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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모든 것이 되시는 독생자의 모범
나에게 기별을 주셨는데, 너는 일찍이 유한한 인간에게 맡겨진 일이 없었던, 가장 고상한 사업을 위하여 네 자신을 헌신하라. 나는 너에게 고상한 포부와 능력과 그리스도의, 사업에 대한 참된 사명을 줄 것이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애와 죽으심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사신 바 되었으니, 너는 네 자신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된 그대의 자녀의 마음과 봉사를, 요구하신다는 기별이었다.(1SM 39.1/기별1) 저들에게 하나님의 독생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말하십시오. 저들 앞에 성경말씀을 제시하십시오. 진리의 말씀을 그릇되게 해석하고 그릇되게, 증거 할 자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저들의 눈은 어두워졌으며 저들은 사단이 저들을 위하여 꾸며놓은, 표상들과 해석들을 진열해 놓았으며 화잇 자매가 말한 증언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의미의 해석을 붙일 것입니다. 마치 ‘유다’가 죄의 편에 서서 그리스도를 따른 것처럼 사단도,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의 자녀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허위 진술을 일삼는 사단의 학교에서, 저들 자신을 교육하였습니다. ‘스가랴’ 3장을 보면 그러한 자들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의 교회만큼, 하나님께 더욱 사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사단은 인간의 정신에 작용하였으며, 기만적인 방법으로 꾸준히 거룩한 믿음을, 배신하도록 역사할 것입니다.(1SM 57.3)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닫힌 문이 있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그 시대의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마23:38)고 선언하셨다.(1SM 63.6)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열심히 그리스도께서, 기만자라는 증거를 내세우려고 노력하였던가! 저들은 얼마나 열심히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그릇되게 증거하고 해석하기 위하여, 책잡을 말을 살폈던가! 교만, 편견 및 정욕은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일 영혼의 모든 통로를 굳게 닫아버리고 말았다.
주님께서 저들의 악을 지적하시고 저들의 행위가, 사단의 자녀들이 하는 행위를 드러냈다고 밝히셨을 때, 저들은 분노하여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고 하면서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1SM 70.2) 바로 그러한 것이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오셔서, 구원하시려는 인간이 그분께 보여준 정신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려 하고 진리의 기별을, 이 세상에 증거 해야 할 자로서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보다, 더욱 유리한 대접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1SM 71.2)
남녀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수 있는 품성을 형성하게 되고, 극기와 자아희생의 생애를 온전히 이루며 마지막 시험을 치를 준비가 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소개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범죄 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분자신을 기꺼이 바치신 주님께서는, 어떤 것을 가장 고상한 봉사가 될 것인가? 무한하신 사랑을 소유하신 그분께 어떤 사업이 가장가치 있는 것이 될 것인가? 하늘 아버지와 독생자에게 가장 큰 만족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업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멸망하여 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에게 복음의 구원하는 능력을 가져오시기 위하여 돌아가셨다.
하나님의 자비의 사업을 전진시키기 위하여, 그분과 협력하며 가까이 있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기울여 일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무리가, 하늘 보좌의 주위에 서게 될 때, 구세주의 기쁨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1SM 90.4) 인간가족은 그리스도께서 사단과의 투쟁에서 가지셨던, 모든 도움을 가지고 있다. 저들은 정복당할 필요가 없다. 저들은 사랑해 주시고 저들을 위하여, 그분의 생명을 바치신 주님을 통해서, 보다 큰 정복자가 될 수 있다. “너희는 ...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전6:20)”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댓가이랴! 인성을 쓰신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인간을 공격하는, 모든 유혹들 곧 격렬하고 겉으로 보기에 압도적인, 시험과 씨름하셨는데 그 시험들이란 식욕의 방종, 하나님께서 인도하시지 않는 일에 나타내는 주제넘은 모험심, 이 세상의 우상숭배, 이생의 현혹적인 쾌락 때문에 영원한 축복을 희생시키는 것 등이다. 모든 사람이 시험을 받을 것이로되, 우리들이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받도록 허락하시지 않겠다는 성경말씀이 있다. 우리들은 교활한 원수를 항거할 수 있으며 패배시킬 수 있다.(1SM 95.3)
모든 영혼들이 싸워서 얻어야 할 천국이 있으며, 멀리 피해야 할 지옥이 있다. 그리고 하늘천사들은 시련을 당하고 시험을 받는, 영혼에게 도움을 주려고 항상 준비하고 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시험과 시련을 견디셨다. ‘갈바리’의 십자가는 모든 영혼들 앞에, 생생하게 서 있다. 모든 인간의 문제들이 재판을 받게 될 때에, 저들(잃어버린 자)이 하나님께 욕을 돌린 것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멸시한 죄로 고통을 받게 될 때에, 아무도 핑계하지 못할 것이나 단, 한 사람도 멸망 받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와 사단 중 누가 저들의 임금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저들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모든 사람은 큰 시련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모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십자가는 단 한 사람도 잃어버린바 될 필요가 없으며, 모든 영혼들을 위한 넉넉한 도움이 준비되어 있다는, 보증으로 서 있다. 우리들은 사단의 대리자들을 정복할 수 있으며, 반면에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업을, 대항하려는 세력과 합세할 수도 있다.... (1SM 96.1)
