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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대(三代)
정 비 석
철학은 과거의 불행, 미래의 불행에서는 용이히 이긴다. 하나, 현재의 불행은 항상 철학에게 이긴다.
― 라 로슈푸코, 「잠언록」
아파트의 오전은 이유 없이 소란하다. 바닥이 콘크리트로 포장된 복도를 사뭇 배바쁜 걸음걸이로들 오락가락하는 징 박은 구두꿈치외 딱딱한 음향에 형세(亨世)는 기어코 단잠이 바서지고 말았다.
그는 눈이 짜개지는 길로 이내 곁에서 자던 미례(美禮)를 더듬었다. 하나 미례는 이미 간 곳 없고 빈 이부자리만이 벗어 버린 뱀의 허물처럼 궁굴고 있었다.
순간 형세는 주인 없는 방에 혼자 남겨진 불안을 가냘프게 느끼며 고개를 비틀어 머리맡에 놓인 사발시계를 쳐다보다가 벌써 열시가 넘었음올 발견하고 미례의 없어진 이유를 깨닫고 건성 고개를 끄덕였다, 미례가 출근한 것을 그제야 알아냈던 것이었다. 형세는 미례가 아까 잠든 제 몸집을 대구 흔들며,
“시간이 돼서 먼저 회사로 가니 푸짐히 주무세요. 그리구 쇠 여기 있으니 가실 땐 잠가 주세요, 네!”
이렇게 다지던 말을 잠결에 들은 것이 이제야 꿈결같이 생각났다.
“체!”
형세는 약간의 불만을 느끼며 혀를 찼다. 비상시라도 유만부동이지 정월 초사흗날부터 출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미례의 신세에 공연한 짜증이 생기는 것은 무슨 샐러리맨에 대한 의협심에서가 아니라 단지 모처럼의 아침에 미례를 빼앗긴 단순한 불평에서였다. 하긴 어젯밤에도 미례가,
“언제나 그렇게 각박한 건 아니구 금년은 전시가 돼서 그렇다우! 생각해 보세요! 만들어지는 간즈메라는 게 죄다 제일선의 용사들의 찬거리가 되는 게거든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우리두 싸움의 한몫을 담당한 병사인 셈이에요. 만약 우리가 하루를 더 쉰다면 제일선의 용사들은 그만큼 밸 주려야 할 게 아냐요?”
하고, 필시 간즈메 회사 사장이 직원들을 보아 놓고 일렀을 그 말을 충실한 여사무원인 미례가 그 뽄대로 되풀이하는 것을 형세는 듣기는 들었고, 또 그렇긴 그렇겠다고 수긍까지 하였던 것이 생각나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태 동안을 담담히 사귀어 오다가 비로소 처음 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난 오늘 아침에 미례를 수월히 빼앗긴 것은 암만해도 섭섭했다. 인연이란 것은 원체 야릇한 것이어서 형세가 미례와의 어젯밤을 가지게 된 것도 전혀 ‘전시’의 덕분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어제― 마침 정초여서 오래간만에 미례는 하루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형세는 또 형세대로 오랫동안 졸업논문 준비에 지쳤던 판이어서 둘이는 아주 한가로운 기분으로서 극장엘 가기로 했던 것이다.
영화관에 들어가자 양화가 곧 끝나고 뉴스 영화가 이어 상영되었다. 무려 수천의 기마병대가 맹렬한 기세로 광야를 정벌하면서 돌연 스크린의 한복판으로 질풍같이 나타났다. 평화롭던 벌판엔 별안간에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는 듯 정복의 의욕에 물릴 줄을 모르는 기마와 병사는 멀리 산 위의 적을 목표로 우레같이 휩쓸며 매진한다.
말은―대가리를 뒤로 번쩍 제치며, 삼킬 듯이 아가리를 헤벌리며 앞가슴을 잔뜩 내솟고 네 굽을 볼새없이 놀리면서 공중을 나르는 듯, 땅에서는 난데없는 흙연기만이 태풍같이 어지럽게 몽게인다.
기마가 앞으로 앞으로 내닿는 족족 벌판의 풀이 더부러지고 숲이 흩어지고 풀 속에 깃들였던 짐승들이 난데없는 날벼락에 미친 듯이 이리저리 날뛰고―하나 말 위의 용사들은 그것만으로도 유부족이어서 채찍으로 말 궁둥이를 연방 호되게 갈기며 혁을 날래게 챈다. 그리하여 광막하던 황무지가 눈결에 정복되자 맞은편에 우뚝 마주 서는 것은 험악한 산악이었다. 저 ‘산악의 반항’을 기마병대들은 어떻게 처리하려나 하고 형세가 주먹을 불끈 부르쥐어 보고 있는 동안에 달리는 대오(隊伍)의 중복판의 한 사람이 기다랗게 번득이는 칼을 높이 뽑아 들며 뭐라고 호령을 하자(사일런트 영화였으므로 호령을 듣는 재주는 없었다) 가뜩이나 질풍같이 용감하던 기마병들은 더한층 자세를 도사리며 채찍을 휘두르니 말들은 앞발을 번쩍 들며 놀랍게도 험악한 산을 향하여 덤벼 오른다. 말발꿈치에 채여 돌이 윙윙 날아나고, 바위가 급전직하로 굴러 떨어지고 그래도 기마병대는 아랑곳 않고 상봉으로 상봉으로 산을 휩쓸며 올라간다. 나폴레옹의 알프스 정벌인들 저렇기야 험악했을끼·. 형세는 정복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송두리째 뽑히며 보고 있는 동안에 기마병대는 수월히도 산의 반항을 정복하고 상상봉에 쳐올랐다. 산 넘은 편에 매복했던 적군이 창황하여 어쩔 줄을 몰라 찔쩔매면서도 반항을 하나 기마병대는 힘 안 들이고 적군을 소탕해 버리고 상상봉에 일장기를 꽂는 데서 영화는 끝난다.
형세는 지금 본 화면의 인상을 지워 버릴 수는 도저히 없었다. 다음 화면이 나타났으니· 형세의 눈에는 역시 지금의 그 장면만이 떠벌려져 보였다. 숨을 헐떡이며 주먹에 땀을 부르쥐었던 것을 깨달은 것은 오랜 후의 일이었다.
