매년 여름 가족들과 함께 고향집으로 향한다. 다시 올 수 없는 단 한 사람, 준페이를 기리기 위해... 그리고 그 자리에 초대받는 또 한 사람, 요시오 역시 매년 준페이의 집을 방문한다. 그 해 여름 역시 준페이의 기일을 맞아 모인 가족들로 왁자지껄한 하루가 흘러갈 무렵... 요시오, 그만 와도 되지 않아요? 차남 료타는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요시오를 놓아줘도 되지 않냐는 말을 넌지시 건네고, 엄마는 그런 료타의 질문에 지난 10여 년간 숨겨왔던 진심을 쏟아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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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평 1 ===
[나의 친구 그의 영화] 남 신경 쓸 필요없어
씨네21 2009-07-09 08:30:02
- <걸어도 걸어도> 속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을 보며 어떻게 살지 생각하다 -
* <걸어도 걸어도>의, 스포일러라면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지내본 경험은 지난해 겨울 유럽에서의 석달이 전부였지만 지난주 김연수씨의 충고는 깊이 새겨둘 만하다. 외국으로 여행 갔을 때 정색하면 지는 거다. 어떻게든 웃으면서 즐겨야 하고, 모든 것을 기쁜 마음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당황하거나 외로워하거나 허둥지둥하면 지는 거다. 여행이 사람을 성숙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정색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가끔은 당황하거나 외로워하거나 허둥지둥하는 게 여행의 묘미이기도 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이 꼬였는데 말은 통하지 않을 때 느끼는 막막함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의 정수가 아닐까 싶다.
여행 준비를 할 때마다 제일 먼저 챙기는 것은 음악이다. 음악을 챙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외로울 때 듣기 위해서다. 영국 리버풀의 사람들 틈에 끼어 비틀스를 듣는다면 어떨까, 추운 북극의 나라에 가서 시규어로스의 살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 브리스톨에 가서 포티셰드의 베스 기븐스 목소리를 듣는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전세계의 음악을 챙기게 된다. 모든 상황에 대비해서 모든 장르의 음악을 챙겨간다. 그런데 막상 외국에 나가면 음악을 듣는 일은 거의 없다. 여행을 하면 언제나 귀를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을 잘하는 방법 중 하나가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도시에는 각각의 독특한 소리가 있어서 그 소리들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나는 비엔나를 생각하면 트램 지나가는 소리와 횡단보도의 째깍째깍하던 경보음이 떠오른다. 런던을 생각하면 템스 강 위로 보트가 지나가던 소리가 떠오른다. 로마는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떠오르고, 스톡홀름은 새가 날아가는 소리가 유독 생생하다. 당연히 저마다 기억하는 소리가 모두 다르다. 정답이 있을 리 없다. 소리를 떠올리면 풍경이 살아나고 풍경이 살아나면 감정이 동영상으로 재생된다. 나는 가끔 소리를 녹음해 오기도 한다. MP3플레이어에다 넣어두고 가끔 도시의 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도시가 생각난다.