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치르신 무한한 대가에 대해서, 좀 더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도 ‘바울’은 “너희는 ... 값으로 산 것이 되었”(고전6:19,20)다고 하였으며,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신 만큼 이것은 참된 진술이다. 우리는 모두 이 점을 생각하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초청을, 거부할 수 있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화평을, 등한히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독생자의 보혈로, 사신 바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12:3).(1SM 100.2)
성령의 결핍과 율법과 율법의 영원한 의무에 대한, 영성의 부족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하신, 이 약속의 말씀을 깊이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노라고 공언한 자들은, 저들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관계를 밝히 깨닫지 못하였으며, 다만 그 의미의 윤곽을 흐릿하게 이해할 뿐이다. 저들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막연하게 깨달을 뿐이다. 저들은 거룩한 율법의 주장이 얼마나 고상한 수준에, 미치고 있다는 것과 율법의 교훈들을 얼마나 밀접하게, 실생활에 적용해야 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저들은 기도와 회개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이며, 얼마나 긴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헌신의 특징을, 인간에게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직무이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영혼이 깨우침을 받고, 품성이 새롭게 되며 성화되고, 고상하게 된다.(1SM 134.1) 사단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주시게 된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이, 깨달을 수 없게 하려고 굳은 결의를 하였다. 아, 우리가 어떻게 함으로 하나님의 깊고도 고귀한 사랑을,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이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 라고 외치는 것 외에 달리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또 있을까. 우리는 죄인들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고 말하자.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대리자로서 예수님을 증거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간이 깨닫지 못하도록, 사단이 우리 길에 깔아놓은, 암영(暗影:어두운 그림자들)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다. ‘갈바리’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십자가는 하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과 측량할 수 없는, 자비에 대한 영구적인 보증이다.(1SM 156.2) 생명의 양식을 원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읽어야 하며, 유한[인간의 한계성]하고 과오를 범하는, 인간의 교훈을 따라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오신, 생명의 양식을 백성들에게 주라. 그대들이 전하는 교훈에 인간의 가설들과, 억측들을 혼합시키지 말라. 원컨대 하나님의 독생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이 얼마나 필요하며, 주님의 말씀을 저희 생명의 한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긴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바란다.(1SM 160.3)
우리 목사들은 저들의 독특한 견해들을 주장하며, “여러분들도 제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생각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형식의 감정은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상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하여, 큰 사업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아야 하며, 저들은 반드시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저들이 반드시 먹어야 할 음식은, 그대의 견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의 살과 피 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요6:55),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말씀하셨습니다.(1SM 178.1)
율법을 범하는 생애 가운데는 안전함이 없고, 평안과 정당성이 없다. 인간이 죄를 계속해서 짓고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무죄한 자로 서기를 바랄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평할 수도 없다. 그는 범죄 하는 생애를 그쳐야 하며, 충성되고 진실하게 되어야 한다. 죄인이 도덕을 투영(投影:반영, 반사) 시키는 큰 거울을 바라볼 때, 그는 자기 품성의 결함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흠과 점이 많으며 더럽고 정죄를 받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벗게 할 수도 없고, 범죄자를 용서해 줄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죄인에게는 율법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학교 교사다. 죄인은 죄를 담당하신, 구세주를 바라보아야 한다. ‘갈바리’의 십자가에 달리셔서 모든 세상 사람들의, 무거운 죄에 눌려 죽어가는 그리스도께서, 죄인에게 나타나 보이실 때에 성령께서는 죄를 회개하는, 모든 영혼들에게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 주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1SM 213.2) 인간가족은 하늘 아버지의 율법을, 범함으로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의 치유 제를 보이실 때까지, 죄인을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가 죽으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믿는 조건으로 우리를 위한 대치 물과 담보로서, 이 희생을 받아들이셨다. 죄인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 그분의 공로를 붙잡고 죄를 짊어지신 주님께 자신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받아야만 한다.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의가 회개하고, 믿는 죄인에게 전가(轉嫁:주님에게 덮어씌움)되었다.