물론 한 사람의 병사와 한 마리의 기마로 본다면 거기에는 더할 수 없는 고난과 고초가 엇보이기는 하나 수백이 한덩어리로 엉클어져 산과 들을 정복해 나가는 거기에는 고난은새레 오직 정복의 찬란한 아름다움밖에 없어 보였다.
형세가 그 화면에서 그만치나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된 것은 혹은 그 직전의 영화에서 인생의 소극적이고 퇴폐적인 장면만을 본 그 반항이었을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이상한 흥분으로서 절실히 몸에 배어드는 정복감에는 괜시리 팔다리가 수물거렸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다른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도 형세는 줄곧 아까의 화면만을 머릿속에 그려 보고 있었다. 시간이 끝나고 미례가 일어서기를 재촉하였을 때에야 형세는 비로소 미례의 존재와 함께 뉴스 영화에 취해 있었던 저를 깨달으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거리의 레스토랑에서 미례와 함께 식사를 할 때에 형세는 다시 ‘정복의 장면’에 취해 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세요?”
마침내 미례가 묻는 말에 형세는 잠깐 당황하였다가 이내 겸연쩍은 어조로,
“정복의 아름다움을 오늘에야 절절히 깨달았어!”
하며 미례를 마주 보았다.
“아까 그 기마병대의 영화에서 말씀이죠?”
“그래, 보는 사람이 그만치 감동될 젠 실상의 병사들은 얼마나 상쾌한 것일까.”
“그보다두 전 피정복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봤어요. 정복이 그만치나 철저한 것이라면 정복되는 편으로도 오히려 상쾌할 것 같았어요! 찬란이라는 문구의 참된 뜻을 오늘에야 알아보았어요!”
하며 형세를 빤히 쳐다보는 미례의 눈에는 고혹적인 광채가 어리어 있었다.
형세는 유난스럽게 빛나는 미례의 눈에서 또 한번 정복의 쾌감을 맛보며 말 다리같이 굼틀거려지는 자기의 사족을 느끼었다.
식사가 끝나고 다시 거리에 나섰을 때에도 둘의 가슴에서는 정복, 피정복의 쾌감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몇 군데 찻집을 돌았을 때에는 밤도 이미 깊었고 서로 헤어져야 할 마당에 이르자 또 한번 새삼스럽게 정복의 화면이 생각되어서 형세는 기마를 달래듯 미례를 달래어 미례의 아파트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어젯밤의 우스꽝스런 경험을 되풀이하며 형세는 옷을 주워 입고는 방에 쇠를 잠그고 거리로 나섰다.
정월 초사흗날이라 여느 해 같으면 상기 거리에는 새해의 기분이 풍비할 것이나 때가 전시라서 거리는 오히려 적막하여 쌀쌀한 바람만이 아스팔트의 먼지를 휘몰아친다.
형세는 어디로 갈까 하고 잠간 망설였으나 역시 집으로밖에 갈 곳이 없었다.
집으로밖에 갈 곳이 없다는 생각이 형세를 몹시 우울케 하였다. 상기껏 탕건을 짓눌러 쓰고 밤낮 사랑간에 도사리고 앉아서 사서삼경만 숭상하고 있는 아버지라든가, 요새로 유난스럽게 우울병이 심해 가는 한때에 투사이던 형 경세(經世)라든가, 곰처럼 비굴해 보이는 아내 정숙(靜淑)이라든가, 형세와 경세를 한결같이 사랑스럽지 않게 여기는 주제넘은 형수라든가―가족은 모두가 형세에게는 시금직한 화상들이었다. 집으로 가느니 어디 친구라도 찾아갈까 했으나 공교롭게 방학이어서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 버리고 없었다. 마지못해 형세는 떨찌한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오기로 하였다.
큰대문께로 해서 사랑 앞을 지나다가 형세는 문득 사랑문 앞에 놓인 다 해어진 시대화를 발견하고 문칫 걸음을 멈추었다. 그 시대화는 틀림없는 형의 것인데 형 경세가 사랑에 나왔다는 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아버지의 경제화와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형세를 더욱 놀랍게 하였다.
아버지가 경세와 따뜻이 이야기하는 것을 형세는 아직껏 한 번도 본 길이 없었다.
아버지―구한국시대에 병조판서를 지내던 아버지는 정변 때문에 벼슬을 떼이고 사랑간에 들어앉게 되자부터 주소로 연연해하는 것은 벼슬에 대한 미련이었다. 높은 자리에 도사리고 앉아 하속배에게 호통하던 그 시대를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판서영감은 욕망을 아들에게서나 채워 볼 작정으로 경세를 내지 유학까지 시키며 거기에 전 촉망을 붙였던 것이다. 하나 경세는 대학 이학년 때 시대의 유령에 휩쓸려 꺼뜩거리다가 자유를 빼앗기는 몸이 되었고, 거기서 삼 년을 살고 나서도 이내 집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이에 판서영감의 슬픔과 절망은 컸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 시대의 정세가 바뀌어 경세가 육 년 후에 돌연 귀가하였을 때에도 판서영감은 아들을 쓴 도라지보듯 하였고 또 육 년 되는 오늘날까지에도 그가 아들과 마주 앉아 담화를 한다든가 하는 일은 통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이인 아버지와 형이 이제 뜻밖에도 사랑에 마주 앉았을 것을 상상하고 형세는 몹시도 어울리지 않는 장면을 그려 보면서 잠시 거기에 망설이고 서 있었다.
사랑에서는 얼마간 잠잠하다가 문득,
“가부간에 대답을 하려무나…… 내 생각 같아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 네 편에서 망설일 건 없을 것 같구나! 초봉으로 칠십오 환이라면 봉급으로만 따져도 결코 적은 편이 아니겠고(그야 월급으로 보가살이를 하려고는 생각도 않는다만) 또 직함은 본부 사회과 촉탁이라지만 촉탁이라는 벼슬이 명색뿐이지 실상 보는 일은 별로 없고 가끔가다 연설 마디나 했으면 그만이라니까…….”
하고 전에 없이 부드러운 목성으로 타이르듯 설복하는 아버지의 말이 들려 나왔다.
