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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를 구합니다
이 글은 이미 오래전에 문학답사를 하면서 써논 것인데, 어디나 마땅하게 올릴데가 없어
호남방에 한번 올린바가 있고, 제가 공직을 마치고 할일이 없어 고향의 강진의 농촌학교인
강진의 계산초등학교에서 2개월간 계약제 교사를 하면서 일요일이면 남도답사1번지 강진을
해남으로 유적지 답사를 즐겨 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도의 유적지를 알린다는 의미에서 이
글을 올립니다 깊은 양해를 바람니다 --죽곡 용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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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민족의 시인 영랑 김윤식 선생 생가 문학답사기
글/ 죽곡(竹谷) 용상씀
나는 시서 할아버지 詩 人 의 影 堂 祭 를 지내고 산소에서 시제를 지내고져 호남지역의
내려 갈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또한 시간을 내서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으로 향하였다.
강진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려진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 다산초당이 만덕산 산록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20 여년 가까운 긴 유배 생활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포" 흠흠심서"등 많은
저서를 남기신 정약용 선생님의 유배지가 함께하고 있다.
이번에는 강진읍내에 있는 영랑 (본명 김윤식)생가를 찾았다
나는 노원구청 퇴직을 하고 강진에 있는 계산초등학교에서 잠시 5학년을 가르친 바가 있다
그때 이미 학교학생들을 가르치고 시간이 있으면 영랑생가를 찾으어서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여기는 영랑생가입구로서 사립문으로 만들어져서 당초의 생가를 느낄수 있는 모습으로
만들었다. 우리 농경사회에서는 대나무로 이렇게 사립문을 만들어 초가 속에서 살아 왔다
우리나라가 70 년대~80 년대를 거치면서 새마을운동을 농촌에서 전개하면서 농가구조도
스레트 그리고 새마을기와집등으로 변모하면서 점차 초가지붕이 볼 수 없는 농촌이 되어 왔다
여기 영랑생가는 주인이 다른사람에게 팔게되어 전매가 이루졌으나 강진군청에서 매입하여
강진의 대표적인 민족 시인이시며 우리나라의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일본에 저항하며
민족독립운동을 고취시키고, 직접 독립운동을 하시다 옥고를 치루신 김윤식 선생님 (영랑)의
집 터를 가족들의 고증을 거쳐 복원하며 지금은 직접 강진군청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
집안에 들어서면 詩 碑 가 세워져 시인의 집임을 알수 있도록 방문객을 환영이라도 하듯이
세워져 반겨히 맞이하고 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다닐때 국어교과서에 나오는 시 (詩 )같다
학교 다닐때 국어선생님이 이시를 낭송하면서 영랑시의 강의를 열심히 해 주었던 추억이 새로워지며
어렴풋이나마 시에 대한 공부를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 더듬어 온다
이제 나이들어 직장을 은퇴하고 문학공부를 한답시고 현장을 답사오니 흐뭇하기도 하고 한 편
즐겁기도 하다.
이미 2005년도에 강진의 계산초등학교에 있을때 현 노정회 양이국 회장님과 같이 답사를 즐겄던
추억도 생각이 난다.
여기는 강진도서관이다.
도서관앞에 서 보았다 . 2005년도에 강진계산초등학교에 근무하면서 퇴근후에 이 도서관에서
야간에 전라남도 교사 임용고사를 보기 위해서 공부를 하였던 추억이 있어서 .......
본인으로서는 나이도 60 에 가깝고 집에 있는 부인은 암투병중인데 돈도 벌어야 겠고 임용고사도
봐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퇴직후에 주경야독을 한셈이다.
외지에서 식사와 주거생활이 어려운 상황에서 주경야독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생을 했던
본인의 삶의 현장인셈 이다. 그때에도 어떻게 장(腸)이 않 좋아 고통을 받았던 사연이 있어
여기에 올려 보았습니다.
그런 고통속에서 전라남도 초등임용고사를 합격하고 올라오니 집에서 암투병하는 부인이
즐겁게 반겨 주었고 저의 아이들도 아빠를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보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 산다는 것은 삶의 투쟁속에서 겪꺼야 하는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 살아야 하는것인지?
