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픽처
919회 사드배치결사반대 김천촛불집회
<박석민 자문위원 발언 중>
우리가 지금 사드 반대 투쟁을 포기한다면 훗날 역사를 돌아볼 때 슬플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우리 사드 반대 투쟁이 없었다면 사드가 미국이 강요한 불법 전쟁무기임을 이야기할 이유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소성리에서 김천에서 추운 겨울에도, 지난 7년여 세월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곧 역사입니다.
성탄절 전날인 오늘도 일요일 저녁 7시, 김천역 광장에서 사드배치반대 평화촛불집회가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오늘의 사회자 김종희-
“메리크리스마스”
아침에는 눈발이 날리더니 지난주에 비해 이번주는 추위가 누그러졌다. 전쟁무기 사드뽑고 이땅의 평화를 심기 위한 제919회 김천시민촛불 집회를 힘찬 함성으로 시작하겠다. 오늘은 이땅에 평화를 심을 수 있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시작한다. 구호를 힘차게 외쳐보자.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에 살자. 통일로 가자. 사드뽑고 평화심자.”
오늘 아침은 정수태 목사님과 함께 케잌을 사서 구미 아사이 동지들의 농성 투쟁 현장을 갑자기 찾아갔다. 따뜻하지 않은 길거리 천막 안에서 투쟁하는 동지들이 안쓰러웠다. 이땅의 노동자, 농민, 인간의 생존권을 위한 길거리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투쟁 동지들을 생각하면서, 인간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위해 싸우고 있는 동지들을 생각하며 우리 같이 민중의례를 시작하자.
-묵념과 임을 위한 행진곡 -
- 박수규 소성리 평화행동가 여는 발언 -
고생 많으십니다. 소성리도 그렇지만 김천역 촛불시민이 김천역을 지키고 있어 너무 든든합니다. 이로 인해 소성리에서도 쉼없는 지속적인 투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 초청 연사 : 박석민 자문위원(전 민주노총 통일위원장) -
사회자가 김천시민촛불 집회에서 가장 믿을 만한 분을 모셨다. 어느 상황에서든 무대로 이끌어도 주저없이 역사와 사회 현상에 대해 즉석에서 박식한 정보와 냉철한 분석력을 발산한다. 사회자의 발언 요청 준비없이 마이크를 잡고 30분 이상의 연설과 강연을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소중한 김천 촛불 자원임은 분명하다.
“그동안 마이크 잡는걸 주저한건 자꾸 앞에 나서는 게 대책위에 크게 도움이 안된다고 생각했고, 여러분들이 그런 의견이어서... 운영팀 막내로 일찍 집회 나와서 준비하는 일에 충실해 왔는대, 오늘 갑자기 발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발언은 최근 크게 흥행하는 서울의봄 영화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0시부로 관객이 천만명을 돌파했는데, 우리나라 첫 천만 관객 영화가 뭘까요? 2003년 실미도가 처음 천만 관객을 돌파했는데, 우연하게도 서울의봄과 실미도가 천만을 넘긴 날이 12월24일 오늘로 같은 날짜입니다.
오늘은 12월 24일은 예수가 오신날인데, 1949년 12월 24일 오늘, 경북 문경 산북면 석봉리 석달마을에서 국군이 수색 정찰중 민간인 86명을 학살했는데, 주민들이 환영하지 않는다고 빨갱이마을로 간주하고 만행을 저지른 날입니다. 1950년 오늘 한국전쟁 중 서울시민에 피난령이 내려졌고, 최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학살하는 가자지구 공격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2014년 오늘 대량학살 등에 사용될 우려 있는 재래식무기의 국제거래 막기위한 유엔무기거래조약(ATT) 발효되어 가자지구에 백린탄을 사용하는 이스라엘은 규탄 받아 마땅합니다. 이를 제공한 미국 역시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서울의봄. 정확히 전두환 일당이 벌인 1212 군사반란 얘기를 하려면 박정희가 심복 후배인 김재규에게 총 맞아 죽은 10.26 얘기부터 시작해야 연결이 돼서 10.26 얘기부터 시작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우리나라 첫 방조제 삽교천에서 굳은 얼굴로 준공 테이프 끊고 올라와 궁정동 안가에서 가수와 모델을 좌우에 앉히고 술을 먹던 중 김재규가 부마항쟁 민중을 캄보디아처럼 1~2십만 죽이면 된다는 차지철을 쏘고 이어 박정희를 쐈습니다. 차지철은 화장실로 달아나 경호원을 부르지만. 그가 애타게 부른 경호원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사살당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 요원들과 중정 요원들은 특별한 사이로 모두 해병대 출신들로 서로 잘 아는 사이인데, 이들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를 일으킬 때 한강다리를 앞장서서 건넌 해병대로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으로 박정희의 채홍사 노릇을 했던 박선호는 해병 3연대장 출신으로 청와대 경호처장 정인형과 동기였습니다. 박선호가 같이 살자고 부르짖지만 정인형이 총을 뽑으려하자 박선호가 정인형을 총을 쐈는데, 그날 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 거사를 주도한 것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로 박정희가 저지른 악행은 밤새 얘기해도 끝이 없고 많이들 들으셨을 겁니다. 오늘은 김재규 얘기를 하겠습니다. 보다 자세한 건 2005년에 개봉한 영화 한석규. 백윤식, 송재호 등이 주연한 “그때 그 사람들”을 보시면 됩니다”
“김재규는 1924년생으로 박정희 집권 기간 동안 대표적인 최측근이었으나 결국 박정희를 살해했습니다. 박정희와 7년 차이나지만 육사 2기로 박정희와 김재규는 육사 동기이기도 합니다. 김재규는 1943년 안동농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에 선발되어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고 소위 임관을 앞둔 와중에 해방을 맞았는데, 해방 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지금의 육군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했는데, 재직 중 부대내 사망사고의 책임을 지고 면직, 잠시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복직한 이력도 있어 김천과 그런 인연도 있었네요.