형세는 그 한마디로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벼슬에 대한 욕망을 아들에게서 채워 보려는 기대를 상기도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형세는 형의 국민복 차림새로 연단에 나섰을 광경을 잠시 상상하고 시니컬한 웃음을 웃어 보면서 형의 대답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그러나 형은 가다부타 소리 없는 모양으로 아무 말도 들려나오지 않았다. 형세는 호랑이 앞에 나선 개 모양으로 고개를 수그린 채 쭈그리고 앉아 있을 형의 형상을 그려 보는데, 다시 아버지가,
“어서 대담을 하려무나…… 윤판서영감께서두 널 특별히 생각하시구 알선해 주신 게니 남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도 사람 된 도리가 아니겠고…….”
하고 처음에는 좀 명령적인 어조이다가 나중에는 애원조로 변한다.
“이삼 일간 생각하도록 여유를 두어 주십시오.”
경세는 겨우 이 한마디를 그것도 아주 낮은 목소리로 들릴락말락하게 말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말에 못마땅한 듯이 얼마를 움도 쿰도 없이 있다가,
“그럼 잘 생각해 봐라…… 허지만 달리 여러 가지루 생각 말구 천재의 일우를 놓치지 않도록 해라. 내 그 동안 윤참판영감껜 뭐라구 핑곌 대둘 테니…….”
하고 마치 감판 사나운 아기라도 달래듯 온공히 말한다.
형세는 아버지 말대로 짜장 형에게는 좋건 궂건 간에 천재의 일우인 취직처임은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시대가 바뀌고 사람이 발라지고 했으니 말이지 붉은 사상의 세례를 받은 경세를 촉탁으로 써준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 아닌가!
형세는 새삼스럽게 시대가 대담하게 변천되었음을 느끼며, 세상이 그렇게 바뀐 줄도 모르고 아버지는 다짜고짜로 벼슬 숭상만 하는 것이 어이없게도 딱한 존재로 여겨졌다. 형 경세를 촉탁 자리에 앉혀 보는 것도 우스꽝스런 일이거니와 아버지가 바로 내 아들은 본부 촉탁나리요 하고 배통 내밀고 혹세할 것은 더더구나 우스운 일 같았다.
형세는 그만 엿듣고 건넌방으로 들어오니 아내 정숙은 송그리고 앉아서 바느질을 하다가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살며시 일어서며,
“인제 들어오세요?”
할 뿐이다.
형세는 대답조차 귀찮아 잠자코 책상 앞으로 가 앉았다. 남편이 밖에 나가 밤을 새고 들어와도 일언반사 불평을 토설할 줄 모르는 아내의 태도를 아버지는 부덕(婦德)이라고 해석할는지 모른다. 칠거지악(七去之惡)에도 ‘투거(妬去)’라고 하여 아내 된 몸으로 지아비에게 질투를 해선 절대로 못쓴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형세의 눈에는 아내의 그 부덕이 비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동물적인 굴종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항상 굴종으로써 자기의 현재의 지위(동물적인)를 무난히 옹호해 가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정숙도 역시 그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짜장 형세 자신은 아내와는 야욕적인 교섭을 제하고는 아무런 거래도 없었던 것이다. 형세가 아내를 맞은 것은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니까 벌써 칠 년이 되었으나 그 칠 년 동안에 그는 아내를 ‘말하는 동물’로밖에 보아 오지 않았다. 아버지의 억지에 못 이겨 지은 결혼이므로 이제조차 책임을 느낄 필요도 없게 여겨졌다. 형세는 일체의 과거를 부인하면서 미례와의 새로운 출발만을 생각하면 그만이라 하였다.
형세가 그러한 생각에 잠시 취해 있는데 마당에서 발자국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어느새 사랑에서 들어왔는지 형은 툇마루에 웅숭그리고 앉아서 햇볕을 쪼이고 있었다. 그 꼬락서니가 하도 어이없어 형세는 희랍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연상하며 형에게도 역시 볕은 필요한 모양이라고 혼자 웃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다시 내다보니 이번엔 의외에도 형은 제 아들인 영훈(永勳)을 안고 있었다. 형이 아이를 안아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므로 형세는 더욱 이상히 여기며 그냥 형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훈은 난생 처음 아버지에게 안겨 보니까 반가웁보다도 오히려 어색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얼굴에 충만하였고, 형 경세는 아기를 기는 안았으면서도 역시 예전이나 다름없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으므로 마치 곰이 강아지 새끼라도 안은 듯이 어울리지 않았다.
형은 그러한 채로 얼마를 멀거니 있다가 문득 무슨 생각이 났던지 아이를 달래며,
“얘, 너 몇 살이지?”
하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영훈은 뜻밖의 질문에 잠시 공포에 찬 눈을 어룻두룻하다가,
“다섯 살!”
하고 대답한다. 그러자 형은 또다시,
“너 몇 살이지?”
“다섯 살!”
하고 아이는 아까보다는 높은 어조로 대답하였다. 그래도 그는 또다시,
“너 몇 살이지?”
하고 무뚝한 표정을 조금도 누그리는 일 없이 곱캐어 묻는다.
“다섯 살!”
“너 몇 살이야?”
“다섯 살이래는데!”
“너 몇 살이지?”
“씨! 다섯 살이래는데―”
아이의 얼굴에는 확실히 불평과 분노와 공포의 표정이 서리어 있었다. 그래도 경세는 아랑곳 않고,
“너 몇 살이지?”
“씨, 다섯 살이야! 다섯 살!”
그래도 또 먼산만 바라보면서,
“너 몇 살이지?”
그러니까 아이는 더 참고 견딜 수가 없어 얼굴을 찡그려 울상이 되며 울성으로 간신히,
“다섯 살이 래는데 ―”
하며 눈물과 공포에 찬 눈으로 아버지를 마주 쳐다본다. 그 얼굴에는 도저히 더 감당해 낼 수 없는 곤궁한 빛이 차 있었다. 그렇건만 경세는 사정없이 또 한결같은 목성으로 천연스럽게,
“너 몇 살이지?”
하니까 이번엔 영훈은 악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고 통곡을 하면서 경세의 품에서 벌떡 뛰어나 대청으로 해서 큰방으로 달아나 버린다. 갑자기 고요하던 집 안에 통곡하는 아이의 울음이 처량하기까지 하였다.
형의 그러한 꼴을 처음부터 엿보고 있었던 형세는 그 너무나 어이없음에 실소치 않을 수 없었다. 다섯 살이라는 말에서 형은 침체한 자기 생활의 육 년간을 연상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한번 품었던 시대에의 신념을 마치 영원불변의 신주처럼 고집하는 농간 없는 형의 성격이 아이를 달래는 태도에까지 나타난 듯이 보여 형세는 새삼스럽게 형에게 대한 경멸감이 느껴졌다. 형세는 와락 달려나가서 형의 뺨이라도 갈겨붙이고 싶었다. 하나 형세보다 먼저 큰방 형수의 입에서 공격의 폭탄이 터져 나왔다.
