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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4일
말씀 : 엡4:14
제목 : 멈출 수 없는 성장
지난주에는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을 함께 나누었고, 오늘은 14절 말씀으로 함께합니다. 교회는 오늘 본문 말씀처럼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교회는 우리를 어린아이의 자세와 태도에서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합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교회는 참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머리 되시는 교회의 몸으로 부르심을 받아 각각 지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새 창조’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 새 창조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존재의 핵심 가치가 변화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 즉 율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들에게 율법은 짊어져야 할 도덕률이 아닙니다. 율법은 일부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은 짐이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과 죄성을 확인하고 성령을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즉 율법은 우리를 경건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지체인 우리의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성화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믿음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님의 재림과 종말의 때까지 또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인생의 여정에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많은 약점과 실패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모난 것을 다듬고 빚어내면서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한 데까지 성장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일을 가능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새 언약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더 이상 반역과 불순종의 죄악에 젖어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창조된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함께하시며 도우십니다.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엡4:14)’ 세상의 유혹들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성장은 멈추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불순종을 정당화하며 변명으로 일관하는 매우 불건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를 들면 먹을 것이 없어서, 목이 말라서, 부추와 마늘이 먹고 싶어서 불순종했다고 핑계했습니다. 신8:3-4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장 먼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다’고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싶어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어서 못한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시면서 그분의 말을 듣는지 시험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물과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그들을 이끄셨습니다. 40년 광야 생활 동안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 않으며,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쏟아냈고, 그 결과 그들 중 20세 이상은 모두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신뢰하는 것과 배부르거나 배고픈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잘살게 해주시면 하나님을 잘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자녀들이 잘되고 가정이 복을 받으면 충성하며 헌신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계 10위 안에 드는 경제 대국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십시오. 너무 잘 먹어서 살 빼는 데 돈을 투자합니다. 음식물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서 골치가 아픕니다. 한 가정에 보통 2~3대 있는 자동차 때문에 주차 문제가 심각합니다. 전보다 훨씬 편안하게 잘삽니다.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자식이 잘되고 가정이 행복하면 불평 없이 주님을 잘 섬기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갈 것 같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날 심각한 상황에 빠진 교회의 현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무관심, 물질주의, 불순종이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사실상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상해서도 아니고 성격, 관점, 가치관, 해석의 차이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못해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요구하시는 복음과 사명을 축소시키고 교회를 세상처럼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한 영혼’을 위해 서야 합니다. 세력화, 권력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화려한 교회 건물과 값비싼 성전 기물을 이용해 대중이 좋아하는 교회와 목사를 만들었을 뿐 은혜의 값비싼 대가를 강조하지도, 세상의 부패와 죄악을 멀리하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우리가 책망이나 권징의 말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감정적, 감각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기분이 내키지 않거나 내 생각과 판단에서 벗어나면 망설임 없이 교회를 박차고 나갑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는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 차고 넘칩니다.
오늘날 교회라고 부르는 이 거룩한 기관에서 성경이 요구하는 주님의 신부가 될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교회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중생과 회심을 정확하게 깨닫고 이해하는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충성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교회 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세속에 물들어 세상의 원리, 방법, 기준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겠다(렘31: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과 성도와의 새 언약의 관계를 분명히 하고 계신 것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 온전히 헌신하고 충성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즉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성향으로 새롭게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 성향으로 새롭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은 그들 안에 생명이 살아있기 때문에 자발적이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을 따르는 성향을 보입니다. 결단과 실천이 부족하고, 어린아이의 믿음으로 이론적으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인다고 해도 성향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정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영과 진리’로 그분을 예배하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관계가 끊임없이 유지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파괴되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는지에 대해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받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임을 고발했습니다. 옛 언약의 백성과 새 언약의 백성의 신앙이 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한창 코로나를 겪을 때 교회를 향해 ‘포비아(phobia)’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세상은 우리의 삶을 동경하거나 칭찬한 적이 없었습니다. 코로나가 유행하는 상황에서 편협한 신앙의 자세로 이웃에게 오히려 부담과 피해를 주는 태도 때문에 교회는 많은 질타를 받았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를 향해 세상도 저지르지 않은 죄를 교회가 저지르고 있다고 질책했습니다. 오늘날도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제가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민망합니다. 제사장이 타락했을 때 이스라엘 나라는 망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타락하면 나라는 어지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목사들의 타락상에 드릴 말씀이 없지만 목사들이 이 정도면 성도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이런 교회를 ‘참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지난주에 다루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참 교회로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5월 12일은 ‘창립 32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사실 교회는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잠시 세상에 얽매일 수 있고, 세상의 법을 두려워할 수도 있으며, 나도 모르게 세상의 원리대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어린아이의 신앙을 벗어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성품과 성향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도덕하고 불경스러운 세상 문화에 긴장하며 그것에서 돌아서기를 결단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코스모스는 영원히 코스모스입니다. 