1957년 육군대학 부총장을 맡고,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 일시 감금되었으나 박정희의 명령으로 풀려나 군사정부에 적극 협조하게 됩니다. 특히 육군 제6사단장 시절이던 1964년, 6.3 투쟁(굴욕적인 한일협정) 당시 계엄군을 지휘하여 박정희에게 더 큰 신임을 받아 제9대 국회의원, 건설부 장관, 중앙정보부장을 마지막으로 박정희와 정치인생을 같이했습니다. 박정희를 살해한 때문에 김재규를 의사라고 부르며 추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979년 8월 11일 YH 무역 여공 농성 진압과 김경숙의 죽음.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국회의원 제명, 10월 16일 부마항쟁 등 계속된 정국불안사건을 수습, 78년 2/21 동일방직 똥물사건. 79년 10월 7일, 김형욱 전 중정부장 살해. 등 모두 김재규가 중정부장일 때 저질러진 일로, 김재규는 박정희의 공작정치 최선봉에 서 있었음을 주지의 사실로 박정희 똘만이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서중석 교수 말대로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서 죽지 않았다면 79년 대한민국은 80년 광주민중학살보다 먼저 피바다가 되어 수많은 생명이 먼저 죽음을 맞았을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중앙정보부는 그야말로 하나의 작은 정부로 언론기관과 학교, 각급 기관 사무실에는 그들을 위한 자리가 따로 있었고, 법관들은 중앙정보부가 매긴 형량을 읊는 녹음기에 불과했으며, 박정희를 온몸으로 떠 받드는 기관이었는데,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는 미리 계획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김재규의 부하 의전과장 박선호나 정보부장 비서였던 박흥주가 반발하지 않고 김재규 계획을 함께 실행했던 것으로 보면 김재규는 나름대로 부하들에게 신망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박정희 암살 후 체포된 김재규는 자신의 행동이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했고, 자신을 믿고 따른 부하들에게 “자유를 회복시킨 것은 진리를 회복시킨 것이니 죽을 때에는 ‘대한민국 만세, 자유민주주의 만세, 10ㆍ26혁명 만세만은 부르고 가자. 지금 우리는 가지만 10ㆍ26혁명만은 언젠가 빛을 보게 마련이다.”는 말은 남겼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의 행동이 역사적으로 평가받으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던 모양입니다.”
“김재규는 1979년 12월 18일 계엄군법회의 최후진술에서 "민주화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계획적인 혁명 거사였다" 라고 주장했는데,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은, 첫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김재규의 박정희 살해를 몰랐을까요? 2011년 1월 18일, 미국 재미동포에 의해 김재규에 관한 미국의 당시 비밀문서가 모두 비공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던 당일 오후 2시에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를 만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에 대한 의문과 관심이 한층 더 높아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60살 넘게 살면서 대망의 새해라는 표현을 가장 많이 들었던게 79년인 듯 합니다. 말끝마다 대망의 80년대가 되면 삶이 어쩌구 나라가 저쩌구 떠들었던. 그 대망의 80년대는 군사반란으로 시작해서 80년 광주 피의 학살과 박정희에 이어 전두환 노태우까지 이어지는 30년 군부독재. 한국사회를 가장 비정상으로 만든 시작이 1212라고 봅니다.