그 죄인은 하늘가족의 일원이 되며 하늘임금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함께 유업을 받는 자가 될 것이다.(1SM 215.1) 하늘궁전에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사단의 지배권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단의 권세를 맞아 정복해야 할 때가 올 것을 알고 계셨다. 그 시기가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그분의 왕관과 왕의 두루마기를 벗으시고, 그분의 신성을 인성으로 입히시고 악의 임금을 맞아, 정복하기 위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다. 하늘 아버지 앞에서 인류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하여, 구세주께서는 모든 인간이 사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였으며 세상에서 당하는 역경과 슬픔과 시험을, 받으셔야만 하였다.
‘아담’이 타락하게 되자 세상이 있기 이전부터, 하늘 아버지의 영광의 참여자이셨던 주님께서는, 그분왕의 제복과 왕관을 벗어 놓으시고, ‘베들레헴’의 갓난아기가 되셔서 ‘아담’이 걸려 넘어진 땅을, 밟으시기 위하여 높으신 권좌에서 내려오셔서,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여야 하셨다. 주님께서는 원수가 인간에게 가져오는 모든 유혹들을, 스스로 당하시기로 작정하셨으나 사단의, 모든 공격으로도 하늘 아버지께 대한 주님의 충성심을, 변절케 할 수 없었다. 죄가 없으신 생애를 사심으로써 주님께서는, ‘아담’의 모든 아들과 딸도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를 가져온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해 보이셨다.(1SM 226.1)
‘베들레헴’의 갓난아기로서 구세주께서는, 인류와 하나가 되셔야 하였고 말구유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흠 없는 생애로서 그분은 인간이, 회개의 생애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친히 보이셔야만 하였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속하시는 은혜와, 죄의 용서하심을 가져오셨다. 만일 인간이 충성심을 되찾고, 그 이상 더 범죄 하지 않으려 한다면, 저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1SM 223.2)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그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으며 누구든지 그분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분의 의로운 생애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붙잡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 해 보이셨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죄인이 회개와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을 활용함으로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셨다.(요3:16)(1SM 223.4)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독생자의 생명의 은사를, 받는 사람은 유혹에 넘어갈 수 없다. 믿음으로 거룩한 성품을 굳게 붙잡을 때,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는 기도하며, 기도한 바를 믿을 것이다.
시험을 당하고 시련을 겪을 때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주시기 위하여 돌아가신 그 능력을 주장할 것이며, 주님의 은혜를 통하여 승리하게 될 것이다. 모든 죄인은 바로 이 점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어야 하며 구원하시는 능력과 그를 죄로부터, 보호하시는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모본으로 보이신 그 은사에 대하여, 우리들은 얼마나 감사해야 할 것인가!(1SM 224.2)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이 범죄 하는 경우 인류의 구속자가, 되시기로 친히 서약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남녀들에게, 이길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 주님께서는 한 인간으로서 인간사회에 사시기 위하여, 인간의 형체를 쓰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본성에 따르는 모든 부담들이 입증되어야 하고, 시련을 당해야 할 것으로 여기셨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인성 가운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가 되셨다. 그분의 성육신(成肉身:마리아의 몸에서 탄생)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칭호를 얻으셨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고 말하였다.
인간의 아들이면서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의미에서 하나님의 독생자가 되셨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나시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인간으로 출생하심으로, 인류와 연분을 맺으셨다.(1SM 226.2) 도덕적인 율법은, 예표나 그림자가 된 적이 결코 없다. 도덕적인 율법은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에 존재하였으며, 하나님의 보좌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 율법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그분의 율법 중, 단 한 가지 계명도 변화시키거나 고칠 수 없으시다. 그 이유는 율법이, 그분정부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율법은 변할 수 없는 것이며, 고칠 수도 없고 무한하고 영원한 것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또한 율법의 명예를 보존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죄를 위한 희생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바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죄를 아시지 못하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갈바리’에서 돌아가셨다. 주님의 죽으심은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그분의 율법의 불변성을 나타내었다.(1SM 239.4)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겸비[순종겸손]는, 인간의 정신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이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주님의 신성(神性:창조주)과 그분의 존재하심이, 실존(實存:성부와 함께)했다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본체로서 영광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우리의 중보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 중보자는 모든 하늘천군의 사령관이시며, 그분의 신성에 인성을 옷 입으신 주님께서는, 스스로 종의 형체를 쓰셨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6,7)고 하였다. (1SM 243.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5,14).(1SM 246.1) 인간의 육체를 쓰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교리는, 신비에 속한 것이며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추었던 것”(골 1:26)이다.