남다른 돈도 벌어 놓지도 못하고 별다른 사회의 역활도 하지 못한 범인의 한 사람으로 삶의
애환인지 모른다.
영랑생가안에 영랑생가임을 말해주는 표지돌이 세워져 있다
국가지정 중요 민속자료 252호로 보존되어 오고 있다
본인이 뒤늦게 문학공부를 조금 해보면서 느끼바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의 시인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민족독립을 위해서 고취시키는 글로써 때로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의 선각자로 민족의 앞에서서 싸워왔음이 많은 자료와 글로써 나타나고 있는것이다
3.1운동의 민족지도자 만해 한용운 선생님 그리고 윤동주시인 ,이상화,이육사등등 많은
시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해서 몸바쳐 왔는가 ? 이런분들이 우리의 역사속에서 계셨기에
우리민족은 독립을 하여 민주국가로써 발돋움을 하여 오늘날의 경제국가를 이룩하여
배고프지 않고 살아오고 있지않는가!
여기가 강진의 구강포와 남해 바닷가가 함께 어우러진 강진만이다.
강진읍내는 뒤로는 우두봉이 안아주고 있고 앞으로는 강진만이 푸르고 넓은 바다와 접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백련산 산록에 위치한 다산초당이 있으며 여기서 정다산은
유배지에서 500여권의저서를 통해 우리민족의 삶의 방향을 제시하시면서 지내신것이다
정다산이나 영랑선생님이나 저아름다운 남해바다와 강진만이 함께 어우러진 바닷가를
보면서 아름다운 詩 心 을 키우시면서 애민(愛 民 )사상을 글로써 승화시키셨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노원구 공무원에서 초등학교 교사로써 신분변화를 하면서 학교의 교단에 서는
왕초보의 계약제 교사로써 생활을 하게되면서 못쓰는 글을 써보게 되는것이었다
여기서 2005년도에 초등학교 교단에 서면서 강진에서 잠시 근무하면서 못쓰는 글하나를
올려보겠다
구강포에서
글/ 죽곡 용상씀
북으로는 우두봉이 우뚝 솟아 있고
고성사의 종소리는 은은하구나!
그 아래는 옹기 종기 모여사는 이웃동네
마을에서는 저녘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그 동네 가운데 영랑의 집터에서는
영랑의 시혼이 깃들어 있고
우리를 무언가 일깨워 주고있네.
머얼리 구강포를 바라다 보는 마음
만덕산 아래의 천일각에서는
정다산의 학문과 애민사상이 깃들고
넓은 들판에는 황금물결이 출렁거리며
나그네의 마음도 또한 풍성해지네
2005년 10월 잠시 강진에 머무르면서 ..
이 글은 가을철에 학생들을 대리고 우두봉으로 즉 강진의 뒷 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강진의
전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강진만이 남해 바닷가와 한테 어우러지고 들판에는 누런 황금벌판이
펼쳐지고 고성사의 법종소리가 울리는것을 현장에서 느끼면서 그 감회를 못쓰는 글로 써본
것이다.
나는 옛날의 감회가 있어서 강진만의 맨끝자락 남해바닷가로 향해서 넓은 바다가를 바라보며
머리도 식힐겸 삶의 여유를 잠시나마 갖고져 바다가로 갔는데 때마침 풍어제를 하는지
민속놀이를 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사실 그렇다 남도문화란 저런데서 삶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것같다
그래서 남도에는 육자배기 .판소리 ,화백,또한 호남문학의 문인들이 글로써 삶을 노래하고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아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저기 주변에 모여서 즐기는 어촌의 주민들이 50여평의 대형아파트가 있겠습니까?
강남의 금싸라기 같은 땅이 있어서 부자가 되겠습니까? 고급 승용차가 있겠어서 저렇게
즐거운 노래가락으로 민속놀이를 하겠습니까?