박정희 18년 철권 통치가 끝나고 대망의 시대. 그런 역사의 격동, 변화의 물줄기를 한순간에 바꾼게 1212. 정치 군인들이 역사를 쥐고 뒤흔든 사건. 이런 반란이 80년 광주를 불러왔고. 서울의봄 영화에서처럼 조폭 수준도 안되는 이들의 왕초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불같은 80년대. 얼음기둥과 불기둥이 맞붙은 시대를 맞게 되었습니다.”
“1212는 한국 군대 오욕의 역사라고 평가 받는 하나회 소속 정치 군인들이 저지른 군사반란으로 하나회는 아시는대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등의 육사 11기가 주축이 돼서 만든 군내 비밀 사조직인데 51년 한국전쟁 통에 육사에 너무 손쉽게 들어간 11기 애들이 주축으로 하나회 리더인 전두환은 공부를 지질이 못해서 매 학년때마다 퇴교 위기를 맞기도 했습니다. 육사 11기 졸업할 때 전두환은 거의 꼴지 수준으로 150여명중 136등으로 졸업합니다. 노태우는 조금 나았고, 김복동이 13등으로 제일 좋은 성적이었다고 합니다.
불법조직인 하나회는 박정희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는데, 육사 11기 첫 별을 단 이들이 4명인데, 모두 하나회 출신이고 그다음은 4명중 2명이 하나회 출신으로 전두환은 승용차까지 하사 받기도 했는데, 아마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전두환이 나서 육사에 찾아가서 시위를 조직해 5월18일 5,16 지지 가두시위는 5.16 군사쿠데타 성공의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사조직을 통해 군 내부 인사와 좋은 보직을 차지해온 하나회. 그 리더인 전두환은 79년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10,26 이후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경호실의 모든 정보력을 손에 쥐는 등 권력을 장악했는데, 당시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이를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전두환을 동해사령관으로 발령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를 실행하기 전인 12월12일 생일집잔치라는 암호명으로 군사반란을 거행했고, 하나회가 주축이 된 반란군과 이를 막으려던 진압군의 대결이 지금 개봉중인 서울의봄 내용입니다. 군대 내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하나회, 전두환은 결국 군사반란을 통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체포하고, 권력 전체를 좌우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국가 권력 장악까지 나서 이에 맞선 광주민중을 학살하고 집권해 또다시 군부독재 권력의 지배하는 얼음같은 나라, 이러한 얼음기둥과 민주화와 평화를 위해 맞선 민중들의 불기둥이 맞서는 대망의 80년대를 우리는 지내왔습니다.”
“미국은 전두환의 군사반란을 몰랐을까? 영화에서도 기록에서도 미국의 상황 파악을 못했다고 하는데, 믿기 어렵지요. 5,16 박정희의 군사쿠데타 때도 미국 CIA 덜레스 국장은 4월부터 8번이나 한국 상황을 보고하는 등 상황을 읽고 있었고, 덜레스는 나중에 자신이 활동한 기간 가장 훌륭했던 일은 박정희가 집권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의 봄 영화처럼 전방부대, 공수부대, 장갑차와 탱크, 군부대 병력이 이동하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모든 작전통제권, 부대의 이동까지도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의 암묵적 동의 없이 노태우 부대나 공수부대가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던 바 미국은 1212 진행을 지켜본 것으로 봐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분단, 미군정 통치, 516, 1212, 광주민중학살, IMF까지 한국 현대사의 주요 정치, 경제 모든 분야에서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개입하지 않은 적이 없고, 지금도 실질적인 지배력으로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게 주지의 사실입니다.”
“1212는 세명의 사망자가 발생합니다. 김오랑 소령, 정선엽 병장, 박윤관 상병이 그들입니다.
박윤관 상병은 본의 아니게 반란군쪽이었는데 1212 당시 무력 충돌 과정에서 사망합니다. 정선엽 병장는 육군 벙커를 지키다 반란군이 무기를 버리라고 하는 것에 “나는 중대장 명령 아니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다”며 저항하다 반란군에 의해 살해됩니다.
김오랑 소령은 특전사 대부로 불리던 정병주 특전 사령관 비서실장으로 반란군이 쳐들어왔을 때 “혼자 계시면 적적할거 아닙니까?”면서 정병주를 지키다가 자신의 선배인 최세창 3공수 여단장 부대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습니다. 김오랑 소령의 부인은 시신경 질환을 앓고 있었는데, 남편 사망의 충격으로 실명되고, 부모는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부인 백영옥씨는 군인아파트에서 쫏겨나 이후 봉사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남편의 진상규명, 명예회복을 위해 활동하던 중 건물에서 실족 사망했는데, 그 죽음이 석연찮은게 사실입니다.