이것은 매우 크고 심원[깊고 극진]한, 경전의 비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요 1:14)신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본성에 비하여, 열등한 인성을 그분 스스로 취하셨다. 이처럼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의 겸비하심만큼, 놀라운 겸손은 다시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요3:16)다. ‘요한’은 모든 사람들이 밝혀진 사상을 깨닫고, 감화를 받을 수 있도록 단순한 표현으로, 이 놀라운 문제를 증거하고 있다.(1SM 246.3)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그분의 순종의 생애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성취하셨다. 구속사업은 그분의 본체를 버리시고 다른 형체를, 취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분자신의 본체에, 인성을 쓰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본체에서 나온, 한 실체를 인성에게 주셨다. 그리스도 안에 인성을 이루며 타락한 인류를, 신성[하나님의 품성]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 구속사업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류가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와 하나이신 것처럼,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사랑하신 것처럼 인간을 사랑할 수 있으며, 거룩한 성품의 참여자들이 될 수 있고 주님 안에서, 온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인성을 쓰셨다.(1SM 250.3) 하나님의 독생자에게서 기인하신 성령께서는, 인간의 몸과 혼과 영을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신인성(神人性:하나님이 인간품성을 함께 가지심) 에 붙들어 매신다.
이 연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가, 붙어 있는 것으로 상징되었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하신]그리스도의 인격에 연결된다. 믿음을 통하여 인성이, 그리스도의 본성에 흡수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1SM 251.1) 우리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심으로, 영감을 받기 위하여 간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있다. 세상의 궁전에서 왕이 자신의 진실성을 사람들에게, 보증하기 위하여 가장 믿음직한 서약을 할 때, 그가 약속을 이행 할 때 도로 찾는 조건으로, 자기자식을 볼모[담보로 잡아둠]로 내놓는다. 하늘 아버지의 진실성에 대한 서약이, 어떠한가 보라!
하나님께서 하늘총회의 불변성을 보증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께서 인성을 쓰시고 이 세상에, 오시도록 허락하셨으며 이 지상에서의 짧은 기간만이 아니라, 하늘법정에서도 인성으로 남아 있게 하여, 하나님의 진실성에 대한 영원한 서약의 표로 삼으셨다.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부요하심이, 얼마나 심오[깊고도 오묘]한가!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요일3:1).(1SM 258.2) 하늘의 하나님이시며,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께서는, 그분 자신을 비천하게 낮추시고 인성을 쓰셨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도마’의 질문에 대하여,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 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6-11)고 대답하셨다.(1SM 292.1)
사람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들을 사랑하심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독생자를 사랑하신 것처럼, 죄인을 사랑하실 수 있으실까? 물론 있으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그리스도께서 그같이 말씀하셨으며 주님의 말씀에는, 추호의 꾸밈이나 거짓이 없으시다. 만일 우리가 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허락들을 붙잡으며, 주님을 신뢰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계획들을 존중하실 것이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든 영혼들을 그리스도께서, 하늘 아버지께 드린 기도 가운데 포용(包容:감싸서 용납)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6).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가? 인간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깊은 진리이다.(1SM 300.1) 하나님의 정부의 율법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죽음으로써, 높임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죄의 짐을 지시게 되셨다. 우리의 충만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成肉身)과 사망[십자가]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신성의 버티게 하는 힘으로, 고난을 견딜 수 있으셨다.