소리의 기억을 통한 여행의 즐거움
아주 가끔은 준비해간 음악을 듣는 경우도 있다. 기차를 탔는데 목적지가 종착역일 때 (그래서 기차 방송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때), 배를 탔는데 목적지까지 열 시간 이상 걸릴 때 (배 구경을 다 하고도 여섯 시간 이상 남았을 때) 가끔 음악을 듣는다. 바깥의 낯설지만 단조로운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나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지, 모든 게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듣는 음악은 귀가 아니라 심장에다 이어폰을 꽂은 것처럼 온몸을 뒤흔든다. 그럴 때는 비틀스도 좋고, 바흐도 좋고, 시규어로스도 좋겠지만, 우리말 가사가 있는 ‘유행가’보다 더 좋은 게 없다. 한줄 한줄 가사에 밑줄이 그어지고, 모든 말이 시처럼 느껴진다. 한국말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모든 단어와 조사와 표현이 새롭다. 몇 시간 전에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처럼 사랑 이야기에 가슴이 아프다. 지난 겨울 유럽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김범수의 <슬픔활용법>이다. ‘그때처럼 웃어본 적 없어, 세상이 마냥 좋은 적 없었어’라는 가사만 들으면 어쩐지 울컥, 하면서 모든 게 그리워지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감상적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감상이란 여행에서만 제대로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게 아닐까. 요즘도 <슬픔활용법>을 들으면 그때가 생각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제목은 1970년대에 히트했던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영화에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중요한 부속품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가 몰래 불렀던 노래이며, 어머니가 숨어서 들었던 노래다. 아버지는 며느리 앞에서 음악에 대한 자신의 취향을 이야기한다. 클래식을 좋아하고 비틀스와 마일스 데이비스까지는 인정할 수 있지만 힙합은 음악도 아니라고 평가한다. 음악에 대한 취향을 드러내는 대목은 병원 원장이었던 아버지의 허세를 드러내는 대목이기도 하다. 집에서는 병원 원장의 체면 때문에 슈퍼마켓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지도 않고, 빨래도 빳빳하게 널지 않게 구겨버리는 성격이지만 다른 여자 앞에서는 사랑 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이다.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세울 때는 클래식이나 마일스 데이비스가 좋지만 정작 사랑받고 싶을 때는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부르는 아버지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는 아버지의 길티 플레저였던 셈이다.
사라진 계단을 마지막 화면으로 했더라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쓸쓸하다. 어머니의 삶도 아버지의 삶도 쓸쓸하다. 아버지가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아무 데서나 부르고 다녔으면 어땠을까. 병원 원장이어도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좋아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 모든 일에 화를 냈으면 어땠을까. 혼자서 몰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듣는 게 아니라 그냥 대놓고 따졌으면 어땠을까. 그러지 못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이유는 바꾸거나 옮길 수 없는 생활이 되었을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모든 장면을 좋아한다. 하지만 마지막 몇 장면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아마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 끝냈을 것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라진 계단을 마지막 화면으로 남겨두고 영화를 끝냈을 것 같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이야기니까. 우리는 그 사람들을 잊고 있으니까. 두 사람을 남겨두고 우리는 잘 살고 있으니까. 인간은 역시, 상대방을 배려하기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인 동물이다. 타일을 고쳐주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곤 낮잠만 자다 간 사위처럼 ‘1년에 한번만 찾아와도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아들처럼, 모두들 제 생각하기에 바쁘다. 그러니 남 신경 쓸 필요없다.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마음에 든다면 마음껏 불러야 하고, 싫으면 싫다고 소리질러야 하고, 상처를 받았으면 따져야 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살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러나, 정말,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글)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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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평 2 ===
[나의 친구 그의 영화] 인생에서 중요한 건 디테일이야
씨네21 2009-07-16 08:30:02
- <걸어도 걸어도>를 보고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고민하는 친구에게 -
<걸어도 걸어도>를 다 보고 나서 한없이 쓸쓸해져서 ‘정말,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라고 생각하게 된 일산 변두리 거주 고민남(39)에게.