“아니 원! 애비 구실을 못할망정 애길 울려 놀 건 뭐란 말요 글쎄!”
그래도 경세는 들은 척 만 척 무안한 낯색조차 없이 아무룩히 앉아서 먼산만 바라보고 앉았는 꼴이 흡사 바보만 같았다.
그러한 집안 분위기의 도시가 질식할 지경이어서 형세는 훌쩍 일어서 외투를 걸치며 밖으로 나섰다. 둥뒤에 아내의 차디찬 시선을 바늘같이 느끼면서 형세가 중대문을 막 나서는데,
“형세!”
하고 형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형세는 잠시 발을 멈추고 형을 돌아서 마주 보다가 가만히 형의 곁으로 왔다.
아마 아까 그 취직 일로 제 의견을 물으려나 보다 했던 것이다. 하나 형은 그 일은 감쪽같이 숨기고 곁에 놓인 신문을 잡아다려 정치면을 가리키며,
“너 이 구주정셀 어떻게 생각하니?”
하고 묻는다.
경세는 이와 꼭 같은 질문을 형세에게 벌써 세 번씩이나 물은 일이 있었다. 또 아이를 울리던 식이 나왔구나 생각하면서 형세는,
“무얼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모두를 영토적 안심에서 나오는 침략과 그 침략을 물리치려는 대립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까 결국 힘센 자가 이길 따름이겠지요. 형님은 또 무슨 딴 견핼 가지구 계시우?”
하고 일부러 형의 비위를 거슬러쳐 보려고 과장해 말하였다.
“…….”
하나 경세는 손끝으로 밤송이같이 뾰쪽뾰쪽한 턱아랫수염을 쓸쓸쓸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형세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내지서 가제 집에 돌아온 형은 아우를 붙잡고 곧잘 변증법이 어떠니 유물사회관이 어떠니 하고 지식을 휘두른 일이 있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경세에게는 사회적인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로부터 육 년이 지난 오늘에는 형은 놀랍게도 변하여 가는 새로운 사실 앞에서 오직 자기의 품었던 신념에의 회의와 고민을 거듭하면서 인제는 좀체 입을 열지 못하였다.
경세가 사회과 촉탁의 의자를 차지하려면 차지할 수 있는 것도 벌써 사회 정세가 그만치 전환된 중좌임에 틀림없었다.
형세는 자기 신념에 대한 자신을 잃어버려 가는 형을 보는 것이 무한한 재미였다. 아니 보다도 형이 지니고 있던 지식 혹은 신념 그것이 몰락하여 가는 것을 보는 것이 여간한 흥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질서의 파멸에 대한 예찬이기도 하였다.
형은 2十3=5를 어디까지든지 믿어 왔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시대가 오래―너무나 오래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2+3=5를 굳세게 믿으면서도 거기에 적지 않은 염증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거기서 비로소 사람들은 2+3=5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다시 말하자면 2+3=5가 되는 질서를 파괴하는 비상시라는 것을 무의식중에 갈망한 것이 아니었을까(물론 갈망한다고 기적처럼 올 것은 아니지만). 그리하여 만인이 학문의 위력을 확신하는 그 절정에 도달하였을 때에 무질서의 시대가 영웅처럼 나타난 것이 아닐까. 따라서 경세가 새로운 사실에 아연실색하는 반면 형세는 농간 없는 형을 비웃으면서 새날을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는 삼십년대와 이십년대 사이에 언어가 통치 않는다고 했지만 형세의 생각으로는 오히려 문제의 출발점부터 부인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오늘에는 벌써 삼십년대의 언어는 이십 년대에게는커녕 삼십 년대의 그들 자신에게까지 통치 않을 것이니까. 아니 언어란 언제나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결코 무질서까지를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그러한 것을 생각하며 형세는 옛날과는 달리 경세가 입이 무거워졌음을 차라리 현명타고 생각하였다. 사실 발언권을 박탈당한 형에게는 무슨 말을 할 권력도 거리도 없을 것이었다.
경세와 형세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윽고 형세가 말을 헐었다.
“형님은 오늘의 시대를 부정의 시대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긍정의 시대라고 생각하시나요? 전 그것이 가장 요긴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부정이라든가 긍정이라든가 한 것을 일언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 어느 사회를 물론하고 사회란 한 움직이는 물건이요 움직이는 것에는 언제나 부정적 측면과 긍청 적 측면이 있으니까.”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지금의 사실을 부정해야 옳겠는가 혹은 긍정해야 옳겠는가 말이죠.”
“글쎄…….”
하고 경세는 둔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버린다.
“형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하고 형세는 말을 계속한다.
“저로서는 이 사실을 긍정하고 싶습니다. 아니 긍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이 사실을 긍정하고 안 하고와는 아무런 관계없이 사실은 사실대로 진개될 것이니까…….”
“그러나 이 사실 속에서 질서를 추려 내는 것이 성인의 임무가 아닐까?”
“그렇겠죠. 하지만 지성이라는 것이 시대적인 운명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용납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얼마든지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아요?”
“운명?”
하고 경세는 운명이란 말에 의심을 가져 본다.
“그렇지요, 운명이지요. 오늘의 사실도 틀림없는 운명적인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운명이란 말은 필연이라는 말과 상통된다고 전 생각해요. 성자필멸(盛者必滅)의 불교적 관념으로 보나, 극성즉애(極盛則哀)한다는 유교적 관념으로 보나, 혹은 형님이 늘 말씀하시던 변증법적 논리로 보더라도 질서의 뒤에는 반드시― 필연적으로 무질서의 세계가 올 것이 아닐까요.”
“허나 그 무질서를 지성의 눈으로 질서의 세계에까지 지양시키는 것이 지식인의 해야 할 임무가 아닐까?”
“건 이상이겠죠. 적어도 사회의 운동은 그 자체의 운동 논리로써 움직이는 것이요, 움직인다는 것은 힘과 힘의 싸움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단순한 지식의 힘만으로써 그 힘을 이겨 낸다는 것은 도저히 어려운 일일결요.”