가을이 되면 여지없이 피어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새롭게 창조된 그리스도인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교회를 함부로 비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족한 부분을 함께 회개하며 나아가는 연합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참 교회, 주님의 신부 된 교회,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의 지체들을 비난하고 비판하며 조롱거리로 삼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사람들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교회를 향해 말할 때는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고전14:3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새 언약의 백성들은 모두 예언할 자격이 있습니다. 누구나 격려하고 권면하며 덕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권징조차 덕을 세우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기체적으로 연합된 지체인 성도는 서로 다투거나 서로를 헐뜯고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오른손이 왼손을 비난할 수 없고, 오른눈이 왼눈을 헐뜯을 수 없습니다. 각자 맡은 곳에서 성실하게 충성을 다하며, ‘경건의 열심’으로 교회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 된 거룩한 곳임을 명심하고 거룩함을 위해 서로 노력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해 ‘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참 교회로 세워지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교회가 복음으로 세워지는 일을 게을리했기 때문’입니다. 인본주의적 신앙관으로 세워진 교회는 사람이 주인 된 사람 중심의 교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본주의를 경계해야 까닭은 온전한 복음이 아닌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복음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어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을 무시한 채 사람들이 꺼리는 말씀을 빼고 전한다면 어떻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인본주의는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존귀함과 위대함을 경시하고 인간을 무대의 주인공으로 올려놓습니다. 인간 중심에는 감각과 감정이 강하게 도사리고 있어서 마음과 양심에 아주 작은 상처가 되는 말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회개하라’는 말씀 대신 죄인들은 기도해야 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사람들에게 되풀이할 뿐입니다. 이론적인 말씀만 강조한다는 뜻입니다. 회개의 실천이 아닌 이론만 가르칩니다. 그래서 회개를 형식적으로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양심의 고통이나 정신적 고뇌에서 해방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심리적 위안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향한 질문에 대한 두 번째 대답으로 회심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관점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이 교리화, 지식화되어 우리 마음에서 굳어버린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중생’을 단순히 믿기로 결단하고 죄인의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도 평생 세속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속된 것이 들어와도, 인본주의로 세워져도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이 교회에 없는 것입니다. 문제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중생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재창조 사역’입니다. 그것은 새롭게 재창조된 성품과 성향으로 거룩함을 추구하면서 죄를 이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을 믿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겉핥기’식으로 하는 신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사실 중생의 핵심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전해야 하며, 핵심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에서 강조되지 않고 강단에서 사라지는 이유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육과 세속의 삶을 살면서도 믿음을 점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죽으면 천국 간다는 것만을 신앙의 만족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폐단은 역사 속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대각성 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도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침례나 세례를 받고 예의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으며, 자신들은 기독교 국가의 시민이자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지 휘트필드, 존 웨슬리, 찰스 웨슬리, 하웰 헤리스 등의 신학자들이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성령으로 흔들어놓자 자신들의 가면을 벗고 자신들의 신앙은 모두 가짜였다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신앙의 점검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도 ‘나는 구원을 받았고 교회 생활 잘하고 있어서 천국 가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의 임재를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며 온전한 믿음으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반드시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의 진정성과 회심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또한 부활 이후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와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지체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며 믿음의 삶을 살고 있는지를 교회 안에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와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풍성한 열매의 삶을 기대하고 있는지, 그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의 기업과 유업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하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울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중심에서 떠나신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지, 육적, 세속적인 삶에 매몰되어 교리적,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습관적인 예배, 교제, 기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긴장하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나타나는 이런 현상의 원인 중 하나는 교회가 문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그것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노력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드러나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행동하거나, 그들의 관심을 공유하거나, 그들의 유행을 따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경건함과 거룩함을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코인이나 주식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거기에 동참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인정받고 박수 받을 수 있을까?’와 같 은 세상의 관심은 우리의 삶의 패턴 속으로 결코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들의 유행을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과 진리 위에 선 세상의 빛과 소금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초청할 때 ‘믿으면 복 받는다’, ‘치유 받을 수 있다’, ‘사람들을 사귀면 너무 좋다’ 등으로 복음을 대신하는 것 또한 피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미 잘살고 있고, 병원이 코앞에 있으며, 여러 가지 모임을 통해 인간관계를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말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로서 천국의 삶을 맛보며 참 교회로 세워지기 위해 서로 돕고, 중보기도하며, 예언하고 사랑하는 훈련을 교회 안에서 잘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천국에서도 우리의 교회는 그대로 유지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를 통해 천국을 맛보고, 하나님의 것을 공유하며, 우리의 삶과 물질 또한 하나님과 공유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