1. 먼저 고민남의 절절한 심정에 감정이입하기 위해서 김범수의 <슬픔활용법>이라는 노래를 틀었습니다. 오늘은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금 떨어진 그 빗방울부터 장마가 시작되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니니 역시(일본영화를 보고 나면 아무튼 이 말만 입에 붙는다니까요) 그 사흘째라는 건 제쪽의 일방적인 판단입니다(미안합니다만, 잠시 커피를 가져오겠습니다). 분위기 좋습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한번 노래에 귀를 기울입니다. 소박한 의문 하나가 떠오르네요. 왜 이 남자는 슬픔까지 활용할 생각을 하는 것일까요? 설마 하나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 하지만 폐품 지경이 되어 재활용해야 할 건 지구가 아니라 노래 속의 남자군요.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 절규하니까요. 여자 앞에서 까불다가 어디 뼈라도 분질러진 것일까요? 도대체 이 남자, 왜 못 쓰게 됐을까요? 어쨌든 오늘은 장마가 시작된 지 사흘째가 되는 날입니다. 그 하늘 아래 어딘가에 뼈라도 분질러졌는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지도 못하고, 슬픔을 활용해서 그녀를 눈앞으로 데려오는 정신승리법을 연마하는 폐품 남자가 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구름들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울고 웃는 사이에 세상은 다시 여름입니다. 봄에 죽은 누군가에게 이 여름은 그의 인생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런 여름입니다. 만든 지 사흘 정도가 된, 완전히 새로운 여름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니 당연합니다. 이런 여름, 정말, 솔직히,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대충남이 고민남에게 답합니다)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따지지 말고, 대충 살아요
조언하자면 그냥 대충 살아요. 따지지 말고. 괜히 싫은 사람 찾아가서 싫다고 소리 지르지 말고, 상처 주는 인간들 앞에서 상처 헤집어 보여주지 말고.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마음에 든다면 마음껏 부를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습디다. 대충대충, 부르게 됩디다. 지금 저는 김범수의 노래를 벌써 여섯 번째 듣고 있습니다.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라며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를 지경이군요. 이 여름도 그렇게 몇번을 반복재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한 세 번째 재생될 때쯤이면 우린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살면 되는지. 하지만 인생이 재활용되는 거 본 적 있습니까? 우리 앞의 인생은 늘, 언제나, 만든 지 사흘 정도가 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니까 다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우왕좌왕 좌충우돌의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 이기적인 인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고민남(39, 일산 변두리 거주)의 솔직한 고백처럼 아는 게 없기 때문에 싫으면 싫다고 소리 지르고, 상처를 받으면 꼭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기적이라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할지 알 수 없는 게 아니라 말입니다.
그러니 올바른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인생에 대해서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우린 어쩔 수 없이 이기적입니다. 싫다고 소리칠 때조차 우리는 그게 과연 싫은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김범수가 고민남에게 답합니다.)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너 때문에 못 쓰게 된 나라고, 바보처럼 너를 미워할 핑계를 찾곤 했”던 시절이 다들 있었겠지만, 그렇게 말할 때조차도 우리는 그녀를 정말 미워하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따지지 말고, 일단 살아요. 나중에 다 알게 될 거니까.
2. 분명히, 여기까지 읽고도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 것인지 모를 것 같아서 일부러 시간을 내어서 <걸어도 걸어도>를 보러 갔습니다. 빌어먹을 변신로봇들이 동네 상영관을 모두 점거하는 바람에 서울까지 가야만 했던 것인데, 고민남은 그 외진 동네에서 어떻게 이 영화를 보려고 마음먹었는지 궁금하더군요. 영화를 보다가 고민남이 말한 문제의 장면, 그러니까 할머니가 추억의 노래라면서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를 때, 저도 모르게 “마찌노 앙가리가 도떼모 끼레이네, 요코하마 부르 라이또 요코하마”라면서 흥얼거리게 되더군요.
그건 우리 어머니가 유일하게 남들 앞에서 불렀던 노래였기 때문이지요. 그때가 우리 어머니 45살 때의 일입니다. 나중에 어머니 칠순 잔치에 저는 직지사 관광호텔 뷔페 무대에 올라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건 어머니에게 배운 유일한 노래입니다”라고 제가 그 곡을 소개했지요. “걸어도 걸어도 작은 배처럼 나는 흔들리고 흔들려 당신의 품속.” 그 노래를 부르는데 제가 처음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어머니가 얼마나 젊었는지 떠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다음에 그 노래를 들을 때, 저는, 그리고 어머니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결국에는 그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영화에서 듣게 된 것입니다. 2009년의 여름은 김범수의 노래로 기억될까 싶었는데, 역시 <걸어도 걸어도>로 떠올리게 되겠군요.