“…….”
경세는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없다.
“운명 ― 현대야말로 틀림 없는 운명 의 시대라 하겠지요.”
하고 형세는 다시 계속하였다.
“운명이라는 말을 형님은 우습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운명을 부인한다는 말은 동시에 변증법을 무시하는 말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겝니다. 왜냐하면 운명이란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떡할 수 없는 운동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니까. 그러므로 ‘운명’을 고쳐 말하면 변증법의 걸어가는 코스라고 해도 좋겠지요.”
“그렇다면 이 세상엔 지식과 노력의 필요가 없을 게 아니냐?”
“천만에! 주어진 운명의 권내에서 그것을 잘 이용해 가는 덴 지식이 절실히 필요하겠지요. 결국 사람은 오늘을 가장 즐겁게 보람 있게 살아가면서야 비로소 내일을 생각하도록 마련된 것이 아닐까 해요. 대체 먼 장래의 일을 누가 알겠습니까. 과거의 수다한 철학자들이 미래를 알아보려 애썼지만 아무도 모르지 않았어요. 가령 우리가 우리의 죽을 날을 안다고 합시다, 그러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괴로운 일이겠어요. 오늘밖에 모르기에 살아가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요? 따라서 오늘의 일을 가장 옳다고 긍정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술이겠지요. 대체 선악의 기준을 어디다 둔단 말입니까. 선악의 기준부터가 시대를 따라 변천되는 겐데…….”
“네 말대로 하자면 오늘에 승리하는 자가 역사상으로도 승리하는 폭이 되겠구나?”
“물론이죠. 승리란 항상 반복되는 것이니까 오늘의 승리가 내일엔 패배의 비운을 면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오늘에 승리한 것은 오늘의 선이겠죠. 선이니 악이니 승리니 패배니 하는 것은 결국 힘의 문제니까요.”
경세는 다시 말이 없었다. 형세도 형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나 형세는 몹시 유쾌하였다. 그는 형의 묵묵부답 하는 태도를 지식의 패배로 돌렸다. 이론적으로 싸운다면 형이 저보다는 월등하게 배승할 줄 알면서도 형세는 거의 생리적으로 형에게 대한 우월감을 느끼었던 것이다.
경세는 그러나 아우처럼 새로운 사실에만 취할 수는 없었다. 형세는 형의 그러한 양심적인 고민을 엿보고,
“세상에 양심을 고집하는 것처럼 밑지는 일이 어디 있을라구요! 혼자서만 어질〔賢〕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자는 없다는데. 첫째 신념이란 것도 사회의 경험에서 얻은 것인 이상 신념도 자꾸 변해 가야만 옳겠죠. 형님은, 어떤 시대의 ‘이성’을 그대로 다음 시대에까지 고집하고 있으면 모르는 결에 그것이 ‘감정’으로 변해 버린다는 걸 생각해 본 일은 없으세요.”
하고 형에게 물었다.
아우의 말에 경세는 가슴이라도 찔린 듯이 잉큼 놀라며 머리를 들었다.
형세는 문득 어제 본 뉴스 영화의 장면이 회상되었다. 일초도 유여없이 절박히 달려오는 현실의 힘을 형은 어떻게 막아 보려는 것일까.
“집에만 앉아 계시지 말구 더러 전황 뉴스 같은 것도 구경하시우! 절박한 현실의 상징을 거기서 찾아볼 수 있더군요.”
하고 말하였으나 거기에도 형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천치같이 펄짝이 주저앉아서 눈만 무겁게 떴다 감았다 하였다.
형세는 형 앞에 더 앉았을 흥미를 잃어서 벌떡 일어서며 일어서는 서슬에,
“흘러가는 물에 곰팡이 스는 법 없다구 사람은 항상 현실에 대해 충실히 활동할 필요가 있올 것 같애요.”
하고 형세는 형의 취직에 대한 암시적인 말을 던졌다.
그 순간 경세는 일어서는 아우를 반사적으로 치켜보며 팟팟한 표정으로 무엇인가 중대한 결의라도 말하려는 듯 잠시 입 가장자리를 실룩거리다가 그대로 입을 꽉 다물어 버리고 만다. 형세에게는 순간 형의 입술이 퍼들퍼들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잠시는 먼히 선 채 형의 말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이미 형은 굳은 침묵의 껍질 속에 사족을 가들어치고 만 듯하였다.
거리로 나오자 형세는 미례에게 전화를 걸었다. 미례는 아침에는 실례하였다고 말하면서 네시 반에 다방 ‘향원’에서 만나자는 부탁이었다.
남은 시간 반을 거리에서 보낸다는 것도 지루한 일이어서 형세는 어제의 뉴스 영화의 감명을 새로이 되씹으면서 가까운 극장으로 들어갔다.
오늘도 또 마침 뉴스 영화 시간이었다. 영화는 역시 제일선의 전황 뉴스로 어딘지 지명은 알 수 없으나 커다란 도시가 폭격당하는 장면이었다.
맨 처음엔 만리장성인가 싶은 철벽 같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벽이 나타나고 그 다음으로 차츰 고색이 창연한 고루 거각이 나타나고, 시가지가 나타나고, 성벽을 의지삼아 진을 친 적의 군사들이 나타나고ㅡ가장 평화스럽게 보이는 도시의 창공에는 돌연 으르렁거리는 폭음과 함께 행렬도 정연한 열두 대의 황취(荒鷲) 폭격기가 제비처럼 나타나더니 갑자기 폭 아래로 꺼져 내려오면서 폭탄들을 던진다. 열두 대의 비행기에서 빗발같이 떨어지는 폭탄은 쏜살같은 속력으로 커다란 빌딩에 붓좁기와 함께 쾅! 소리를 내며 지봉이 와술렁와슬렁 허물어지고 연기가 삽시에 시가에 가득 차고 그리자 한편에서는 화염이 맹렬한 기세로 하늘을 찌를 듯이 타오른다. 평화롭던 도시, 문화를 자랑하던 도시는 참으로 놀랄 만한 속도로 파멸의 세례를 받는다.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거대한 운명의 힘만 같았다. 그리고 비행기의 폭격과 시간을 같이하여 세상없어도 무너지지 않을 듯싶던 철벽 같은 성벽이 몇 방의 대포알의 세례를 받고 콰드덩 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성은 무너지고 돌은 조각조각으로 부서지고―번개같은 찰나에 천지가 무너져 세상은 암흑의 수라장으로 변하려는가, 스크린은 눈알을 뽑을 듯이 분주히 어지러워지면서 오직 파괴의 운동을 찬란하게 계속할 뿐이었다.