무슨 고관대작을 노리거리거나 큰부자를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그야말로 순수하고 조그마한 행복을 느끼면서 즐거우면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이웃과 어울려서 같이 더부러서 사는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가 사립문에서 생가의 안채로 들어가기전의 모습이다
저기 저집의 문에 들어서야 생가의 안채가 있다. 그야말로 옛날 벼슬께나 한 고관대작의
고택도 아니고 초가로 지어진 한국의 전형적인 가옥인셈이다
더욱더 우리들에게 정겹고 가까히 하고 싶은 옆집의 이웃인것 같다
이 시비가 영랑의 대표작이고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이다
영랑 김윤식선생님은 1903년생으로써 강진에서 출생하여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를
거쳐 1920년에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서 수학 하였다
그 후 박용철, 정지용, 정인보,등과 (시문학)동인으로 참가하면서 활발히 詩 作 활동을 펼쳤다
영랑은 생전에 (영랑시집 1935년)과 영랑시선 (1949년)두권의 출간했으며,1950년 한국전쟁때
북한군의 포탄을 맞고 만47세로 애석하게 운명을 하셨다.
여기가 영랑의 안채이다.
아담하고 아늑하고 정감이 넘치는 한국고유의 전통적인 농촌형 가옥이다 .
우리가 어렸을적에 농촌마을에서 이 정도의 갖춘 집안이라면 시골말로 밥술이나 먹는
집안의 형태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랑은 강진의 지주의 아들로써 서울의 휘문고를
다닐정도이고 일본으로 유학을 갈정도이니 농촌에서 상당히 경제력이 있는 집안으로
생활을 하신것이다. 지금도 안채의 안방에서 이 집 주인이 반갑게 나와서 맞이해 줄 것
같은 분위기이다
.
영랑 생가 안에서는 이곳 저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 시(詩)의 제목은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라는 제목에서 보듯이 환경이 농촌에서
누나와의 대화로 가을 추석전후에 단풍이 드는 관경을 순수하게 표현한 작품인것 같다
언제나 누나는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사람으로 누나의 사랑을 느낄수 있는 대상인것 이다
영랑은 자연에 대한 吟 諷 弄 月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고 깨끗한 자연앞에 승복하는 자세를 보여줌으로써 ,일제 강점기의 억압적 현실을
날카롭게 드러넀다. (거문고),(춘향),(두견)과 같은시에서는 항일-저항 시인의 면모가 나타난다.
여기는 영랑생가 안채의 뒷쪽에 대나무가 어우러져 집안을 잔뜩 껴안고 있다.
거기다가 동백나무가 빨간 꽃을 필동말동 하면서 이 답사객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옛 이야기에 대나무는 선비의 기상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쓰는 나무이다.
꼿꼿한 선비의 기상은 대나무에 비유하기도 한다.여기서 한들한들 강진만 바람이
이마을에 불어오는 날이면 대나무의 잎파리가 사각사각 나브끼는 느낌은 마음이
허(虛)의 경지에 도달하여 인생의 모든 잡념을 버리고 詩 想 이 떠 오르지 않을까
이 답사객은 한번 느껴본다. 그래서 영랑시인은 그 주옥같은 작품들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여기는 안채와 분리된 사랑채 전경이다.
전통적인 가옥의 구조의 보면 안채와 사랑채가 확실하게 구분됨을 알수 있다.
그 이유는 유교적인 사상에서 볼 수 있다고 본다. 즉 남녀칠세 부동적이다 즉 남(男)과 여(女)는
자리를 같이 하지 않는다는 사상이다.
그러니 안채는 아녀자들이 사용하고 사랑채는 남자들이
사용한다는 것이다.그래서 이 답사객의 생각으로는 영랑은 이 사랑채에서 詩想 을 구상하고
작품을 만들어 내는 산실이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여기서 찾아오는 문인들을 접대하고
대화를 나누고 독립운동을 걱정하고 인생을 논하는 장소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답사객도 영랑 시인의 마음과 같이 한 번 느껴 보고져 한번 포즈를 취해 보았다
인생의 어러운 삶도 있지만 이러한 삶의 어유로움도 있는것이 우리내 인생살이 아닌가?