엄마 칠순잔치에서 부른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
이번 여름이 시작되기 전에 저 역시 고민남처럼 거대한 질문을 안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과연 점점 나아지는 것인가? 여긴 조금 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남이 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저는 <걸어도 걸어도>를 보면서 잠시 그런 질문 같은 건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건 백일홍과 노란 나비와 수건 위에 놓인 세 자루의 칫솔과 뒤늦게 산 RV와 타일이 떨어져나간 목욕탕과 늙은 참치집 주인이 자꾸만 내놓는다는 참치 뱃살 같은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섬세한 디테일들은 우리 인생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사랑했던 시절들이 어떻게 사물에 달라붙는지, 그리고 나중에 그 사물들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 사랑을 다시 환기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누군가가 어떻게 살면 좋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충 대답합니다만, 몇년에 한번 우연히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를 들을 때마다 저는 잘사는 방법이 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사물에 담긴 추억으로 우리는 같은 인생을 여러 번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로써 디테일이 왜 영화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그토록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인생의 여러 가지 일들이 이런 식으로 재활용되는 것이라면 (딱히 고민남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만) 폐품 인생한테도 구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너 때문에 이렇게 산다고 욕하지 맙시다.
(글)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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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평 3 ===
[전영객잔] 비틀즈 아닌 엔카의 통속이구나
씨네21 2009-07-16 08:30:02
- <걸어도 걸어도>가 오즈 야스지로의 그림자를 벗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방식 -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머니의 죽음이 계기가 되어 <걸어도 걸어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2년 동안 자신이 작성한 메모와 어머니가 말한 것들을 바탕으로 각본을 썼고 그것을 영화로 만든 것이 <걸어도 걸어도>라고 말해주었다. “감정적으로 자전적인 게 많이 반영된 시나리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견디기 힘든 슬픔을 영화로 표현하려 할 때, 지금까지의 어떤 영화보다 더 자전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했을 때, 문득 이 영화 안으로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 내게는 흥미롭다. 오즈 야스지로, 그러니까 20살에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를 처음 보고 매료된 뒤에 첫 장편 극영화를 오즈 영화의 습작으로 만들었고 이후에는 필사적으로 그의 품 안의 자식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해온 그가 지금 다시 오즈를 정면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물론 <걸어도 걸어도>는 오즈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삶의 어떤 절경을 보여주는 뛰어난 영화라 말할 수 있다. 배우들의 물결 같은 연기의 파동, 그걸 끌어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특별한 연출법. 너그러움과 잔혹함, 돌이키지 못할 과거와 그에 대한 미련이 쌓인 현재,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쌓인 앙금, 하지만 가족의 이름으로 무마될 하룻밤의 여름. 그것들의 분위기. 그런데 다시 말해도 중요해 보이는 것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다른 무엇이 아닌 비로소 오즈를 통해 이 영화를 보라고 그 스스로와 우리에게 동시에 원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그걸 일부러 피해갈 필요는 없어 보인다.
어느 가족의 하루 이야기
개인적으로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가 뛰어나기는 해도 얼마간의 과대평가를 받아왔다고 늘 느껴왔다. 일부 평자들 사이에서 역작으로 평가받는 <아무도 모른다>를 포함시킨다 해도 여전히 내게는 그러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상실의 시간 이후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묻거나 무엇이 상실을 낳은 것인지 원인을 역추적하는 드라마를 그려왔는데 그때 그의 영화는 처음에는 오즈의 영향 아래 있다가 매우 빠르게 원래 자기의 자리였던 다큐멘터리적인 소재로 진로를 선회했고 <하나>에 이르면 적어도 소재 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동분서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극히 사적인 감정으로 시작한 이 영화에서 마침내 오즈를 정면으로 다시 응시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게다가 내게는 이 영화야 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진정한 첫 번째 걸작처럼 보인다. 그런 점에서 오즈 야스지로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사이에 고리를 이은 다음 하나의 해석을 내놓는 글이 한편쯤은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그걸 말하지 않고 이 영화의 미덕을 말하는 평들이 내게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이 영화에서 오즈의 무엇을 차용하고 있으며 그의 무엇에 공감하고 또 무엇을 수정하는지 말해야 할 것 같다.
