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이번에 포항 바닷가에다 네 평짜리 집을 손수 지었다며 구경하러 오라고 한다. 과연 네 평으로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직접 보기 전까지는 불법 건축물이겠거니 했는데, 근린생활시설로 정식 건축 허가를 받으셨단다. 단층이지만 층고를 엄청 높이고 내부를 이층 구조로 하여 겉보기엔 꼭 이층집 같다. 아래층은 바다가 내다보이는 큰 창문 앞에 놓인 식탁과 침대 겸용 소파 하나만으로도 꽉찬 느낌이다. 그런데 귀퉁이에 싱크대와 인덕션으로 꾸민 주방과 샤워기가 달린 제법한 화장실까지 있다.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조심스레 올라가면 위층 다락방에는 직접 제작한 더블 침대가 놓여 있고 가림막 뒤로는 앙증맞은 세면대와 요강 만한 변기가 숨겨져 있다. 유리문 밖으로 작은 발코니가 있는데, 거기 나가서 바라보는 바다 전망이 그저 그만이다. 아무튼 네 평의 공간을 짜임새 있게 잘 활용해 집으로서 기본적으로 있어야 할 것은 다 갖춰 놓았다. 전에도 그분이 토함산 깊은 골짜기에 버려진 화전민 집을 사서 마치 백설 공주와 일곱 난장이가 살았을 법한 아기자기한 집으로 고쳐 짓고 사셨기 때문에 그분의 타이니 하우스가 내겐 하나도 낯설지 않다. 그보다 원래 화가가 본업인 분이 그림은 접어 두고 왜 작은 집을 짓는데 그렇게 골몰하시는지 그 까닭이 더 궁금하다. 이젠 하다하다 네 평짜리 집이라니.
그분은 어린 시절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게다가 본인은 잔머리라고 표현하셨지만, 꾀도 많아서 공부도 참 쉽게 하셨다는 거다. 예를 들면 친구들은 구구단을 2단에서 9단까지 차례로 외웠지만, 자신은 2단만 외우고 3단은 3x3, 4단은 4x4, 5단은 5x5부터 외우는 식으로 순식간에 다 외워 버렸다고 자랑하신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아들었는데, 남편은 하루가 지나도록 이해가 안 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구구단표를 만들어 설명을 해주니까 그제서야 “아하”하는데 정말 알아들은 건지 미심쩍다. 그 영재 소년은 시골 초등학교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4학년때부터 줄곧 반장뿐 아니라 학교 전체 미화부장을 맡아 곳곳에 반공 포스터를 그려 붙이고 운동회 때는 교문 위에 아치형 조형물을 설치하는 등 솜씨를 맘껏 뽐내었다니 선생님들의 칭찬이 자자했을 테고, 여학생들에게도 인기가 대단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당시 문예부에 그분의 마음을 사로잡은 여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자기를 도와주던 미화부 여학생은 코찔찔이에 상고머리를 한 못생긴 계집애였는데, 단정한 단발머리에 벨벳 원피스를 입은 그 여자애가 어찌나 예뻐 보이는지 그 애로 바꿔주지 않으면 미화부장을 그만 두겠다고 떼를 썼다가 선생님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하신다. 중년이 되어 초등학교 동창회에 처음 나가던 날, 그녀에게 주려고 실크 머플러에 그림을 그려서 들고 갔는데 다른 여자 동창들 눈치를 보느라 헤어질 때야 겨우 건네 주고 말도 제대로 붙여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후 그녀한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와서 나갔더니 그녀가 중학생 때 직접 뜨개질로 만든 빛바랜 남자 조끼를 선물이라며 내밀더란다. 그러니까 그분의 첫사랑이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니었다는 말 아닌가. 이제 막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나 기대했는데, 한창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남자와 법조인의 아내가 된 여전히 아름다운 여자의 로맨스는 싱겁게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쩌다 이야기가 이렇게 흘렀느냐며 쑥스럽게 웃는 그분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평소 그저 제멋대로 사는 괴팍한 예술가쯤으로 생각했는데, 그분이 어릴 적 애틋한 추억을 가슴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로맨티스트였다니 뜻밖이었다. 그분의 작품에서 유쾌한 장난기가 느껴졌던 건 그분 안에 남아있는 아이 같은 천진함 때문이었나 보다. 그러고보면 그분의 계속되는 집짓기 놀이는 주위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잠재의식의 표현같기도 하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기도 했지만, 추억담이 마냥 길어지자 남편은 지루한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저녁 식사 때가 되었는데 근처 식당에서 생아구탕을 대접하고 싶다하니까 사양 하신다. 칼국수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하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러면 칼국수 한 그릇이라도 하자고 권했더니 백신을 맞지 않아 사람 많은 곳에 갈 수 없다고 거절하시는 거다. 마음은 늘 자유분방한 젊은이 같지만, 현실은 백발이 성성한 영감님이 아닌가. 코로나에 감염될까 두려워하시는 그분의 노파심에 밥 한끼도 함께 하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서자니 퍽 섭섭했다. 차를 세워놓은 동네 어귀까지 배웅나온 그분이 "우리 오래오래 잊지 말고 살자."며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드셨다. 그건 내가 알고 있던 그분의 모습이 아니다. 팬데믹이 길어지자 그분도 나처럼 코로나 블루라는 병에 걸려 전에 없이 심하게 외로움을 타고 계신 게 아닌가 싶다. 엄마의 자궁 속 같은 비좁은 집에서 홀로 지내시는 게 자신은 아늑하고 편하다고 말씀하시지만, 난 왠지 그 외진 곳에다 아이를 홀로 떼어 놓고 온 것 같은 안쓰러운 마음에 울컥 서러워져 돌아오는 내내 남편 모르게 눈물을 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