이미 화면에서는 요만치의 질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철벽 같은 아성도, 정신문화를 자랑하던 사원(寺院)도, 문명의 힘을 자긍하던 마천루도 새로운 힘 앞에서는 오직 한 조각의 고고학적 창고품으로 변해갈 뿐이었다.
문화는 타오르는 혼돈(混沌) 위에 드리운 얇은 임금(林檎) 껍질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니체가 만약 이 광경을 보았다면 얼마나 오만하게 웃었을 것일까.
이십세기 동안에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단숨에 죄다 부숴 버리고 말자는 심산일까.
화면은 다시 바뀌어 어지럽게 파괴된 거기에 문득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육탄과 육탄의 충돌이었다. 배낭을 둘러메고 철감투를 짓눌러 쓰고 ―창검을 든 수백 수천의 용사들이 오직 ‘이기겠다’는 한 개의 공통된 목적하에서 적을 향하여 이리같이 덤벼드는 그것은 야만적인 행동이면서도 벌써 결코 야만적이 아니었다.
형세는 이기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 순간처럼 굳세게 깨달은 적은 없었다. 만약 지면 어쩔까 하는 생각은 형세를 여지없이 초조케 하였다. 이기느냐 지느냐 그 둘밖에는 없었고 이기기 위하여서는 수단을 가릴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긴다는 말은 모든 것을 획득한다는 말이요 진다는 것은 존재 가치를 부인당하논 것이다. 이기느냐 지느냐의 막다른 골목에서는 벌써 치사스럽게 선악의 판단이거니 거추장스런 이론이 필요치 않았다. 이기기 위하여 취하는 행동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수단이든 간에 결국 인간의 정의적인 의욕의 치열한 표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운명의 패쪽의 표리에는 ‘승’과 ‘패’의 두 가지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모든 학설은 이기기 위하여서의 한 계통적인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책상머리의 작전계획만으로서는 판결이 안 나는 날, 학설을 비웃으면서 전쟁이 전개되는 것이 아닐까?
형세는 완전히 정신을 뽑힌 채 용맹과감한 스크린의 전향에 취해있었다. 스크린을 휩쓰는 영웅적인 힘은 형세의 피를 지글지글 끓어오르게 하였다.
영웅시대一그러나 시저, 알렉산더, 나폴레옹이 개인적으로 시대를 지배했던 것처럼 현대는 군중적인 힘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군중적인 영웅시대!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런 군중적인 심리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형세는 주먹이 불끈불끈 부르쥐어지는 자기 자신을 보람 있게 생각하였다.
역사는 항상 상반되는 두 개의 군중심리의 교류로서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후세의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군중심리에 휩쓸렸던 옛사람들을 비웃을는지 모르나, 그러나 비웃는 그 자신들이 다른 방법으로서의 군중심리에 지배되지 않는다고 누가 보증할 수 있을까!
그러한 것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스크린을 열심히 쏘아보고 있던 형세의 눈에는 문득 어지러운 스크린과는 동떨어진 정경으로 무대 위에 한 사람의 양복쟁이가 나타나 보였다.
극장에 근무하는 사람으로 아마 바람벽에 못이라도 박으려는지 스크린 옆에서 어물거리고 있었다.
순간 형세는 어지러우면서도 극도로 긴장된 스크린의 광경과, 싱겁게 서성거리는 스크린 밖의 그 사내와의 어울리지 않는 광경을 대조해 보다가 문득 집에 있는 형 경세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다 미치고 형 경세만이 말짱한 사람인지는 모르나, 애꾸의 나라에서는 두 눈 다 성한 사람이 병신 체를 해야 하는 것처럼 오늘의 세상에서는 경세가 틀림없는 어리석은 사람일 수밖에 없어 보였다. 결국 경세가 미친 사람들과 함께 떠들고 고함치고 하지 않으려면 그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수밖엔 딴 도리가 없을 것이라 여겨졌다.
뉴스 영화가 끝나고 장내에 불이 반짝 켜졌을 때 형세는 저 모르게 우뚝 일어섰다. 고요하던 영화관이 갑자기 자가사리 끓듯 왁자지껄 하였다.
형세는 눈앞에 오글쏘글 들끓는 머리떼를 유연히 바라보면서 미례와의 약속을 생각하고 영화관을 나오려 하였다. 비좁은 통로를 헤치고 막 문 밖으로 나오려다가 형세는 뜻밖에도 거기에서 형 경세를 발견하고 발을 뚝 멈추었다.
‘형은 어느새 여기에 왔을까. 혹 아까 내가 이른 말을 듣고 온 것이나 아닐까.’
형세는 순간 그러한 것을 생각하며 형의 곁으로 한걸음 다가갔다. 그러나 형은 팔거리에 팔꿈치를 세워 턱을 받치고 앉아서 눈을 무겁게 내리깐 채 깊은 생각에 잠겨서 형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아마 금방 본 전황 뉴스 영화의 인상을 정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세는 팔을 들어 형을 찾으려고 하다가 문득 그의 생각을 깨트려주는 것이 죄스러운 일 같아 그대로 두고 밖으로 나와 버렸다.
시난없는 겨울해는 이미 저물어 거리는 사막처럼 쓸쓸하였다. 형세는 영화관에 남겨 두고 나온 명상에 잠겨 있던 형의 모습을 몇 번이고 머릿속에 그려 보면서 다방 향원에 다다랐을 때에는 미례는 벌써 구석진 박스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래 기다렸수?”
형세는 마주 가 앉으면서 담배를 뽑아 들었다.
“저두 금방 왔어요. 참 아침 엔 실례했어요.”
미례는 어젯밤의 일을 생각하고서인지 얼굴을 붉히며 인사한다. 어제보다도 미례는 한결 씩씩해 보였다. 형세는 담배를 붙여 물고 자욱이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미례의 얼굴을 더듬으면서,
“그래 오늘두 제대루 사물 봤수?”
하고 물었다.
“보구말구요. 우리두 병사라는데 자꾸 그러시네! 병사에게 설이 있을라구요!”
“병사라!”