요코하마의 어느 집에 가족들이 모여든다. 집안의 큰아들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가족이 모인다는 사실은 조금 뒤에야 알게 된다. 요이치라는 다소 덤벙대고 허점 많아 보이는 뚱뚱한 사내가 이 집안에 찾아 왔을 때에야 준페이가 오래전 그를 살리려다 자기 목숨을 잃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반면 회화 복원사인 차남 료타는 하츠시라는 아이를 둔 유카리와 결혼해 살고 있고 그의 부모는 남편을 잃고 아이까지 있는 여자와 사는 그 아들이 마땅치 않다. 아버지는 의사인데 엄격하고 좀 퉁명스러우며 아들인 료타가 그의 대를 잇지 않은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그리고 어머니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것 같지만 때때로 매섭고 흉포한 발톱을 숨기고 있다. 누이는 철이 좀 없어 보이고 그의 남편은 과장스럽다. 한편 저녁 식사 자리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오래된 사건이 엔카 한곡으로 실체를 드러낸다. 그들이 한데 모여 보내는 여름날의 하루가 <걸어도 걸어도>의 중심 내용이다.
그 장면 오즈와 다르네?
이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데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단 아무 저항없이 오즈의 것들을 몇 가지 차용한다. 원제인 <걸어도 걸어도>가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의 가사이기는 해도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Even If You walk And Walk>라는 건 일종의 유머이자 징표다. 오즈를 소시민 장르 안에서 처음으로 널리 알린 ‘…하기는 했지만’시리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졸업은 했지만…>(I Graduated, But…), <낙제는 했지만…>(I Flunked, But…), <태어나기는 했지만…>(I Was Born But…: A Picture Storybook for Adults). 말하자면 ‘걸어도 걸어도 ’혹은 ‘태어나기는 했어도’라는 말이 동시에 주는 어떤 뉘앙스를 이 영화의 제목은 염두에 둔다. 하지만 제목을 해석한다는 행위는 늘 그렇듯 화제는 돼도 중요하지는 않다.
몇 장면에 숨은 유머와 노련한 배치가 더 흥미롭다. 첫 장면은 어머니가 무를 씻는 딸에게 문득 무의 다양한 요리법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왜 무일까. 실은 영화는 첫 장면부터 오즈 영화에 대한 부분적 주의 환기로 시작하는 것이다. 오즈가 유작인 <꽁치의 맛>의 차기작으로 정했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한 영화의 제목이 <무와 인삼>이었다. 물론이다. 인삼에 대해 말하는 장면은 없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제부터 오즈의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집을 나서면 이웃과 날씨에 대한 인사를 나누고 지나가는 기차의 풍경이 어김없이 등장하며 누군가 가족이 아닌 사람(일식집 배달원)이 집을 방문하여 문 앞에서의 긴 대화가 펼쳐진다. 이 집은 오즈의 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왔던 구조이며 가족이 둘러앉은 식탁에서 오고 가는 대화 속에 다른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아버지와 아들만 남았을 때에는 심지어 두 사람 앞에 각자의 맥주병이 평행하게 놓인다. 오즈의 술상에서 옮겨온 것임을 유머러스하게 제시하는 장면이다(하지만 감독은 오즈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정확한 도상적 매칭은 일부러 거절한다).
가장 아름답고 적확한 오즈적 숏은 유카리와 아들 하츠시가 자신들의 진정한 가족으로 료타를 끼워줄까 말까 농담할 때 순간 문 밖으로 건너간 카메라에 의해 제시된다. 그때 카메라는 거실의 탁자 위에 놓은 정물로서의 꽃을 물끄러미 본다. 그때 오즈의 영화에서처럼 사물이 주는 정감이 발생한다.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사물이 정감을 일으키는 오즈식의 숏을 다른 몇 장면에서 더 활용한다. 료타가 어릴 적 일기장을 슬며시 본 다음, 다음날 아침이 오기까지 등장하는 몇개의 숏들은 숨길 수 없는 오즈의 그것이다. 바깥에서 들여다보이는 텅 빈 마루, 욕실의 한 벽면, 그리고 이층의 빈방. 그 하루가 지나고 아버지와 아들 료타는 오즈의 영화에서처럼 바닷가를 찾아 ‘나란히 서서’ 이야기를 나눈다.