정병주 특전 사령관은 강제로 예편 당한후 1212 진실 규명을 위해 뛰어 다녔는데, 1988년 10월 실종되었다가 140일만에 변사체로 발견되었는데, 장태완 1212 당시 수방사령관은 1212 진상규명을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활동하는 등 절대 자살할 분이 아니라고 증언했습니다.
전두환 일당에 가장 정면으로 맞섰던 수방사 장태완 소장은 결국 반란군 진압을 하지 못한채 체포되고 이후 가택 연금을 당하기까지 하는데,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술만 드신 때문에 일찍 돌아가시고,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가족 전체의 삶이 무너집니다. 그런 와중에도 아들이 서울대 자연대 수석 입학을 하는데 그 아들마저 여행을 떠났다가 할아버지 묘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 됩니다. 1212 군사반란 불법성 진실규명을 위해 애쓰다가 2000년 죽음 맞게 됩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반란군에 의해 강제 예편당하고 농사 등 시골생활을 하다가 노태우가 회유책을 모두 거부하다가 김영삼때 공기업 이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1993년 1212 국회 청문회에 장태완, 김진기 등 1212 당시 진압군이었던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했는데, 김진기 헌병감은 1212같은 군사반란이 진상이 규명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야만 다시는 그런일이 생기지 않고 역사를 세울수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군대내 불법사조직 하나회는 김영삼 대통령 초기에 드라마틱하게 해체됩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김영삼은 취임하자마자 3월4일 육사 졸업식에서 “임무에 충실한 군인이 조국으로부터 받는 찬사는 그 어떤 훈장보다도 값진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걸어온 대다수 군인에게 당연히 돌아가야 할 영예가 상처를 입었던 불행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잘못된 것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닷새 후, 김영삼은 임기가 남아도 한참 남아 있던 육군 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의 옷을 벗깁니다. 당시 군을 주요 요직을 장악하던 이들은 육사 17기 하나회로 참모총장은 김진영 대장. 김진영은 1212때는 수도경비사령관 명령을 거역하고 전두환을 따랐던 33경비단장을 맡았던 인물로 김영삼으로 4월까지 하나회 장성을 하나둘 강제 예편 시키면서 40개가 넘은 별이 떨어지는 일이 강행되었습니다. 거기에 하나회 명단이 공개되고 김영삼의 하나회 제거에 반발해 술자리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이 전해지면서 격노한 김영삼이 령관급 장교까지 모두 1년이 넘는 기간동안 제거하면서 하나회를 힘을 잃게 됩니다. 이양호 공군 참모총장이 건국 이후 최로로 비육군 출신 합참의장이 되는 등 그래서 오죽하면 김영삼 미쳤나보다. YS 다시 봤다 대단하다 등의 칭찬이 이어졌고, 93년 하나회 제거와 금융실명제 실시로 집권초 매우 높은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은 대망의 80년대 한국 민중을 짓밟는 시작이었고, 그 이후 광주민중항쟁 등 피나는 싸움이 불가피했습니다. 이번에 개봉해서 천만을 넘긴 영화, 서울의 봄. 전두환 일당에 맞섰던 장태완, 정병주, 김오랑, 김진기, 정선엽 등의 죽음, 그들조차 없었다면 1212는 더 암울 했을 것으로 영화뿐 아니라 현대사에서 특별 했던 죽음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다고 해야 할까? 아마 우리는 1212을 이야기 할 이유도 없고, 영화도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드 반대 투쟁을 포기한다면 훗날 역사를 돌아볼 때 슬플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우리 사드 반대 투쟁이 없었다면 사드가 미국이 강요한 불법 전쟁무기임을 이야기할 이유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소성리에서 김천에서 추운 겨울에도, 지난 7년여 세월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곧 역사입니다.
오늘은 발언자가 없어 조금 길었습니다.
사드뽑고 평화심자!
3. 우현덕 수사의 연주곡
제가 봄을 기다릴 수 있는 것은 기다리면 봄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즐겁게 기다릴 수 있습니다.
다 뭔가를 기다리시죠? 맞습니다. 제가 다이어리를 보니까 작년 12월 25일 날에도 제가 김천역 무대 위로 올라왔더라고요.
이 교회 다닌다고 자꾸 성탄절에 그러시나. 이 곡은 “쿰바야”라는 곡입니다. 교회에서 노래를 막 부를 때 “홈 바이 히어” 이 사람들이 들리는 대로 그렇게 흥바이야라고 이렇게 불렀대요. 이곳에 오소서라는 뜻이거든요.
오늘 성탄절을 맞이해 가지고 제가 좀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