형세는 병사라는 말을 되씹으면서 문득 금방 보고 온 뉴스 영화의 장면을 연상하였다. 짜장 씩씩한 미례의 태도에는 어딘지 모르게 아까 본 병사들과 공통되는 용맹이 잠재해 있는 듯하였다. 제일선의 병사들과는 말할 것도 없고 미례에게만 비기더라도 강단에 서서 철학이 어쩌니 문학이 어찌니 하는 대학 교수들이란 게 얼마나 무력한 존재이냐고 형세는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형처럼 세상을 부정하고 회의하고 하는 것보다 현실과 함께 춤추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형세는 경세와 미례의 대조로써 확실히 깨달으며 미례의 얼굴을 빤히 마주 보고 있었다.
“아이 싫여요! 왜 사람을 그렇게 빤히 바라보세요!”
“옳구 곯구 간에 사람은 신념을 가져야겠군!”
하면서 형세는 담배를 빨았다.
“그야 물론이죠! 참 북지에 가보구 싶은 생각 없으세요?”
“북지에?”
“네, 북지에 말아요. 오늘 우리 회사 사장이 그러는데 자기가 관계하는 모 방직회사에서 이번에 북지로 진출하게 되었다구 혹 희망자가 있다면 그리루 전근시켜 준다나요.”
“그래 미례는 간다구 했수?”
“아이! 오늘 신년인사 때에 그러셨는데 언제 그럴 틈이 있었겠어요. 하여튼 전 가구 싶어요. 사장 말씀이 뭐라시는구 하니 사변은 곧장 끝날지 모르지만 건설은 하루 이틀에 될 일이 못 되니까 이제부터 북지로 갈 사람은 적어두 해골을 북지에 매장할 만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나요. 난 그 말에 퍽 매력을 느꼈어요.”
“그래 미례두 해골을 북지에 매장할 각오가 있수?”
“호호호, 물론…… 형세 씨두 가십시다. 이번에 새로 직원을 많이 모집한다는데.”
“호쿠시에 가케오치카(북지로 사랑의 도피라).”
하고 형세가 독백 비슷이 중얼거리자,
“소네! 가케오치데모 이이쟈나이노! 도시테? 고와이(그래요! 사랑의 도피라도 좋잖아요! 왜요? 두려우신가요)?”
순간 미례의 얼굴에는 옅은 구름이 지나갔다. 형세도 농으로나마 그런 말을 하였던 것이 뉘우쳐졌다. 미례가 형세를 북지로 유인하는 것은 물론 커다란 시대적인 힘에 달떠서일 것은 말할 것도 없으나 그러나 형세에게 이미 아내가 있다는 그 불리한 조건이 미례의 행동에 심리적으로 전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가면 언제 가누?”
형세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이월 초에는 떠나야 한다나요!”
“이월 초? 그럼 졸업 전이겠는데…….”
“졸업 같은 것 못 험 어때요! 졸업장이 뽑낼 수 있는 건 옛날 일야요! 적어두 해골을 그 땅에 묻을 각오로 대륙 진출을 할 사람이 졸업장 같은 데 옹색해서 어떻게 해요!”
하고 미례는 경별하듯 톡 쏘아붙인다.
짜장 형세 자신도 자기를 경별치 않을 수 없었다. 형 경세를 볼 때마다 지식의 무력을 조소해 온 제가 저 모르게 졸업장에 애착을 가졌던 것을 깨닫고 형세는 자기 환멸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형세는 광막한 북지의 벌판에 선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의 미례와 자기와의 영웅적인 환상을 그려 보면서 가슴속에 수물거리는 힘을 깨달았다.
“미례! 갈 텐가?”
“가시겠어요!”
“갈 테야, 갈 테야!”
하고 형세는 어린애처럼 씩씩한 표정이다.
“정말요? 가십시다, 네?”
“가구말구 ―”
형세는 어느새 군중적인 영응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꿈을 꾸었다. 오랫동안 찾아 헤매었던 꿈을 이제야 찾아낸 듯하였다.
“그럼 전 내일 모집규정을 잘 알아 올게요.”
하며 미례도 참새처럼 희망에 날뛰었다.
손에 손을 맞잡고 광막한 처녀지로 개척의 첫걸음을 내밟는다는 것은 얼마나 낭만적인 사실인가?
형세도 의기충만한 눈으로 방 안을 휘 둘러보다가 문득 이구석 저구석에 널려 앉아서 사뭇 깊은 철학적 명상에라도 잠겨 있는 듯한 뭇사람들의 무력한 포즈를 발견하고 갑자기 우울하여졌다. 거기에는 무수한 경세의 해골이 흩어져 있는 듯하였다.
‘스스로 생을 포기하고 자기의 무덤을 손톱으로 파고 있는 무리들.’
형세는 이렇게 불러 보며 홀 안의 질식할 공기를 더 참고 견딜 수없어 마루를 박차듯 일어서 나왔다.
형세는 이날 밤도 미례의 아파트에서 묵었다. 이튿날 미례의 출근을 바래주고 나서 형세는 다시 자리에 누워서 북지로 갈 궁리를 해보았다.
어제 본 뉴스 영화의 처참한 장면이 눈앞에 다시 떠벌려지면서 그러나 어제는 그렇게나 아름답게만 보였던 장면장면들이 웬셈인지 오늘은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을 고난의 장면으로밖엔 해석되지 않았다.
될 수만 있으면 고난을 피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영리한 처세술이 아닐까고까지 생각하였다. 미례에게 북지행을 단언하면서 영웅적 심정에 도취했던 것이 어느 무용전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들면서 형세는 몇 번이고 몸을 뒤채었다. 지식을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할 처지에 함부로 행동의 세계에 범접해 본다는 것은 일종 망발인 것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형 경세의 꼴을 생각하자 형세는 또 한번 지식을 멸시해 보면서 그러나 눈앞은 오직 캄캄해질 뿐이었다.
그때 문득 문 밖에 노크 소리가 나고 문이 열리면서 사환아이가 미례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알리었다.
형세는 아닌때의 전화로 해서 불길한 예감에 가슴 찔리면서 전화를 받았다.
미례는, 어젯밤에 경세에게서 회사로 세 번씩이나 전화가 결려 왔다는 것과, 숙직 직원이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까 이형세라는 사람의 간 곳을 몰라 그러는데 혹 미례 씨가 알 듯싶어서 그런다는 말을 하더라고 하면서 무슨 급한 일이 생겼는지도 모르니 어서 집으로 가보라고 한다.