더불어 재미있는 장면이 있다. 가족이 모여 사진을 찍는 장면이다. 오즈의 영화에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은 자주 등장하는데 그때 늘 중앙에 자리한 사람은 집안의 가장이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사정이 좀 다르다. 늙은 아버지는 제일 오른쪽으로 밀려나 겨우 줄을 서 있고 심지어 사진을 찍어주는 사위가 왼쪽으로 더 들어오라고 말하자 화가 난 듯 화면을 휙 빠져나가버린다. 이 장면은 의도적이며 이상하다. 오즈의 영화에서 가족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언제나 그 안의 누군가가 삶을 잃고 빈자리가 생길 것이란 것에 대한 예고다. <도다 가의 형제자매들>에서, <맥추>에서 그 밖의 영화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대개 사진을 찍은 직후 아버지가 생을 마친다. 그는 사진 속 늘 중앙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자리조차 그의 것이 아니며 사진에 담기는 것조차 거절한다. 그래도 그는 빈자리의 주인공이 되고 말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자신의 슬픔을 위무하는 법
가족이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의식적으로 엿보이듯 이 가족의 구성원은 오즈에게서 가져왔으나 의도적으로 비껴나 있다. 우리는 이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그려졌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어머니의 죽음에서 동기를 얻은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했지만 덧붙여 “구체적인 설정은 다르다. 우리집은 의사 집안도 아니었고, 아버지도 그런 캐릭터는 아니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 그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여기에는 단순한 차용이 아니라 다소 복잡하게 비틀려서 들어온 오즈적 인물들로 가득하다. 아마도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전반적인 관계지도의 틀로 생각한 건 하라 세쓰코가 노리코라는 극중 이름으로 출연한 ‘노리코 삼부작’ <만춘> <동경이야기> <맥추>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인물들이 그대로 오지는 않는다. 노부부는 <동경이야기>와 <맥추>,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도다가의 형제자매들>에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인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가 가진 의사라는 직업은 <동경이야기>와 <맥추>의 큰 아들이 가졌던 직업의 번안일 가능성이 크다. 큰딸이 <동경이야기>에서처럼 철이 없어 보이고 그의 남편이 허풍선이처럼 보이는 것은 유사하지만, <동경이야기>에 남편을 잃었어도 여전히 시부모를 모시고 살겠다는 노리코가 있었다면 여기서는 정반대되는 상황이 종종 갈등의 핵이다. <동경이야기>에는 남편을 잃은 지 8년이 지나도록 홀로 사는 노리코가 있고 그녀에게 재가를 권하는 시어머니가 있지만 <걸어도 걸어도>는 그걸 역으로 질문하는 것 같다. 만약 그 여자가 재가를 한다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까, 라고. 료타의 부모는 유카리가 이 집안에 들어온 걸 싫어하는 눈치다. 중요한 건 오즈 영화에서 차용된 인물이 있지만 그들이 무작정 오지 않고 각자의 위치와 사연을 비껴서 와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오즈 영화와의 연관성을 열심히 더 찾는 것으로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당연히 전략적 차이를 집중해야 한다. 그게 정작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오즈를 대동한 이유일 것이다. 그는 지금 오즈에 헌사를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슬픔을 위로하고 미련을 용서받을 어쩔 수 없는 영화적 판단으로 오즈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우선 인물들의 성격이 다르다. “아이 딸린 과부는 재혼이 힘들어”라며 새며느리 들으라는 듯 말하는 아버지, 기모노를 챙겨주면서도 “술은 먹어도 잔은 비우는 법이 아니”라고 따끔하게 경고하는 어머니상은 오즈 영화에 없다. 남편을 잃고 홀로 지내는 며느리에게 이제는 재가를 하라는 인자한 시어머니와 부인이 젊은 시절 찼던 시계를 건네주던 시아버지는 여기 없는 것이다. 이때 무엇이 생겨날까. 오즈가 인물들의 사연은 등장시키되 캐릭터를 무화시켰던 것에 반해 혹은 간교한 인물들의 등장과 여파를 배제한 것에 반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인간애가 아니라 인간의 간교함이라는 그 후자에도 동등하게 무게를 싣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확실히 한 가지 영화적 목표점이 있다.