비록 영랑은 한 시대를 살고 계시다가 가시고 않 계시지만 시간과 공간을 떠나 이 공간은
영랑이 심혈을 기우려 작품을 만들어낸 산실임에는 틀림 없으며 시간은 1930년대의 일제
강점기로 돌려 놓으면 되는것이다.
특히 영랑은 우리민족의 정한을 노래한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시세계는 동양적 은일의 시관(時觀 )과 한시,특히 고산 윤선도의 시조등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는 사랑채와 안채가 한테 어우러진 균형을 이루고 있는 가옥구조를 잡아 보았다
요소요소에 영랑시인의 시비들이 세워져 있고,안채 뒷쪽에는 대나무가 아늑하게 껴안고
있으니 작품활동의 장소로서는 제격이다.
이상으로써 남도시인의 영랑생가를 조명해 보았으며 현장을 스케취하여 보았다.
이 답사객이 능력이 부족하여 설명이 미흡한 부분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도하며 최대한
현장을 스케취 한 것 만은 틀림이 없다. 나는 답사를 다 끝내고 입구의 관리사무실에 서
영랑의 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사가지고 강진을 벗어나서 나주로 귀가를 하였다
이 글을 읽어주신분들께 감사를 드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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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러 해 전 강진 갔을 때, 다산 귀양지(다산초당)와 영랑 생가를 탐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강진에는 현재 미래당 대표인
손학규(전 서강대 교수)도 거주하고 있다고 했었는데...
다시 구경하게 되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남도 답사 1번지이지요
우리의 남도에는 이러한 중요한 유적과 훌륭한 인물들이 배출한 훌륭한
지역이기도 하지요
지금같은 닭장의 아파느만 보다가 고요한 한옥을
보니 일단 내용보다 마음이 차분해 집니다.
참으로 깊은 철학적 고찰이담신 글이네요
좋은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을 두루 다니며
공부를 하시는 죽곡님의 생활도 복 받으신
것 같습니다.
공직에 있을때나 이모작을 찾아 돈을 벌때는 입에 풀칠을 할려고
발버둥치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은퇴후의 나의 취미생활과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는 시기인것 같고,남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기도 하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렇게 초가집에서 살때가 참좋았는데
동구리선배님의 올려주신 작품속에서 고향에
오는듯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
남도의 땅 강진 고향 역사탐방 혼자 다니시면서
새밀하게도 올려 주셨네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
호남인의 자존심이 강한 유독 그러한 고향이지요
난국에 처할땐에는 언제나 분연히 앞장을 서서 헤쳐왔지요
광주학생사건, 그리고 수많은 의병들이 나라를 지킬려고 ,5.18의 민중항쟁도
민주주의를 지킬렬려고....
감사합니다
우와 훌륭한 글 입니다
가을이 시작되나 보아요
풍요로운 주말 되세요
역사현장과 문학답사를 다니면서 알았던 내용을
나혼자만 알고 있기가 아쉬어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
좋은 자료가 되었으면,그리고 시간이 있으면 와 보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남도가 거리상 이곳 토영과 가깝다 보니 자주 가게 됩니다.
물론 산악회나 동 행정과 연관된 나들이긴 하지만 강진은 이래저래 이야에겐 낯설지 않은 곳이지요.
올리신 문학기행 글도 잘 보았습니다.
동구리님의 글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동구리님처럼만 나들어 갈 수 있다면..입니다.
아주 보기 좋습니다.^^
우야뜬, 건강하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이 들어 할일이 없으니 , 이렇게 소일이라도 해야죠
그리고 쥐꼬리만한 남도인의 긍지를 갖어봅니다
문학 기행,잘보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히 잘 지내시기를 ......
영랑 시인님 잘 보았습니다.
문학 기행 활동은 인생을
풍부하게 합니다.
오랜 공직에서 물러나서
즐겁게 사는 모습 보기가
좋습니다.
행복한 아침이 되세요.
감사합니다
사실 문학을 좀 공부를 하여보니 삶을 풍요럽게 하더군요
노후에 적격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남도 답사1번지를 하여 보셨군요
강진으로 고흥반도의 섬도시가 아름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