또한 주님께서는 불충성의 오점이나 죄가 전혀 없으셨으므로, 죄에서 승리할 수 있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징벌의 공의[공정한 형벌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류를 위하여 승리하셨다. 주님께서는 율법을 존귀하게 하시며, 존대하심으로 인류에게 생명을 안겨 주셨다.(1SM 302.1) 하나님과 동등하시며, 하늘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히1:3)신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신성에 인성을 입히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시며 죽으시기, 위하여 이 지상에 오셨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그분 자신을, 낮추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의, 죽음을 맛보시게 되셨다. 그분의 몸에 죄의 저주를 지심으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이 미칠 수 있는 곳에 행복과 불멸의 생명을 두셨다.(1SM 308.3)
하늘 아버지의 독생자보다 덜 거룩한 이로서는, 아무도 구세주를 저희 대속자로 받아들이며, 천국의 율법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가장 죄악 적이며 타락한 사람들까지도, 깨끗하게 하기에 충분한 효력이 있는, 희생제물을 바칠 수 없다. 거룩하신 주님보다 덜한 자격으로서는 아무것도,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원상그대로 회복시켜 줄 수 없다.(1SM 309.3)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죄인들을 위하여, 죽도록 주실 때에 타락한 인간에게,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8)는 성경말씀에 대하여,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나 아직도 많은 수의 사람들이, 수치스럽게도 이 말씀의 뜻을 더럽혔으며, 그 의미에 대하여 거짓된 해석을 함으로, 위험한 과오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만이 우리가 신령한 애정을,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표준이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우리의 표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표준을 세우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에 대한, 고귀한 허락들을 주셨으나 우리는 여호와를, 범죄를 간과(看過:죄와 허물을 지워버리게)하시고 죄악에 대하여 눈감아주시는, 자애로움을 가지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1SM 311.1)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전부 범하였으며, 율법을 범한 자들로서 인간은 절망적으로, 파멸에 이르게 되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로 전락하였으며, 단 한 가지 선도 행할 힘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롬8:7)다. 도덕적인 거울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바라볼 때에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자기 자신의 악한 상태와, 율법의 공의로운 형벌 밑에서 절망적인 파멸에, 이르게 된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깊이 빠지게 된 죄의 절망적인 비탄가운데, 버려지지 않았으며 죄인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동등하셨던 분께서, ‘갈바리’에서 그분의 생명을 바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1SM 321.2)
죄인이 ‘갈바리’에서 죽어가는 구세주를 바라보고, 고난당하시는 분이 거룩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될 때에 그는 왜 이러한 큰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 묻게 된다. 그 때에 십자가는 범한 바 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불변성과, 의에 대하여 결정적인 논증이 된다. ‘이사야’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예언하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자기의 의로우심을 인하여, 기쁨으로 그 교훈(율법)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려 하셨”(사42:21)다고 말하였다. 율법은 행악 자[죄인]를 용서할 권세가 없다.
율법은 다만 죄인의 결점을 지적해 주어, 죄인으로 강한 힘을 가지고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깨닫게 하며 자기의 대치물이 되고, 담보물이 되며 의가 되실 주님에 대한 필요를, 깨닫게 하는 직분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죄들을 그분이 친히, 짊어지셨으므로 죄인들의 필요를 충당해 주신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주님께서는 죄인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실 수 있었으며, 철저히 멸망시키실 수 있었으나, 보다 값비싼 계획이 선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크신 사랑으로써, 절망적인 인간에게 희망을 마련해 주셨고, 세상 죄를 지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의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풍성한 은사로서, 온 하늘에 부어 주셨으므로 인간이 구원의 잔을,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후사가 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어떤 필요한 도움도 아끼지 않으실 것이다.(1SM 323.1) 공의는 단순히 사유함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형언도를 집행하도록 요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독생자를 은사로 허락하심으로, 이 두 가지 요구에 대처하셨다. 인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형벌을 그치게 하셨고, 용서의 길을 터놓으셨다.(1SM 340.1)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오전(誤傳:고의적인 거짓 기만술책)을 믿으므로 말미암아, 인간의 품성과 운명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저들은 정신과 품성이 변화될 것이며, 영생을 얻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는 말씀을, 믿는 것은 곧 마음을 변화케 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재현시킬 것이다.(1SM 346.1)
그리스도를 통하여 숨겨진, 지성소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의 고통을 맛보셨다. 그리고 이 제물로 말미암아 사람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있었다. 얼굴에 쓴 것을 벗어 버리고, 주의 영광을 거울 속같이 들여다 볼 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되어 있다. 지극히 거룩한 곳,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렀던 시은소가,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모두에게 공개된다. 그리고 그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과 친교관계를 맺는다.
휘장은 찢어졌고, 막힌 담은 헐렸으며, 의문에 쓴 증서는 제하여졌다.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원수된 것은, 폐하여진바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다 같이 생명의 떡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5BC 1109.1/화잇주석5권) 우리가 가진 모든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믿음에 대해 말하도록 스스로를 가르치고, 미래의 생명을 위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땅에 대한 합법적인 소유권을, 얻기 위하여 얼마나 열렬히 노력하는가. 그들은 법의 시험에 견딜 증서를,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유자는 자기 소유권에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 한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오, 그 사람들이 율법의 시험에 견딜 수 있는, 그들의 하늘 소유에 대한 증서를 얻기 위하여, 그 같은 열성을 보였더라면 얼마나 좋았을 것인가. 사도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자기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케 하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고 권고한다. 영생을 위한 그대의 주장에, 아무 결점도 아무 흠도 없어야 한다. 구주께서는 “계명을 지키는 자들은(킹제임스 성경)복이 있나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그 문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계22:14)라고 말씀하신다.(CS 225.1/청지기 기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