오즈의 영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계통화하는 후대감독들은 대개 두 가지 양태로 나뉜다. 한쪽은 오즈의 형식적 면모를 더 극단으로 밀어붙인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완성한 <파이브, 오즈에게 바쳐진>은 말 그대로 단지 다섯개의 숏만으로 어느 해안가를 74분간 비춘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자신이 가야 할 그 길, 시네마토그래픽한 영화적 길 앞에 오즈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나머지 한 방식은 오즈의 영화 속 관계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집안의 공기를 형식의 공기에서 생활의 공기로 바꾸기. 허우샤오시엔이 오즈에게 헌정한 <카페 뤼미에르>에서 그렇게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일면 <걸어도 걸어도>에서 허우샤오시엔적이다. 허우샤오시엔이 넉넉한 역사적 해석을 가했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더 노골적이고 범속한 세속의 현장으로 오즈의 영화를 끌어내리려 한다.
말하고, 실수하고, 또 후회하고
무엇보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오즈의 특징적 형식으로 잘 알려진 것들 중 낮은 위치의 카메라를 제외한다면 많은 것을 볼 수 없다. 엇나가는 시점숏, 고정된 카메라, 거기에 맞춰 연기하는 무성영화적 인물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부재하는 터치에 관해서 이 영화는 자유롭다. 앞서 말한 맥주병 장면만 보아도 이 장면이 오즈에게서 가져왔음을 숨기지 않지만 오즈만큼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 다음이 실은 좀더 중요한 문제다. 정밀한 구도(composition)의 숏 안에 그림의 일환으로 존재하던 오즈의 인물들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바꾸려 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그림의 한 방편으로서의 인물을 이야기의 인물로 바꾼다는 말은 그럼 무슨 뜻일까. 오즈는 인물을 그릴 때 세상의 한 풍경으로, 그림에 속하는 도상으로, 그에 따른 자동인형 혹은 소도구의 존재로 형상화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인물을 불러와 다시 이야기 속 피와 살을 가진 인물로 바꾸려는 것이다. 이때 인물들이 피와 살을 갖는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또다시 저지를 수도 있는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인 것 같다. 여기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솔직한 태도를 드러낸다. 그는 자신이 정작 이해하고 좋아했던 것이 오즈 영화의 영화적 본령이 아니라 오즈 영화에 대한 자신의 오해였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그 오해를 후회하기는커녕 그것에 바탕하여 한편의 영화를 만든다.
오즈는 영화에 너무 많은 드라마가 있을 때 그것이 영화를 망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시각적 플롯의 극단으로 나아간 오즈의 영화를 드라마적 충만함으로 바꾸고 싶어 한다. 오즈의 영화에서라면 표현되어지지 않았을 이야기의 살이 그래서 덧붙여진다. 오즈 안에서 표현하되 오즈가 말하지 않고 보여주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번외의 방법을 그는 택한다. 오즈에게는 너무 많은 드라마인 것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에게는 꼭 필요한 드라마가 된다.
내러티브적 플롯을 앙상하게 만든 뒤 시각적 플롯에서 극단적으로 멀리 진전했던 오즈의 영화, 그것의 골자를 가져와 제거된 내러티브를 다시 채우고 드라마의 활용이라는 쪽으로 영화를 회전시켰을 때 다음과 같은 대사의 합이 정서적 힘을 발휘한다. 차남 료타 일행을 배웅한 뒤 노부부가 힘없이 말한다. “다음 설에나 보겠군.” 하지만 숏이 바뀌고 차에 타고 가는 아들 료타는 가족에게 말한다. “다음 설은 안 와도 되겠어…. 어제 저녁 먹기 전에 갈걸 그랬지….” 오즈가 영화에서 이런 잔인한 감정적 대사의 엇갈림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단단한 형식을 통해 비로소 그걸 느끼도록 만들었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왜 그걸 말해서는 안되는 것인가 반문하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고, 실수하고, 또 후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그것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의 세상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은 통속의 프로젝트
그러므로 미뤄온 대답을 하자면 <걸어도 걸어도>에는 오즈에게는 중요치 않았던 다른 추구가 있다. 그걸 통속에의 추구라고 말해도 될 것 같다. 비교컨대 비틀스와 마일즈 데이비스 정도까지는 즐길 수 있지만 엔카는 부르지 않는다고 말하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아내가 아닌 다른 여인을 위해 통속의 엔카를 불러주었다. 아버지의 가장 낭만적인 시절 그러나 그 어머니의 가장 가혹했던 시절, 통속의 엔카 <블루 라이트 요코하마>가 들려올 때 마주하게 되는 것이 바로 그 과거의 시간이며 통속의 시간이고 그것은 오즈의 영화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오즈의 영화에서 현재의 표면적 시간 혹은 표층의 시간 외에 과거의 회귀적 시간 혹은 사연으로 얽힌 정념의 시간이 치명성을 안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의식적으로 그 시간을 재차 부른 뒤 통속화한다. 통속의 장르에서 비통속의 극단적 형식을 추구한 오즈의 영화를 전제로, 심지어 그 때문에 포스트모던한 영화로 불리기까지 한 그의 영화를 차용한 뒤 <걸어도 걸어도>가 저항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바로 이 통속의 프로젝트다. 거기에는 오즈처럼 삶의 수순을 냉정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오로지 영화 그 자체가 오롯이 남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하는 얼룩진 미련과 애환이 들끓는다.