전화를 끊고 밖으로 나오면서 형세는 통 영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어제 영화관에서의 형의 심각한 표정을 본 것이 생각나기는 하나 그것도 언제나 보던 표정이요.― 혹 아버지가 외박하는 걸 아시고 걱정하시는 것이나 아닐까, 또 혹은 요새로 알아보게 침울하여 오던 정숙이가 음독자살의 연극이라도 핀 것이 아닐까…….
형세는 착잡한 상상에 마음 헷갈리면서 집으로 돌아오니 죽은 듯이 조용하던 큰방에서 별안간에 벌컥 뛰어나오는 것은 눈물어린 형수였다.
“아우님! 영훈 아버지가 글쎄 어젯밥에 어디론지 달아나 버렸구려! 이 일을 어쩌우 글쎄!”
“형님이……? 달아나시 다니요?”
형수의 말을 되풀이하면서도 형세는 순간에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었다. 영화관에서의 형의 심각하던 표정이 또 한번 나타나 보였다.
“이를 어쩌우 글쎄― 전에 없이 어제는 외출을 하였다가 밤 열시나 되어서 돌아오기가 바쁘게 저녁상두 안 받구 자리에 누웠던 사람이 자다 깨보니 오니 가니 소리 없이 없어졌군요 글쎄! 어디 가셨음직한 곳이라두 짐작 안 나시우?”
“글쎄 모르겠군요.”
하고 형세는 천연스럽게 말하였다.
“어드메 기생네 집이래두……?”
형세의 천연스런 태도에 형수는 좀더 달떠서 어쩔 줄을 모른다. 형세는 형수의 말에 어이없음을 느끼며, 여태껏 혼자 고민하는 형의 태도를 가정에 대한 불만으로 알아 온 형수의 단촐한 생각이 측은하기까지 하였다.
“그래 거리에서 돌아와서두 아무 말도 없었나요?”
“내게야 무슨 말을 허는 성미던가요 머! 참 잠자리에 누워서 얼말 있다가 형세 안 들어왔지? 하고 그 한마디 묻더군요!”
“글발 같은 것 써놓은 것도 없구요?”
“그런 게 있으면야 속이 왜 상하겠수!”
하고 형수는 짜증 쓰듯 하며 머리를 빡빡 긁는다.
형세는 형수와는 딴 의미로 초조하였다. 미례에게도 전화를 세 번씩이나 걸었다니 형은 집 떠나기 전에 내게 무슨 말을 하려 하였던 것일까. 이제 생각하니 어제 형세가 집을 나올 때에 형이 무슨 중대한 말을 하려다 말던 것도 먼길 떠난 것과 무슨 관계가 있었을 것이 짐작이 갔다.
형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육 년을 두고 끙끙 앓으면서 신념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가 실패한 나머지 뛰어든 곳이 대체 어떤 나라일까. 형세는 형의 입에서 우러나올 마지막 말을 엿듣지 못하였음이 무던히 안타까웠다.
반드시 승리를 노리면서가 아니라 차라리 패배의 쓰라림을 인식하면서 신념의 나라로 뛰어든 것일까? 막다른 골목에서 절개와 양심을 박차면서 현실의 폭풍에 몸째 휩쓸려 들어간 것일까? 도저히 알아맞힐 수 없는 일이면서도 둘 중의 어느 것이든지 간에 형세에게는 어쩐지 형의 세계가 몹시도 찬란하게 느껴졌다.
“그러구 섰지만 말구 어디 갔음직한 곳에 좀 알아보아 주어요, 어서.”
하고 성화같이 재촉하는 형수의 말에 형세는 비로소 꿈에서 깨어나면서,
“그러리다.”
그리고 휙 돌아서 중대문께로 나오다가 형세는 문득, 건넌방문을 열어 잡고 근심 가득 찬 눈으로 형세를 내다보고 있는 정숙의 시선과 딱 마주쳤다. 그래 형세는 당황히 외면하고 재빨리 중대문간 밖으로 걸어나오며, 나도 이로써 영영 이 집에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하였다.
순간 형세는 오늘 아침 미례의 아파트에서 북지로 가는 데 대해 겁을 먹어 보고 혹은 지식에의 미련을 가져 보고 한 것을 뉘우쳤으나 그러나 그것도 말하자면 형세 자신이 다소라도 형과 같은 사조에 물들지 않을 수 없던 오직 그 때문이었음에 틀림없었음을 깨달았다. 하나 형 자신조차가 이미 이 집을 떠난 바엔 벼슬에의 미련에 연연한 아버지나 동물같이 몰이해한 형수나 정숙을 위하여 형세 자신이 이 집에 더 머물러 있을 의무는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촉탁 같은 것으로서는 성이 차지 않아 좀더 엄청난 세계로 뛰어들었을 형을 생각하며 형세는 무턱대고 그 세계가 찬란하게 여겨졌다.
하나 그 순간 형세에게는 웬일인지 그 찬란한 세계라는 것이 피뜩 자살이라는 두 자로 바뀌어 생각되었다. 형은 혹시 자살한 것이나 아닐까. 자살로써 저 혼자만이 미치지 않았다는 걸 고집할 작정이나 아니었을까.
짜장 형에게는 그 길만이 단골길같이 생각되었다. 하나 자살하였다면 하였지 이제 어쩌는 도리도 없을 게고 또 자살만이 형의 갈 길이었다면 그 역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형세는 인제 굳이 형의 행방을 탐색할 것 없이 미례와 더불어 운명의 물길을 쫓아 내달았으면 그만일 것 같았다.
형세가 큰대문 밖에 나섰을 때 돌연 사랑에서 아버지가 뭐라고 분노에 가까운 목소리로 형세에게 호령하는 것이 들려 나왔으나 형세는 들은 척 만 척 획획 거리로 나와 버리고 말았다. 아들의 권세를 빌려 다시 한번 옛날의 혹세를 누려 보자던 화려한 꿈이 하룻밤 새에 여지없이 깨트려진 아버지의 처참할 표정을 형세는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거리에 나선 형세에게는 오직 앞길만이 환하였다. 한낮 가까워 수라장같이 혼돈한 거리의 인파를 갈라 헤치며 형세는 미례를 만나려고 재빠른 걸음을 이어 나아갔다.
(《인문평론》, 194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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