때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당연히 오즈적으로 보일 만한 지점에서 이 영화를 끝맺지 않는다. 다소 구태의연하고 불필요해 보이는 에필로그를 붙여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몇년이 지나 무덤가를 찾은 아버지 료타와 그의 가족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손을 잡고 언덕길을 내려갈 때 그건 상투적이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그건 음악으로 칠 때 이 영화가 비틀스나 마일즈 데이비스의 음악이 아니라 이시다 아유미의 엔카이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오즈의 영화는 당대에 후자인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전자였고 그것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지금 다시 전치시킨다. 만약 노부부가 사라진 그 공원의 계단에서 보이스 오버가 흘러나오고 영화가 끝난다면 그래서 다시 한번 오즈식의 빈 숏으로 끝난다면 그건 철저하게도 오즈 영화에 대한 추종이 될 것이다. 오즈는 누군가가 죽은 다음 그 후대가 묘역을 찾는 구태의연한 드라마 따위는 덧붙이지 않았던 창작자다. 하지만 다시 말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오즈의 영화에 대한 헌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이야기를 생각했고 가족의 이야기를 생각했고 그때 피해 갈 수 없는 오즈를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그럼에도 그 안에서 자기의 작고 소박한 또 하나의 길을 찾으려 했다. 그러니 이 영화는 오즈를 불러들였지만 오즈처럼 끝내서는 안되었던 영화다.
다시 접하기 힘든 뛰어난 작품
오즈는 일본영화의 고전적 제도권 안에서 그리고 이미 통속화된 장르 안에서 형식의 요설로서만, 그러나 당대에는 대부분 알아차리지 못한 전대미문의 연출로 그걸 실천한 창작자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말에 따르면 표층의 영화, 말을 바꾸자면 표면의 영화를 추구했던 작가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오즈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말해지는 개념인)“무(無)란 한편의 영화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도중에 겪게 되는 체험이다. 그것이 잔혹함과 경계를 접하는 쾌락임은 말할 것도 없다”고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마지막 문장을 통해 단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즈 영화에서 ‘무’란 초월적이며 선(zen)적인 어떤 것이라고 볼 때 그가 획기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나는 오즈의 영화를 생각할 때 하스미 시게히코의 의견에 크게 공감하지만, 그의 계보를 창의적으로 잇는 영화 중에 <걸어도 걸어도>처럼 저항적 통속의 프로젝트 또는 통속의 감정으로의 재편을 시도하는 영화가 한편쯤 있는 것도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오즈에 대한 수긍과 저항의 프로젝트인 이 영화에서 오즈를 이렇게 마주하고서야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자신만의 삶의 절절한 통속극의 절경을 그려낼 수 있었으니 그로써 된 것이다. 나는 그가 <걸어도 걸어도>만큼 보편적 감흥을 뛰어나게 끌어내는 영화를 다시 보여줄 지 확신이 없지만 이 작품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쉽게 접하기 힘든 뛰어나고 의젓한 작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다.
(글) 정한석 mapping@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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